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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 2

출애굽기 3장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하나님

작성자유도순|작성시간17.12.09|조회수2,133 목록 댓글 0

출3장,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출 3:6

또 이르시되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 모세가 하나님 뵈옵기를 두려워하여 얼굴을 가리우매.

 

 

 3장은 2장 마지막 부분에서 “하나님이 그 고통 소리를 들으시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운 그 언약을 기억하사 이스라엘 자손을 권념하셨더라”(2:24-25) 한 것을 시행(施行)에 옮기시기 위하여 모세를 부르셔서 사명을 주시는 내용입니다. 이 장면에서 주목해야할 말씀이 있는데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는 말씀입니다. 이점은 이미 2장 마지막 절에서 대한 바가 있습니다만 3장에서는 세 번(6, 15, 16)이나 반복적으로 강조되어 있습니다.


모세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은 누구의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시는가?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6)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백성들에게 가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 이는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여호와라 하라”(15) 하십니다. 또 장로들을 모으고 그들에게 “여호와 너희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 내게 나타나 이르시기를” 너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가나안 땅으로 올라오게 하리라 하셨다 하라(16-17)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본 장의 주제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라 말할 수가 있습니다. 이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언약하신 “언약의 하나님”이심을 나타내는 말씀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언약을 지켜주시려는 것입니다. 세 단원으로 나누어 상고합니다.

 

첫째 단원(1-6) 모세를 부르시는 하나님

둘째 단원(7-12) 너를 바로에게 보내리라

셋째 단원(13-22) 너희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라 하라

 

 

첫째 단원(1-6) 모세를 부르시는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가 보려고 돌이켜 오는 것을 보신지라 하나님이 떨기나무 가운데서 그를 불러 가라사대 모세야, 모세야 하시매 그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4).

3장은 “모세가 그 장인 미디안 제사장 이드로의 양 무리를 치더니 그 무리를 광야 서편으로 인도하여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매”(1) 하고 시작이 됩니다. 2:23에서 “여러 해 후에”라고 말씀했는데 몇 년의 세월이 지난 것일까요? 성경은 이를 설명하기를 “사십 년이 차매”(행 7:30) 라고 말씀합니다. 모세는 애굽에서 도피한 후에 40년 동안 호렙산 기슭에서 양 무리를 돌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는 무의미한 세월의 낭비가 아니었습니다. 애굽의 문물을 익힌 모세는 이제 영적인 훈련을 받고 있었던 것입니다. 성경 상으로 볼 때에 “양 무리를 치더니” 라는 말은 의미 있는 말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애굽 사람들은 다 목축을 가증히 여긴다(46:34)고 했는데 애굽에서 40년 간 고등교육을 받은 모세가 “목축”을 하고 있다는 것은 그의 사명이 목자의 사명으로 바뀌었음을 상징적으로 나타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십 년이 차매, 그렇습니다. “때가 찬 경륜”(엡 1:9) 가운데 역사하시는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나타나시되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2) 나타내신 것입니다. 떨기나무에 어떤 의미를 부여함이 없이 시내 광야에 흔히 있는 나무로 보아 넘길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상징성이 있다고 봄이 마땅합니다.

 

떨기 나무

 

이스라엘 족속은 실로 “떨기나무”같이 무가치한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이 떨기나무마저도 온전한 것이 아니라 “떨기나무에 불이 붙음” 같이 불같은 시련과 환난 가운데 있었던 것입니다. 훗날 모세는 “너희를 쇠풀무 곧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사”(신 4:20) 라고 떨기나무 같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같은 시련을 당했음을 회고하고 있습니다. 모세가 이상히 여긴 것은 떨기나무도, 불도 아니었습니다. “내가 돌이켜 가서 이 큰 광경을 보리라 떨기나무가 어찌하여 타지 아니하는고”(3) 한 “타지 않음”을 이상히 여겼다고 성경은 말씀함으로 이에 함축된 의미를 깨닫기를 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타지도 아니하고 사라지지 않을 수가 있었던 것은 즉 이스라엘 자손들이 “학대를 받을수록 더욱 번식하고 창성”(1:12)할 수 있었던 것은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그에게 나타나시니”(2상) 하신 대로 하나님께서 그들 중에 계셨기 때문입니다. 타서 살아지기는커녕 “생육이 중다하고 번식하고 창성하고 심히 강대하여 온 땅에 가득하게 되었더라”(1:7)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그들 가운데 계셨기 때문에 400년의 세월이 지나는 동안에도 애굽에 동화되지도 않고, 쇠퇴하지도 않고, “생육이 번성하고 심히 강대”(1:20)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잠간 그들에게 성소가 되리라

 

인간이란 얼마나 망각하기를 잘하는지요. 창세기 46:3-4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나는 하나님이라 네 아비의 하나님이니 애굽으로 내려가기를 두려워 말라 내가 거기서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내가 너와 함께 애굽으로 내려가겠고> 정녕 너를 인도하여 다시 올라오게 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출애굽을 통하여 보여주기를 원하시는 원대한 계획을 수행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께서 야곱을 애굽으로 내려보내시면서 혼자 보내셨겠습니까? 천만 에요. 그렇게 하셨다면 하나님의 계획은 무산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애굽으로 내려보내는 그들을 방치하신 것이 아니라 “내가 너와 함께 애굽으로 내려가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들은 이를 망각하고 있었을는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약속하신 대로 400년 동안 그들 가운데 계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그들이 학대를 받을수록, 즉 불이 붙었으나 사라지지 아니하고 더욱 번식하고 창성할 수가 있었던 원동력이요, 하나님께서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그에게 나타나신” 까닭이었던 것입니다. 이제 분명합니까?

이 계시는 에스겔 선지자를 통해서도 나타나고 있는데 이를 인식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아는 일에 중요한 요점이 됩니다. “내가 비록 그들을 멀리 이방인 가운데로 쫓고 열방에 흩었으나 그들이 이른 열방에서 내가 잠 간 그들에게 성소가 되리라”(겔 11:16) 하십니다.


이는 남쪽 유다를 징벌하셔서 바벨론으로 내어쫓는 장면입니다. 그러시면서 “그들이 이른 열방에서 잠 간 그들에게 성소가 되리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슨 뜻일까요?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바벨론으로 내려가시겠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포로로 내어주실 때에 그들만 보내신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그들과 함께 바벨론으로 내려가셔서 그들과 함께 거기 거하시겠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그래서 “잠 간 그들에게 성소가 되리라”고 말씀합니다. 임시로 천도(遷都)하는 셈입니다. 복역(服役)이 끝나는 70년 후에 그들과 함께 올라오실 것이기 때문에 잠간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왜 그러하셔야만 했습니까? 이유는 단 한가지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입니다.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가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 던짐을 받았으나 머리털도 그슬리지 않을(단 3:26-27) 수가 있었던 것이나, 다니엘이 사자 굴에 던짐을 받았으나 조금도 상하지 아니(단 6:23) 할 수가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바벨론으로 내려가셔서 그들과 함께 계셨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자기 백성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7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은 이스라엘 족속을 “내 백성”이라고 부르십니다. 떨기나무 같이 보잘것없고 무가치한 그들이 불같은 시련 중에서도 타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워주신 “언약”을 통해서인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6)고 이점을 강조해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신약의 성도들에게는 어떠한 하나님으로 계시하여주실 까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더 이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엡 1:17)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언약의 성취자로 오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믿는 언약의 근거는 더 이상 아브라함의 언약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 부자간에 세우신 “새 언약”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치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행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사 43:1 -2). 어떻게 이것이 가능해지는 것일까요?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이요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떨기나무 가운데서 그를 불러 가라사대 모세야 모세야 하시매 그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이리로 가까이 하지 말라 너의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4-5) 하십니다. 4절과 5절은 우리의 신앙에 균형과 조화를 이루게 합니다. “떨기나무 가운데서” 부르시는 하나님은 삭개오의 집에 유하러 들어가신 주님처럼 사랑과 긍휼과 인자하신 하나님으로 계시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5절은 “이리로 가까이 하지 말라 너의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하십니다. 이는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엄위하심을 나타내주고 있습니다. 이점이 고린도전서 3장 16절과 17절에서도 나타납니다. 16절은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하십니다. 하나님은 떨기나무 가운데 거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17절에서는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고 “하나님의 엄위”(롬 11:22)를 대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모세에게 계시하시는 이 장면은 교회에도 적용이 됩니다. 우리들의 부르심을 돌이켜보면 “미련한 것들과, 약한 것들과,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고전 1:27-28)뿐입니다. 실로 떨기나무 같은 존재들입니다. 그러나 기독교 2000년 사를 돌이켜 보십시오.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사라지지” 않았던 것입니다. 성경은 이를 가리켜 “이 큰 광경을 보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교회야말로 그 영광스러움을 비할 데 없는 “큰 광경”인 것입니다. 교회의 구성원들인 성도 한 사람 한사람도 말입니다. 모세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영광스러움과 “발에서 신을 벗으라” 하신 경외심을 함께 간직하고 있습니까?

 

 

둘째 단원(7-12) 너를 바로에게 보내리라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로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10).

본 단원은 모세에게 사명이 주어지는 내용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정녕히 보고 그들이 그 간역자로 인하여 부르짖음을 듣고 그 우고를 알고”(7) 하십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을 “보고, 듣고, 알고” 계신다고 말씀하십니다. 보고, 듣고, 알고만 계시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내려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겠다”(8상)고 말씀하십니다. 주목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애굽으로 내려가셔서 인도해 내시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이러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여기 중요한 요점이 있습니다. 8절과 10절을 대조해 보십시오. 8절에서 “내가 내려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겠다” 하신 하나님은 10절에서는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로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 하십니다. 이는 구출하는 것은 하나님이 하시되 이 일에 너를 종으로 쓰시겠다는 의미가 됩니다. 이것이 모세에게 주어진 사명입니다.

모세는 즉각적으로 “내가 누구관대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11) 라고 거절합니다. 이것이 모세의 첫 변명입니다. “내가 누구관대”, 그렇습니다. 모세가 누구이기에 이 임무를 감당할 수가 있다는 말입니까? 모세는 “두 히브리 사람이 서로 싸우는 것”(2:13)도 해결해주지 못했던 위인이 아니었던가! 이 일은 모세뿐만이 아니라 그 누구도 감당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여기에 모세의, 그리고 우리 모두의 착각이 있는 것입니다. 모세보고 감당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내려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겠다”는 것입니다. 다만 너는 내가 명하는 일에 믿음으로 순종만 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가라사대 내가 정녕 너와 함께 있으리라”(12상)고 말씀하십니다. “너더러 하라는 것이 아니다. 네가 할 수 없다는 것은 너보다 내가 더 잘 알고 있다. 내가 할 것이다. 너는 내가 시키는 대로 순종하기만 하라”는 그런 뜻이 함의되어 있는 것입니다.

“네가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12하) 하십니다. 이 말씀을 듣는 모세에게는 꿈같은 이야기로 들렸을 것입니다.


지금 양 몇 마리를 돌보고 있는 자신이 양이 아니라 장정만 60만이나 되는 이스라엘 족속을 애굽에서 해방시켜 “이 산에서”(시내산) 하나님께 예배하게 되리라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고 이를 증거로 제시하십니다. 기필코 그렇게 되고야 말리라는 확증인 것입니다.

이럴 경우 “믿음”은 무엇이라 말하고 있는가?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롬 4:18) 라고 말씀합니다. 바랄 수 없는 중에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롬 4:19-21) 라고 말씀합니다. 모세도 이와 같이 화답할 수 있을 것인가?

 

 

셋째 단원(13-22) 너희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라 하라

 

“모세가 하나님께 고하되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서 이르기를 너희 조상의 하나님이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면 그들이 내게 묻기를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리니 내가 무엇이라고 그들에게 말하리이까” (13).

이것이 모세의 두 번째 변명입니다. 본문에는 하나님에 대한 중요한 계시가 있습니다. 신학이란 하나님을 아는 것으로부터 출발합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의 첫 기도제목은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엡 1:17)였습니다. 열심의 정도가 신앙의 본질을 좌우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가 하나님을 어떤 하나님으로 알고 고백하고 있는가가 문제입니다. 그런데 본문은 하나님을 계시하시기를


①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14) 하십니다. 이는 하나님은 피조(被造) 된 존재가 아니라 시작도 끝도 없으신 홀로 영원하신 분임을 의미합니다. 만물은 티끌 하나까지라도 스스로 있지를 못합니다. 그것들은 모두가 다 스스로 있는 자에 의해서 지음 받은 피조물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계시는 문맥과 무관하게 주어진 것이 아님을 유의해야합니다.


②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고 물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어찌하여 모세는 그들이 이렇게 물을 것을 예상했을까요? 이는 그들의 신앙이 유치하여 유일신 신앙에 굳게 서 있지 못함을 나타내는 말인 것입니다. 각 나라와 족속들에게는 각기 섬기는 신들이 있었는데 다른 신들과 구별하기 위하여 이름을 갖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를 들면 모압 족속의 신은 “그모스”이고 암몬 족속의 신은 “몰록”(왕상 11:7)과 같습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조상의 하나님을 그런 신들 중의 하나로 여길 것이라는 말이 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하십니다. 이는 우상들과 같지 아니함을 나타내신 말씀인 것입니다. 우상이란 다 수공물(手工物)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점을 시편 기자는 “천지는 없어지려니와 주는 영존(永存)하시겠고 그것들은 다 옷같이 낡으리니 의복같이 바꾸시면 바뀌려니와 주는 여상(如常)하시고 주의 연대는 무궁(無窮)하리이다”(시 102:26-27)고 찬양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스스로 있는 자”이십니다.


③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6, 15)이라 하십니다. 이는 “언약의 하나님”이심을 나타냅니다. 그들은 이름을 물을 것이 아니라 “언약”으로 만족해야만 옳았습니다. 그렇습니다. 기사와 이적의 하나님, 축복의 하나님을 구할 것이 아니라 언약의 하나님, 그 언약을 성취하여주시는 하나님으로 족한 것입니다.


④ “여호와라 하라 이는 나의 영원한 이름이요 대대로 기억할 나의 표호니라”(15하) 하십니다. “여호와”라는 계시가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여호와>라 하라” 하고 조상들에게 세우신 언약과 결부되어 있음을 주목해야만 합니다. 그러므로 여호와는 언약과 결부된 성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언약 밖에 있는 이방인들은 “하나님”이라고 부를 수는 있으나 “여호와”라고는 부를 자격이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이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13, 14, 15) 하라고 말씀합니다. 모세를 보내심에 얼마나 힘을 실어주는 말씀입니까! 이러한 하나님이 나를 너희에게 보내셔서 너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8, 10, 11, 12, 17) 조상들에게 약속하신 땅으로 “이르려 하노라”(8), “올라가게 하리라”(17)고 말해주라는 것입니다.


생각나는 예화가 있습니다. 어느 교회에 젊은 목사님이 오셔서 설교를 했는데 좀 가볍게 행동했나 봅니다. 예배 후에 한 늙은 성도가 다가와서 물었더랍니다. “당신은 보내서 왔오? 스스로 왔오?” 형제의 소명감(召命感)과 사명감(使命感)은 분명합니까? 누가 형제에게 “당신을 보낸 분은 누구냐”고 묻는다면 무엇이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 나를 보내셨다”고 대답할 것입니까?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라”(마 28:18-19).

이만하면 모세가 소명감과 사명감에 확신을 가질 만 하지 않겠습니까? 이제 하나님은 바로가 쉽게 승복하지 않으리라(19-20)는 것과, 이스라엘 족속이 떠날 때에 빈손으로 보내게 하지 않겠다(21-22)는 말씀을 부언하심으로 모세를 격려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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