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나무 송(頌) /박이문
파리 유학 시절 나는 살고 있던 대학 기숙사촌, 시테-유니베르시테르에서 이타로 카르노라는 친구와 오랫동안 가깝게 사귀었다. 그는 나와 같이 프랑스 정부 장학생으로 와서 같이 불문학을 공부하고 있었던 브라질 출신의 학생이었다. 그는 키가 컸고 과묵하며 성실하고 젊은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언제나 의젓했다. 우리는 자주 저녁식사를 함께하고 여러 가지 나무, 꽃 그리고 잔디밭으로 가꾸어진 기숙사촌의 그림 같은 정원을 산책하곤 했다.
언제나와 같이 문학과 인생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며 산책하던 겨울철 어느 날 나는 정원에 우뚝 서 있는 전나무 앞을 지나가며 그 친구 카르노에게 느닷없이 물었다: 「너는 다시 태어날 수 있다면 무엇으로 태어나고 싶으냐? 나는 이런 전나무로 태어나고 싶다!」 나의 뚱딴지 같은 질문을 받고 처음엔 약간 어리둥절했지만 당황하지 않고 곧 웃는 얼굴로 나를 쳐다보던 그의 의젓한 표정은 사십 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하다.
나는 지금 다시 찾아봐도 여전히 초라한 벽촌에서 태어나 성장했다. 동네는 나의 고조와 증조의 큰산소가 모셔진 야산을 배경으로 들어앉아 있었는데 그 복판에 자리잡은 우리 집 담 뒤에 큰 전나무 하나가 언제나 푸르게 우뚝 서 있었다. 왠지 어린 나는 늘 그 전나무에 마음이 끌려 있었다. 내게 그것은 잘생기고 멋있어 보였다. 그것은 꼬마인 나에게는 무한히 크고 늠름하며 우람하고 우아한 존재였다. 또한 어느 모로나 보잘것없는 동네에서 그 나무가 유일한 자랑거리처럼 나는 생각되었다. 내가 우리 동네의 그 전나무를 정말 좋아했었던 이유를 다시 생각해보게 된 것은 긴 세월이 흘러간 후 파리 대학의 기숙사촌에 서 있던 전나무를 보고 나서였다.
20대를 넘어설 무렵, 나는 객지에서 경제적으로나 건강상으로나 몹시 고통스러웠지만 무엇보다도 실존적 문제 때문에 내적으로 깊은 갈등과 고민에 허덕이고 있었다. 나는 철학적 허무주의자였다. 산다는 것이 무의미한 고통에 불과하다는 허망한 생각에 빠져 거기서 헤어날 수가 없었다. 나는 허무주의자인 동시에 염세주의자였으며, 인간혐오주의자에 가까웠다. 내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거나 남들이 사는 모습을 관찰하면 할수록, 다른 생명체의 존재양식이 인간의 존재양식보다 더 바람직하다는 생각을 걷어낼 수가 없었다. 따지고 보면 궁극적으로는 아무 의미도 없는데 나나 다른 이들이나 인간으로서 생물적 본능에 끌려 살아 남으려고 자나깨나 악을 쓰고 바스락거리고 언제나 초조하게 살아가는 동물이라는 생각을 어찌할 수 없었다. 그러한 인간의 모습이 결코 당당하거나 아름다울 수 없는데도 어쩔 수 없이 이런 식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 치사해 보였다. 산처럼 의젓하고 바위처럼 든든하게 존재하는 방법은 없으며 구름처럼 초연하고 자유롭게 사는 길은 없을까?
식물과 동물은 인간보다 낫다. 그들은 돈이나 병이나 도덕적으로나 지적이나 정서적이거나의 문제로 생기는 고통을 밖으로 드러내지 않고, 사랑을 하거나 생존을 위해 자신과 다른 종을 죽이거나 할 경우도 위선적이 아니고 언제나 정직하고 당당하다. 잡초, 개나리, 소나무, 감나무, 바퀴벌레, 미꾸라지, 까치, 토끼, 사자는 각자 자기의 생존을 위한 욕망을 충족시켜야 하지만 결코 그 한계를 넘지 않는 절제의 미덕을 갖고 있다. 인간은 무덤, 비석을 남겨 대자연의 질서를 깨뜨리지만 인간 이외의 생명체들은 그런 것을 남기지 않고 자연 속으로 다시 완전히 돌아간다. 자신의 흔적을 인위적으로 남기려고 조바심하지 않고 의젓하게 죽음을 수용한다. 풀이나 나무, 버러지나 동물은 인간과는 달리 실존적 고민에서 해방되어 있다. 이런 점에서 모든 식물이나 동물들은 기독교적으로는 구원받고, 불교식으로는 해탈하여 열반에 도달해 있다. 위선이 없다.
식물과 동물들은 세수나 목욕을 하지 않더라도 더러워 보이지 않고, 빗질을 하지 않거나 옷을 입지 않더라도 새나 짐승의 머리와 몸의 털은 언제나 정갈하고 나무와 버러지들의 몸은 부끄러움을 모른다. 세수를 하지 않은 인간의 얼굴은 지저분하고, 이발을 하지 않거나 빗질을 하지 않은 인간의 머리는 깔끔치 않으며 옷을 입지 않은 인간의 몸은 부끄럽다.
봄이 되면 풀같이 파랗게 솟아나고, 진달래처럼 연분홍 꽃을 피우고, 가을이 되면 깨끗하면서도 섹시한 빛깔의 감들을 주렁주렁 달다가 다 같이 자신의 때가 되면 조용히 사라진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잉어나 고래처럼 자유롭게, 학이나 꽃사슴처럼 우아하게, 매나 말처럼 늘씬하게, 호랑이나 코끼리처럼 늠름하게 태어나 성장하고, 열매를 맺고, 짝짓기를 하고 살다가 때가 되면 시들어 죽거나, 자연의 원리에 따라 잡아먹혀서 사라지는 삶이 어찌 바람직하지 않겠는가? 식물이나 동물의 삶의 양식은 인간의 삶의 양식에 비추어볼 때 다 같이 월등하고 바람직하다. 그들의 세계에는 거짓이 없다. 풀이나 나무, 날짐승이나 네발짐승들은 <진리와 허위> <선과 악> <미와 추함>을 훨씬 초월한 차원에 존재한다. 풀은 <풀의 의미>, 새는 <새의 의미>, 사슴은 <사슴의 의미>, 호랑이는 <호랑이의 의미>를 묻지 않음으로써. 자신이 스스로 만들어 깔아놓고 장치한 종교적 혹은 형이상학적 망상의 덫에서 몸부림치는 인간과는 달리 자유롭고 그만큼 조용하고 점잖다. 갈대나 진달래 같은 식물, 붕어나 까치·사슴이나 사자 같은 동물이 다 같이 인간보다 낫다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식물이나 동물에 다 같이 끌리지만, 동물보다는 식물에 더 마음이 간다. 식물은 동물보다 더 침착하고 더 의젓하고 초연하다. 지렁이를 비롯해서 모든 동물들이 눈만 뜨면 먹을것과 짝짓기의 상대를 찾느라고 항상 바쁘고 초조하게 쏘다니는 모습에서는 궁상스러움이 보이고, 사자나 호랑이 같은 강한 종류를 제외한 모든 동물이 자나깨나 약탈자로부터 잡아먹히지 않으려고 항상 불안스럽게 사방을 둘러보는 초조하고 불안스러운 모습이 그들의 위신을 깎는다. 식물은 다르다. 풀이거나 나무거나 모든 식물은 자신의 땅에 뿌리를 박고 서서, 비바람이나 눈보라에도 제자리를 지키고, 여름이나 겨울이 아무리 덥거나 아무리 추워도 안달하지 않고 자신의 자리와 정체성을 굳건히 버티고 지킨다. 버러지나 물고기, 새나 네발짐승 등의 모든 동물과는 달리 풀과 나무는 위협과 죽음 앞에서도 불안과 공포의 내색을 드러내지 않는 금욕적 성숙성을 지니고 있다. 뿌리가 다치고 가지가 꺾이는 아픔을 당하고 뿌리가 뽑히거나 나무통이 잘리는 죽음을 당하더라도 풀과 나무는 고통과 죽음을 초월한 듯 아픔의 고함이나 슬픔의 울음을 밖으로 나타내지 않는다.
인간 이외의 생물체, 특히 식물이 나의 마음을 끄는 이유는 무엇일까? 여기서 사르트르적 실존철학의 존재론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사르트르에 의하면 우주의 모든 것은 직자로 불리는 그냥 존재와 대자로 불리는 인간 존재라는 두 존재범주 중 하나에 속한다. 대자로서의 인간의 본질은 의식이며 의식의 본질은 시간과 공간 속에서 인과적으로 설명될 수 있는 그 밖의 모든 존재와는 달리 미결정성 즉 자유이다. 자유로서의 인간은 자신의 정체를 자신의 선택에 의해서만 비로소 스스로 결정할 수 있으며, 따라서 자신의 운명에 대한 책임을 스스로 져야 한다. 책임은 불안이라는 고통을 동반하며, 그러한 고통은 그것으로부터의 도피에 대한 욕망을 추구한다. 대자로서의 존재 즉 자유로서의 존재가 이러한 고통의 원인인 이상 인간은 자신의 본래적 존재양식인 자유로서의 존재 즉 대자로서가 아니라 그 반대의 존재 즉 직자로 변신하여 짐승이나 식물이나 돌로 되었을 때만 자신의 목적인 고통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모든 인간의 꿈은 개나 새나 나무나 풀 또는 돌이나 흙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대자 즉 의식으로서의 내가 직자로서의 개나 새, 나무나 바위가 된다는 것은 내가 의식을 상실했음을 의미하고, 내가 의식이 없는 존재로 변한다면 그렇게 변함으로써 대자로서의 고통으로부터 해방됨으로써 경험하고자 한 충족감을 기대할 수 없다. 내가 그런 충족감을 경험하려면 나는 의식적 존재 즉 대자로서 존재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내가 원래 욕망하는 것은 의식으로서의 대자와 의식으로부터 해방된 직자로서 동시에 존재하는 데 있다. 대자와 직자의 통합은 완전한 존재 즉 절대선을 뜻한다. 그러나 어떤 존재도 동시에 대자와 직자로서 존재한다는 것은 논리적 모순이다. 신의 존재는 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완전한 존재 즉 신이 되고자 하는 인간의 궁극적 소원은 궁극적으로 쓸데없는 헛수고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도 죽는 날까지 인간은 조그만 일에 웃고 울고, 시시한 것을 갖고 떠들고 싸우며, 안달하고 조바심한다. 거짓말하고 허세를 부린다. 인간의 삶은 비극도 희극도 아닌 값싼 코미디이다. 태연하고 초연하게 존재할 수 없을까?
내가 인간보다는 동물, 동물보다는 식물의 존재양식에 무의식적으로 끌리는 이유는 위와 같은 사르트르의 인간 존재양식에 대한 실존철학적 분석으로 밝혀질 수 있다. 동물과 식물은 다 같이 대자와 직자 즉 의식으로서의 존재와 그냥 물질로서의 존재의 어느쪽에도 속할 수 없는 애매한 중간적인 존재 즉 불안전한 상태이기는 하나 대자인 동시에 직자인 존재양식으로 착각할 수 있다. 바로 이런 점에서 그것들은 인간의 실현 불가능하지만 피할 수 없는 인간의 근원적 욕망/소원을 상징적으로 만족시켜준다. 아무튼 나는 돌이나 흙보다는 풀이나 나무가, 새나 개보다는 복돌이나 옥순이가 되고 싶으면서도, 역시 복돌이나 옥순이보다는 새나 짐승이, 새나 개보다는 풀이나 나무가 되고 싶다. 풀이나 나무 같은 식물 가운데서도 각별히 전나무가 되고 싶다.
살아 있는 나무의 초록빛은 생명이 탄생하는 현장이며, 원초적 생명의 향연이다. 생명은 모든 가치의 근원인 동시에 목적이다. 생명을 떠난 가치를 생각할 수 없는 한 생명의 가치는 영원하다. 그러기에 여름이면 무성하게 푸르다가도 겨울이 되면 앙상한 장작개비 같은 가지만 남는 낙엽수로 덮인 산림이 쓸쓸한 데 반해 계절을 타지 않고 아무리 얼어붙는 겨울에도 언제나 초록색을 간직하는 상록수 삼림이 한결 더 아름다워 보인다. 그러기에 같은 나무이면서도 상록수가 낙엽수보다 더 우리의 미적 정서를 채워준다. 수많은 종류의 상록수가 있다. 전나무는 상록수 가운데 하나이다.
나는 상록수 중에서도 각별히 전나무에 매료된다. 녹색은 깨끗하다. 멀리서나 가까이에서나 전체적으로 볼 때 전나무의 녹색은 다른 나무들의 녹색에 비추어 한결 더 푸르다. 키가 훌쩍 큰 사람은 그것만으로도 든든하고 그만큼 믿음직해 보인다. 드 골 장군이 이러한 사실의 좋은 예이다. 그는 프랑스인으로서는 커서 장대같이 우뚝 서 보이고, 알 수 없는 위신과 권위를 풍기며 신뢰감을 준다. 그것은 그가 정치적으로는 프랑스의 대통령이었던 사실과 도덕성으로는 나치 독일군에 항복하지 않고 조국을 위해 싸웠던 사실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그의 키가 장대같이 두드러지게 커서 다른 프랑스인보다 물리적으로 우뚝해 보였기 때문이기도 했던 것 같다.
전나무는 우뚝 서 자란다. 해가 묵을수록 전나무는 한결 더 드 골 장군같이 늠름하다. 정원의 중심이나 동네의 한복판 혹은 산기슭에 혼자 우뚝 선 전나무는 늠름하고 점잖고 조용하면서도 당당하고 도도하고 우람하며 믿음직하다. 전나무는 아무리 거센 비바람이 불어와도 쉽게 흔들리지 않고 구기지 않는 자세로 끄떡없이 언제나 우뚝 서 있다. 한결같은 품격을 지킬 수 있는 전나무는 인격적으로도 높이 우뚝 서 있다.
전나무는 미학적으로도 어떤 상록수보다도 우리의 시선을 끈다. 전나무는 그냥 푸르고 그냥 크기만 하지 않다. 전나무는 하나의 예술적 걸작품이다. 그것은 전체적으로 볼 때 자연적 산물이라기보다는 인위적으로만 가능할 것 같은 단순하면서도 환상적인 기하학적 균형을 갖추고 있다. 전나무는 아름답다. 전나무는 도통한 인격자인 동시에 위대한 예술작품이다. 물질과 의식의 통합과 자연과 인간의 조화, 무의미와 의미의 통일을 나는 언제나 푸르고 언제나 흔들리지 않고 우뚝 선 전나무를 통해 경험한다. 언제 봐도 전나무는 우뚝 푸르고 잘생겼고, 태연하고 초연하다.
홀로 우뚝 선 전나무를 볼 때마다 나는 발길을 멈추고 멀리서 바라보기도 하고 가까이서 우러러본다. 어려서 고향 마을의 우리 집 담 뒤에 우뚝 선 전나무에서 나는 내가 이상으로 삼는 삶의 모습을 막연히 발견했었고, 파리 대학 기숙사촌의 정원에 서 있는 전나무에 자꾸 마음이 끌려 그것을 오랫동안 바라보곤 했다. 지금도 나는 나무 가운데 전나무를 가장 좋아한다. 나는 전나무처럼 살고 싶고 전나무가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