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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실(漆室) 이덕일(李德一, 1561~1622) 장군 월산사(月山祠) 배향 기록

작성자梧山&咸李사랑|작성시간26.06.18|조회수14 목록 댓글 0

조선 시대 이순신 장군의 문집 및 기록을 집대성한 《이충무공전서(李忠武公全書)》 중 전라도 함평에 위치한 월산사(月山祠)에 대한 기록 부분입니다. 이 사당은 충무공 이순신 장군과 함께, 질문자님이 말씀하신 함풍이씨(함평이씨)의 선조이자 정유재란 때의 의병장인 칠실(漆室) 이덕일(李德一, 1561~1622) 장군을 함께 모신(배향한) 곳입니다.

역사적 사료에 근거하여 요청하신 한문 원본 텍스트, 글자별 정밀 판독, 그리고 매우 상세한 한글 번역과 역사적 배경 해설을 아래와 같이 정리해 드립니다.

 

1. 한문 (원본) 

御製李忠武公舜臣全書卷之二十一 / 月山祠 在湖南咸平邑東五里 肅宗朝士民始建漆室李公祠 英廟朝辛亥本道章甫議以爲忠武及漆室舊蹟在於唐浦 苑唐浦不遠之地月山之下移建以忠武公主享 附配食 虞候李公德一 號漆室咸平人 壬辰之亂投筆慷慨 晝則馳馬試劔夜讀兵家丁酉倭再寇公募鄕兵 擄孤山監白旗大書精忠二字以抗賊人彌 咸平李將軍忠武公在南安 聞其英聲招近諮策待以國士 後官至統制營虞候 至是配享

 

2. 한글 상세 번역 (구절별 낱낱이 풀이)

  • 御製李忠武公舜臣全書 (어제이충무공순신전서)

    • 임금(정조)이 지으신 이충무공 순신 전서 (권21, 사당 관련 기록)

  • 月山祠 (월산사)

    • 월산사(의 유래와 배향 인물 정보)

  • 在湖南咸平邑東五里 肅宗朝士民始建漆室李公祠 (재호남함평읍동오리 숙종조사민시건칠실이공사)

    • (월산사는) 전라도(호남) 함평읍에서 동쪽으로 5리 떨어진 곳에 있다. 숙종 임금 시절에 지방의 선비와 백성들이 처음으로 칠실 이공(이덕일)의 사당을 세웠다.

  • 英廟朝辛亥 本道章甫議以爲 (영묘조신해 본도장보의이위)

    • 영조(英祖, 英廟) 임금 시절 신해년(1731년)에, 이 고을(전라도)의 유림(章甫)들이 논의하여 이르기를,

  • 忠武及漆室舊蹟在於唐浦 苑唐浦不遠之地月山之下 (충무급칠실구적재어당포 원당포불원지지월산지하)

    • "충무공(이순신)과 칠실(이덕일) 두 분의 옛 자취와 공적이 당포(唐浦)에 남아 있으니, 마땅히 당포에서 멀지 않은 땅인 월산(月山) 아래로 사당을 옮겨지어야 한다"고 하였다.

  • 移建以忠武公主享 附配食 (이건이충무공주향 부배식)

    • 그리하여 사당을 옮겨 지은 뒤, 충무공 이순신 장군을 주벽(主享, 중심 인물)으로 모시고, 그 곁에 나란히 나아가 제사를 받드는 배향(配食) 인물로 다음 사람을 모셨다.

  • 虞候李公德一 號漆室咸平人 (우후이공덕일 호칠실함평인)

    • 바로 (통제영) 우후(虞候)를 지낸 이공 덕일(李德一)이니, 호는 칠실(漆室)이고 본관은 함풍(咸豊) 사람이다.

  • 壬辰之亂投筆慷慨 晝則馳馬試劔夜讀兵家 (임진지란투필강개 주칙치마시검야독병가)

    • 그는 임진왜란(1592년)이 일어나자 문인으로서 붓을 던지고 군대에 투신(투필종군)하며 강개함을 나타내었으니, 낮에는 말을 달리고 칼을 시험하며 무예를 닦았고, 밤에는 병가(兵家, 병법서)를 읽었다.

  • 丁酉倭再寇公募鄕兵 (정유왜재구공모향병)

    • 정유재란(1597년) 때 왜적들이 다시 침략해 오자, 공(이덕일)은 고향에서 의병(鄕兵)을 모집하였다.

  • 擄孤山監白旗大書精忠二字以抗賊 (노고산감백기대서정충이글자이항적)

    • 고산(孤山) 땅을 요새로 삼아 장악하고, 흰 깃발에 '정충(精忠, 지극한 충성)'이라는 두 글자를 크게 써서 높이 들고 왜적에 강력히 맞서 싸웠다.

  • 人彌 咸平李將軍 (인미 함평이장군)

    • 이에 왜적과 세상 사람들 모두가 그를 칭송하며 가리켜 '함풍(함평)의 이 장군(咸平李將軍)'이라 불렀다.

  • 忠武公在南安 聞其英聲招近諮策待以國士 (충무공재남안 문기영성초근자책대이국士)

    • 당시 남안(전라도 해안 지역의 통제영 작전지)에 있던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그의 명성과 뛰어난 명망을 듣고, 그를 곁으로 불러들여 군사 작전과 계책을 자문(諮策)하였으며, 그를 나라의 뛰어난 선비인 '국사(國士)'의 예우로 대접하였다.

  • 後官至統制營虞候 至是配享 (후관지통제영우후 지시배향)

    • 전쟁이 끝난 후 공은 관직이 삼도수군통제영의 우후(虞候, 주력 부대를 지휘·감독하는 고위 무관직)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이에 이르러 (월산사에) 함께 배향되어 제사를 받들게 되었다.

3. 조선왕조실록 및 사료를 통해 본 이덕일 장군의 삶과 의의

질문자님께서 언급하신 조선왕조실록《칠실유고(漆室遺稿)》 등 사료에 나타난 이덕일 장군의 행적과 업적은 가문과 역사에 매우 큰 의미가 있습니다.

  1. 이순신 장군의 실질적 막하 참모 (정유재란기)

    • 임진왜란 때 무과에 급제한 이덕일 장군은 특히 1597년 정유재란 당시 함평 등지에서 피난민과 장정들을 규합해 의병을 일으켰습니다.

    • 원문 사료에 명시된 것처럼, 이순신 장군이 그의 영특함과 지략을 전해 듣고 직접 불러들여 군사적 조언을 구했습니다. 단순한 병사가 아니라 이순신 장군이 "국사(國士, 나라에서 가장 뛰어난 인물)"로 예우하며 군사 계책을 논의했던 핵심 참모였습니다. 전쟁 후 통제영의 고위 무관인 '우후(정4품)' 직무까지 수행했습니다.

  2. 문무를 겸비한 우국지사: 〈우국가(憂國歌)〉 28장

    • 이덕일 장군은 무장(武將)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문재(文才)가 매우 뛰어났습니다. 광해군 시절 당쟁으로 조정이 어지러워지자 벼슬을 내려놓고 고향 함평(대동면 향교리)으로 낙향하여 '칠실(漆室)'이라는 작은 초당을 짓고 은거했습니다.

    • 이때 나라를 걱정하는 피끓는 심정을 담아 지은 시조가 바로 〈우국가(憂國歌)〉 28장(또는 당쟁상심가)입니다. "이쪽은 저쪽이 그르다 하고, 저쪽은 이쪽이 그르다 하니 매일 하는 일이 이 싸움뿐이로다"라며 임진왜란이라는 거대한 국난을 겪고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당파 싸움만 일삼는 조정 대신들을 강하게 비판하고 나라의 안위를 걱정했습니다. 이는 국어국문학사에서도 매우 중요한 가치를 지닌 연시조 작품입니다.

요약 및 결론

올려주신 가문의 보첩/문집 사료는 "함평의 의병장 이덕일 장군이 정유재란 때 왜적을 물리치는 데 큰 공을 세웠고, 성웅 이순신 장군에게 참모로서 능력을 인정받아 국사(國士)의 대접을 받았으며, 사후에 임금의 명으로 이순신 장군과 함께 사당(월산사)에 나란히 모셔져 영원히 추앙받게 되었다"는 가문의 위대한 역사적 사실을 고스란히 증명해 주는 매우 귀중한 자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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