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8월 25일 월요일
[(녹) 연중 제21주간 월요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오늘 전례
[백] 성 루도비코 또는
[백] 성 요셉 데 갈라산즈 사제
말씀의 초대
바오로 사도는 테살로니카 신자들에게 인사하며, 하느님에 대한 그들의 믿음이 곳곳에 알려졌다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에게, 위선자이며 눈먼 인도자들이라고 하시며 불행하다고 하신다(복음).
제1독서
<여러분은 우상들을 버리고 하느님께 돌아섰습니다. 다시 일으키신 하느님의 아드님을 여러분이 기다리게 되었습니다.>
▥ 사도 바오로의 테살로니카 1서 시작입니다. 1,1-5.8ㄴ-10
1 바오로와 실바누스와 티모테오가
하느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는
테살로니카 사람들의 교회에 인사합니다.
은총과 평화가 여러분에게 내리기를 빕니다.
2 우리는 기도할 때에 여러분을 모두 기억하며 늘 하느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3 하느님 우리 아버지 앞에서
여러분의 믿음의 행위와 사랑의 노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희망의 인내를 기억합니다.
4 하느님께 사랑받는 형제 여러분, 우리는 여러분이 선택되었음을 압니다.
5 그것은 우리 복음이 말로만이 아니라
힘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여러분에게 전해졌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여러분을 위하여 여러분 가운데에서
어떻게 처신하였는지 여러분은 알고 있습니다.
8 하느님에 대한 여러분의 믿음이 곳곳에 알려졌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더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9 사실 그곳 사람들이 우리에 관한 이야기를 전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여러분을 찾아갔을 때에 여러분이 우리를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여러분이 어떻게 우상들을 버리고
하느님께 돌아서서 살아 계신 참하느님을 섬기게 되었는지,
10 그리고 여러분이 어떻게
하느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신 그분의 아드님,
곧 닥쳐오는 진노에서 우리를 구해 주실 예수님께서
하늘로부터 오실 것을 기다리게 되었는지 말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 음
<불행하여라, 너희 눈먼 인도자들아!>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3,13-22
그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13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사람들 앞에서 하늘 나라의 문을 잠가 버리기 때문이다.
그러고는 자기들도 들어가지 않을 뿐만 아니라,
들어가려는 이들마저 들어가게 놓아두지 않는다.
(14)·15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개종자 한 사람을 얻으려고
바다와 뭍을 돌아다니다가 한 사람이 생기면,
너희보다 갑절이나 못된 지옥의 자식으로 만들어 버리기 때문이다.
16 불행하여라, 너희 눈먼 인도자들아!
‘성전을 두고 한 맹세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성전의 금을 두고 한 맹세는 지켜야 한다.’고 너희는 말한다.
17 어리석고 눈먼 자들아! 무엇이 더 중요하냐?
금이냐, 아니면 금을 거룩하게 하는 성전이냐?
18 너희는 또 ‘제단을 두고 한 맹세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제단 위에 놓인 예물을 두고 한 맹세는 지켜야 한다.’고 말한다.
19 눈먼 자들아! 무엇이 더 중요하냐?
예물이냐, 아니면 예물을 거룩하게 하는 제단이냐?
20 사실 제단을 두고 맹세하는 이는
제단과 그 위에 있는 모든 것을 두고 맹세하는 것이고,
21 성전을 두고 맹세하는 이는 성전과 그 안에 사시는 분을 두고 맹세하는 것이며,
22 하늘을 두고 맹세하는 이는
하느님의 옥좌와 그 위에 앉아 계신 분을 두고 맹세하는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의 묵상
오늘부터 다음 주 화요일까지 평일 미사 독서로 테살로니카 1서를 읽습니다. 신약 성경 가운데 가장 먼저 쓰이고 그리스도교 최초의 문헌인 이 서간은 기원후 51년 무렵 집필되었습니다. 로마 제국의 속주인 마케도니아의 주도 테살로니카에 바오로 사도가 처음 도착한 것은 제2차 선교 여행을 하던 50년 무렵입니다. 이 도시는 그가 방문한 유럽 대륙의 첫 대도시입니다. 테살로니카에 살던 유다인들이 그의 활동에 어깃장을 놓았기에, 테살로니카 신자들은 한밤중에 그 일행을 베로이아로 보냅니다. 그곳까지 쫓아온 유다인들은 바오로 사도의 선교를 방해합니다. 새로 생겨난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두고 떠나야 하였던 바오로 사도의 마음은 갓난아기를 집에 남겨 둔 채 떠나야 하는 부모의 마음과 같지 않았을까요? 제1독서 본문을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은총과 평화가 여러분에게”(1테살 1,1)라는 인사는 바오로 서간의 전형적 특징입니다. 바오로 사도가 신자들에게 빌어 주는 은총과 평화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신 삼위일체 하느님께 속합니다. 둘째, “우리는 기도할 때에 여러분을 모두 기억”(1,2)한다는 내용은 서간의 발신인과 수신인들의 유대를 다시 확인해 줍니다. 물리적으로 떨어져 있더라도 기도로 이어져 있다는 뜻이지요. 셋째, “믿음의 행위와 사랑의 노고와 …… 희망의 인내”(1,3)라는 표현도 인상적입니다. 신망애의 원천은 예수 그리스도로 풀이됩니다. 넷째, “예수님께서 하늘로부터 오실 것을 기다리게 되었는지 말하고 있습니다.”(1,10)라는 이 구절은 주님께서 다시 오심이 가까이 왔다는 생각에 불안해하였을 신자들의 상황을 간접적으로 반영합니다. 테살로니카 1서를 읽으면서 바오로 사도가 품었을 부모의 마음을 곰곰이 생각해 봅시다.(김상우 바오로 신부)
깊이 있고 감미로운 기도 생활을 맛보았다면!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이 주간 계속 봉독하게 될 마태오 복음은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를 향한 예수님의 강력한 경고 말씀인데, 천천히 듣고 묵상해보니, 너무나 강경하고 날 선 말씀이라, 당시 말씀을 듣던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엄청 화가 났을 것이 분명합니다.
예수님 입에서 나온 말씀 한 마디 한 마디가 정곡을 찌르는 데다, 당시 그들이 실제적으로 저지르던 악행을 너무나 정확하게 지적하시니,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 입장에서 속이 부글부글거리며 어떻게 하면 제대로 복수할 수 있을까, 많이 고민했을 것입니다.
지도자들이나 절대 권력이 저지르는 불의와 악행 앞에 절대 침묵하지 않으셨던 예수님의 모습을 바라보며, 오늘 우리 가톨릭교회 공동체 구성원들이 수시로 직면하는 거대한 악과 불의 앞에 취해야 할 노선이 어떤 것인지를 명확하게 파악할 수 있습니다.
나라 전체가, 교회 전체가, 공동체 전체가 최고 책임자와 그 주변 인물들의 그릇된 처신과 선택 앞에서, 그러려니 하고 침묵한다? 그들의 회개를 위해 조용히 기도만 한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정치는 정치인들에게 맡긴다? 성직자들은 교회 울타리 안에서 조신하게 신앙의 진리만 선포한다?
예수님께서 보시면 크게 분노하실 처신이리라 확신합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영적 생활만 잘 하면 그만인 사람들이 결코 아닙니다. 자신의 인생 여정에서 영적 생활과 실제 생활이 잘 조화를 이루도록 노력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깊이 있고 감미로운 기도 생활을 맛보았다면, 그 결과물이 있어야 합니다. 주변 사람들과 더 조화롭게 지내고, 자신이 몸담고 있는 공동체의 성장과 쇄신을 위해 더 노력하고, 복음 정신에 따라 공동선의 실천하고, 가난하고 고통받는 동료 인간들을 위해 헌신해야 마땅합니다.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향한 예수님의 날 선 말씀을 묵상하다 보니, 불에 달군 화살 같은 예수님 말씀의 다른 누군가가 아니라 바로 오늘 우리 사목자들, 성직자, 수도자, 지도자들을 향한 말씀이었습니다.
가끔 만나게 되는 증거가 안되는 사목자, 지도자들의 모습을 안타깝게 바라봅니다. 세상이 바뀐지 오래 지났는데도, 아직도 구 시대적, 제왕적, 독단적, 가부장적인 모습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과도하고 분별없는 언행으로 인해 공동체 전체가 고통을 받습니다. 양들은 목자로부터 사랑받고 위로받기는커녕 협박받고 공격당합니다.
그들은 존재 자체로 하느님 나라를 증거하지 않고 오히려 반대 증거자로 전락합니다. 어떻게든 사람들을 하느님 나라로 인도해도 부족한데, 하느님 나라의 문을 잠가버립니다. 결국 그들도 못 들어가게 하고 본인도 들어가지 못하는 참혹한 결과를 초래합니다.
나이를 조금 먹어가다보니 과거 젊은 사목자 시절 미성숙과 부족함으로 인해 양들에게 저질렀던 과오와 흑역사가 떠오릅니다. 떠오를 때마다 큰 부끄러움과 송구함에 크게 이불킥을 합니다. 더 이상 부끄러운 위선자나 눈먼 인도자로 살지 않도록 간절히 청해야 하겠습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우리는 오늘 복음 말씀에서 예수님께서 바리사이파 사람들을 향해 강하게 꾸짖는 장면을 만납니다. 그들의 위선적인 종교 행위, 겉으로는 하느님을 섬긴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자신들의 명예와 이익을 앞세우는 모습을 예수님께서는 "어리석고 눈먼 자들아!"라는 단호한 말로 지적하십니다. “무엇이 더 중요하냐? 금이냐, 아니면 금을 거룩하게 하는 성전이냐?” 예수님의 이 질문은 단지 당대의 바리사이파를 향한 것이 아니라, 오늘을 사는 우리를 향한 물음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무엇을 더 소중히 여기며 살고 있는가? 무엇에 눈을 두고, 무엇에 마음을 빼앗기고 있는가?
‘산 넘어서 또 산’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슬픔이 쓰나미처럼 밀려온다.’라는 말도 있습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어찌해 볼 수 없는 고통과 슬픔이 파도처럼 밀려오는 모습을 볼 때가 있습니다. 열심히 일해서 자리를 잡으려는데 가족의 건강에 빨간불이 켜졌습니다. 아버지는 암 투병으로 기력이 쇠해졌습니다. 아들은 오랜 시간 신장 투석을 하는 몸이 되었습니다. 어머니는 허리통증이 심해서 병원에 갔더니 암으로 판정되었습니다. 가족력으로 당뇨가 심한 자매님이 있습니다. 혈압이 높아서 뇌졸중이 왔고, 하반신을 움직이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일주일에 3번 투석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발에 작은 상처가 났는데 아물지 않고 염증이 심해져서 한쪽 발을 절단해야 한다는 진단이 나왔습니다. 병자성사를 드리면서 주님께 기도했습니다.
저는 종종 고통과 질병, 상실 속에서도 믿음을 잃지 않으려 애쓰는 교우들을 만납니다. “산 넘어서 또 산”이라는 표현처럼, 한고비를 넘으면 또 다른 시련이 밀려오는 삶의 굽이굽이에서, 저는 하느님의 얼굴을 찾는 이들의 눈동자에서 깊은 성찰의 울림을 느낍니다. 당뇨, 암, 투석, 절단 인간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파도 앞에 서 있을 때, 우리는 종종 묻습니다. “주님, 왜 저입니까?” 하지만 그런 순간에도 신자들은 기도를 멈추지 않고, 미사에 참여하고, 눈물을 삼키며 “주님,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라고 기도합니다. 이들의 삶은 단순한 ‘신체의 고통’을 넘어 ‘존재의 무게’를 견뎌내는 위대한 믿음의 길입니다. 여기서 ‘존재의 심연’을 바라보는 인간의 고백을 듣게 됩니다. 고통 속에서도 인간은 신을 찾고, 진리를 향해 나아갑니다. 고통은 인간의 가장 깊은 질문을 끌어내는 신앙의 출발점이기도 합니다.
예전에 한국 교회의 문제점을 토론한 적이 있습니다. 첫 번째 문제점은 ‘대형화’였습니다. 대형화된 교회는 많은 업적을 남길 수 있습니다. 필요한 건물을 지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대형화된 교회는 신자들의 아픔과 고통을 헤아리기 어렵습니다. 교회를 유지하기 위해서 큰 비용이 들기 때문에 신자들은 더 많은 헌금을 내야 됩니다. 두 번째 문제점은 ‘중산층화’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픈 사람, 병자들, 장애인들과 늘 함께하였습니다. 중산층화된 교회는 풍요와 축복을 이야기하기 마련입니다. 가난하고, 헐벗은 이들에게 교회의 문턱이 점차 높아지게 되었습니다. 세 번째 문제점은 ‘제도화’였습니다. 제도화된 교회에서는 성령께서 함께하시기 어렵습니다. 제도화된 교회에서는 사랑과 관용, 이해와 용서가 자리 잡기 어렵습니다. 법과 규정으로 신자들을 대하기 때문입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인데,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처럼 되기 때문입니다. 이런 모든 문제의 중심에는 ‘돈’이 있습니다. 자본이 가져다주는 화려함과 풍요에 중독된 우리들의 일그러진 양심 때문에 그렇게 된 것입니다. 썩어 없어질 세상이라는 곳간에 더 많은 재물을 쌓으려는 욕심 때문에 그렇게 된 것입니다.
예전에 신학교 교수 신부님께서 말씀해 주셨던 사제의 덕목이 떠오릅니다. 기도하는 사제는 하느님의 말씀을 통해 시대를 읽고, 공부하는 사제는 교회의 지혜로 진리를 전하며, 성실한 강론을 준비하는 사제는 지친 영혼을 위로합니다. 시간을 소중히 여기는 사제는 늘 깨어있는 영적 감수성을 지니고, 건강을 지키는 사제는 하느님의 도구로 살아갈 체력을 유지합니다. 이 다섯 가지는 단지 사제만의 덕목이 아니라, 우리가 기억해야 할 ‘신앙인의 삶의 태도’이기도 합니다. 오늘 예수님은 우리에게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십니다. “무엇이 더 중요하냐? 금이냐, 아니면 금을 거룩하게 하는 성전이냐?” 눈에 보이는 것, 사람의 영광, 세상의 기준이 더 중요한가? 아니면 하느님의 뜻, 사랑, 자비, 공감, 용서, 믿음, 그리고 성령의 인도하심이 더 중요한가?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은 세상의 금을 따르지 않고, 하느님의 성전을 따라갔습니다. 바오로 사도도 똑같은 길을 갔습니다. 오늘, 이 시대를 사는 우리는 어떤 길을 따라가야 할까요? “주님! 크신 자비로 시련을 이겨낼 수 있는 용기를 저희에게 주소서. 주님! 금이 아닌, 금을 거룩하게 하는 성전을 더 사랑하게 하소서.”
<길의 바램>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불행하여라, 너희 눈먼 인도자들아!”(마태 23,16ㄱ)
길
따라
걸으니
어느덧
길
되어
따르는
길
하나둘
이어져
앞선
길에는
뒤선
길이요
뒤선
길에는
앞선
길일지니
앞선
길
뒤선
길
잇는
길이기를
오늘의 성인
성 루도비코(Louis)
신분 : 왕, 3회원
활동지역 : 프랑스(France)
활동연도 : 1214-1270년
같은이름 : 누수, 루도비꼬, 루도비꾸스, 루도비쿠스, 루수, 루이, 루이스
성 루도비쿠스(Ludovicus, 또는 루도비코)는 프랑스 왕 루이 8세와 카스티야(Castilla)의 블랑쉬(Blanche)의 아들로 프와시(Poissy)에서 태어나 어머니의 종교적인 분위기 속에서 성장하였다. 1226년 그의 부친이 서거했을 때 그의 나이는 12세에 불과 했으므로 어머니가 섭정의 자리에 올랐다. 그녀는 아들의 왕권을 노리는 샹파뉴(Champagne)의 티보를 비롯하여 야심 많은 귀족들과 대항했고, 어떤 때에는 전쟁도 불사하였다.
그는 1234년 5월에 프로방스의 공작 레이먼드의 딸인 마르가리타(Margarita)와 결혼하여 열 명의 자녀를 두었다. 같은 해에 그는 대권을 물려받고 통치자가 되었고, 모친 블랑쉬는 고문관으로 아들을 도왔다.
그는 1242-1243년의 남 프랑스의 반란을 진압했고, 또 잉글랜드(England)의 헨리 3세를 테임브르그에서 격퇴하였으며, 포와투를 손에 넣는 등 국가의 권력을 점점 확대하였다. 1248년 그는 십자군을 지휘하여 출정하였으나 1249년에 다미에타에서 포로가 되어 사라센인들의 손에서 곤욕을 치렀다.
그 후 그는 석방되어 성지로 가서 1254년까지 머물다가 모친의 사망 통보를 받고 프랑스로 돌아왔다.
그는 플랑드르(Flandre)와의 평화를 이룩했고 리모주(Limoges), 카오르(Cahors) 등 수많은 지역을 평정하였다.
루도비쿠스는 천성적으로 신심이 깊었고, 또 실제로 이상적인 수도자를 꿈꾸었다.
이 때문에 그는 정의를 펴고 그리스도교적 사랑으로 나라를 다스렸으며, 왕으로부터 농부에 이르기까지 각자의 권리를 옹호하여 성왕으로 불리었다. 동시에 그는 예리하고 힘찬 군주였으며, 동시에 평화를 사랑하는 뛰어난 군인이었다. 그는 하느님께 불경한 태도나 말을 한 사실이 없다. 그의 맏아들에게 했던 유언에서도 그는 자신의 신앙을 그대로 설명하고 지키도록 부탁할 정도였다. 1270년 그는 재차 십자군을 일으켰다가 8주일 후에 이질에 걸려 운명하였다.
성인은 한마디로 가장 이상적인 중세의 그리스도인 왕이었다. 그의 치하에서 프랑스는 최대의 번영을 누렸다.
그의 신심은 자신이 작은 형제회 3회원이 됨으로써 입증하고도 남음이 있다.
그는 작은 형제회 3회의 남자 수호성인이다. 그는 1297년 교황 보니파티우스 8세(Bonifatius VI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임종시에 그는 이런 말을 하였다.
“주님, 저는 이제 당신의 집에 들어가렵니다. 당신의 거룩한 성전에서 예배하리이다. 당신의 이름에 영광을 드리나이다.” 그리고 오후 3시경에 “제 영혼을 당신 손에 맡기나이다.” 하며 숨을 거두었다. 그의 유해는 생드니(Saint-Denis) 수도원 성당에 안장되었다.
성 요셉 데 갈라산즈(Joseph de Calasanz)
신분 : 신부, 설립자, 교육자
활동연도 : 1556-1648년
같은이름 : 갈라산스, 갈라상스, 요세푸스, 요제프, 조세푸스, 조세프, 조셉, 조제프, 주세페, 쥬세페, 칼라산스, 칼라산즈, 호세
아버지 페드로 갈라산즈(Don Pedro Calasanza)와 어머니 마리아 가스토네아(Maria Gastonea)의 막내아들인 성 요셉 데 갈라산즈(Josephus de Calasanz)는 에스파냐 아라곤(Aragun)의 페트랄타 데 라 살(Petralta de la Sal) 근처의 칼라산사(Calasanza) 성에서 태어났다. 그는 에스타디야(Estadilla)에서 문법과 수사학을 공부하였으며, 레리다(Lerida) 대학에서 철학과 법학을 공부하여 법학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1571-1577년). 그리고 발렌시아(Valencia) 대학과 알칼라 데 에나레스(Alcala de Henares) 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하였다.
그런데 이 기간 중에 어머니와 형이 사망하자, 아버지는 요셉이 돌아와 결혼하여 가문을 이어가기를 바랐다. 그러나 요셉은 이러한 아버지의 뜻을 물리치고 1583년 12월 17일 우르겔(Urgell)의 주교인 우고 암브로시우스(Hugo Ambrosius)로부터 사제 서품을 받았다. 그 후 성 요셉은 알바라신 교구에서 활동하였다. 교구장 주교는 성 요셉을 자신의 고문 신학자이자 주교대리로 임명하여 피레네 산맥의 외딴 지역들에 대한 성직자들의 개혁과 신앙 재건을 위하여 파견되었다. 요셉은 모든 임무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1592년 로마(Roma)로 가서 콜론나(Colonna) 추기경을 만났는데, 그 추기경 역시 성 요셉을 자신의 고문 신학자 겸 조카의 스승으로 삼았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서, 그는 로마에서 교육과 자선 활동을 위한 공동체 설립을 시도하게 되었다. 그는 로마에서 일반 국민들의 무지와 윤리적 타락, 특히 부모가 죽은 뒤 버림받은 고아들을 보살피고 교육하는 일이 급선무임을 깨닫고 티베르 강을 끼고 있는 빈민가에서 유럽 최초의 무료 공립학교를 개설하였다. 그는 1597년에 두 사제의 도움으로 이 학교를 연 다음 ‘그리스도교 교리 형제회’의 책임자가 되었다.
마침내 1617년 교황 바오로 5세(Paulus V)는 성 요셉이 설립한 학교를 공식 수도회로 승인해 주었고, 많은 이들의 지원과 협력으로 이와 유사한 많은 학교들이 설립되어 학생수가 천여 명에 이르게 되었다. 1621년 11월 18일에 그의 공동체는 교황청으로부터 정식 인준을 받은 수도회가 되었으며, 성 요셉은 이 수도회의 종신 총장이 되었다.
초창기의 사제들은 주로 초등학교에서 가르쳤다. 성 요셉은 초급과 중급 학교의 체계화에 기여하였다. 그는 교과과정을 면밀히 구성하였고 어린이들이 선(善)을 사랑하도록 교육 원칙을 세웠다. “어린이들이 처음부터 신앙과 문학 교육을 받음으로써 자신의 삶이 행복함을 알게 된다.”고 그는 기록하였다.
이들 학교는 에스파냐, 보헤미아(Bohemia), 폴란드, 이탈리아 등 수많은 나라에 세워졌다. 그러나 설립자의 만년은 야심을 가진 후계자들의 심각한 분쟁으로 점철되었다. 그는 또 다른 욥처럼 용기를 발휘하였지만 그의 수도회에 대한 신뢰는 그가 죽은 후에야 되살아났다. 그는 로마에서 1648년 8월 25일에 운명하였고, 1748년 8월 7일 시복되었으며 1767년 7월 16일 교황 클레멘스 13세(Clemens XIII)에 의해 시성되었다. 교황 비오 12세(Pius XII)는 그를 ‘모든 그리스도교 학교의 천상 수호자’로 선포하였다.
성 제네시오 (Genesius)
활동년도 : +3세기경
신분 : 희극배우, 순교자
지역 :
같은 이름 : 게네시오, 게네시우스, 제네시우스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궁중 무대에서 그리스도교의 성사를 풍자한 연극을 공연하였는데, 배우 성 게네시우스(또는 제네시오)는 세례를 받으려고 준비하는 예비자로 출연하였다. 이 예식이 공연되던 중에 그는 갑자기 그리스도교로 개종하겠다는 생각이 불같이 타올라 세례를 받았다. 그가 이 사실을 황제에게 선언하자 황제는 그를 재판장 플라우티아누스에게 넘겼다. 재판관이 이교신에게 희생 제사를 바치라는 요구를 하자 그는 믿음을 지키며 끝까지 거절하고 참수형을 받아 순교하였다. 게네시우스는 배우의 수호성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