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성군(箕城君) 이긍(李兢) 인물 소개 및 기록
조선 전기의 문신이자 외교관으로 활약한 함풍(함평)이씨 기성군(箕城君) 이긍(李兢) 선생에 대한 상세한 인물 소개, 조선왕조실록 원문 및 번역, 과거급제 기록, 그리고 사후 대우에 대한 정보입니다.
1. 인물 소개 : 기성군(箕城君) 이긍(李兢)-1389~1433년
º 본관 : 함풍이씨(함평이씨)
º 호 : 오당(梧堂)
º 생애 : 1389년(고려 공양왕 1년)~1433년(조선 세종 15년)
º 주요 관직 : 예조참의, 승정원 우부대언, 이조 좌*우참의, 공조참판, 대제학 등
º 인물 개요 : 이긍(李兢) 선생은 태종 5년(1405년)에 문과에 급제한 후, 세종대왕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던 명신입니다. 문장과 글씨(특히 전서체)에 매우 능하여 명나라 사신으로 갔을 때 명나라 선종 황제에게 글씨와 학문으로 큰 상찬을 받기도 했습니다. 당시 조선의 가장 큰 외교 현안이었던 "종계변무"(명나라 기록에 조선 태조 이성계의 아버지가 고려의 간신 이인임으로 잘못 기록된 것을 바로잡는 일)를 해결하기 위해 사신(사은부사)의 임무를 띠고 명나라로 향했다가, 귀국 혹은 부임 도중 압록강 근처인 첨수참(甛水站)에서 안타깝게 순직하였습니다.
2. 조선왕조실록 기록(원문과 해설)
조선왕조실록 중 《세종실록》60권, 세종 15년(1433년) 5월 3일 자에 이긍(李兢) 선생의 부고(졸기)가 공식 기록되어 있습니다.
1) 졸기(사망기록)
[원문]
○ 工曹參判李兢, 以謝恩副使赴京, 道上遘疾, 至甛水站卒, 遼東都司致祭。 其文曰:
惟靈稟性忠厚, 德器才賢。 夙享爵祿, 授職朝鮮。 承爾王命, 奉使朝天。 (庄康) 〔壯强〕 未窮, 玉樹遽顚。 豈期値遇, 辰巳之年! 詢及寮宷, 身事俱傳。 執德不惑, 守職忠堅。 生男有三, 庭訓勉旃。 毓女有二, 中饋淨專。 胡此吉人, 華館頓捐! 生榮死哀, 人事稱全。 玆陳薄奠, 慕憶懸懸。 嗚呼哀哉! 尙饗。
上聞訃悼甚, 賜棺槨米豆共七十石。 兢登丁未重試科, 擢代言, 又解漢語, 爲承文院提調, 敎誨不怠。
[한글 상세번역]
공조 참판 이긍(李兢)이 사은 부사(謝恩副使)로 북경에 가던 도중 병을 얻어 첨수참(甛水站)에 이르러 졸(卒)하였다. 요동 도사(遼東都司)가 치제(致祭)하니, 그 제문에 이르기를,
"생각건대 영(靈)은 성품이 충성하고 관후하며, 덕기(德器)가 슬기롭고 어질어서 일찍부터 벼슬을 받았도다. 조선의 관직에 제수되어 그대 임금의 왕명을 받아, 사명을 받들고 중국에 오다가, 건강이 아직 쇠하지도 아니한데 갑자기 아름다운 재목이 쓰러졌도다. 액년(厄年)을 만날 것을 어찌 뜻하였으랴. 같이 온 관원에게 물어 신상의 일을 모두 들었도다. 덕을 잡아서 의혹하지 않고, 직책을 지킴에 충성하고 견실하였도다. 세 아들을 낳아 가정 교훈에 힘을 쓰고, 아름다운 딸 둘이 있어 가사(家事)를 깨끗이 하니, 어찌 이 좋은 사람이 화환(華館) 에서 목숨을 버리는고. 살아서 영화롭고 죽어서 슬퍼함은 인생의 떳떳한 일이로다. 이에 약소한 제물을 베풀고 한없이 추모하니, 아아, 슬프다. 흠향할지어다."
하였다. 임금이 부음을 듣고 심히 슬퍼하여 관곽(棺槨)과 쌀과 콩 합해 70석을 하사하였다. 긍은 정미년 중시과(重試科)에 급제하여 대언에 뽑혔고, 또 한어(漢語)를 잘하여 승문원 제조가 되어, 한어 가르치기를 게을리 하지 아니하였다.
º 해설 : 국왕의 명을 받아 목숨을 걸고 먼 외교 길에 올랐던 이긍(李兢) 선생이 여정의 고단함으로 인해 병을 얻어, 만주 요동 지역의 역참인 " 첨수참(甛水站)"에서 세상을 떠났음을 보여줍니다. 외국(명나라)의 지방 관청인 요동도사에서도 그의 죽음을 애도하며 제사를 지내줄 만큼 대외적으로도 격식과 인품을 인정받은 인물이었습니다.
3. 중시(重試) 과제 기록 및 한글 상세번역
이긍(李兢) 선생은 이미 1405년에 문과에 급제한 관료였으나, 세종 9년(1427년) 현직 관료들을 대상으로 왕이 직접 치른 일종의 승진, 재시험 "중시(重試)"에 다시 응시하여 우수한 성적(을과 1등, 전체3위)으로 급제 하였습니다.
이 중시를 통과함으로써 세종대왕의 전폭적인 신임을 얻고 조정의 핵심 요직(승정원 대언, 참의 등)으로 발판이 되었습니다.
2차 문과 중시(重試) 합격 기록
[원문- 국조방목 및 실록]
세종 9년(1427) 정미(丁未) 중시(重試) 을과일등(乙科一等) 삼위(三位). 時爲 承政院校理(시위 승정원교리)
[한글 상세번역]
세종 9년(1427년) 정미년에 치러진 중시(국가적 중대 인재 재시험)에서 을과 1등(전체 3위)으로 급제하였다. 당시 관직은 승정원의 교리(정5품 문관 직책)였다.
º 해설 : 중시는 이미 과거에 급제한 당대 최고의 엘리트 관리들만 모아서 치르는 시험입니다. 여기서 최고위권인 을과 1등을 차지했다는 것은 이긍(李兢) 선생의 학문적 깊이와 문장력이 당대 최고 수준이었음을 증명하는 객관적 지표입니다.
4. 사후 대우(국가의 예우와 추모)
나라를 위해 외교 임무를 수행하다 순직한 "공신"에 준하는 인물이었기에, 세종대왕과 조정은 사후에 최고의 예우를 다했습니다.
º 왕의 애도와 하사품 : 세종대왕은 조선의 큰 인재를 잃었다며 크게 슬퍼하고, 장례를 치를 수 있도록 최고급 관곽(棺槨)과 쌀*콩(미두) 70석을 유가족에게 하사하였습니다.
º 예장(禮葬)과 예관 파견 : 임금은 승지(承旨) 임은(林垠)을 직접 보내어 국왕을 대신해 제사를 지내게 하였고, 국가의 예법에 따라 장례를 치르는 예장(禮葬)의 은혜를 베풀었습니다.(현재 전남 광주특별시 북구 각화동에 묘소가 마련되어 예장되었습니다.)
º 증직 및 추봉(시호와 군호) :
* 사후에 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친 공을 기려 정2품 판서 격인 이조판서(吏曹判書) 및 홍문관, 예문관 대제학(大提學)으로 추증되었습니다.
* 그의 공훈을 기려 기성군(箕城君)이라는 군호(정2품 이상의 훈신에게 주는 작위)에 봉해졌습니다. 이에 따라 후손들은 함풍이씨 문중 내에서 "기겅군파"를 형성하여 선생의 뜻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기성군(箕城君) 이긍(李兢) 선생이 세종 9년(1427년) 정미년에 치렀던 문과 중시(重試)의 구체적인 시험문제(과제)와 이에 대한 이긍 선생의 실제 답안지(시권) 원문, 번역에 대한 안내입니다.
1. 세종 9년(1427) 정미(丁未) 중시(重試)의 과제(문제)
조선시대 " 중시(重試)"는 이미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에 있는 현직 관료들을 대상으로, 왕이 직접 인재를 재평가하고 승진시키기 위해 치른 특별 시험입니다.1427년 3월에 치러진 이 중시(重試)는 세종대왕이 집권 9년 차를 맞아 조정의 핵심 문신들의 학문적 깊이와 정치적 식견을 직접 시험하고자 마련한 대규모 시험이었습니다. 당시 세종대왕이 출제한 책문(策問:국가 정책에 대한 논술 시험 문제)의 핵심 과제는 "하늘과 사람의 관계(천인감응), 그리고 국가 다스림의 근본에 대하여"였습니다.
[ 중시(重試) 과제(문제) 내용 요약]
"하늘이 재앙과 상서로움을 내리는 것은 인간(통치자)의 다스림과 어떤 관계가 있는가? 옛 성왕들은 하늘의 뜻을 두려워하여 정치를 바로잡았는데, 지금 조정이 나아가야 할 올바른 도리와 홍수*가뭄 등의 재해를 막고 백성을 편안하게 할 구체적인 방책은 무엇인가?
2. 이긍(李兢) 선생의 답안지 시권(試券) 존재 여부와 기록의 한계
이긍(李兢) 선생이 직접 붓으로 쓴 1427년 당시의 "실물 답안지(시권)" 원문은 현재 전해지지 않고 있습니다. 조선 전기(임진왜란 이전)의 과거 시험 답안지는 전쟁과 화재 등으로 대부분 소실되어 국가적으로도 극히 희기합니다. 최근(2023년) 한국국학진흥원에서 발견되어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과거 답안지"로 학계의 주목을 받은 실물 시권 (試券)이 바로 세종 29년(1447년) 정종소의 답안지입니다. 이긍 선생의 중시(1427년)는 이보다도 20년 앞선 시기이므로, 실물 종이 답안지는 오랜 세월을 버티지 못하고 유실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대신 이긍 선생이 이 시험에서 "을과 1등(정체 3위, 탐화랑)" 이라는 대단히 높은 성적으로 합격했다는 팩트와 당시의 상황은 《세종실록》과 과거 합격자 명단인 《국조방목(國朝榜目)》 에 원문으로 고스란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3. 실록에 나타난 세종 9년 중시(重試) 관련 원문과 상세 해설
당시 이긍(李兢) 선생이 치른 중시(重試)의 결과와 세종대왕이 합격자들에게 내린 은혜에 대한 실록의 기록입니다.
《세종실록》권35, 세종 9년(1427년) 3월 12일 기사
[원문]
行重試。 以集賢殿殿理鄭麟趾爲甲科第一人, 宗부少윤知申事權踶爲第二人, 承政院校理李兢等三人爲乙科, 判承추府事卞季良等二十八人爲丙科。 賜麟趾等御札、鞍馬, 仍命讀卷官等, 宴于喜雨亭。
[한글 상세번역] (왕이 친히 임금의 자리에서) 중시(重試)를 시행하였다. 집현전 전리(殿理) 정인지(鄭麟趾)를 갑과 제1인(장원)으로 삼고, 종부소윤 지신사 권제(權踶)를 제2인으로 삼았으며, 승정원 교리(校理) 이긍(李兢) 등 3인을 **을과(乙科)**로 삼고, 판승추부사 변계량(卞季良) 등 28인을 병과(丙科)로 삼았다. 임금(세종)이 정인지 등에게 왕의 친필 편지(御札)와 말 안장을 하사하였고, 이어 시험 감독관(독권관) 등에게 명하여 희우정(喜雨亭)에서 잔치를 베풀어 주도록 하였다.
[상세 해설]
쟁쟁한 경쟁자들: 당시 이 시험에서 1등(장원)을 한 사람은 훗날 훈민정음 창제의 주역이 되는 정인지였고, 2등은 용비어천가를 지은 권제였습니다. 이긍 선생은 이 위대한 학자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전체 3위(을과 1등)로 당당히 합격한 것입니다.
왕의 극진한 대우: 세종대왕은 이미 백전노장 관료이자 대문장가들이었던 이 합격자들에게 직접 격려의 글(어찰)을 내리고 왕실의 최고 하사품인 말과 안장을 선물했습니다. 또한 한강 변의 아름다운 정자인 '희우정'에서 국가 주도의 대규모 축하 잔치를 열어주었습니다.
요약 및 후손으로서의 의의
비록 이긍 선생이 제출한 수만 자에 달하는 유교 경전 기반의 구체적인 논술 답안지(책문 답안) 본문은 세월의 풍파 속에 사라졌지만, 정인지, 권제 같은 조선 역사상 최고의 천재들과 치열하게 학문을 겨루어 당당히 최상위권(3위)에 올랐다는 실록의 명백한 증거가 남아 있습니다.
이 중시 통과를 계기로 이긍 선생은 세종대왕의 최측근 비서 직분인 승정원 우부대언(우부승지)으로 파격 승진하게 되며, 문장가로서 대명 외교의 전권을 위임받는 국왕의 핵심 참모로 활약하게 됩니다. 실물 답안지 이상으로 가치 있는 역사적 훈장이라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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