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장, 구속하여 내 백성을 삼고
| 출 6:7 |
너희를 구속하여 너희로 내 백성을 삼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니 나는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어 낸 너희 하나님 여호와인줄 너희가 알지라. | |
6장에는 출애굽기, 나아가 성경 전체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계시가 있습니다. 본문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시는 목적(目的)과, 그 방법(方法)과, 근거(根據)가 계시되어 있습니다. 이를 통해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목적과, 방법과, 근거를 깨닫게 되는 중요한 진리인 것입니다.
① 목적(目的)은 “너희로 내 백성을 삼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니”(7상)에 있습니다. 이는 성경 전체의 주제라고 말씀드릴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있고, 하나님이 계셔서 다스리시는 그곳이 “하나님의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세기 3장에서 파괴되었던 하나님의 나라를 회복하시려는 것입니다. 이것이 목적입니다.
② 그 방법은 오직 “구속”(6하)이라는 방법으로 말미암아서만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죄 값으로 팔렸기 때문입니다.
③ 그 근거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워주신 “언약”(4하)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6장의 주제가 “구속하여 내 백성을 삼고” 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이점을 두 단원으로 나누어 상고하겠습니다.
첫째 단원(1-8) 너희 하나님, 나의 백성
둘째 단원(9-30) 모세와 아론을 들어서 역사하심
첫째 단원(1-9) 너희 하나님, 나의 백성
“그러므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기를 나는 여호와라 내가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어 내며 그 고역에서 너희를 건지며 편 팔과 큰 재앙으로 너희를 구속하여 너희로 내 백성을 삼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니”(6-7).
본 단원은 두 부분으로 되어 있습니다.
① 1절은 “어찌하여 나를 보내셨나이까”(5:22하) 하고 불평하는 모세 자신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이제 내가 바로에게 하는 일을 네가 보리라 강한 손을 더하므로 바로가 그들을 보내리라 강한 손을 더하므로 바로가 그들을 그 땅에서 쫓아내리라”(1) 하십니다. 이 말은 바로가 쉽게 보내지 않으리라는 말씀입니다. “너는 바로가 쉽게 보낼 것이라고 생각했느냐?” 아닙니다. 바로는 쉽게 보내지 않을 것이요, 쉽게 보내서도 안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바로는 사탄을 상징하고 있는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사탄이 사로잡고 있는 영혼을 쉽게 내어줄 성싶습니까? 쉽게 보내 줄 것으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전도하다가 쉽게 단념하고 중단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가 쉽게 보내지 않을 것이라는 점은 이미 3장에서 “강한 손으로 치기 전에는 애굽 왕이 너희의 가기를 허락지 아니하다가 내가 내 손을 들어 애굽 중에 여러 가지 이적으로 그 나라를 친 후에야 그가 너희를 보내리라”(19-20)고 말씀한 바입니다. “여러 가지 이적”이란 1-9까지의 이적을 가리키는 것일 겁니다. 그래도 보내는 듯 하다가 안 보내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러다가 결정적으로 장자를 치는 유월절의 밤에야 보낼 것을 하나님은 아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는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벧전 1:18-19)를 계시하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그들이 해방될 수 있는 “구속”의 방도는 오직 “유월절 어린양의 피”에 있었던 것입니다.
② 2-8까지는 “우리를 죽이게 하는도다”(5:21) 하고 원망하는 백성들에게 전하라고 주신 말씀입니다. 우선적으로 강조하시는 것이 “언약”(4, 5, 8)입니다.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기로 맹세(약속)한 땅으로 너희를 인도하고 그 땅을 너희에게 주어 기업을 삼게 하리라 하셨다 하라”(8)고 말씀하십니다. 언약한 바를 지켜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한 번 언약하신 바는 반드시 지켜주시는 하나님이심을 성경을 들어서 증거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전체를 통틀어 언약의 핵심은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인류를 구원하여 주시겠다는 오직 “메시아 언약”으로 집중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언약을 지켜주셨습니다. 이제 하나 남은 약속,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 14:3)는 약속도 지켜주실 것을 확신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의 종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5-7을 주의 깊게 관찰해 보면 이스라엘 자손들의 신분(身分)이 세 가지로 바뀌는 것을 주목하게 됩니다.
① 본래 그들은 “이스라엘 자손”(6상) 즉 야곱의 자손이었습니다.
② 그들을 “이제 애굽 사람이 종”(5상)을 삼았다는 것입니다.
③ 그런데 하나님께서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어 내며 그 고역에서 너희를 구속하여 너희로 내 백성을 삼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니”(6-7상) 하십니다. 그들의 신분이 야곱의 자손-바로의 종-하나님의 백성으로 바뀌는 것을 보게 됩니다. 우리는 야곱의 12 아들의 출생성분이 별 볼일 없는 신분임을 창세기를 통해서 알고 있습니다. 더욱이나 지금은 바로의 노예신분입니다. 그런데 그들을 구속하여 “하나님의 백성”을 삼으시겠다고 말씀합니다. 저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으신다면 하나님은 저들의 하나님이 되심이 분명한 것입니다. “너희 하나님, 나의 백성”을 삼으시려는 여기에 출애굽의 목적이 있고 구속사역을 이루시는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나라건설”입니다. 중요한 대목이므로 몇 곳을 인용하여 이점을 확증하려 합니다.
① 출 29:45-46, 내가 이스라엘 자손 중에 거하여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니 그들은 내가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로서 그들 중에 거하려고 그들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줄을 알리라 나는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니라.
② 레 11:45,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③ 레 22:23, <너희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자니 나는 여호와니라.
④ 레 26:12-13, 나는 너희 중에 행하여 <너희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될 것이니라 나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어 그 종 된 것을 면케 한 <너희 하나님> 여호와라 내가 너희 멍에 빗장목을 깨뜨리고 너희로 바로 서서 걷게 하였느니라.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왜 이렇게 해주시겠다는 것입니까? 이점을 모세는 임종머리에서 이렇게 회상합니다. “너는 여호와 네 하나님의 성민이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지상 만민 중에서 너를 자기 기업의 백성으로 택하셨나니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은 연고가 아니라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 여호와께서 다만 너희를 사랑하심을 인하여, 또는 너희 열조에게 하신 맹세(언약)를 지키려 하심을 인하여 자기의 권능의 손으로 너희를 인도하여 내시되 너희를 그 종 되었던 집에서 애굽 왕 바로의 손에서 속량하셨나니”(신 7:6-8).
너희 아버지, 나의 자녀
그리고 이점은 신약성경에 와서 이렇게 성취가 되는 것입니다.
①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에 열심 하는 친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딛 2:14).
② “너희에게 아버지가 되고 너희는 내게 자녀가 되리라 전능하신 주의 말씀이니라”(고후 6:18). 구약시대는 “너희 하나님, 나의 백성”이라고 말씀하셨으나 신약시대에 와서는 “너희 아버지, 나의 자녀”라고 더욱 친근한 관계로 발전이 된 것입니다.
③ 그리고 신구약을 통하여 이루어오신 하나님의 나라건설은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가로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보좌에 앉으신 이가 가라사대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하시고 또 가라사대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되니 기록하라 하시고 또 내게 말씀하시되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라”(계 21:3-6)에서 완성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백성들에게 전해주라고 모세에게 명하신 말씀입니다. 이를 요약하면 ① “너희를 구속하여”(6하), ② “너희로 내 백성을 삼고”(7상), ③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기로 맹세한 땅으로 너희를 인도하고 그 땅을 너희에게 주어 기업을 삼게 하리라” (8)는 말씀입니다. 이는 율법이 아닙니다. 기쁜 소식입니다. 십자가 복음인 것입니다. 그런데 미련한 인간은 “우리를 죽이게 하는도다”고 원망하는 것입니다.
둘째 단원(9-30) 모세와 아론을 들어서 역사하심
“모세가 이와 같이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하나 그들의 마음의 상함과 역사의 혹독함을 인하여 모세를 듣지 아니하였더라”(9).
모세가 이 기쁜 소식을 전해주었으나 “그들의 마음의 상함과 역사의 혹독함을 인하여 듣지 않았다”고 말씀합니다. 참으로 안타깝고도 답답한 노릇입니다. 이스라엘 자손들만 생각하고 하는 말이 아닙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들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그런 후에 모세와 아론의 족보가 수록되어있음을 보게 됩니다. 이 시점에서 모세의 족보를 기록하고 있는 의도가 무엇일까요? 이는 모세와 아론의 사명이 얼마나 중차대(重且大)한 임무임을 나타내는 증표입니다. 이점이 26절에 나타납니다. “이스라엘 자손을 그 군대대로 애굽 땅에서 인도하라 하신 여호와의 명을 받은 자는 이(족보를 통해 밝힌) 아론과 모세요” 합니다. “내 백성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라”는 “여호와의 명”을 받았다는 것보다 더 중대한 사명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이 모세와 아론은 예표의 인물이요, 신약에 와서 “하나님의 백성을 사탄의 속박으로부터 인도”할 사명이 실체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복음서는 주님의 족보(마 1장)를 수록하는 것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모세의 족보를 통해서 믿음으로 모세를 양육한 아버지 아므람과 어머니 요게벳(20)을 만나게 된다는 것은 기쁜 일입니다. 그러므로 모세의 사명이 영광스럽고도 중차대함을 나타내기 위해서 그의 족보를 수록하였다고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대언자 모세
여기서 주목해야할 점은 우리는 “모세” 하면 열 가지 재앙이나 홍해를 가른 그런 일을 연상하게 됩니다만 모세의 사명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여야할 “대언자”의 사명으로 나타나 있다는 점입니다. “애굽 왕 바로에게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내어 보내라 <말한 자>도 이 모세와 아론이었더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점이 어째서 중요하냐 하면 신구약을 막론하고 하나님의 역사는 대언(代言)한 하나님의 말씀의 성취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말씀과 함께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계 19:10에서는 “예수의 증거는 대언의 영이라”(계 19:10)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모세가 대언을 해야할 대상(對象)은 두 가지 방면인데 첫째는 “백성들”이요, 둘째는 “바로”입니다.
① 먼저 회중에게 말씀을 전해야만 했습니다. “모세가 이와 같이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하나 그들의 마음의 상함과 역사의 혹독함을 인하여 모세를 듣지 아니하였더라”(9) 합니다. 바로만 듣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먼저는 이스라엘 자손들이었습니다. 여기서 설교자가 “낙망하고 피곤”(갈 6:9)함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 복음으로는 안 되겠다 하고 “철학과 세상의 초등학문”(골 2:8)으로 설득하려는 유혹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를 아셨기에 에스겔 선지자에게 “그러나 이스라엘 족속은 이마가 굳고 마음이 강팍하여 네 말을 듣고자 아니 하리니 이는 내 말을 듣고자 아니함이니라 내가 그들의 얼굴을 대하도록 네 얼굴을 굳게 하였고 그들의 이마를 대하도록 네 이마를 굳게 하였으되 네 이마로 화석보다 굳은 금강석같이 하였으니 그들이 비록 패역한 족속이라도 두려워 말며 그 얼굴을 무서워 말라”고 격려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듣든지 아니 듣든지 그들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이 이러하시다 하라”(겔 3:7-11)고 명하셨던 것입니다. 전도자는 구하기를 하나님이여 내 이마를 “화석보다 굳은 금강석같이” 되게 하여주옵소서 해야할 것입니다. 박치기의 왕 김일 선수의 이마처럼 말입니다.
② 다음으로 모세는 바로에게 대언을 해야만 했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들어가서 애굽 왕 바로에게 말하여 이스라엘 자손을 그 땅에서 내어 보내게 하라”(10-11) 하십니다. 모세가 무어라고 대답했을 것 같습니까? “모세가 여호와 앞에 고하여 가로되 이스라엘 자손도 나를 듣지 아니하였거든 바로가 어찌 들으리이까”(12) 합니다.
형제가 불신자들을 향하여 입이 열리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은 아닙니까? 그러면서 “나는 입이 둔한 자니이다”(12하) 하고 말재주가 없다는 타령만 합니다. 마지막 절을 보십시오. “모세가 여호와 앞에서 고하되 나는 입이 둔한 자이오니 바로가 어찌 들으리이까” 합니다. 참으로 답답한 노릇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제 가라 내가 네 입과 함께 있어서 할 말을 가르치리라”(4:12) 하시지 않았습니까? 주님께서도 “어떻게 무엇으로 대답하며 무엇으로 말할 것을 염려치 말라 마땅히 할 말을 성령이 곧 그 때에 너희에게 가르치시리라”(눅 12:11-12)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답답한 것은 모세만이 아닙니다. 확신을 가지십시다. 담대함을 가지십시다. 감당할 자신이 없노라고 그토록 핑계를 대던 모세가 감당하지를 못했습니까?
성경은 말씀합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말씀하사 그들로 <이스라엘 자손>과 애굽 왕 <바로>에게 명을 전하고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시니라”(13). 기어코 인도하여 내셨습니다. 모세는 훌륭하게 사명을 감당했던 것입니다. 형제에게 맡겨진 사명은 영광스러운 사명입니다. 형제의 사명은 중차대한 사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