능소화 낭자 -이정원-
달빛이 내리는 밤에 보는 능소화는 전설 속의 낭자를 연상시키고 남았다. 주황빛이라 달빛 아래서도 선명하게 보이는 꽃송이가 그 낭자의 발걸음으로 여기지기까지 했다.
"언젠가 밤 뜨락을 거니는 그대를 본 적이 있오. 깊은 생각에 잠긴 듯한 여인의 단아한 걸음걸이. 그래서 내 얼음 릉(凌)과 물결 파(波)를 써서 능파(凌波)라 했다오"
장차 낭자의 배필이 될 젊은 선비가 낭자를 보며 했다던 말. 결국 낭자는 능파라 불리운 차가운 그 걸음으로 죽음을 향해 가고 말았기에 가슴이 저려왔다.
이름조차 몰랐던 능소화, 그 꽃을 처음 본 건 오래 전 어느 목장에서였다. 죽은 나무를 감고 올라가며 핀 주황빛 꽃들은 눈에 확 띄었었다. 끝이 다섯으로 갈라진 커다란 꽃송이들은 한여름 햇빛 속에서 화사하면서도 기품 있어 보였다.
그런 아름다움 때문이었는지, 예전에는 양반집 뜰에만 심을 수 있었던 꽃이라는 걸 나중에야 알았다.
여염집에서는 함부로 심어 가꾸지 못하게 했었기에 양반꽃이라 불리워졌다고도 했다.
그 뒤 꽃에 서린 한 낭자의 전설을 알고 나자, 능히 그렇게 불리워졌음직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양반이라는 말속에는 차라리 자기를 거둘지언정 구차스럽게 목숨을 잇지는 않겠다는 의지도 들어 있을 테니 말이었다.
옛 고을에 어머니를 일찍 여의고 덕망 있는 벼슬아치인 아버지의 손에 자란 낭자가 있었다. 아버지는 애지중지 하는 딸의 배필로, 자기 문하에 있는 젊은 선비를 점 끼어 놓았다.
어머니 없이 자라났으면서도 낭자는 누구보다 인물이 곱고, 그에 못지 않게 심성 또한 고왔다. 늘 서책을 가까이 했기에 매사에 사려 깊었고, 가야금 솜씨 또한 뛰어나 사랑을 받았다.
어느 날, 남인이었던 아버지가 북인의 세력에 밀려 급기야는 몸을 피해야 할 지경에 이르렀다. 젊은 선비와 함께 셋이서만 간신히 집을 빠져 나와, 갈림길에 도달했을 때였다. 아버지는 뒷날을 기약하며, 선비에게는 다른 길로 가라고 했다,
그리고는 딸과 선비의 손을 모아 잡고, 이것으로써 너희는 부부의 연을 맺은 것이니 깨뜨려서는 결코 아니 된다고 다짐을 두었다.
이리저리 떠돌다가 어느 고을에 머물게 된 낭자와 아버지의 고초는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그 때 헤어진 선비의 소식은 영들을 수가 없었고, 그러다가 아버지마저 병들어 눕게 됐다. 약 한 첩 쓰지 못한 채 애를 태우던 낭자는, 망설임 끝에 전부터 은근히 말을 비치던 기생 어미를 찾아갔다. 기방에 머물기도 하고 우선 받은 돈으로 약을 구해 왔으나, 아버지는 얼마 못 가 숨을 거두고 말았다.
눈물을 뿌리며 아버지의 시신을 묻은 뒤, 낭자는 두말 않고 기적에 올라 버렸다. 낭자의 아름다움에 이끌려 풍류를 즐기는 한 선비가 이따금씩 찾아 왔다. 뭔가 사연이 있음을 눈치채고 연신 캐물어도 낭자는 말없이 가야금만 뜯을 뿐이었다.
"그대는 고우면서도 정녕 차가운 여인이구려. 그러한 그대에게 능소화(凌宵花)하는 이름을 지어 주리라. 얼음 능(凌)과 하늘 소(宵)라, 차가운 기운이 서린 꽃이라는 뜻이오.
세월이 흘러 남인이 다시 득세를 하고, 젊은 선비는 과거에 급제해 그 고을 수령으로 오게 됐다. 헤어진 낭자를 수소문해 찾던 선비는 어느 날, 귀에 익은 가야금 소리를 들었다.
이윽고 두 사람은 더할 나위 없는 반가움으로 두 손을 마주 잡았으나, 낭자의 눈에는 슬픔이 고여 있었다.
사실을 안 선비는 모든 걸 잊을 테니, 이제나마 부부의 정을 나누자 했다. 낭자는 서방님의 뜻이 그러하다면 기꺼이 따르겠노라며, 며칠간의 말미를 달라고 했다. 하나, 약속한 날 선비가 왔을 때 낭자는 이미 숨이 져가고 있었다. 그 동안 자기를 정갈하게 지키지 못했음을 탓하며, 노리개에 감추어 두었던 비상을 먹은 거였다.
"이제 와서 제 어찌 서방님을 따를 수 있사오리까. 그간의 허물을 탓하지 않으시는 마음만으로도 여한이 없나이다."
낭자의 무덤에선 덩굴진 줄기가 솟아났고, 퍼져 가는 그 줄기 끝마다 주황빛 꽃들이 끊임없이 피어났다. 활짝 피었는가 싶으면 이내 져버리고 마는 그 꽃을, 사람들은 능소화라 불렀다.
담겨진 사연이 그토록 애절했기에, 능소화는 어느 꽃보다도 깊이 내 가슴에 남아 있었다.
하지만 도심에서는 즐겨 가꾸지 않는 꽃이어서 인지 좀처럼 눈에 띄지가 않았다.
그러다 이 번 여름, 식구들과 태안에 있는 아는 분 댁엘 가게 됐다. 시골집 같지 않게 말끔히 단장된 그 집에 들어서려는 순간, 눈에 확 띄는 주황빛 꽃이 있었다. 대문에 올려진 덩굴에서 밑으로 늘어지며 피어난 그 꽃은, 바로 능소화였다.
내가 반색하며 감탄을 하자, 주인인 노교장 선생님은 어떻게 그 꽃을 알아보느냐고 했다. 난 빙그레 웃기만 했을 뿐, 굳이 입을 열어 사연을 말하고 싶지는 않았다.
밤이 되어 식구들은 모두 잠이 들었는데, 잠자리가 바뀐 탓인지 난 영 잠이 오질 않았다. 얼마를 뒤척이다 방문을 열고 나가니, 뜰엔 달빛이 내리고 있었다.
달빛 속에 다시금 바라보는 능소화의 꽃송이는 그대로 낭자의 자태가 되어 다가왔다.
꿈에도 못 잊어 하던 낭군을 만났으면서도 끝내 죽음을 향해 가버린 여인의 차가운 걸음걸이, 눈앞에 드리운 행복 앞에서 그 흔들림 또한 무한히 깊었으련만 . . . .
기어이는 깨끗이 자기를 꺾어버리고만 그 혼이 서려 있어, 능소화는 저리 고우면서도 기품이 있어 보이는 걸까. 유난히 선명한 인상을 남김도 그래서일까
그 아픔이 가슴에 젖어들어 마냥 섰는데, 지나는 바람에 꽃송이 몇 개가 후두둑 떨어졌다. 안타까워서 주워드니, 처음에는 낭자의 단아한 발걸음으로 여겨지던 그 꽃송이들이 어느새낭자의 눈물로 비쳐왔다.
얼음 같은 의지로 자기를 다스림에, 핏방울이 되어 치마폭에 떨어져 내렸을 눈물, 나라면 정녕 삶에서 미련을 떨어버리고 그리할 수 있을까 싶어, 그 의지가 차츰 두려워지는 것이었다.
달빛이 내리는 밤에 보는 능소화는 전설 속의 낭자를 연상시키고 남았다. 주황빛이라 달빛 아래서도 선명하게 보이는 꽃송이가 그 낭자의 발걸음으로 여기지기까지 했다.
"언젠가 밤 뜨락을 거니는 그대를 본 적이 있오. 깊은 생각에 잠긴 듯한 여인의 단아한 걸음걸이. 그래서 내 얼음 릉(凌)과 물결 파(波)를 써서 능파(凌波)라 했다오"
장차 낭자의 배필이 될 젊은 선비가 낭자를 보며 했다던 말. 결국 낭자는 능파라 불리운 차가운 그 걸음으로 죽음을 향해 가고 말았기에 가슴이 저려왔다.
이름조차 몰랐던 능소화, 그 꽃을 처음 본 건 오래 전 어느 목장에서였다. 죽은 나무를 감고 올라가며 핀 주황빛 꽃들은 눈에 확 띄었었다. 끝이 다섯으로 갈라진 커다란 꽃송이들은 한여름 햇빛 속에서 화사하면서도 기품 있어 보였다.
그런 아름다움 때문이었는지, 예전에는 양반집 뜰에만 심을 수 있었던 꽃이라는 걸 나중에야 알았다.
여염집에서는 함부로 심어 가꾸지 못하게 했었기에 양반꽃이라 불리워졌다고도 했다.
그 뒤 꽃에 서린 한 낭자의 전설을 알고 나자, 능히 그렇게 불리워졌음직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양반이라는 말속에는 차라리 자기를 거둘지언정 구차스럽게 목숨을 잇지는 않겠다는 의지도 들어 있을 테니 말이었다.
옛 고을에 어머니를 일찍 여의고 덕망 있는 벼슬아치인 아버지의 손에 자란 낭자가 있었다. 아버지는 애지중지 하는 딸의 배필로, 자기 문하에 있는 젊은 선비를 점 끼어 놓았다.
어머니 없이 자라났으면서도 낭자는 누구보다 인물이 곱고, 그에 못지 않게 심성 또한 고왔다. 늘 서책을 가까이 했기에 매사에 사려 깊었고, 가야금 솜씨 또한 뛰어나 사랑을 받았다.
어느 날, 남인이었던 아버지가 북인의 세력에 밀려 급기야는 몸을 피해야 할 지경에 이르렀다. 젊은 선비와 함께 셋이서만 간신히 집을 빠져 나와, 갈림길에 도달했을 때였다. 아버지는 뒷날을 기약하며, 선비에게는 다른 길로 가라고 했다,
그리고는 딸과 선비의 손을 모아 잡고, 이것으로써 너희는 부부의 연을 맺은 것이니 깨뜨려서는 결코 아니 된다고 다짐을 두었다.
이리저리 떠돌다가 어느 고을에 머물게 된 낭자와 아버지의 고초는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그 때 헤어진 선비의 소식은 영들을 수가 없었고, 그러다가 아버지마저 병들어 눕게 됐다. 약 한 첩 쓰지 못한 채 애를 태우던 낭자는, 망설임 끝에 전부터 은근히 말을 비치던 기생 어미를 찾아갔다. 기방에 머물기도 하고 우선 받은 돈으로 약을 구해 왔으나, 아버지는 얼마 못 가 숨을 거두고 말았다.
눈물을 뿌리며 아버지의 시신을 묻은 뒤, 낭자는 두말 않고 기적에 올라 버렸다. 낭자의 아름다움에 이끌려 풍류를 즐기는 한 선비가 이따금씩 찾아 왔다. 뭔가 사연이 있음을 눈치채고 연신 캐물어도 낭자는 말없이 가야금만 뜯을 뿐이었다.
"그대는 고우면서도 정녕 차가운 여인이구려. 그러한 그대에게 능소화(凌宵花)하는 이름을 지어 주리라. 얼음 능(凌)과 하늘 소(宵)라, 차가운 기운이 서린 꽃이라는 뜻이오.
세월이 흘러 남인이 다시 득세를 하고, 젊은 선비는 과거에 급제해 그 고을 수령으로 오게 됐다. 헤어진 낭자를 수소문해 찾던 선비는 어느 날, 귀에 익은 가야금 소리를 들었다.
이윽고 두 사람은 더할 나위 없는 반가움으로 두 손을 마주 잡았으나, 낭자의 눈에는 슬픔이 고여 있었다.
사실을 안 선비는 모든 걸 잊을 테니, 이제나마 부부의 정을 나누자 했다. 낭자는 서방님의 뜻이 그러하다면 기꺼이 따르겠노라며, 며칠간의 말미를 달라고 했다. 하나, 약속한 날 선비가 왔을 때 낭자는 이미 숨이 져가고 있었다. 그 동안 자기를 정갈하게 지키지 못했음을 탓하며, 노리개에 감추어 두었던 비상을 먹은 거였다.
"이제 와서 제 어찌 서방님을 따를 수 있사오리까. 그간의 허물을 탓하지 않으시는 마음만으로도 여한이 없나이다."
낭자의 무덤에선 덩굴진 줄기가 솟아났고, 퍼져 가는 그 줄기 끝마다 주황빛 꽃들이 끊임없이 피어났다. 활짝 피었는가 싶으면 이내 져버리고 마는 그 꽃을, 사람들은 능소화라 불렀다.
담겨진 사연이 그토록 애절했기에, 능소화는 어느 꽃보다도 깊이 내 가슴에 남아 있었다.
하지만 도심에서는 즐겨 가꾸지 않는 꽃이어서 인지 좀처럼 눈에 띄지가 않았다.
그러다 이 번 여름, 식구들과 태안에 있는 아는 분 댁엘 가게 됐다. 시골집 같지 않게 말끔히 단장된 그 집에 들어서려는 순간, 눈에 확 띄는 주황빛 꽃이 있었다. 대문에 올려진 덩굴에서 밑으로 늘어지며 피어난 그 꽃은, 바로 능소화였다.
내가 반색하며 감탄을 하자, 주인인 노교장 선생님은 어떻게 그 꽃을 알아보느냐고 했다. 난 빙그레 웃기만 했을 뿐, 굳이 입을 열어 사연을 말하고 싶지는 않았다.
밤이 되어 식구들은 모두 잠이 들었는데, 잠자리가 바뀐 탓인지 난 영 잠이 오질 않았다. 얼마를 뒤척이다 방문을 열고 나가니, 뜰엔 달빛이 내리고 있었다.
달빛 속에 다시금 바라보는 능소화의 꽃송이는 그대로 낭자의 자태가 되어 다가왔다.
꿈에도 못 잊어 하던 낭군을 만났으면서도 끝내 죽음을 향해 가버린 여인의 차가운 걸음걸이, 눈앞에 드리운 행복 앞에서 그 흔들림 또한 무한히 깊었으련만 . . . .
기어이는 깨끗이 자기를 꺾어버리고만 그 혼이 서려 있어, 능소화는 저리 고우면서도 기품이 있어 보이는 걸까. 유난히 선명한 인상을 남김도 그래서일까
그 아픔이 가슴에 젖어들어 마냥 섰는데, 지나는 바람에 꽃송이 몇 개가 후두둑 떨어졌다. 안타까워서 주워드니, 처음에는 낭자의 단아한 발걸음으로 여겨지던 그 꽃송이들이 어느새낭자의 눈물로 비쳐왔다.
얼음 같은 의지로 자기를 다스림에, 핏방울이 되어 치마폭에 떨어져 내렸을 눈물, 나라면 정녕 삶에서 미련을 떨어버리고 그리할 수 있을까 싶어, 그 의지가 차츰 두려워지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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