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윗을 이스라엘의 대표자로 세우신 하나님
17장은 너무나 잘 알려진 장이면서도 관점의 차이로 인하여 그 해석상 아쉬움이 많은 장이기도 합니다. 다윗이 블레셋의 장수 골리앗을 물리치고 이스라엘을 구원한 것은 기름부음을 받은 후에 대외적으로 이룩한 첫 행사임을 유념해야만 합니다. 이는 다윗이 구속사의 무대에 등장하는 데뷔전인 셈입니다. 16장에서 기름부음을 받고 여호와의 신에 크게 감동되어 17장에서 골리앗을 물리치는 문맥인 것입니다. 이 문맥을 놓치기 때문에 곁길로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적장 골리앗은 “너희는 한 사람을 택하여 내게로 내려보내라”고 제의합니다. 대표자끼리 싸워서 지는 편이 승자의 종이 되기로 하자는 것입니다. 성경을 구속사의 관점에서 볼 때에 이 “대표성”(代表性)을 이해한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요점이 됩니다. 성경을 교훈적인 관점으로 접근한다면 이 대표성을 이해하지 못하게 되고 성경을 곡해하게 됩니다.
아담 한 사람의 범죄가 어찌하여 인류 전체에게 미치는 원죄가 된단 말인가? 그는 인류의 대표자로써 죄를 범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의 죽음이 어떻게 인류를 구원할 대속적인 죽음이 되는가?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인류의 새로운 대표자로 세워주셨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롬 5:19). 어찌하여 “아담” 또는 “예수”라고 말씀하지 않고 “한 사람”이라고 말씀하는 것일까요? 바로 대표성 때문입니다. 첫 대표자가 사탄의 유혹에 패배함으로 그 후손 모두가 패배자가 되었듯이 새로운 대표자이신 그리스도의 승리하심이 그에게 연합한 모두의 승리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진영에는 골리앗과 상대하여 싸워서 승리할 대표자가 없었습니다. “이 말을 듣고 놀라 크게 두려워”(11)했다고 말씀합니다. 24절에서도 “이스라엘 모든 사람이 그 사람을 보고 심히 두려워하여 그 앞에서 도망”했다고 말씀합니다. 이때, 즉 인간의 능력으로는 불가능함이 입증이 된 이때에 하나님께서 예선해 놓으셨다가 기름을 부으시고 성령으로 충만케 하신 다윗이 등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왕이 없던 시기에 왕을 준비하셨으며 대표자가 없던 시기에 대표자를 준비하고 계셨던 셈입니다.
그러므로 본 장의 주제가 “다윗을 이스라엘의 대표자로 세우신 하나님”이 될 수가 있습니다. 다섯 단원으로 나누어 상고합니다.
첫째 단원(1-11) 한 사람을 택하여 보내라
둘째 단원(12-30) 다윗의 등장과 의분
셋째 단원(31-49)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
넷째 단원(50-54) 승리한 싸움을 싸우는 이스라엘
다섯째 단원(55-58) 소년이여 누구의 아들인가
첫째 단원(1-11) 한 사람을 택하여 보내라
“블레셋 사람들이 그 군대를 모으고 싸우고자 하여 유다에 속한 소고에 모여 소고와 아세가 사이의 에베스담밈에 진치매 사울과 이스라엘 사람들이 모여서 엘라 골짜기에 진치고 블레셋 사람을 대하여 항오를 벌렸으니 블레셋 사람은 이편 산에 섰고 이스라엘은 저편 산에 섰고 사이에는 골짜기가 있었더라”(1-3)
성경은 두 진영이 진을 치고 있는 광경을 보여주십니다. “블레셋 사람은 이편 산에 섰고 이스라엘은 저편 산에 섰고” 사이에는 골짜기가 있습니다. 이는 영적 실상을 보여주는 상징성이 있습니다. 지구상에는 많은 나라, 많은 민족이 있다하여도 영적 논리로 하면 <두 나라, 두 임금>, <두 진영, 두 대장>이 있을 뿐입니다. 그리하여 모든 사람은 두 나라, 두 진영 중 어느 한편에 속해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두 임금 중 어느 한 왕을 섬기게 되는 것이며 두 대장 중 어느 한 대장의 명령에 복종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상황은 필연적으로 두 종말을 가져온다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부자와 나사로는 같은 동네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죽자 나사로는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는 불꽃 가운데서 괴로움을 당하는 분리가 있게 됩니다. 도움을 청하는 부자에게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뿐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이 끼어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할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 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눅 16:26).
따라서 “두 진영” 사이에는 불가피 하게 적대감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인류가 두 진영으로 나누어지고 적대감이 있게 된 것은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창 3:15) 하신 대로 첫 대표자의 범죄로 말미암아 비극적으로 야기 된 것입니다.
블레셋 진영에서는 골리앗이 대표자로 나선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진영에는 “대표자”가 없었습니다. 사울이 왕으로 있으나 그는 이미 대표자로써의 자격을 상실한 것입니다. 그도 한때는 “하나님의 신에게 크게 감동이 되어”(11:6) 대표자로써 용맹을 발휘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여호와의 신이 사울에게서 떠나고 악신이 그를 번뇌케”(16:14) 하고 있는 처지입니다.
골리앗은 “내가 오늘날 이스라엘의 군대를 모욕하였으니 사람을 보내어 나로 더불어 싸우게 하라”(10)고 싸움을 돋우고 있습니다. 그가 모욕하는 “이스라엘의 군대”란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사백 삼십 년이 마치는 그 날에 여호와의 군대가 다 애굽 땅에서 나왔다”(출 12:41)고 한 “여호와의 군대”인 것입니다. 골리앗은 여호와의 군대를 모욕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군대, 곧 여호와의 거룩하신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여호와의 군대를 모욕한다는 것은 최대로 싸움을 돋우는 일인 것입니다.
그러나 모욕하는 말을 들으면서도 여호와의 군대의 진영에서는 슬프게도 여호와의 명예를 위하여 목숨을 내 놓고자 하는 “한 대표자”가 없었습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들의 대표자로 이 땅에 등장하시기 전의 우리가 처한 상황이기도 했습니다.
둘째 단원(12-30) 다윗의 등장과 의분
“다윗은 유다 베들레헴 에브랏 사람 이새라 하는 자의 아들이었는데”(12)
이새가 다윗에게 이르되 네 형들을 위하여 이 볶은 곡식 한 에바와 이 떡 열 덩어리를 가지고 진으로 속히 가서 네 형들에게 주고…네 형들의 안부를 살피고 증표를 가져 오라(17-18)는 지시를 합니다. 다윗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서 양을 양지키는 자에게 맡기고 이새의 명한 대로 가지고 가서 진영에 이른즉”(20), 이리하여 소년 다윗이 등장하게 됩니다. “속히 가라”고 명하심에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명한 대로 순종하기를 신속히 합니다.
이때에 다윗이 보냄을 받게 된 것은 배후에서 역사 하시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보아야만 합니다. 하나님께서 “내가 한 왕을 예선하였음이니라”(16:1)고 말씀함은 “한 대표자를 예선”해놓으셨다는 의미도 되기 때문입니다. “왕”이란 그 나라의 대표자요, 그러므로 사울이 이스라엘의 대표자가 아니라 다윗을 대표자로 내어보내시는 하나님의 엄위를 대하게 됩니다. 다윗은 더 이상 이새의 사사로운 아들이 아니었습니다. “택한 하나님의 그릇”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질그릇에 하나님의 신으로 충만케 하셨습니다. 그렇게 하셔서 두 진영이 대치하고 있는 전쟁마당으로 보내신 것입니다.
다윗이 전쟁터에 이르렀을 때 “마침 블레셋 사람의 싸움 돋우는 가드 사람 골리앗이라 하는 자가 그 항오에서 나와서 전과 같은 말을 하매 다윗이 듣게”(23) 됩니다. 그리고 분개해서 이같이 말합니다. “이 블레셋 사람을 죽여 이스라엘의 치욕을 제하는 사람에게는 어떠한 대우를 하겠느냐 이 할례 없는 블레셋 사람이 누구관대 사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하겠느냐”(26).
그러나 다윗의 형들은 환영을 하기는커녕 노를 발하면서 “어찌하여 이리로 내려왔느냐”고 배척을 합니다. 전쟁을 구경하러 왔도다 하고 비난을 합니다. 사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하는 말을 들으면서도 분개할 줄을 모르는 자들이 의로운 분노를 발하는 다윗을 교만하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은 대답합니다. “어찌 이유가 없으리이까”(29).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예선해 놓으신 다윗을 전쟁터에 보내신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다윗의 손에는 “칼이 없었더라”(50)고 말씀합니다. 그렇다면 다윗에게 있는 무기는 무엇이겠습니까?
셋째 단원(31-49)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45)
다윗은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하는 말을 들으면서도 잠잠한 여호와의 군대를 이해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모욕과 치욕을 당하면서도 잠잠하고 있는 저들을 과연 여호와의 이름과 명예를 위하여 세움 받은 여호와의 군대라 말할 수가 있단 말인가? 하나님의 신에게 크게 감동된 다윗을 분개케 한 것은 “사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하는 말이었습니다. “모욕”이란 말이 10, 25, 26, 36, 45, 다섯 번이나 반복적으로 강조되어 있습니다. “누구관대 사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하겠느냐” 그러고도 살아남을 줄로 알았더냐?
자신의 알량한 자존심이 상하면 길길이 뛰면서도 하나님의 이름이 모욕을 받고 있는데도 잠잠하고 있는 하나님의 군대라니, 얼마나 한심한 군대란 말인가? 다른 것은 다 참을 수가 있다하여도 하나님을 모욕하는 이것만은 묵과할 수가 없었던 것이 다윗입니다.
사울 왕도 “사울이 이 말을 들을 때에 하나님의 신에게 크게 감동되매 그 노가 크게 일어나서”(11:6)한 분개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요나단도 “여호와의 구원은 사람이 많고 적음에 달리지 아니하였느니라”(14:6)고 하나님만 의뢰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신이 떠나고 악신에 의하여 번뇌를 당하고 있는 사울의 수하에 있는 병사들에게서는 의분도 용맹도 찾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저희가 주를 대하여 악하게 말하며
주의 원수들이 헛되이 주의 이름을 칭하나이다
여호와여 내가 주를 미워하는 자를 미워하지 아니하오며
주를 치러 일어나는 자를 한하지 아니하나이까
내가 저희를 심히 미워하니 저희는 나의 원수니이다 시139:20-22
이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원수는 곧 “나의 원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다윗을 보내신 목적이 여기에 있었던 것입니다. “주의 종이 사자와 곰도 쳤다”(36상)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전에는 다윗이 양떼를 위하여 사자와 곰과 싸우는 것이 임무였다면 기름부음을 받고 여호와의 신에 충만케 함을 입은 이제는 모욕을 당하고 있는 하나님의 명예를 위하여 싸우라는 것, 이것이 다윗의 사명이었던 것입니다. 다윗은 외칩니다.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45).
다윗은 칼과 창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을 가지고 간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여호와께서 너를 내 손에 붙이시리니”(46)합니다. 47절에서도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붙이시리라”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어째서 이를 확신할 수가 있는 것입니까?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47)임을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전쟁이 여호와께 속한 것이란 말씀을 대하 20:15절에서도 언급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말씀하시기를 이 큰 무리로 인하여 두려워하거나 놀라지 말라 이 전쟁이 너희에게 속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라”고 말씀합니다. 무슨 뜻입니까? 모든 전쟁이 하나님의 주관하심 하에 있다는 뜻도 함의되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것은 그런 뜻이 아닙니다. 지금 이스라엘이 싸우고 있는 “이 전쟁이 너희에게 속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구속의 역사를 이루시기 위한 전쟁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는 뜻입니다. 거기에는 하나님의 명예가 걸려 있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자신이 이 싸움을 싸우고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바울이 “내가 선한 싸움을 싸웠다”고 고백한 것도, 그리고 형제가 싸우고 있는 영적 전쟁도 바로 이 싸움을 싸우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승리를 확신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너희를 우리 손에 붙이시리라” 합니다. 그리하여 “내가 너를 쳐서 네 머리를 베고 블레셋 군대의 시체로 오늘날 공중의 새와 땅의 들짐승에게 주어 온 땅으로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계신 줄 알게 하겠고”(46하)합니다.
형제여 성경은 궁극적으로 온 땅으로 하나님이 계신 줄을 알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자기계시인 것입니다. 이를 위하여 예선해 놓으셨던 다윗을 보내신 이는 하나님이십니다. 구속의 역사란 하나님의 나라가 파괴당함으로 손상을 입으신 하나님의 거룩하신 이름과 영예를 회복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전쟁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본문을 통해서도 높임을 받으셔야할 분은 다윗이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또한 굳게 세워져야할 것은 하나님의 주권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나를 위하며, 내가 나를 위하여 이를 이룰 것이라 어찌 내 이름을 욕되게 하리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주지 아니하리라”(사 48:11).
넷째 단원(50-54) 승리한 싸움을 싸우는 이스라엘
“다윗이 이같이 물매와 돌로 블레셋 사람을 이기고 그를 쳐죽였으나 자기 손에는 칼이 없었더라”(50)
다윗이 “손을 주머니에 넣어 돌을 취하여 물매로 던져 블레셋 사람의 이마를 치매 돌이 그 이마에 박히니 땅에 엎드러지니라”(49). 그야말로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하신 말씀을 연상케 합니다
나의 반석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저가 내 손을 가르쳐 싸우게 하시며
손가락을 가르쳐 치게 하시도다 시 144:1
이 시는 다윗의 시입니다. 그렇다면 노래 잘하는 소년 다윗이 물매 돌로 정확히 골리앗의 이마를 맞혀 거구를 땅에 엎드려 드린 후에 수금에 맞춰 부른 노래가 아니었을까요? 다윗이 달려가서 블레셋 사람을 밟고 그의 칼을 그 집에서 빼어내어 그 칼로 그를 죽이고 그 머리를 베니 블레셋 사람들이 자기 용사의 죽음을 보고 도망하는지라(51). 이것입니다. 이때까지 “놀라 크게 두려워”(11)하며 “심히 두려워하여 그 앞에서 도망”(24)하던 “이스라엘과 유다 사람들이 일어나서 소리지르며 블레셋 사람을 좇아 가이와 에그론 성문까지 이르렀고 블레셋 사람의 상한 자들은 사아라임 가는 길에서부터 가드와 에그론까지 엎드러졌더라”(52)고 말씀합니다.
이스라엘은 그들의 대표자가 승리해 놓은 싸움을 싸운 것입니다. 주님은 말씀합니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 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3). 성경은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니라”(요일 3:8). 영적 다윗의 군사들도 이미 승리해 놓으신 싸움을 싸우고 있음을 깨닫는다는 것은 중요한 요점이 됩니다. 십자가 군병들은 “일어나서 소리를 지르며”(52) 도망가는 적들을 추격하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다섯째 단원(55-58) 누구의 아들이뇨
“다윗이 블레셋 사람을 향하여 나아감을 사울이 보고 군장 아브넬에게 묻되 아브넬아 이 소년이 뉘 아들이냐 아브넬이 가로되 왕이여 왕의 사심으로 맹세하옵나니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하매”(55)
마지막 단원의 화두는 단연 이 소년이 “누구의 아들인가?” 하는 것입니다. 네 절 속에 세 번이나 나옵니다. 사울도, 군장 아브넬도, 다윗 앞에서 얼마나 부끄러웠을까요? 16절에 의하면 “블레셋 사람이 사십 일을 조석으로 나와서 몸을 나타내었더라”고 말씀합니다. 40이란 숫자는 40년 광야에서의 방황, 주님의 40일 동안 시험받으심에서 볼 수 있듯이 상징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이를 단 번에 종식시킨 이 사람이 누구인가? 우리 중 아무도 행할 수 없었던 이 일을 혜성처럼 나타나서 전격적으로 해치운 이 사람은 누구인가? 범인(凡人)으로는 할 수 없는 이 대사를 행한 이 사람이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에 관심이 쏠리게 된 것입니다.
사울은 다윗을 알고 있었다고 보아야만 합니다. “사울이 이에 사자를 이새에게 보내어 이르되 양치는 네 아들 다윗을 내게로 보내라”(16:19)고 말한 일이라든가 “다윗이 사울에게로 왕래하며”(15) 수금을 탄 일 등이 이를 말해줍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삼스럽게 “소년이여 누구의 아들이뇨”(58) 하고 묻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성경이 결론부분에서 다윗이 누구인가를 부각시키고 있는 것은 무심한 일이 아닌 것입니다. 이점을 삼 년이나 주님을 따른 제자들을 향하여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물으신 말씀과 연관지어 보십시오. 제자들은 주님께서 광풍을 잔잔케 하시자 “저희가 심히 두려워하여 서로 말하되 저가 뉘기에 바람과 바다라도 순종하는고”(막 4:41) 했습니다.
성령께서는 다윗이 누구인가를 알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만일 이를 모른 다면 18장 이하의 말씀과 사무엘 하, 역대 상, 시편의 말씀들을 상고하게 될 때에 수박 겉 핥기 식으로 의문(儀文)만 보고 신령한 면은 보지를 못하게 될 것입니다. 그 점은 예언서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다윗이 누구인가를 모른다면 “내 종 다윗이 그들의 왕이 되리니 그들에게 다 한 목자가 있을 것이라”(겔37:24)고 외친 에스겔의 예언을 어떻게 이해할 수가 있겠습니까? 내 종 다윗이 영원히 그 왕이 되리라고 말씀합니다(25).
에스겔 당시는 다윗이 죽은 지 수백 년이나 지난 후입니다. 그런 다윗을 왕이요 목자로 세워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화평의 언약”을 세우고 “내 처소가 그들의 가운데 있을 것이며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되리라”(27)하십니다. 이는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임이 명백합니다. 오직 다윗은 왕이요 목자로 오실 그리스도의 예표적인 인물이었던 것입니다. 성경은 이를 알기를 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는 주의 종 베들레헴 사람 이새의 아들이니이다”(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