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울 왕을 버리신 하나님
15장은 사울 왕 자신이 버림을 당하는 장입니다. 13:14에서는 “지금은 왕의 나라가 길지 못할 것이라” 하고 왕위가 자식의 대로 계승되지 못할 것을 말씀했다면 본문 26절에서는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 왕을 버려 이스라엘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음이니이다” 하고 사울 자신이 버림받은 것을 말씀합니다.
그렇다면 사울 왕이 하나님께 버림을 당한 원인이 무엇일까요? 11절이 답변이라고 말씀드릴 수가 있습니다. “내가 사울을 세워 왕 삼은 것을 후회하노니 그가 돌이켜서 나를 좇지 아니하며 내 명령을 이루지 아니하였음이니라 하신지라”. 11절 중에서도 핵심은 내 명령을 “이루지 아니함”에 있는 것입니다.
이점에서 명심하고 놓치지 말아야할 문맥은 하나님께서는 지금 하나님 나라를 회복하시는 구속 사역을 이루어 나가고 계시는 중이라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원복음에서 계시된 바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창 3:15)하신 사탄을 정복하는 영적 싸움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사울을 가리켜 “나를 좇지 아니하며 내 명령을 이루지 아니하였음이니라”고 하신 말씀은 단순한 불순종의 차원을 넘어서 하나님의 나라를 회복하시기 위한 영적 전쟁에서 군령(軍令)을 거역한 불복종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본 장에는 “여호와의 말씀”(1, 2, 10, 23,) 또는 “여호와의 명령”(11, 13, 24)이 강조되어 있고 이에 대하여 “청종치 아니함, 또는 거역”이 치명적인 죄임을 대하게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 나라건설을 대적하는 행위였기 때문입니다.
사울이 첫 테스트에서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일에 실패했습니다. 두 번째 시험은 명령에 대한 “복종”에 실패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할 수 없다면 그 명령에 복종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뢰하지 못하고 복종하지 않는 종이라면 더 이상 기대할 것이라고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본 장의 주제가 “사울 왕을 버리신 하나님”이 될 수가 있습니다. 세 단원으로 나누어 상고합니다.
첫째 단원(1-9) 아말렉을 진멸하라
둘째 단원(10-23) 하나님의 명령을 이루지 아니한 사울
셋째 단원(24-35) 하나님보다 백성을 두려워한 사울
첫째 단원(1-9) 아말렉을 진멸하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아말렉이 이스라엘에게 행한 일 곧 애굽에서 나올 때에 길에서 대적한 일을 내가 추억하노니 지금 가서 아말렉을 쳐서 그들의 모든 소유를 남기지 말고 진멸하되 남녀와 소아와 젖 먹는 아이와 우 양과 약대와 나귀를 죽이라 하셨나이다”(2-3)
사무엘은 사울에게 하나님의 명령을 전달합니다. 명령은 아무에게나 시달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호와께서 “왕을 삼으셨은즉 이제 왕은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소서”(1)합니다. 하나님께서 구속사역을 이루어 나가시는 중에 쓰시기 위하여 그를 왕으로 삼으셨으니 여호와의 명령을 들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영적 전쟁에 있어서 최고사령관이신 것입니다. 명령의 요지는 “아말렉을 진멸하라”는 것입니다. 이점에서 성경을 구속사의 관점에서 보아야함을 절감하게 됩니다. “지금 가서 아말렉을 쳐서 그들의 모든 소유를 남기지 말고 진멸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은 너무나 가혹한 듯이 여겨질 수도 있습니다. 더욱이나 “남녀와 소아와 젖 먹는 아이” 까지 죽이라는 말씀에 이르러서는 교훈이나 인도주의적인 입장에서는 감당하기가 어려운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아말렉이 이스라엘에게 행한 일 곧 애굽에서 나올 때에 길에서 대적한 일을 내가 추억하노니”(2) 하십니다. 이는 “출애굽 사건”이 사탄의 속박으로부터의 해방을 뜻하는 영적 출애굽에 대한 그림자이듯이 아말렉을 진멸하라 하심은 하나님의 나라건설을 대적하는 사탄과 그의 추종자들에게 임할 공의로우신 심판에 대한 예표적인 사건임을 인식해야만 합니다.
그러나 “사울과 백성이 아각과 그 양과 소의 가장 좋은 것 또는 기름진 것과 어린양과 모든 좋은 것을 남기고 진멸키를 즐겨아니하고 가치 없고 낮은 것은 진멸하니라”(9)고 말씀합니다. 이는 이적(利敵) 행위였던 것입니다.
둘째 단원(10-23) 하나님의 명령을 이루지 아니한 사울
“내가 사울을 세워 왕 삼은 것을 후회하노니 그가 돌이켜서 나를 좇지 아니하며 내 명령을 이루지 아니하였음이니라 하신지라 사무엘이 근심하여 온 밤을 여호와께 부르짖으니라”(11)
하나님의 후회하심과 사무엘의 근심도 모른 체 사울은 “갈멜에 이르러 자기를 위하여 기념비를 세우고”(12) 있었습니다. 사울 왕은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위하여서가 아니라 “자기를 위하여” 즉 자신의 명예와 영광을 위하여 승전비를 세웠던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내가 여호와의 명령을 행하였나이다”(13)고 말했던 것입니다. 이점은 주의 종들에게 중요한 경계가 됩니다. 제 자신도 이점이 염려하는 것 중의 하나입니다. 책을 펴낼 때마다 몇 권 째다 하고 권수나 헤아리게 되고 자기 만족과 성취욕을 위해서 이 일을 하고 있지나 아니한 가고 성찰하게 됩니다. 이런 의미에서 사도 바울은 선교의 목적을 분명히 천명하고 있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아 그 이름을 위하여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케 하나니”(롬 1:5)합니다. 그가 “선한 싸움을 싸운 것은” 자기를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그 이름을 위하여” 죽도록 충성했던 것입니다.
“사무엘이 가로되 그러면 내 귀에 들어오는 이 양의 소리와 내 귀에 들리는 소의 소리는 어찜이니이까 사울이 가로되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하려 하여 양과 소의 가장 좋은 것을 남김이요 그 외의 것은 우리가 진멸하였나이다”(14-15)고 변명합니다. 사울은 “나는 실로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하여 여호와께서 보내신 길로 가서 아말렉 왕 아각을 끌어 왔고 아말렉 사람을 진멸하였으나 다만 백성이 그 마땅히 멸할 것 중에서 가장 좋은 것으로 길갈에서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하려고 양과 소를 취하였나이다”(20-21)고 그 책임을 백성들에게 전가시키기까지 합니다.
이쯤 되면 그에게 무슨 말이 더 소용이 있겠습니까?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23)는 선언만이 남았을 뿐입니다. 여기서 유명한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22)한 말씀이 등장합니다. 어찌하여 순종이 제사보다 나은 것일까요?
① “제사”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드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② 하나님의 뜻이 제사보다 우선하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한 답변이 히브리서에 있습니다. “전체로 번제함과 속죄제는 기뻐하지 아니 하시나니 이에 내가 말하기를 하나님이여 보시옵소서 두루마리 책에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시니라…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히 10:5-10).
하나님의 나라에 있어서, 그리고 구속사역에 있어서 최우선해야할 점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주권을 의미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빌 2:8) 하심도 하나님의 뜻을 좇아,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되어진 일입니다.
그러므로 “이는 거역하는 것은 사술의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23)는 논리가 성립이 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는 것은 거기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 곧 사탄을 섬기고 그를 좇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이점은 아합이 아람 왕 벤하닷을 놓아주었을 때에도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멸하기로 작정한 사람을 네 손으로 놓았은즉 네 목숨은 저의 목숨을 대신하고 네 백성은 저의 백성을 대신하리라”(왕상 20:42)고 이것이 이적행위임을 말씀합니다.
셋째 단원(24-35) 하나님보다 백성을 두려워한 사울
“사무엘이 그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오늘 이스라엘 나라를 왕에게서 떼어서 왕보다 나은 왕의 이웃에게 주셨나이다”(28)
“사울이 사무엘에게 이르되 내가 범죄하였나이다 내가 여호와의 명령과 당신의 말씀을 어긴 것은 내가 백성을 두려워하여 그 말을 청종하였음이니이다”(24)고 말합니다. 사울은 하나님의 명령보다 백성의 요구에 영합하여 그리하였노라고 실토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찌하여 사울은 하나님보다 사람을 더 두려워하게 되었을까요? 그 대답은 분명합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택하신 왕이 아니라 “너희의 구한 왕, 너희의 택한 왕”(12:13)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백성들이 자신을 어떻게 평가할까 여기에 급급했던 것입니다. 첫 번 시험 때도 백성들이 자기에게서 흩어지는 것을 보고 두려워서 명을 어기고 번제를 드렸으며(13:8-11) 두 번째 시험에서도 “내가 백성을 두려워하여 그 말을 청종하였나이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백성들의 요구에 영합하여 “그 양과 소의 가장 좋은 것 또는 기름진 것과 어린양과 모든 좋은 것을 남기고 진멸”(9)하지 말아라 고 말했을 때 백성들은 얼마나 좋아했겠습니까? 우리 왕 최고라고 말했을 것입니다. 여기에 주의 종이 심각하게 물어야할 말씀이 있습니다. “이제 내가 사람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갈 1:10).
사무엘이 가려고 돌이킬 때에 사울이 그의 겉옷자락을 붙잡으매 찢어진지라(27). 사무엘이 그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오늘 이스라엘 나라를 왕에게서 찢어서 왕보다 나은 왕에게 주셨나이다(28)고 선언합니다. 이점에서 비상하게 명심해야할 점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건설, 곧 구속의 역사는 중단되거나 미완성에 끝인다거나 하는 일이 절대로 없다는 점입니다. 거기에는 하나님의 뜻과 명예가 걸려있기 때문입니다. 사울은 하나님의 “명령을 이루지 아니” 하였으나 하나님은 “왕보다 나은 왕”을 들어서 기어코 이루시고야만다는 것입니다.
“왕보다 나은 왕”이란 무슨 뜻입니까? 더 선하고 의롭다는 말입니까? 그런 의미도 있을 것입니다 마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뜻대로 예선해 놓으신 왕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구속의 역사란 하나님의 주권적인 행사이기 때문입니다. “왕보다 나은 왕”이란 누구를 가리킵니까? 다윗입니다. 그렇다면 다윗이 사울보다 의롭다고 말할 수가 있겠습니까? 한가지 분명한 것은 다윗의 죄가 윤리적인 죄였다면 사울의 죄는 경건치 아니함(2:25)이었다는 점입니다. 다시 말하면 다윗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였으나 사울은 사람을 두려워하였던 것입니다.
사울은 하나님께는 버림받은 왕이었으나 백성들에게는 인기 있는 왕일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이미 자신을 버려 이스라엘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다는 선고를 받고도 “사울이 가로되 내가 범죄하였을지라도 청하옵나니 내 백성의 장로들의 앞과 이스라엘 앞에서 나를 높여”(30) 달라고 간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가 아닙니다. “장로들의 앞과 이스라엘의 앞에서”입니다. 불쌍할 정도의 자기집착입니다.
사무엘이 죽는 날까지 사울을 다시 가서 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그가 사울을 위하여 슬퍼함이었고 여호와께서는 사울로 이스라엘 왕 삼으신 것을 후회하셨더라(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