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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2025년 1월 8일 (백) 주님 공현 대축일 후 목요일

작성자정요세비|작성시간26.01.08|조회수37 목록 댓글 0

2025년 1월 8일 목요일

[(백) 주님 공현 대축일 후 목요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말씀의 초대

하느님의 자녀가 된 우리는 이웃 사랑의 계명을 지켜야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이사야 예언자의 말씀이 바로 이 자리에서 이루어졌다고 선포하신다(복음). 

 

제1독서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 형제도 사랑해야 합니다.>
▥ 요한 1서의 말씀입니다. 4,19―5,4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하느님을 19 사랑하는 것은
그분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20 누가 “나는 하느님을 사랑한다.” 하면서
자기 형제를 미워하면, 그는 거짓말쟁이입니다.
눈에 보이는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21 우리가 그분에게서 받은 계명은 이것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 형제도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5,1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사람은 모두 하느님에게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를 사랑하는 사람은 모두 그 자녀도 사랑합니다.
2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계명을 실천하면,
그로써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들을 사랑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3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은 바로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의 계명은 힘겹지 않습니다.
4 하느님에게서 태어난 사람은 모두 세상을 이기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이긴 그 승리는 바로 우리 믿음의 승리입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 음

<오늘 이 성경 말씀이 이루어졌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4,14-22ㄱ
그때에 14 예수님께서 성령의 힘을 지니고 갈릴래아로 돌아가시니,
그분의 소문이 그 주변 모든 지방에 퍼졌다.
15 예수님께서는 그곳의 여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모든 사람에게 칭송을 받으셨다.
16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자라신 나자렛으로 가시어,
안식일에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셨다.
그리고 성경을 봉독하려고 일어서시자,
17 이사야 예언자의 두루마리가 그분께 건네졌다.
그분께서는 두루마리를 펴시고 이러한 말씀이 기록된 부분을 찾으셨다.
18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19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20 예수님께서 두루마리를 말아 시중드는 이에게 돌려주시고 자리에 앉으시니,
회당에 있던 모든 사람의 눈이 예수님을 주시하였다.
21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기 시작하셨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
22 그러자 모두 그분을 좋게 말하며,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은총의 말씀에 놀라워하였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의 묵상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것은 기쁜 소식, 곧 복음을 선포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이 복음은 먼 미래에 이루어질 무엇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우리 삶 안에서 실현되는 은총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루카 4,21)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들은 사람들도 “그분을 좋게 말하며,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은총의 말씀에 놀라워합니다”(4,22).
그런데 마치 복음 선포처럼 보이지만 조심해야 하는 때도 있습니다. 거짓 예언자의 선동이 한 예입니다. 주님의 복음 선포는 우리의 삶을 바꾸고 회심에 이르게 합니다. 또한 복음은, 말씀을 듣고 묵상하며 그것을 실천할 때 비로소 살아 있는 말씀이 됩니다. 그러나 거짓 선동은 이해관계에 놓인 경우가 많고, 모든 사람을 위한 주장인 듯 보이지만 대부분 소수의 이익을 위한 주장인 경우가 많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이름을 빌려 과장된 목적을 주장하거나, 그것이 마치 주님의 뜻인 것처럼 복음을 이용합니다.
우리는 참된 복음의 선포자가 되어야 합니다. 복음을 실천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찔러 혼과 영을 가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냅니다.”(히브 4,12)라는 말씀처럼, 주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힘과 위로를 얻고 그 말씀 안에서 사랑을 전하는 참된 선포자로 살아갑시다.(이철구 요셉 신부)

 

주님께서 바로 나를 위해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나자렛 회당에서 행해진 예수님의 설교 말씀은 말씀 선포자로 사는 제게 참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만듭니다. 그분의 가르침은 군더더기가 하나 없습니다. 주저리 주저리 사설을 길게 늘어놓지 않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갑니다.

그 순간, 그 자리에서 꼭 필요한 말씀, 지극히 절제되고 요약된 말씀, 시의적절한 말씀만 골라서 하시는데, 청중들을 감동의 도가니로 몰아넣고, 그 자리에서 회개를 불러일으킵니다.

예수님께서 강단에 서시자 이사야 예언서 두루마리가 그분 손에 전해졌습니다. 수많은 말씀들 가운데, 한 부분을 꼭 집어 낭독하시는데, 그 짧은 내용 안에 공생활기간 동안 메시아로서 당신께서 수행하셔야 할 사명이 정확하게 포함되어 있습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한 구절, 한 마디가 모두 은혜롭습니다. 기쁜 소식을 전하고, 해방을 선포하며, 다시 보게 하고, 속박에서 풀어 주고...

성경 봉독이 끝난 후 더 놀라운 모습을 우리는 목격하게 됩니다. 저 같은 경우, 성경 본문을 읽고 나서 주저리주저리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장황하게 늘어놓으며 10분, 20분 설명을 계속 할 텐데, 예수님께서는 절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딱 한 마디만 덧붙이시고 자리에 앉으셨습니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에서 이루어졌다.”(루카 4,21)

예수님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씀 한마디 한마디는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와는 본질적으로 차별화됩니다. 하느님 아버지의 생각과 의중이 담긴 말씀이므로 권위가 있습니다. 그분의 말씀은 언젠가가 아니라 바로 그 자리에서 이루어집니다. 그분의 말씀은 생명력으로 충만하므로, 듣는 그 자리에서 우리를 구원과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합니다.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께서 다른 어떤 사람이 아니라 바로 나를 위해서 오셨다는 사실, 너무나 감지덕지한 일입니다. 그분은 늘 가짜 뉴스, 안 좋은 소식에 익숙해 있는 우리를 위해 기쁜 소식을 한 아름 품에 안고 오셨습니다. 그 소식은 구원의 기쁜 소식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이런저런 속박에, 죄의 사슬에 얽매어 살아가는 우리를 해방시키려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세상의 좋은 것들, 이기심, 교만함으로 완전히 멀어 버린 우리 눈을 뜨게 하시려고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스티븐 코비는 ‘성공하는 사람의 일곱 가지 습관’에서 이런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소중한 것을 먼저 하라.” 하느님께서는 공평하게 하루에 24시간을 주셨습니다. 성공하는 사람은 의미 있는 일, 소중한 일을 먼저 합니다. 실패하는 사람은 의미 없는 일, 필요 없는 일을 먼저 합니다. 하루는 큰 차이가 없지만, 일주일, 한 달, 일 년이 지나면 차이가 나기 마련입니다. 소방관에게 소중한 일은 ‘화재’의 현장으로 달려가는 것입니다. 소방관이 불이 났는데도 다른 일을 한다면 소방관으로서 자격이 없는 것입니다. 환경미화원에게 소중한 일은 쓰레기를 치우는 일입니다. 환경미화원이 그 일을 하지 않는다면 역시 환경미화원으로서 자격이 없는 것입니다. 며칠 전입니다. 오후 1시 30분에 ‘운동치료’ 약속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봉성체’ 부탁이 있었습니다. 제게 소중한 일은 건강을 위해서 운동치료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더 소중한 일은 지금 몸이 불편한 분에게 ‘성체’를 모셔드리는 것입니다. 이런 선택이 하루나 일주일이면 표시가 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런 선택이 한 달이나 일 년을 넘게 되면 표시가 나게 됩니다.

주변을 보면 돈이 삶의 기준이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국가의 정책도 예산이 중요합니다. 본당에서도 재정이 중요합니다. 매달 재정평의회가 있습니다. 수입과 지출을 보면서 수입이 지출보다 많으면 기분이 좋다가도 지출이 수입보다 많으면 걱정이 되기도 합니다. 가정에서도 돈은 꼭 필요합니다. 저도 돈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것들 때문에 마음이 상하거나, 원망한 적도 있습니다. 29년 전에 한국에는 IMF가 있었고, 저와 저의 가정에도 파도가 몰아쳤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니 모든 것이 다 해결되었습니다. 위기의 순간들이 있었지만, 가족들은 신앙 안에서 건강하게 잘 지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돈으로 해결할 수 없는 일들도 많이 있습니다. 요양원으로 미사를 가거나, 가정으로 봉성체를 가면 거동이 불편하신 분들이 있습니다. 그분들에게 돈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한 달에 한 번 주님을 모시는 것이 더욱 중요합니다. 100세 되신 어르신이 주님을 모시는데 마치 어린아이 같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하느님 나라와 영원한 생명은 결코 돈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얼마나 사랑했는지, 얼마나 나누었는지, 얼마나 희생했는지, 얼마나 기도했는지가 중요합니다. 

한국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한국교회의 위기가 있다면 돈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들은 아닐 것입니다. 가정에서 기도하지 않기 때문에, 가족들이 대화하지 않기 때문에, 성사의 열정이 식어가기 때문에, 복음의 기쁨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돈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에 관한 관심이 부족한 것이 사실입니다. 멀리 떨어진 가족들에게 안부 전화하는 것, 어려운 이웃의 짐을 들어 주는 것, 처음 사제서품을 받은 그 열정을 되살리는 것입니다. 파도가 밀려오는 바다를 볼 때가 있습니다. 그 속에서 사는 물고기들은 파도가 밀려온다고, 사나운 파도가 친다고 두려워하거나, 겁내지 않습니다. 파도에 몸을 맡기고, 어쩌면 그 파도를 즐기는 것처럼 보입니다. 2026년 우리의 삶에도 많은 파도가 밀려올 것입니다. 누군가의 죽음을 보게 되고, 때로 건강에 이상이 생기기도 하고, 사랑하는 이웃과 헤어지기도 하고, 사업이 어려움을 겪기도 할 것입니다. 열심히 성당에 다니던 남편이 별 이유 없이 성당에 나가지 않을 때도 있고, 성당에는 가지 않으면서 결혼은 성당에서 하고 싶다는 아들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원하지 않는다고 해도, 삶의 파도는 끊임없이 우리를 흔들어 놓을 것입니다. 물속에서 파도를 즐기는 물고기처럼 이왕 피할 수 없다면, 우리들 또한 삶의 파도를 받아들이고, 그 파도 속에 녹아있는 하느님의 뜻을 찾을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오늘 제1독서는 새해를 시작하는 우리에게 아주 좋은 이야기를 전해 주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하느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누가 ‘나는 하느님을 사랑한다.’ 하면서 자기 형제를 미워하면, 그는 거짓말쟁이입니다. 눈에 보이는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그분에게서 받은 계명은 이것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 형제도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형제의 범위를 넓히고 있습니다. 이제 단순히 혈연으로 맺어진 관계만이 형제가 아님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가난한 이, 묶인 이, 감옥에 갇힌 이, 억울한 이, 절망하고 있는 이’들이 바로 형제요 자매라고 말합니다. 오늘 나의 말과 행동이 이웃에게 따뜻한 위로와 기쁨이 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것이 신앙의 시작입니다.

 

 

 

<늘 오늘>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루카 4,21ㄴ)


임께서 늘 오늘이시니
나도 따라 늘 오늘입니다


임의 믿음 늘 오늘이니
나의 믿음 늘 오늘입니다


임의 희망 늘 오늘이니
나의 희망 늘 오늘입니다


임의 사랑 늘 오늘이니
나의 사랑 늘 오늘입니다


임의 기쁨 늘 오늘이니
나의 기쁨 늘 오늘입니다


임의 해방 늘 오늘이니
나의 해방 늘 오늘입니다


임의 자유 늘 오늘이니
나의 자유 늘 오늘입니다


임의 평화 늘 오늘이니
나의 평화 늘 오늘입니다


임의 살림 늘 오늘이니
나의 살림 늘 오늘입니다


임께서 늘 오늘이시니
나도 따라 늘 오늘입니다

 

 

 

오늘의 성인

 

성 아보 (Abo)

활동년도 : +781년

신분  :순교자

지역 : 트빌리시(Tbilisi)

같은 이름 :

성 아보는 모슬렘 아랍인이었는데, 그루지아(Georgia)의 트빌리시에서 그리스도 교회의 진리를 확신하였으나 자신의 신앙 고백을 두렵게 생각하였다. 왜냐하면 그는 그루지아 왕자의 향료 제작자였는데 이 나라는 모슬렘 법의 지배를 받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의 주인이 카스피 해 북쪽의 카자리아(Khazaria)로 피난가게 되자 성 아보 역시 그를 수행하여 그곳에서 세례를 받았다. 782년에 그는 트빌리시로 귀향하였고, 그 얼마 후 아보는 모슬렘 왕에게 인도되어 배교자로 낙인찍혀 순교하였다. 성 아보의 축일은 오늘날도 그루지야 공화국의 그리스도인들이 엄격하게 지키고 있다.

 

성 베드로 토마스(Peter Thomas)

활동년도 : 1305-1366년

신분 : 주교

지역 :

같은 이름 : 베드루스, 페드로, 페트루스, 피터

성 베드로 토마스(Petrus Thomas)는 프랑스 남서부 가스코뉴(Gascogne)의 브레이유(Breil)라는 조그마한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곳에는 성당도 없었지만, 다행히 카르멜회와 연관을 맺게 되고 그의 능력을 인정받아 콩돔(Condom)에서 수련을 시작하였다. 1342년 그는 카르멜회의 총경리가 되었다. 이 직책 때문에 그는 아비뇽(Avignon)으로 갔는데, 당시 그곳에는 교황이 머무는 곳이라 즉시 그의 성덕이 고위성직자들에게 널리 알려졌다.

그는 설교에도 매우 뛰어났으므로 교황 클레멘스 6세(Clemens VI)의 장례식에서 강론하도록 초청받기도 하였다. 또한 그는 제노바(Genova), 밀라노(Milano), 베네치아(Venezia)의 교황대사로서 힘든 정치적 문제들을 원만히 타결하는 수완을 보였다. 그는 1354년에 파티(Patti)와 리파리(Lipari), 1359년에 코론(Coron), 1363년에 칸디아(Candia)의 대주교 그리고 1364년에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의 명의 총대주교가 되었다.

그는 교황 우르바누스 5세(Urbanus V)를 위해서 세르비아, 헝가리 그리고 콘스탄티노플을 여행하면서 투르크족에 대항할 십자군을 조직하였다. 1365년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Alexandria)를 공격하는 원정대에 참가하여 화살을 맞고 심한 부상을 당한 그는 3개월 뒤인 1366년 1월 6일 주님 공현 대축일에 키프로스(Cyprus) 파마구스타(Famagusta)의 카르멜회 수도원에서 운명하였다. 그래서 그를 순교자로 공경하는 지방도 있다. 그에 대한 공경은 1609년 교황 바오로 5세(Paulus V)에 의해 승인되었고, 1628년 교황 우르바누스 8세에 의해 카르멜회 안에서 1월 8일에 축일을 기념하도록 결정되었다.

성녀 구둘라(Saint Gudula)

신분 : 동정녀

활동지역 : 브뤼셀(Brussel)

활동연도 : +712년

벨기에 브뤼셀을 찾는 사람들은 성녀 구둘라 대성당을 찾고 있지만, 성녀의 전기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그녀는 비트겔(Witger) 백작과 그의 아내인 모뵈주(Maubeuge)의 성녀 아멜베르가(Amelberga, 7월 10일)의 딸로 니벨레스(Nivelles)의 수도원에서 그녀의 사촌인 성녀 제르트루다(Gertrudis, 3월 17일)로부터 종교적인 생활을 배우며 성장하였다.

성녀 제르트루다가 사망한 후 그녀는 부모의 집이 있는 알로스트(Alost) 근교 함(Hamme)으로 돌아와 함께 지내면서 오로지 이웃을 위한 자선활동과 신심생활에만 전념하였다.

그녀의 집과 모르셀(Moorsel) 성당이 약 3km 정도 떨어져 있었지만 그녀는 매일 아침 성당에 가서 기도하였다.

​성녀 구둘라는 사망한 후 고향 마을에 있는 성당 정문 앞에 묻혔다.

그 후 그녀의 유해는 모르셀 성당에 안치되었다가 978년 브뤼셀로 옮겨졌고, 1047년에는 성 미카엘(Michael) 성당에 안치되었다.

그러나 1579년 칼빈주의자들에 의해 그녀의 묘는 파괴되었고 유해 또한 흩어지고 말았다.

그녀의 자매인 성녀 라이넬디스(Reineldis, 7월 16일)는 생트(Saintes)에 살다가 야만족의 침입 때 살해되었다.

 

성 세베리노 (Severinus)

신분 : 선교사 수도원장

활동지역 : 노리쿰(Noricum)

활동연도 : +482년

같은이름 : 세베리누스 쎄베리노 쎄베리누스

노리쿰(도나우 강 남부와 오스트리아 중부 및 바이에른의 일부를 포함한 지역의 로마 시대 명칭)의 사도로 알려진 성 세베리누스(또는 세베리노)의 출생지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한때 동방의 모처에서 수도자였음은 확실하다.

453년 이후 성 세베리누스는 오스트리아의 노리쿰에 정착했는데, 이곳은 이방인들의 본거지였다.

그는 도나우(Donau) 강을 따라 비엔(Vienne)에서부터 파사우(Passau)에 이르기까지 주민들에게 복음을 전하면서 파사우와 파비아네(Favianae)에 최초로 수도원들을 세웠다.

그는 특히 훈족의 족장인 오도아케르(Odoacer)의 존경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사후에 그의 유해는 이탈리아로 옮겨져 나폴리(Napoli)의 산 세베리노(San Severino)에 있는 베네딕토 수도원에 안치되었다.

하느님께서는 가끔 대 환난 시기에 성인을 보내시어 백성들의 영적 지도자를 삼고, 그의 표양과 행위로 인해 많은 이들을 멸망에서 구하시며, 영육간의 고민을 풀어 주시고, 그들의 신앙과 도덕을 보존케 하고 견고케 하려고 하시는 때가 있는데, 성 세베리노도 역시 이와 같이 하느님께 선택된 사람 중의 하나였다.

때는 5세기의 중엽 지금의 오스트리아 지방의 사방에서 야만족의 침입을 받고 대단히 위험한 상태에 있었을 때, 뜻밖에 천사와 같이 나타나 말과 행실로써 사람들에게 고행과 사랑을 권하고 또한 끊임없는 노력으로써, 오스트리아(당시의 노리쿰)를 야만족의 손에서 구해낸 것이 성 세베리노였다.

그러나 이 거룩한 사제가 어디서 탄생했는지, 또 그의 고향이 어디인지 알 수 없는 것은 섭섭한 일이다.

언젠가 그것에 대해 누가 물으면 "하느님의 일꾼에게 고향이나 형통의 이야기가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그러한 것은 차라리 말을 안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렇게 하면 위험한 교만 죄에도 떨어질 염려가 없을 것입니다.

잘난 체하거낭 교만하지 않는 사람이야말로 착한 일을 할 수 있는 자격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사람들은 하느님의 도우심으로써 어떠한 선행도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나는 다만 천국 사람중의 하나가 되력 하는 것 외에는 하등 바라는 것이 없습니다.

이 세상의 고향같은 것은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하고 대답했다 한다.

다소 판명된 것은 그가 잠시 동양에 이주(移住)하고 있었다는 것뿐이다.

세베리노는 엄격하고도 거룩한 생활로 모든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

그는 엄동설한에도 언제든지 맨발이었다.

음식은 하루종일 조금도 취하지 않을 때도 가끔 이었다. 그의 복장은 누추했고, 그의 조그마한 오막살이는 갈대와 진흙으로 만든 것뿐이었다.

그러나 그는 대부분 집에 있지 않고 사방으로 돌아다니면서 사람들에게 기도와 보속과 자선을 가르치며 권면했다.

그리고 자신을 위해서는 무엇하나 구하지 않았으나,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서는 자선을 청하는 것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하느님을 생각하지 않고 사치생활을 하며, 죄악의 생활에 빠져 있는 부자들 진심으로 회개하여 보속을 하라고 권했다.

어떤 때 그의 말을 듣지 않는 사람이 있으면 그에게는 하느님의 정의(正義)와 죄에 대한 무서움에 대해서 말해 주었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는 언제든지 그의 충고를 받아들이도록 했다.

사제 세베리노에 대한 존경은 점차 높아져 이제는 그의 훈계에 반항하는 이가 없게 되었다.

그는 곳곳에 그리스도교의 축복을 받게 하고 육신상의 자선 사업을 행했다.

어느 곳에 가든 병자를 낫게 하고, 가난한 이를 도와 주었다.

그는 누구에게든지 위로를 주는 사랑이 갚은 아버지였다.

그가 얼마나 사람들에게 공경을 받고 있었던가는 항상 여러 집에서 그를 모시려고 경쟁을 한 사실을 보더라도 알 수 있다.

그 이유는 그가 멈루고 있는 집은 내외의 원수들이 침입을 못하고 항상 평화가 깃들었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은 그의 강복을 받고, 또한 그의 기도로 병을 낫게 해 주기를 원하며, 먼데서 찾아오는 이도 많았다.

어느 날 12년간이나 고통으로 신음하며 전혀 수족을 쓰지 못하는 청년이 마차에 실려 어머니에게 부축 받으며 성인에게 왔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하고 성인이 물으니까, 어머니는 제발 아들의 병을 낫게 해주기를 열심히 부탁하는 것이었다.

그러자 경건한 세베리노는 이에 대답하기를 "그것은 나로서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것을 할 수 있는 이는 다만 하느님뿐입니다.

그러나 한가지 좋은 것을 가츠려 드리리다. 당신은 용기를 내어 가난한 사람들을 도우십시오.

그리하면 하느님께서 반드시 당신을 불쌍히 여겨 주실 것입니다…"했다.

그 어머니는 마침 자선을 베풀 물건을 하나도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자기의 저고리를 벗어서 그것을 성인에게 드렸다.

세베리노는 그의 갸륵한 심정을 보고서, "그 옷은 입으십시오. 그 대신에 집에 돌아가거든 반드시 자선을 하십시오"라고 말한 다음 기도를 바치니

그 즉시 아들의 병은 완치되었다고 한다. 이것은 아주 작은 한 가지 예에 불과하나, 그의 기도에 대한 힘의 위대함을 표시하는 이야기는 얼마든지 있다.

그는 482년 1월 8일에 세상을 떠났다. 이 소식을 들은 국민은 누구하나 이 성인의 죽음을 슬퍼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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