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하 7장
여호와가 너를 위하여 집을 세워주리라
7장은, 여호와께서 주위의 모든 원수를 무찌르사 왕으로 궁에 평안히 살게 하신 때에”(1) 라고 시작이 되는데, 여호와의 궤를 다윗성에 안치한 다윗에게는 새로운 근심이 생겼습니다. 자신은 “백향목 궁에 살거늘 하나님의 궤는 휘장(천막) 가운데”(2)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다윗은 하나님을 위하여 집(성전)을 지어드리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를 거절하시면서 도리어, “여호와가 너를 위하여 집을 짓고”(11), 즉 하나님께서 다윗을 위하여 집을 세워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5절과 11절에 나타난 이 절묘한 대조를 음미해보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집을 세워주시겠다는 뜻은, 다윗에게 세워주신 메시아언약을 가리킵니다. 구속사라는 거대한 산맥(山脈)에는 우뚝 솟은 두 봉우리가 있는데, “아브라함과, 다윗”입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하나님께서 친히 메시아언약을 세워주신 당사자이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에게 하신 언약이 점진하여 다윗 언약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그리고 이 언약이 신
약에 와서,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마1:1) 하고 성취되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구속사에 있어서 7장의 비중은 큰 것입니다. 그러므로 7장의 주제는 “여호와가 너를 위하여 집을 세워주리라”가 됩니다. 이를 네 단원으로 나누어 상고합니다.
첫째 단원(1-3) 다윗의 소원
둘째 단원(4-7) 장막에 거하시는 하나님
셋째 단원(8-17) 다윗에게 세워주신 메시아언약
넷째 단원(18-29) 다윗의 감사와 찬양
첫째 단원(1-3) 다윗의 소원
“여호와께서 주위의 모든 원수를 무찌르사 왕으로 궁에 평안히 살게 하신 때에 왕이 선지자 나단에게 이르되 볼지어다 나는 백향목 궁에 살거늘 하나님의 궤는 휘장 가운데에 있도다”(1-2)하고 불편한 심기를 말합니다.
다윗의 첫 번째 근심은 방치되었던 하나님의 궤를 메어오는 일이었습니다. 이제 그 소원은 이루어져서, “여호와께서 통치”(대상 16:31)하시는 신정왕국이 세워진 것입니다. 이제 새로운 근심이 있게 되었는데 그것은 자신은 백향목 궁에 평안히 거하고 있는데 하나님의 궤는 바람에 펄떡거리는 휘장 가운데 있기 때문입니다. 사울이 왕으로 있을 때에는 무감각했을지라도 다윗은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소원을 나단 선지자에게 말합니다. 나단 선지자는 다윗의 치세 중에 세움 받은 선지자로써 다윗이 흔들릴 때, 특히 두 가지를 바로 잡아준 선지자입니다. 하나는 다윗이 밧세바를 범했을 때(12:1)이고, 다른 하나는 아도니야가 왕위를 찬탈하려 했을 때(왕상 1:22)입니다.
“여호와께서 왕과 함께 계시니 마음에 있는 모든 것을 행하소서”(3) 합니다. 나단도 좋게 여겨 동의했던 것입니다. 다윗의 소원은 옳은 일이고 당연히 그러해야 한다고 여겼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를 거절하셨습니다. 왜 거절하셨는가?
둘째 단원(4-7) 장막에 거하시는 하나님
그 밤에 하나님께서는 나단에게, “가서 내 종 다윗에게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네가 나를 위하여 내가 살 집을 건축하겠느냐”(5) 하시면서 우선적으로 하신 말씀은,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부터 오늘까지 집에 살지 아니하고 장막과 성막 안에서 다녔다(행하였다)”(6)고 말하라 하십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사역을 인식하는데 중요한 정보를 제공해주고, 다윗에게 세워주신 언약을 이해하는데도 결정적인 역할을 합니다. 이는 세 마디로 되어 있는데,
① 집에 거하지 아니하시고 장막과 회막에 거하신 하나님.
② 안식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일을 행(行)하시는 하나님.
③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부터 오늘날까지.
그러면 이 말씀을 구속사라는 맥락으로 보면 어떤 의미가 되는가? 첫째로, “집에 거하지 아니하고 장막에 거하였다”고 말씀하시는데, “집과, 장막”의 결정적인 차이가 무엇입니까? “집”하면 움직일 수 없는 고정(固定)과 부동(不動)의 개념이 있습니다. 이와는 반대로 장막(帳幕)은 간편한 이동식(移動式)입니다.
그런데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부터 오늘날까지” 장막에 거하시면서 행하셨다는 것입니다. 무슨 뜻인가? 시내산에 임하신 하나님은 그곳에 집을 짓고 거하시고 백성들만 가나안을 향하여 행군하라 하신 것이 아니라, 그곳에서 성막(聖幕)을 지으라 명하시고 그들이 시내산을 출발할 때에 그들 앞에서 앞서 행하셨다는 말씀입니다. 가나안에 정착할 때까지만이 아니라, 정착한지 약 500백년이 지난 “오늘까지”(6), 즉 다윗 때까지도 말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신가? 안식일에 병을 고치는 일을 했다고 비난하는 자들을 향하여 주님은,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요 5:17)고 반박을 하셨습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지금까지도 장막에 거하시면서 일을 행하고 계시는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일을 행하시는 여호와, 그것을 만들어(계획하여) 성취하시는 여호와”(렘 33:2)라고 자신을 계시하십니다. 그리고 그 사역은 지금도 완성된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내가 말하기를 너희가 어찌하여 나를 위하여 백향목 집을 건축하지 아니하였느냐고 말하였느냐”(7)고 반문하십니다. 스데반 집사나 바울 사도는 이를 알았기에,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유를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 하신다”(행 17:24, 7:48)고 증언했던 것입니다. 이점에서 우상의 특성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들의 우상들은 은과 금이요 사람이 손으로 만든 것이라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며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며 코가 있어도 냄새 맡지 못하며
손이 있어도 만지지 못하며 발이 있어도 걷지 못하며
목구멍이 있어도 작은 소리조차 내지 못하느니라
(시 115:4-7)
이것이 우상입니다. “발이 있어도 걷지 못하며” 하는 것은, 신당(神堂)에 세워놓으면 걸어서 나오지도 못한다는 그런 뜻입니다. 그러니까 “집”에 거하는 것은 우상이요, 살아계시는 하나님은 “사람의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둔한 인간들은 이제도 예배당을 성전이라고 말하면서 하나님을 어떤 건물 안에 신주(神主)처럼 모셔놓으려는 잘못을 범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거하시기를 원하시는 것은 목석으로 된 건물이 아니라, 구속함을 입은 백성들 가운데 거하시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의 모임인 교회가 성전(聖殿)이고, 성도 개개인의 몸이 성전인 것입니다. 궁극적으로는,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계 21:3) 하실 그때에 하나님의 거하실 집은 완성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한 걸음 더 나아가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부터 오늘날까지” 어떻게 일해 오셨는가를 생각할 때, “집에 살지 아니하고 장막과 성막 안에서 다녔(행하였)나니”(6) 하시는 말씀이 “나는 성전에 있지 아니하고 성막에 있었다”는 그런 단순한 뜻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출애굽 당시는 모세에게,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으리라”(출 3:12)고, 모세라는 “장막”에 거하시면서 행하셨고, 가나안을 정복할 당시는 “내가 모세와 함께 있었던 것같이 너와 함께 있을 것임이라”(수 1:5)고, 여호수아라는 “장막”에 거하시면서 행하신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이점이 왜 중요하냐 하면 주님께서는,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요 14:20) 말씀하시고, 사도 바울은 “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골 1:29)고 고백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지금도 구원계획을 이루시기 위해서 형제라는 장막(몸)에 거하시면서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이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장막에 거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셋째 단원(8-17) 다윗에게 세워주신 언약
셋째 단원의 중심점은, “네 씨를 네 뒤에 세워 그의 나라를 견고하게 하리라”(12) 하신 메시아언약에 있습니다. 이 “씨”는 일찍이 아브라함에게,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니”(창 22:18) 하신 언약과 동일한 것으로,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이라 칭하게 된 근거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내 종 다윗에게 이와 같이 말하라. “내가 너를 목장 곧 양을 따르는 데에서 데려다가 내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로 삼고 네가 가는 모든 곳에서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 모든 원수를 네 앞에서 멸하였은즉 땅에서 위대한 자들의 이름 같이 네 이름을 위대하게 만들어 주리라”(8-9) 하십니다. 여기서 “네 이름을 위대하게 만들어 주리라” 하심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창 12:2) 하신 약속과 맥을 같이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약속은, “네 수한이 차서 네 조상들과 함께 누울 때에 내가 네 몸에서 날 네 씨를 네 뒤에 세워 그의 나라를 견고하게 하리라 그는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을 건축할 것이요 나는 그의 나라 왕위를 영원히 견고하게 하리라”(12-13) 하신, 메시아언약과 결부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유념해야 할 점은, “여호와가 너를 위하여 집을 짓어(이루고)”주겠다 하신 것은 다윗의 왕위를 계승시켜서,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위를 그에게 주시리니 영원히 야곱의 집을 왕으로 다스릴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눅 1:32-33)고 그리스도에게로 성취하여 주시겠다는 언약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를 입증하는 것이, 마태복음 1장에서,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마1;1)고 제시된 족보입니다. “이 족보를 보아라, 예수가 아브라함과 다윗에게 언약하신 그리스도라는 증거다”라고 입증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언약을 세워주시는 이 대목에는 하나님을 가리는 “내가”라는 말이 9번(6, 7, 7, 8, 9, 10, 11, 12, 15) 이상 등장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일방적(一方的)인 언약이요, 주권적(主權的)으로 성취하시겠다는 강한 의지의 표출입니다. 그렇습니다. 구원계획이란 사람이 하나님을 위하여 무엇을 행하기보다 하나님께서 선수 적으로 행해주시는 일인 것입니다.
“네 몸에서 날 네 씨를 네 뒤에 세워, 그는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을 건축할 것이라” 하신 말씀이 1차적으로는 솔로몬으로 성취됩니다만 그것은 예표요, 궁극적인 성취는 다윗의 자손으로 오실 주님께서,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마 16:18)에서 성취될 말씀인 것입니다. 이점을 사도 바울은,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엡 2:22)고 증언합니다.
영원히 견고케 하리라
또한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세워주신 언약에는, “영원히”(13, 16, 16)라는 말과 “견고하게 하리라”(12, 13, 16)는 말씀이 강조되어 있습니다. “영원”이란 하나님의 속성과만 결부되는 것으로, 세상 나라는 영원하지도, 견고하지도 못합니다. 이는 다니엘서를 통해서도 계시되어 있는데, “이 여러 왕들의 시대에 하늘의 하나님이 한 나라를 세우시리니 이것은 영원히 망하지도 아니할 것이요 그 국권이 다른 백성에게로 돌아가지도 아니할 것이요 도리어 이 모든 나라를 쳐서 멸망시키고 영원히 설 것이라”(단 2:44) 하십니다.
다윗도 이 놀라운 메시아언약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사도행전 2장에 수록 된 베드로의 설교를 보십시오. 이는 성령께서 강림하셔서 베드로를 통하여 증언하신 첫 설교인데, “그(다윗)는 선지자라 하나님이 이미 맹세하사 그 자손 중에서 한 사람을 그 위에 앉게 하리라 하심을 알고 미리 본 고로 그리스도의 부활을 말했다”(행 2:30-31)고 증언합니다. 다윗은 “알고, 미리 본고로, (시편을 통해서) 말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세워주신 언약입니다. 그러므로 7장이 사무엘하의 중심 장이요, 창세기 22장이 이브라함의 정상이듯이 다윗의 생애 중 정상(頂上)이라 할 수가 있습니다. 7장 이후로는 마치 하산하듯이 다윗의 내리막길을 대하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장해주시는 말씀이 있는데, “그가 만일 죄를 범하면 내가 사람의매와 인생의 채찍으로 징계하려니와 내가 네 앞에서 물러나게 한 사울에게서 내 은총을 빼앗은 것처럼 그에게서 빼앗지 아니하리라”(14-15)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다윗에게 세워주신 메시아언약이 변하지 아니하리라는 불변성이요, 보장인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만일 죄를 범할” 때마다 사울을 폐하듯이 폐하시고 은총을 빼앗아 버리신다면,
㉠ 집을 이루는 역사는 은혜로 되는 것이 아니라 행위로 되는 것이 되고,
㉡ 만일 행위로 되는 것이라면 폐하여지지 않을 자란 한 사람도 없을 것이요,
㉢ 그렇게 되면 그 집은 이루지를 못하고 중단 될 것이요,
㉣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뜻과 계획하심을 이룰 수가 없게 되고 실패로 끝나게 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제기되는 난제
이점에서 제기되는 난제(難題)가 있습니다. 다윗이 죄를 범해도 폐하시지 않는다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와 충돌하지 않느냐는 점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세워주신 언약이 있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다윗(다윗뿐만이 아니라 구약시대 모든 죄)이 범한 죄를 그냥 묵과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의 자손으로 오실 그리스도에게 그 책임을 묻겠다는 것,
이것이 다윗에게 세워주신 언약의 핵심인 것입니다.
이 언약이 있었기에 다윗만이 아니라, 다윗에게 세워주신 메시아언약을 믿는 구약시대 모든 성도들도 폐하여지지 않고 구원을 얻음이 가능해졌던 것입니다. 이는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다윗에게 세워주신 언약이 행위언약이 아니라 “은혜언약”이요 바로 “복음”임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매와 인생의 채찍으로 징계하려니와”(14) 폐하거나 빼앗지는 않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이 가능했던 것입니다.
이점을 대번에 11장에 가서 보게 되고, 또한 솔로몬의 대에 가서 보게 되는데, “솔로몬이 마음을 돌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떠나”(왕상 11:9) 우상을 섬기는 데까지 타락합니다. 하나님은 “이 나라를 네게서 빼앗아 네 신하에게 주리라”고 선고하십니다. 그러나 “오직 내가 이 나라를 다 빼앗지 아니하고 내 종 다윗과 내가 택한 예루살렘을 위하여 한 지파를 네 아들에게 주리라”(왕상 11:11, 13)고 말씀합니다. “내 종 다윗” 이라 하심은 다윗에게 세워주신 언약을 가리키고, “내가 택한 예루살렘”이라 하심은 하나님의 거룩하신 이름과 계획을 염두에 두고 하시는 말씀인 것입니다. 시편 기자도 이를 알았기에 증언하며 찬양합니다.
만일 그의 자손이 내 법을 버리며 내 규례대로 행하지 아니하며
내 율례를 깨뜨리며 내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면
내가 회초리로 그들의 죄를 다스리며 채찍으로 그들의 죄악을 벌하리
로다
그러나 나의 인자함을 그에게서 다 거두지는 아니하며
나의 성실함도 폐하지 아니하며
내 언약을 깨뜨리지 아니하고 내 입술에서 낸 것은 변하지 아니하리로다
내가 나의 거룩함으로 한 번 맹세하였은즉
다윗에게 거짓말을 하지 아니할 것이라
(시 89:30-35)
이 주권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도 구원을 얻을 수가 있게 된 것입니다. 그 인자하심이 오늘날도 성도들이 죄를 범하면 징계하려니와 빼앗지 아니하시고 견인(牽引)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를 믿기에,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빌 1:6)고 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아멘.
넷째 단원(18-29) 다윗의 감사와 찬양
“다윗 왕이 여호와 앞에 들어가 앉아서 이르되 주 여호와여 나는 누구이 오며 내 집은 무엇이기에 나를 여기까지 이르게 하셨나이까”(18) 하고 감격해 합니다. 다윗이 “궁에 편안히”(1) 왕좌에 앉아 있을 때에는 자신이 하나님을 위하여 무엇인가 해드리려는 궁리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가 너를 위하여 집을 지어” 주시겠다는 망극하신 말씀을 듣고는 왕의 보좌에서 내려와, “여호와 앞에 들어가 앉아서”(18) 겸비한 마음으로 감사와 찬양의 기도를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기도의 첫마디가 “주 여호와여 나는 누구이오며 내 집은 무엇이기에 나를 여기까지 이르게 하셨나이까”(18) 합니다. 이는 “내가 너를 목장 곧 양을 따르는 데에서 데려다가 내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왕)를 삼고”(8) 하신 말씀을 염두에 둔 감사와 감격이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다윗을 주권적으로 택하여 세워주심이 아니었다면 다윗은 평생을 목동으로 지냈을 것입니다. 형제에게도, “나는 누구오며 내 집은 무엇이기에 나를 여기까지 이르게 하셨나이까” 하는 감사와 감격이 있습니까?
나는 누구오며 내 집은 무엇이기에
“주 여호와여 주께서 이것을 오히려 적게 여기시고 또 종의 집에 있을 먼 장래의 일까지도 말씀하셨나이다 주 여호와여 이것이 사람의 법이니이다”(19)고 아룁니다. 이는 세 마디로 되어 있는데
㉠ 첫째는, “주께서 이것을 오히려 적게 여기시고” 한 “이것” 이란, 목동인 자신을 왕을 삼아주심을 가리키는 말이고,
㉡ 둘째로 “또 종의 집에 있을 먼 장래의 일까지도 말씀하셨나이다” 한 것은 메시아언약을 가리킵니다. 이는 다윗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언약의 신령한 의미를 깨달았다는 증거입니다.
㉢ 셋째로, “이것이 사람의 법이니이다” 하는 것은, 하나님의 비밀의 경륜을 사람이 알아듣기 쉽도록 말씀해주셨다는 뜻입니다.
그리하여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주의 종의 귀를 여시고 이르시기를 내가 너를 위하여 집을 세우리라 하셨으므로 주의 종이 이 기도로 주께 간구할 마음이 생겼나이다”(27) 합니다. 이는 다윗이 하나님께서 세워주신 언약의 의미를 “알아들었다”는 명백한 증거입니다.
여기에 신앙의 중요한 요소가 있는데 첫째는, “주의 종에게 알게 하셨나이다”(21)한 “앎”(知)이란 요소입니다. 신앙인이란 지정의(知情意)적인 인격체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먼저는 지적(知的)인 앎이 있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맹목적인 신앙인이 되고 맙니다. 이 앎이라는 지적인 요소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위하여 행해주신 일로 교리라고 말합니다.
이를 안 다음에 둘째로, 정적(情的)인 요소로 하나님께서 행해주신 것을 믿음으로 받아 감사와 찬양과 기뻐하게 되고, 셋째로 의지적(意志的)인 요소로 행함이라는 열매를 맺게 되는 균형 잡힌 성숙한 신앙 인격이 형성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현대교회의 성도들에게 치명적으로 허약한 것이 첫째 되는 지적(知的)인 요소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성경은 창세기에서 “내가—하리라”(창 3:15)고 시작하신 것을 계시록에서 “이루었도다”(계 21:6) 하고 완성하시는 구속사입니다. 그런데 성경의 단편적인 지식은 풍부하나, “영원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추어졌던 비밀의 경륜이 어떠한 것인지”(엡 3:19), 즉 성경의 퍼즐을 맞출 줄을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건물에 비한다면 골조가 부실한 것과 같아서, “비가 내리고 창수가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마 7:27)는 결과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이는 우려가 아니라 현실이 그러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추진해나가시는 구원계획을 깨달은 자라면 다윗같이, “나는 누구오며 내 집은 무엇이기에 나로 이에 이르게 하셨나이까” 하고 감사와 감격해 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나아가 “여호와는 주의 종을 아시오니 다윗이 다시 주께 무슨 말씀을 하오리이까”(20) 한 대로, 감사 외에 달리 구할 것이 그리 많지 아니함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이처럼 무조건적인 사랑과 측량할 수 없는 은혜를 베풀어주셨는데도 마치 하나님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행해주심이 없고, 그리하여 우리들은 아무 것도 받은 것이 없는 가난하고 가련한 자들인 것처럼, “주십시오, 주십시오” 하고 달라고만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오늘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얻은 성도들이 이토록 왜소하고 초라하고 무기력하고 기쁨도 감사도 없어 보이는 결정적인 원인은 하나님께서 이미 베풀어주신 은혜의 선물을 알아야 할 만큼 알지 못하는데 그 원인이 있다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다윗의 기도에는 “말씀”이란 말이 모두 여섯 번(19, 21, 25, 25, 28, 29)이나 강조되어 있는데, 다윗은 언약하신 “말씀”을 붙잡고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여 이제 주의 종과 종의 집에 대하여 말씀하신 것을 영원히 세우시며 말씀하신 대로 행하사(25), 주 여호와여 오직 주는 하나님이시며 주의 말씀들이 참되시니이다 주께서 이 좋은 것을 주의 종에게 말씀하셨사오니 이제 청하건대 종의 집에 복을 주사 주 앞에 영원히 있게 하옵소서 주 여호와께서 말씀하셨사오니 주의 종의 집이 영원히 복을 받게 하옵소서”(28-29) 하고 메시아언약을 이루어주시기만을 구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선수 적이며 무조건적인 사랑과 은혜에 감격해 하면서 언약하신 말씀대로 “이루어주시기를” 구할 뿐 달리 무슨 청구를 하고 있지 아니함을 보게 됩니다. 말씀하신 대로, “우리를 위하여 구원의 뿔을 그 종 다윗의 집에 일으켜”(눅 1:69) 주셨습니다. 참으로 신실하신 하나님을 찬양하십시다. 이것이 “여호와가 너를 위하여 집을 세워주리라”는 말씀입니다.
나누어 봅시다
① 건물이 아니라 장막에 거하시면서 행하셨다는 의미에 대해서,
② 네가 아니라 여호와가 너를 위하여 집을 지어주시겠다는 말씀에 대해서,
③ “나는 누구오며 내 집은 무엇이기에”라는 고백에 대해서
(사무엘하 파노라마 중에서)
저는 한 주간 예정으로 중국 선교사역을 떠납니다. 기억해주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