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성경강해 2

출애굽기 2장 하나님의 언약과 인간의 믿음

작성자유도순|작성시간17.12.01|조회수5,090 목록 댓글 0

2장 하나님의 언약과 인간의 믿음

 

 

출 2:24-25

하나님이 그 고통 소리를 들으시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운 언약을 기억하사 이스라엘 자손을 권념하셨더라.

 

 

 

 

 

 

2장의 내용은 모세의 이야기가 주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의 태어남과, 버림받음과, 건져냄을 받음과, 바로의 딸의 아들이 됨과, 장성한 후에 자기 백성을 돌아보다가 망명길에 오르게 되는 내용입니다. 그렇다고 초점을 모세에게 맞춰서는 아니 됩니다. 왜냐하면 본 장의 핵심은 “하나님이 그 고통 소리를 들으시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운 언약을 기억하사 이스라엘 자손을 권념하셨더라”(24-25)한 “그 언약”에 있기 때문입니다.

2장을 관찰해보면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짐을 보게 됩니다. 1-22절은 “사람들”이 한 일입니다. 이 부분에는 “하나님”이라는 말이 없습니다. 그런데 23-24절에서 비로소 “하나님”이 등장합니다.


① 하나님이 그 고통 소리를 “들으시고”,

② 언약을 “기억하시고”,

③ 이스라엘 자손을 “권념하셨더라” 합니다.

하나님은 “그 언약을 기억하셨다”고 말씀하고 있는데 문제는 “이스라엘 자손들이 고역으로 인하여 탄식하며 부르짖을”(23) 때 그 언약을 기억하고 있었느냐에 있습니다. 이것이 2장을 해석하는 키워드입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세워주신 언약을 기억하고 있었다고 보아야만 합니다.


이에 대한 증거가 “모세가 요셉의 해골을 취하였으니 이는 요셉이 이스라엘 자손으로 단단히 맹세케 하여 이르기를 하나님이 필연 너희를 권고하시리니 너희는 나의 해골을 여기서 가지고 나가라 하였음이었더라”(13:19)는 말씀이 뒷받침 해줍니다. 그렇다면 앞 부분에서 사람들이 행한 일 즉 왕의 영을 어기고 모세를 석 달을 숨긴 일, 갈 상자를 만들어 모세를 거기 담아 하숫가 갈대 사이에 둔 일, 바로의 공주에 의하여 구출 된 모세를 어머니 요게벳이 유모가 되어 젖을 먹인 일 등은 하나님의 “언약”을 믿는 믿음(히 11:23)에서 나온 행위였다고 보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이는 그들이 애굽에서 종살이를 하면서도 하나님의 언약을 믿고 있었다는 증거가 됩니다.

그러므로 2장의 주제가 “하나님의 언약과 인간의 믿음”이 될 수가 있습니다. 이러한 주제가 성립 될 수 있는 것은 본 강해가 구속사의 관점에서 보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이를 네 단원으로 나누어 상고하겠습니다.

 

첫째 단원(1-10) 믿음으로 모세가 구원받음

둘째 단원(11-15) 믿음으로 자기 백성을 돌아봄

셋째 단원(16-22) 믿음의 훈련기간 40년

넷째 단원(23-25) 언약을 기억하사 권념하심

 

 

첫째 단원(1-10) 믿음으로 모세가 구원받음

 

“그 여자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아 그 준수함을 보고 석 달을 숨겼더니”(2).

“남자가 나거든 그를 하수에 던지라”는 법령 하에서 모세가 태어났는데 모세의 부모는 그를 “석 달을 숨겼다”고 말씀합니다. 우리 중에 누구도 이 본문을 해설해주고 있는 성경보다 더 낫게 강해할 자는 없습니다. 성경은 이를 해석하기를 “믿음으로 모세가 났을 때에 그 부모가 아름다운 아이임을 보고 석 달 동안 숨겨 임금의 명령을 무서워 아니”(히 11: 23) 했다고 이것이 “믿음”이었음을 말씀합니다.


그렇다면 누구의 무엇을 믿었다는 말입니까? 다름이 아니라 24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운 그 언약”을 믿은 것이 됩니다. “그 언약”이라고 말씀합니다.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400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게 하리니 그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치할지며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창 15:13-14) 하고 언약하신 “그 언약”을 믿었다는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요셉이 임종 머리에서 “나는 죽으나 하나님이 너희를 권고하시고 너희를 이 땅에서 인도하여 내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한 땅에 이르게 하시리라” 하고 유언한 것을 믿은 것입니다. 이 “믿음”이 바로의 명령을 무서워 아니하고 모세를 숨겼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더 숨길 수 없이 되매 그를 위하여 갈 상자를 가져다가 역청과 나무진을 칠하고 아이를 담아 하숫가 갈대 사이에 두고”(3) 합니다. 석 달을 숨긴 것만이 “믿음”이 아니라 갈 상자에 담아 하숫가에 둔 것도 “믿음”으로 하나님께 맡긴 행위였던 것입니다. “그 누이가 어떻게 되는 것을 알려고 멀리 섰더니” 하는 말씀이 이를 뒷받침 해줍니다. 아기 모세가 마침 목욕하러 나왔던 바로의 딸에 의하여 건져냄을 입게 되고, 친 엄마에 의하여 양육 받게 되고, “아이가 자라매 바로의 딸에게로 데려가니 그의 아들이 되니라”(10) 한 것을 어찌 우연한 일이라고 말 할 수가 있겠습니까?


요셉이 고백한 것같이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창 50:20), 이것이 하나님께서 이루어 오신 구속의 역사인 것입니다. 바로의 딸은 말합니다. “이 아이를 데려다가 나를 위하여 젖을 먹이라”(9). 이는 의미심장한 말입니다.

① 과연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로를 위한” 국고성을 건축하기 위하여 종이 되고(1:11),

② 모세는 바로의 딸의 아들이 되기 위하여 태어났으며,

③ 믿음의 어머니 요게벳은 바로의 딸을 위하여 젖을 먹일 것인가?

 

 

둘째 단원(11-15) 믿음으로 자기 백성을 돌아봄

 

“모세가 장성한 후에 한번은 자기 형제들에게 나가서 그 고역함을 보더니 어떤 애굽 사람이 어떤 히브리 사람 곧 자기 형제를 치는 것을 본지라”(11).

모세가 장성한 후에 있었던 사건입니다. “한번은 자기 형제들에게 나가서 그 고역(苦役)함을 보더니” 합니다. 스데반 집사는 이를 해설해주기를 “나이 40이 되매 그 형제 이스라엘 자손을 돌아볼 생각이 나더니”(행 7:23) 합니다. 이 장면을 영상으로 그려보기를 바랍니다. 어떤 애굽 사람이 어떤 히브리 사람을 치는 것을 모세가 보게 되었습니다. 지금 모세는 40세가 된 장년입니다. 그 동안 “모세가 애굽 사람의 학술을 다 배워 그 말과 행사가 능하더라”(행 7:22) 합니다. 자, 과연 모세는 애굽 사람과 히브리 사람 중 어느 편을 들 것인가? 누구를 자기의 형제로 여길 것인가?


성경은 애굽 사람에게 매를 맞고 있는 “어떤 히브리 사람 곧 자기 형제”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히브리 사람을 곧 자기 형제라고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어머니 요게벳이 아기 모세에게 젖을 먹인 기간이 얼마나 되었을 것인가? 다섯 살을 넘지 않았을 것이라는데 학자들은 동의하고 있습니다. 모세의 유아시절, 그것도 짧은 기간을 어머니 요게벳은 바로의 딸을 위해서가 아니라 이스라엘을 위하여, 곧 하나님을 위하여 믿음으로 젖을 먹였던 것입니다. 그 후 35년 간을 애굽의 학술과 문물을 교육받은 모세입니다. 그러나 모세의 정신과 사상을 빼앗거나 바꿔놓지를 못했던 것입니다.

 

정체성

 

열 두 살 때 주님은 모친 마리아에게 이렇게 말씀합니다.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눅 2:49). 소년 예수는 벌써 이때에 자기가 누구이며, 왜 오셨는가 하는 자기의 정체성(正體性)을 알고 있었음을 나타냅니다. 이 말씀 앞에서 오늘의 우리와 자식들을 생각하게 합니다. 그리스도인 부모들은 자기 자녀들을 자신의 정체성이 무엇인지 분명히 깨닫도록 양육하고 있는가? 현대교회는 청소년들을 투철한 신앙정신과 사상으로 무장을 시키고 있는가? 사사시대를 가리켜 “그 후에 일어난 다른 세대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일도 알지 못하였더라”(삿 2:10)고 말씀하고 있는데 지금이 그런 것은 아닌가 하는 우려를 하게 됩니다.


“좌우로 살펴 사람이 없음을 보고 그 애굽 사람을 쳐죽여 모래에 감추니라”(12) 합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때를 기다림이 없이 인간적인 방법으로 해결하려한 것을 문제 삼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모세의 행위를 무시하듯 하는 것도 옳게 보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사람이 있다면 “당신이라면 그렇게 행동할 수 있었겠느냐?”고 묻고 싶습니다. 성경은 어느 곳에서도 모세가 “좌우를 살핀 것”을 문제삼고 있지 아니합니다. 그러하기는커녕 “한 사람의 원통한 일 당함을 보고 보호하여 압제받는 자를 위하여 원수를 갚아 애굽 사람을 쳐죽이니라”(행 7:24) 합니다. 믿음 장에서는 모세의 행동을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다”(히 11:24-26)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은 능욕

 

모세는 종살이를 하고 있는 히브리 사람이 애굽 사람에게 맞는 장면을 목격하고는 속으로 분히 여기면서도 모른 척하고 지나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우리들처럼 그렇게 비굴하지 않았습니다. 이 광경을 보자 참을 수 없는 의분이 발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초라하고 불쌍한 히브리 사람을 자기 형제로 인정했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애굽 사람을 쳐죽였던 것입니다. 이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닙니다. 이렇게 하는 그 순간 모세는 모든 것을 포기했던 것입니다.

①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는 편을 택했다고 말씀합니다.


②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택했다고 말씀합니다.

③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하나님 믿는 것을 더 큰 재물로 여겼다고 말씀합니다.

④ 그렇다면 모세가 믿은 믿음은 누구의 무엇을 믿은 것인가? 성경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히 11:26상)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경탄(驚歎)할 일이 아닙니까! 모세가 받는 능욕이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이었다니! 이런 논리가 성립이 되는 것은 모세는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는 구속사역에 몸을 던진 것이며, 구속 주는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에 이런 논리가 성립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약의 모든 전사들은 그리스도의 군사들이었다고 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기생 라합이 정탐꾼을 접대함으로 의롭다 함을 받았다는 말씀(약 2:25)도 이 원리에 근거를 둔 것입니다.


모세의 희생적인 행동을 통해서 희생제물이 되어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게 됩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6-8). 주님께서 왜 이렇게 행동을 하셨습니까? “일생에 매어 종노릇하는 우리들을 형제”(히 2:15, 11)로 여겨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히브리 사람은 이러한 모세를 향하여 “누가 너로 우리의 주재와 법관을 삼았느냐”(14상)고 배척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주님도 자기 백성에 의하여 배척을 당하셨습니다. 그리하여 모세는 미디안 지방으로 망명의 길을 떠나가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복음도 이방인에게로 옮겨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셋째 단원(16-22) 믿음의 훈련기간 40년

 

“모세가 그와 동거하기를 기뻐하매 그가 그 딸 십보라를 모세에게 주었더니”(21).

미디안 땅이란 미디안 족속들이 살던 땅을 의미하는데 3:1과 결부시켜 생각할 때 시내 반도의 남쪽, 즉 호렙산 부근으로 여겨집니다. 그곳에서 모세는 40년 간 훈련을 받았던 것입니다.


둘째 단원에서 살펴본 대로 모세가 “나이 사십이 되매 그 형제 이스라엘 자손을 돌아볼 생각이 나더니”(행 7:23) 라는 묘사는 어떤 분기점에 이르게 되었음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즉 애굽에서의 40년 간 연수를 마치고 다음 과정을 밟기 위해서 애굽을 떠날 “때”가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모세는 언제까지 애굽에 머물러 있어야할 사람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다음 훈련장소로 보내셨는데 그곳이 시내광야였던 것입니다. 하나님께는 모세가 애굽 사람을 쳐죽인 일을 선용하셔서 애굽을 떠나게 하셨던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요셉이 형들의 미움을 받아 애굽으로 팔려간 것과도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한 사람을 앞서 보내셨음이여 요셉이 종으로 팔렸도다”(시 105:17) 하고 하나님의 섭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임을 말씀합니다. 성경은 또다시 “40년이 차매”(행 7:30) 하고 모세가 시내 광야에서의 훈련기간이 찼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모세는 언제까지 광야에 머물러 있어야 할 사람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히 11:25) 고난받기 위하여 모든 것을 포기한 모세를 자기 동족들이 배척하자 그가 미디안으로 가 이방 여인 십보라를 아내로 맞이하게 되는 것은 주님께서 배척을 당하자 이방인 우리들을 신부로 맞이하신 것에 대한 예표로 볼 수도 있습니다.

 

 

넷째 단원(23-25) 언약을 기억하사 권념하심

 

“하나님이 그 고통 소리를 들으시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운 언약을 기억하사 이스라엘 자손을 권념하셨더라”(24-25).

여기 성경을 통틀어 핵심이 되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것은 “언약”이라는 말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의 선민 됨의 표시(標示)가 무엇입니까? “저희는 이스라엘 사람이라 저희에게는 양자 됨과 영광과 언약들과 율법을 세우신 것과 예배와 약속들”(롬 9:4)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방인의 비참함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外人)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엡 2:12)였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하나님께서 세워주신 “언약”이 있느냐 없느냐에 달려있는 것입니다. 언약이 없으면 “소망도 없고 하나님도 없는” 것입니다. 언약이 없으면 믿음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믿음이란 언약을 믿는 믿음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언약이 없으면 “하나님”이 없다는 말이 성립이 되는 것입니다. 언약이 없으면 모든 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민족이 비록 애굽에서 종노릇을 하고 있고 고역으로 인하여 부르짖고 있는 처지라 하여도 그들은 “언약”을 간직하고 있는 “언약의 자손”(행 3:25)이었던 것입니다. 여기에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 고통 소리를 들으시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운 그 언약을 기억하사 이스라엘 자손을 권념하셨더라”(24-25) 합니다. 그들이 부르짖었기 때문에 구원하여 주신 양 말해서는 아니 됩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한다면 중심이 하나님의 “언약”이 아니라 인간의 “기도”로 옮겨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부르짖기 이전에 선수적인 하나님의 “언약”(言約)이 있었음을 강조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주권을 세워드리는 일입니다. 그들은 언약을 믿고, 붙들고 부르짖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권념하셨더라”고 말씀합니다. 요셉은 임종머리에서 “하나님이 너희를 권고하시고”, “하나님이 정녕 너희를 권고하시리니”(창 50:24-25) 하고 “권념”하여주실 것을 믿고 고백하면서 죽었습니다. 그로부터 수 백년이 지난 후 때가 차매 하나님이 “이스라엘 자손을 권념하셨더라”(출 2:25)고 말씀합니다. 참으로 신실(信實)하신 하나님을 찬양하십시다. 형제여, 새 언약의 백성들도 더욱 “권고”(眷顧)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이니라”(벧전 5:7).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