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제단과 성막뜰의 식양
출 27:8 | |
단은 널판으로 비게 만들되 산에서 네게 보인 대로 그들이 만들지니라. | |
27장의 내용은 번제단과, 성막 뜰의 식양입니다. 25장부터 시작된 성막의 식양들을 말씀하면서 강조하고 있는 것이 “네게 보인 대로”(8) 만들라는 말씀입니다. 25장에서 내가 그들 중에 거할 성소를 지으라고 명하심으로부터 “내가 네게 보인 대로 지을지니라”는 말씀이 25:9, 40, 26:30, 27:8에서 거듭 거듭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는 가나안 땅에 정착하여 “성전”을 건축하게 되었을 때에도 “다윗이 가로되 이 위의 모든 것의 식양을 여호와의 손이 내게 임하여 그려 나로 알게 하셨느니라”(대상 28:19)고 성막이나 성전의 식양이 인간이 고안해 낸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보이신 식양 대로 되었음을 증거 해주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이처럼 “네게 보인 대로” 만들라고 강력히 명하시고 있는가? 이에 대해 히브리서는 “저희가 섬기는 것은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라 모세가 장막을 지으려 할 때에 지시하심을 얻음과 같으니 가라사대 삼가 모든 것을 산에서 네게 보이던 본을 좇아 지으라 하셨느니라”(히 8:5)고 이것이 “모형과 그림자”로 보여주셨음을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번제단과, 성막 뜰”의 구속사적 의미가 무엇일까요? 이를 세 단원으로 나누어 상고하겠습니다.
첫째 단원(1-8) 성막의 앙장과 결부된 번제단
둘째 단원(9-19) 번제단과 결부된 성막 뜰
셋째 단원(20-21) 번제단과 결부 된 등불
첫째 단원(1-8) 성막의 앙장과 결부된 번제단
“너는 조각목으로 장이 오 규빗, 광이 오 규빗의 단을 만들되 네 모 반듯하게 하며 고는 삼 규빗으로 하고”(1).
① 여기서 말씀하는 “단”(壇)은 번제단을 뜻합니다. 번제단은 하나님께 번제, 속죄제, 화목제 등을 드리는 단입니다.
② 그리고 그 위치는 “또 회막의 성막 문 앞에 번제단을 두고 번제와 소제를 그 위에 드리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대로 되니라”(40 :29) 한 대로 성막 문에 들어서면 최우선으로 만나게 되는 위치인 성막 뜰에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기 위해서는 이 번제단을 반드시 통과해야만 했던 것입니다.
③ 번제단을 통하여 계시하고자 하는 바는 말할 것도 없이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대신 담당하실 십자가를 예표하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번제단을 통하지 않고는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이 불가능한 것입니다.
④ 그러므로 번제단은 금으로 만든 법궤와는 달리 “놋”으로 만들라고 명하셨던 것입니다. 성경에서 놋은 심판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이점이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마다 놋뱀을 쳐다본즉 살더라”(민 21:9)에서 나타납니다. 이는 우리 대신 심판을 받아 십자가에 높이 달리실 주님의 모형이었습니다.
이점에서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순서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성막(앙장)을 먼저 말씀하신(26:1-14) 후에 번제단(27:1-8)을 만들라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도 무심한 것이 아니라고 여겨집니다. 왜냐하면 성막은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실 그리스도의 모형이요, 그렇다면 어찌하여 성자 하나님께서 영광을 비우시고 “해달의 가죽”(26:14)과 같은 인간의 비천한 몸을 입고 임마누엘 하신 단 말인가? 바로 번제단에서 죽임을 당하시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⑤ 한가지 집고 넘어가야 할 식양이 남았습니다. 그것은 번제단 “네 모퉁이 위에 뿔을 만들되”(2) 하신 뿔의 의미가 무엇일까 하는 점입니다. 이 뿔은 능력과 권세를 상징하고 있는데 번제단의 뿔은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라”(롬 1:16)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다윗은 여호와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시 18:2) 라고 찬양했으며 신약성경은 “우리를 위하여 구원의 뿔을 그 종 다윗의 집에 일으키셨다”(눅 1:69) 하고 구원하는 능력이 그리스도의 번제단에 있음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죄를 범한 자라도 도망하여 이 뿔을 잡으면 죽음을 면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왕상 1:50, 2:28). 하나님께서 “네게 보인 식양대로” 하라 명하심은 이러한 모형과 그림자를 통해서 참 것을 계시하기 위해서였던 것입니다. 이것이 성막의 앙장과 결부된 번제단의 의미입니다.
둘째 단원(9-19) 번제단과 결부된 성막 뜰
“너는 성막의 뜰을 만들지니 남을 향하여 뜰 남편에 광이 백 규빗의 세마포장을 쳐서 그 한 편을 당하게 할지니”(9).
성막을 세마포장으로 울타리처럼 둘러치라고 말씀합니다. 그 안이 “성막의 뜰”인 것입니다. 이 뜰을 만들기 위해서는 포장을 고정하기 위한 기둥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한 쪽 면의 “그 기둥이 스물이며” (10) 하고 고정할 기둥을 세우라 하십니다. 이 포장으로 말미암아 성막은 외부와 구별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 뜰에는 번제단과 물두멍이 놓여있습니다.
먼저 명심해야할 점은 “성막 뜰”에 있어서 핵심은 번제단이라는 점입니다. 번제단이 없는 성막 뜰은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번제단을 통해서 구속함을 얻지 못한 이방인(불신자)들은 성막 뜰에 들어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주께서 택하시고 가까이 오게 하사 주의 뜰에 거하게 하신 사람은 복이 있나이다”(시 65:4)고 노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사장이 성소에서 분향하는 동안 백성들은 밖(뜰)에서 기도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눅 1:10). 이런 의미에서 성막 뜰은 하나님의 교회를 상징한다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세마포 포장”은 하나님의 교회가 세속화되지 않도록 거룩하게 구별함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에스겔서에서는 성전 뜰을 언급하면서 “그 사방 담 안 마당의 장과 광이 오백 척씩이라 그 담은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구별하는 것이더라”(겔 42:20)고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거룩하게 구별하심의 뜻이 “세마포”라는 말씀에서도 나타납니다. 계시록에 보면 “그에게 허락하사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게 하셨은즉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계 19:8) 하십니다. 세마포장의 구별이 없게 될 때 하나님의 교회는 세속화되고 마는 것입니다.
이처럼 성막 뜰을 세마포장으로 거룩하게 구별하기 위해서 “기둥”이 필요한 것입니다. 기둥이라는 말이 10번이나 나옵니다. 기둥이 견고하게 서 있음으로만이 외부와의 구별이 가능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막을 중심으로 빙 둘러 서 있는 기둥들을 생각해보십시오. 그리고 이 기둥에 세마포장이 둘러 처진 광경을 상상해 보십시오. 기둥 하나 하나가 누구의 모습같이 생각이 됩니까? 이는 마치 성도들이 세마포 옷을 입고 성막을 옹위(擁衛)하고 있는 듯이 보이지 않습니까? 진실로 이 기둥들이 우리들의 모습을 나타내주고 있다면 나 같은 죄인이 세마포 옷을 입고 견고하게 설 수가 있는 것은 오직 번제단이 있기 때문이며, 그 번제단 네 모퉁이에 뿔이 있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이것이 번제단과 결부된 성막 뜰의 의미입니다.
셋째 단원(20-21) 번제단과 결부 된 등불
“너는 또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하여 감람으로 찧어 낸 순결한 기름을 등불을 위하여 네게로 가져오게 하고 끊이지 말고 등불을 켜되 아론과 그 아들들로 회막 안 증거궤 앞 휘장 밖에서 저녁부터 아침까지 항상 여호와 앞에 그 등불을 간검하게 하라 이는 이스라엘 자손의 대대로 영원한 규례니라”(20-21).
① 백성들에게 감람유를 가져오게 해서,
② 끊이지 말고 등불을 켜되,
③ 제사장들로 하여금 저녁부터 아침까지 등불을 간검하게 하라 하십니다. 즉 등불에 불똥이 앉게 되면 불이 꺼질 염려가 있기 때문에 이를 보살피라는 말씀입니다. 이때 사용케 하시려고 “그 불집게와 불똥 그릇도 정금으로 만들라”(25:28)고 명하셨던 것입니다.
먼저 생각하게 되는 것은 “등불을 켜고, 간검하라”는 말씀을 어찌하여 여기서 말씀하고 있느냐 하는 점입니다. 논리적인 생각으로는 이 말씀이 “등대”를 만들라, 불집게를 만들라(25:31-40)는 문맥에서 주어져야만 자연스러울 것 같은데 성경은 번제단과 성막 뜰을 말씀하시는 문맥에서 말씀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러므로 이를 상고하는 우리들도 “등불을 켜되, 저녁부터 아침까지 항상 켜라”는 말씀을 “번제단”과 결부시켜 생각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성경이 그렇게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점에서 깨달아야할 것은 그리스도에게 되어진 일은 그의 구속으로 말미암아 그의 성도들에게도 되어진 일이라는 진리입니다. 예를 들면 성막은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임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구속사역은 여기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구속으로 말미암아 성도들의 몸이 성막이 되었다는 데까지 나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25장에서 “등대”의 식양을 말씀할 때는 분명 빛 되시는 그리스도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번제단”(구속)과 결부시켜 말씀할 때는 성막 뜰이 교회를 상징하고 있듯이 “등불”도 빛의 사명을 감당해야할 교회를 상징하는 것으로 등장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러하기에 성경은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니라”고 말씀하면서 “회개치 아니하면 내가 네게 임하여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계 1:20, 2:5)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간검”(看儉)하라는 뜻은 “살피라”는 말씀입니다. 이를 신약적으로 말하면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행 20:28)가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자신과, 교회의 등불 위에 불똥이 앉지 못하도록 간검해야할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하여야만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하신 사명을 감당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나 같은 죄인이 감히 “세상의 빛”이 될 수가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번제단으로 말미암아 가능하게 된 것임을 잊어서는 아니 됩니다. 이것이 번제단과 결부된 등불의 의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