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성경강해 2

시편 10편 영원 무궁하신 왕

작성자유도순|작성시간19.06.05|조회수493 목록 댓글 0

시편 10편 개관도표

                                      주제 : 영원무궁토록 왕이신 여호와 하나님

하나님이

없다

하는

사상

1-11

1 ① 여호와여 어찌하여 멀리 서시며 어찌하여 환난 때에 숨으시나이까

2 악한 자 가 교만하여 가련한 자를 심히 군박하오니 저희로 자기의 베푼 꾀에 빠지게 하소서

3 악인은 그 마음의 소욕을 자랑하며 탐리하는 자는 여호와를 배반하여 멸시하나이다

4 ② 악인은 그 교만한 얼굴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이를 감찰치 아니하신다 하며

그 모든 사상에 하나님이 없다 하나이다

5 ③ 저의 길은 언제든지 견고하고 주의 심판은 높아서

저의 안력이 미치지 못하오며 저는 그 모든 대적을 멸시하며

6 그 마음에 이르기를 나는 요동치 아니하며 대대로 환난을 당치 아니하리라 하나이다

7 그 입에는 저주와 궤휼과 포학이 충만하며 혀 밑에는 잔해와 죄악이 있나이다

8 ④ 저가 향촌 유벽한 곳에 앉으며 그 은밀한 곳에서 무죄한 자를 죽이며

그 눈은 외로운 자를 엿보나이다

9 사자가 그 굴혈에 엎드림 같이 저가 은밀한 곳에 엎드려

가련한 자를 잡으려고 기다리며 자기 그물을 끌어 가련한 자를 잡나이다

10 저가 구푸려 엎드리니 그 강포로 인하여 외로운 자가 넘어지나이다

11 저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잊으셨고 그 얼굴을 가리우셨으니

영원히 보지 아니하시리라 하나이다

경건한자의호소

12-15

12 ⑤ 여호와여 일어나옵소서 하나님이여 손을 드옵소서 가난한 자를 잊지 마옵소서 어찌하여

13 악인이 하나님을 멸시하여 그 마음에 이르기를 주는 감찰치 아니하리라 하나이까

14 ⑥ 주께서는 보셨나이다 잔해와 원한을 감찰하시고 주의 손으로 갚으려 하시오니

외로운 자가 주를 의지하나이다

주는 벌써부터 고아를 도우시는 자니이다

15 악인의 팔을 꺾으소서 악한 자의 악을 없기까지 찾으소서

두부류의

종말

16-18

16 ⑦ 여호와께서는 영원무궁토록 왕이시니

열방이 주의 땅에서 멸망하였나이다

17 여호와여 주는 겸손한 자의 소원을 들으셨으니

저희 마음을 예비하시며 귀를 기울여 들으시고

18 ⑧ 고아와 압박당하는 자를 위하여 심판하사

세상에 속한 자로 다시는 위협지 못하게 하시리이다

10편, 영원무궁토록 왕이신 여호와 하나님

요절 : 16절, 여호와께서는 영원무궁토록 왕이시니 열방이 주의 땅에서 멸망하였나이다.

 

10편에는, “악한 자가 교만하여 가련한 자를 심히 군박하오니”(2) 하고, “악한 자와, 가련한 자”의 두 부류(部類)의 사람이 대조되어 등장합니다. “악한 자”란, “모든 사상에 하나님이 없다”(4) 하는 “세상에 속한 자”(18)를 가리키고, “가련한 자”란, 이 세상에서 박해를 당하고 있는 경건한 자를 가리킵니다. “여호와여 어찌하여 멀리 서시며 어찌하여 환난 때에 숨으시나이까”(1) 하고 호소합니다.

이런 심정은 시편 기자만의 고뇌는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영원무궁토록 왕이시라”(16) 고백하면서, “압박당하는 자를 위하여 심판하사 세상에 속한 자로 다시는 위협치 못하게 하시리이다”(18) 하고 확신을 나타내는 것으로 마치고 있습니다.

 

도표를 보시면 “여호와께서는 영원무궁토록 왕이시니”를 중심으로 첫째 단원은 “하나님이 없다 하는 사상”의 특성인데, ① “여호와여 어찌하여 멀리 서시며, 환난 때에 숨으시나이까”, ② “악인은 여호와께서 감찰치 아니하신다, 하나님이 없다 하나이다”, ③ “저의 길은 언제든지 견고하고”, ④ “은밀한 곳에서 무죄한 자를 죽이며, 영원히 보지 아니하시리라 하나이다” 합니다. 둘째 단원은 “경건한 자의 호소”인데, ⑤ “여호와여 일어나옵소서”, ⑥ “주께서는 보시고, 감찰하신다” 하고 말합니다. 셋째 단원에서는 두 부류의 종말인데, ⑦ “주는 겸손한 자의 소원을 들으셨으니”, ⑧ “세상에 속한 자를 심판”하여주시리라는 확신으로 마치고 있습니다.


첫째 단원(1-11) 하나님이 없다 하는 사상

둘째 단원(12-15) 경건한 자의 호소하는 기도

셋째 단원(16-18) 두 부류의 종말

 

첫째 단원(1-11) 하나님이 없다 하는 사상

첫째 단원은, “모든 사상에 하나님이 없다” 하는 교만한 자들이 득세하며 압제하는 내용입니다.

① “여호와여 어찌하여 멀리 서시며 어찌하여 환난 때에 숨으시나이까”(1) 합니다.

㉠ 10편은 경건한 자를, “가련한 자(2, 9, 9), 외로운 자(8, 10, 14), 가난한 자”(12) 등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환난”을 당하고 있건만 자신들을 변호(9:4)해주실 하나님은 “멀리 계시고, 숨어 계신” 듯이 여겨집니다. 경험적으로 그렇게 느껴질 때가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 2-11절은 “악한 자”의 특성을 고발하는 내용인데, “악한 자가 교만하여 가련한 자를 심히 군박하오니 저희로 자기의 베푼 꾀에 빠지게 하소서”(2) 하고, 첫째로 “교만”을 듭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교만은 넘어짐의 앞잡이라” 한대로 치명적인 병패입니다.

 그 교만이 “악인은 그 마음의 소욕을 자랑하며 탐리하는 자는 여호와를 배반(背叛)하여 멸시하나이다”(3) 한 말에 나타납니다. 이러한 악인들이 경건한 자를 심히 군박을 하는데도 하나님은 “멀리 계시고 숨어 계신 듯”, 하다는 것입니다.

 

② 그리하여 “악인은 그 교만한 얼굴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이를 감찰치 아니하신다 하며 그 모든 사상에 하나님이 없다 하나이다”(4) 합니다.

㉠ 여기 악인의 결정적인 특성 두 가지가 언급되어 있는데,

㉮ 첫째는 교만한 얼굴로 “감찰치 아니 하신다”, 즉 하나님이 보시지 않는다” 하는 인생관(人生觀)이고,

 

㉯ 둘째는 “모든 사상에 하나님이 없다” 하는 세계관(世界觀)입니다.

“사상”이란 그 사람의 마음과 생각에 작용하여 세계관, 인생관을 형성하게 하여 삶을 지배하는 위력이 있는데, 영적 싸움이란 사상전(思想戰)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주님은 열 두 살 되던 해 유월절에 예루살렘에 올라가셨을 때에,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눅 2:49) 하는 자신의 정체성을 말씀하셨습니다. 오늘날 교회는 특히 청소년층의 “사상” 무장에 너무 둔감한 듯이 여겨집니다. 윤리적으로는 “아버지가 없다” 하는 말이 최고의 불효이듯이, 신학적으로는 “하나님이 없다” 하는 사상이 근본적인 죄악인 것입니다.

 

㉡ 그런데 물질문명, 인본주의사상은 한마디로 “하나님이 없다” 하는 사상입니다. 질문을 드려보겠습니다. “창조론”은 신학인가? 과학인가? 그렇다면 “진화론”(進化論)은 신학인가? 과학인가? 그리스도인 학생들도 과학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성경은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히 11:3) 합니다.

우주 만물은 분명히 존재합니다. 그런데 거대한 우주가 저절로 이루어졌다는 그것이 과학이란 말인가? 진화론은 우주의 기원을 입증하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진화론은 사탄의 신학이라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진노(震怒)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나나니”(롬 1:18) 합니다. 죄들에는 억만 가지가 있어도 크게는 하나님과의 관계성인 “경건치 아니함”과, 사람과의 관계성인 “불의”, 두 가지로 분류가 됩니다.

그런데 “왕을 죽였다, 부모를 죽였다” 하면 대역죄(大逆罪)로 여기면서, “하나님은 죽었다” 하는 사상은 고상한 철학사상으로 취급을 받고 있으니 이를 가리켜 본문은, “악인은 그 교만한 얼굴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이를 감찰치 아니하신다 하며 그 모든 사상에 하나님이 없다 하나이다”(4) 하고 말씀합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심판은 임한다는 것입니다.

 

창세기 16장에는 애굽 여인 하갈이 “여호와께서 네 고통을 들으셨음이라”는 말씀을 듣고는, “내가 어떻게 여기서 나를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뵈었는고” 하고 여호와의 이름을 “엘 로이”, 즉 “감찰하시는 하나님”(창 16:11, 13)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③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의 길은 언제든지 견고(堅固)하고”(5상) 합니다. 이점을 73:4-6절에서는, “저희는 죽는 때에도 고통이 없고 그 힘이 건강하며 타인과 같은 고난이 없고 타인과 같은 재앙도 없도다 그러므로 교만이 저희 목걸이요 강포가 저희의 입는 옷이며 살짐으로 저희 눈이 솟아나며 저희 소득은 마음의 소원보다 지나며” 합니다.

 

㉠ 그런 자들에게는, “주의 심판은 높아서 저의 안력(眼力)이 미치지 못하오며”(5중) 합니다. 이는 인간의 이성으로는 깨닫지를 못한다는 뜻인데, “그 모든 사상에 하나님이 없다” 하는 것은 교만과 무지(無知)의 극치요, 눈에 보이는 것이 없다, 즉 안하무인(眼下無人)이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로마 총독으로부터 “네 많은 지식이 너를 미치게 한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고상한 인격의 소유자였습니다. 그런 바울도 한 때는 예수가 누군가를 아는데 “안력(眼力)이 미치지 못하여” 박해하던 자였습니다. 그러나 멀었던 눈이 밝아진 후로는,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智識)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빌 3:8) 하고 말하면서, 이를 증거 하는데 자신의 목숨을 걸었던 것입니다.

 

㉡ “그 마음에 이르기를 나는 요동치 아니하며 대대로 환난을 당치 아니하리라 하나이다”(6), 즉 세상에서 누리고 있는 번영과 행복을 대대로 영원히 누릴 것처럼 말한다는 것입니다. 누가 이렇게 말하는가? “교만한 자”입니다. “모든 사상에 하나님이 없다” 하는 자들입니다. 그런 자들은 9편 마지막 절에서 말씀한, “자기는 인생(人生)뿐인 줄”, 즉 “질그릇 조각 중 한 조각 같은 자”(사 45:9)임을 알지 못하는 자들입니다.

 

④ 그런데 8-10절의 묘사를 주의 깊게 관찰해보시기를 바랍니다. “저가 향촌 유벽한 곳에 앉으며 그 은밀한 곳에서 무죄한 자를 죽이며 그 눈은 외로운 자를 엿보나이다”(8),

㉠ “사자가 그 굴혈에 엎드림 같이 저가 은밀한 곳에 엎드려 가련한 자를 잡으려고 기다리며 자기 그물을 끌어 가련한 자를 잡나이다 저가 구푸려 엎드리니 그 강포로 인하여 외로운 자가 넘어 지나이다”(9-10) 합니다.

이 묘사는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벧전 5:8) 한 말씀을 연상하게 합니다. 그렇습니다. “모든 사상에 하나님이 없다” 하는 배후에는 악한 사탄의 세력이 지배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을 향해서,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요 8:44) 하고, 저들이 사탄에 의하여 지배를 당하고 있음을 지적하셨습니다. 이를 아셨기에 주님은 십자가상에서,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 23:34) 하고, 저들이 기만을 당하고 있는 우매에서 깨어나기를 기도하셨던 것입니다.

 

㉡ “저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잊으셨고 그 얼굴을 가리우셨으니 영원히 보지 아니하시리라”(11)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여호와께서 감찰치 아니 하신다”(4)는 뜻입니다.

㉮ 교만한 자는 “보지 아니하시리라” 하고 말하나,

㉯ 경건한 자는 “주께서 보셨나이다”(14) 하고 말합니다.

㉰ 모든 사상에 하나님이 없다 하는 자들은, “감찰치 아니 하신다”(4) 하고 말하나,

㉱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감찰하신다”(14) 하고 말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없다 하는 사상”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이러한 무신론적인 사상 풍조(風潮)는 지나간 특성이 아니라, 현대교회가 직면하고 있는 더욱 큰 위협입니다. 이를 하나의 학문(學問)이라는 차원으로 여겨 교회와 상관이 없는 양 여겨서는 아니 됩니다. 영적 싸움이란 혈과 육의 싸움이 아닙니다. 인간의 “마음과 생각”을 누가 소유하고 지배하느냐의 사상전(思想戰)임을 명심해야만 합니다.

성경은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 4:7) 말씀하고 있는데, 현대교회 내에는 세계관, 인생관, 가치관, 인생의 목적은 거듭나지 못한 채 “자기를 사랑하고, 돈을 사랑”(딤후 3:2)하는 무리들로 붐비고 있는 실정입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정신무장이 무엇인가?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롬 14:7-8) 합니다. 형제의 인생관, 가치관은 확실히 거듭났습니까?

 

둘째 단원(12-15) 경건한 자의 호소하는 기도

⑤ 둘째 단원은 “경건한 자의 호소하는 기도”입니다. “여호와여 일어나옵소서 하나님이여 손을 드옵소서 가난한 자를 잊지 마옵소서”(12) 합니다.

㉠ 경건한 자는, “모든 사상에 하나님이 없다” 하는 악하고 교만한 자와는 대조적으로, “일어나옵소서, 손을 드옵소서, 잊지 마옵소서” 하고 하나님을 의뢰합니다. 하나님의 일어나심과 손을 드심이, 신자들에게는 구원으로, 불신자들에게는 심판으로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 “어찌하여 악인이 하나님을 멸시하여 그 마음에 이르기를 주는 감찰치 아니하리라 하나이까”(13) 하고 호소하는데, 이런 갈등은 하박국 선지자에게도 있었습니다.

“이러므로 율법이 해이하고 공의가 아주 시행되지 못하오니 이는 악인이 의인을 에워쌌으므로 공의가 굽게 행함이니다, 악인이 자기보다 의로운 사람을 삼키되 잠잠하시나이까”(합 1:4, 13) 하고, 호소합니다. 하나님은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정녕 응하리라”(합 2:3) 하고 대답하십니다.

 

⑥ 이를 믿기에 시편 기자도 “주께서는 보셨나이다 잔해와 원한을 감찰하시고 주의 손으로 갚으려 하시오니 외로운 자가 주를 의지하나이다 주는 벌써부터 고아를 도우시는 자니이다”(14) 합니다.

㉠ 이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확신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 “주께서는 보셨나이다” 합니다.

㉯ 저들의 “잔해와 원한을 감찰(鑑察)하신다” 하고 말합니다.

 

㉰ “주는 벌써부터 고아 (외로운 자, 경건한 자)를 도우시는 자니이다”(14) 합니다.

현재 도우시고, 앞으로 도우실 것만이 아니라, 벌써부터, 애굽에서 신음하며 탄식하고 있을 때부터, 바로의 군사가 추격해왔을 때, 골리앗이 사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했을 때부터 도우신 자라는 그런 뜻입니다. 이것이 “경건한 자의 호소하는 기도”입니다.

 

셋째 단원(16-18) 두 부류의 종말

셋째 단원은 “두 부류의 종말”을 말씀함인데, 득세(得勢)하는 듯이 보이던 교만한 악의 세력들은 심판을 당하고 겸손한 자가 승리하게 될 것을 나타냅니다.


⑦ “여호와께서는 영원무궁토록 왕이시라” 하고 고백합니다.

10편의 중심점이 여기에 있습니다. 74:12절에서도, “하나님은 예로부터 나의 왕이시라” 하고 고백을 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예로부터, 영원무궁토록 우리의 왕이신 것입니다. 형제는 하나님이 언제부터 “나의 왕”이 되시는지 알고 있습니까? 창세기 1장에서부터입니다.

㉠ 나라의 구성요건은 “왕, 백성, 영토, 법”입니다. 하나님께서 왕이 되시기 위해서, 천지를 조성하시고, 자기 형상대로 백성을 지으시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실과는 먹지 말라”는 법을 세우심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졌던 것입니다. 에덴을 창설하시고, 아담에게 하와를 짝을 지어주실 때부터 하나님은 우리의 왕이십니다.

 

㉡ “여호와여 주는 겸손한 자의 소원을 들으셨으니 저희 마음을 예비하시며 귀를 기울여 들으시고”(17) 합니다. 첫 절에서는 “어찌하여 멀리 서시며 어찌하여 환난 때에 숨으시나이까” 하던 시편 기자는,

㉮ “겸손한 자의 소원을 들으셨다” 하고 말합니다.

㉯ “귀를 기울여 들으시고” 하고, 거듭 진술함으로 확신을 나타냅니다.

 

⑧ “고아와 압박당하는 자를 위하여 심판하사 세상에 속한 자로 다시는 위협치 못하게 하시리이다”(18), “나는 그렇게 해주실 것을 믿습니다” 하는 확신(確信)으로 마치고 있습니다.

㉠ 여기 “세상(世上)에 속한 자”라는 말이 나옵니다. 그러면 경건한 자는 어디에 속한 자들인가?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 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요 15:19).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빌 3:20) 합니다.

 

㉡ 세상에 속한 자란 “여호와를 떠나는 자는 흙에 기록(記錄)이 되오리니”(렘 17:13) 하나, 그러나 형제의 이름은 “어린양의 생명책에 기록”(계13:8)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10편을 마치기 전에 계시의 진전(進展)에 대해서 말씀드려야만 하겠습니다. 구약의 성도들은 “여호와께서는 영원무궁토록 왕이시니”(16) 하는데, 신약성경에서는, “보라 네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위를 저에게 주시리니 영원(永遠)히 야곱의 집에 왕 노릇하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無窮)하리라”(눅 1:31-33) 하고, 영원무궁한 왕이 “그리스도”시라고 말씀합니다.

 

구약의 성도들은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23:1) 하나, 주님께서는 “나는 선한 목자라” 하십니다. 왜 그런가? 한 마디로 “임마누엘” 사건이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구약의 성도들이 어떻게 해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되는 것이 가능하여졌는가? “구속하여 내 백성을 삼고”(출 6:6-7) 하십니다. 그 예표가 실체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왕국 백성이 되는 것이 가능하여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유대인들이 여호와를 “영원무궁한 왕”으로 믿는다하여도,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왕”으로 고백하지 않는 한,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백성만이 될 수 없는데 끝이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와 그 기름 부음을 받은 자를 대적”(2:2)하는 악한 자, 교만한 자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저들은 “주의 심판이 높아서 저의 안력(眼力)이 미치지 못하고”(5) 있는 상태에 있는 것입니다.

 

형제여, 그리스도를 “나의 왕”으로 고백하는 자는, “가련하지 않습니다. 외롭지 않습니다. 안전합니다. 튼튼합니다. 영원한 승리가 있습니다. 이것이 “세상에 속한 자와, 겸손한 자”의 종말이요, 역전(逆轉)입니다.

적용 : 형제가 때로는 “가련한 자, 외로운 자, 가난한 자”같이 여겨질 때는 없었습니까? 만일 그렇지 않다면 세상과 너무 가까워졌거나 타협했기 때문은 아닌지 고민해보십시다.


묵상

㉠ 악인의 특성(1-11)이 어떻게 표현되어 있는가에 대해서,

㉡ 경건한 자의 호소가 무엇인가에 대해서,

㉢ 어찌하여 그리스도가 영원무궁한 왕이신 가에 대해서,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