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91편 개관도표
주제 :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하는 자
피난처와
요새 | 1-2 1 ①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하는 자는 전능하신 자의 그늘 아래 거하리로다
2 ② 내가 여호와를 가리켜 말하기를 저는 나의 피난처요 나의 요새요 나의 의뢰하는 하나님이라 하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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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을
발로
밟으리로다 | 3-13 3 ③ 이는 저가 너를 새 사냥군의 올무에서와 극한 염병에서 건지실 것임이로다 4 저가 너를 그 깃으로 덮으시리니 네가 그 날개 아래 피하리로다 그의 진실함은 방패와 손 방패가 되나니 5 너는 밤에 놀램과 낮에 흐르는 살과 6 흑암 중에 행하는 염병과 백주에 황폐케 하는 파멸을 두려워 아니하리로다 7 천인이 네 곁에서, 만인이 네 우편에서 엎드러지나 이 재앙이 네게 가까이 못하리로다
8 ④ 오직 너는 목도하리니 악인의 보응이 네게 보이리로다 9 네가 말하기를 여호와는 나의 피난처시라 하고 지존자로 거처를 삼았으므로 10 화가 네게 미치지 못하며 재앙이 네 장막에 가까이 오지 못하리니
11 ⑤ 저가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사 네 모든 길에 너를 지키게 하심이라 12 저희가 그 손으로 너를 붙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리로다 13 네가 사자와 독사를 밟으며 젊은 사자와 뱀을 발로 누르리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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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과
영화 | 14-16 14 ⑥ 하나님이 가라사대 저가 나를 사랑한즉 내가 저를 건지리라 저가 내 이름을 안즉 내가 저를 높이리라 15 저가 내게 간구하리니 내가 응답하리라
⑦ 저희 환난 때에 내가 저와 함께하여 저를 건지고 영화롭게 하리라 16 내가 장수함으로 저를 만족케 하며 나의 구원으로 보이리라 하시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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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91편,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하는 자
요절 : 1절,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하는 자는 전능하신 자의 그늘 아래 거하리로다.
91편의 중심점은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하는 자”(1)에 있습니다. 이 첫 절은 91편 전체의 명제(命題)가 되는 말씀입니다. 그 이하의 말씀은 이에 대한 해설이라 할 수가 있습니다. “은밀한 곳”이란 “비밀 장소”를 뜻하는 것인데, “지존자의 은밀한 곳”이라 했으니 성전 중에서도 지성소를 가리키는 것이 됩니다.
3-13절 안에는 “너”라는 인칭(人稱)이 17번이나 등장하는데, 그러면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하는 너”는 누구란 말인가? 1차적으로는 대제사장을 생각할 수가 있는데 그는 예표의 인물일 뿐, 궁극적으로는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는 그리스도라 할 수가 있습니다.
이점에서 “저희가 그 손으로 너를 붙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리로다” 한 12절은 사탄이 주님을 시험할 때에 인용(마 4:6)한 구절입니다. 그렇다면 사탄은 91편을 알고 있었으며, “네가 사자와 독사를 밟으며, 뱀을 발로 누르리로다”(13) 한 말씀을 증오하고 있었다는 것이 됩니다.
이런 맥락에서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하는 자”란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이 되고, 그의 구속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 거하게 된 성도들에게 적용이 된다 하겠습니다.
첫째 단원(1-2) 피난처와 요새가 됨
둘째 단원(3-13) 독사와 뱀을 발로 밟으리로다
셋째 단원(14-16) 구원하여 영화롭게 하리라
첫째 단원(1-2) 피난처와 요새가 됨
첫째 단원의 중심점은 2번 강조되어 있는, “거(居)함”에 있습니다. 왜냐하면 아담의 후예들은 하나님 존전에 거하지를 못하고 추방을 당했기 때문입니다.
①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하는 자는 전능하신 자의 그늘 아래 거하리로다”(1) 합니다.
㉠ 서론에서 말씀드린 대로 이 말씀이 91편의 명제가 됩니다. 이는 두 마디로 되어 있는데,
㉮ 첫째로 “지존자의 은밀한 곳”(1상)은 가장 영광스러운 곳이요, 안전한 곳입니다. 우리 주님은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나니라”(요 1:18) 하고,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계시던 분이십니다.
이제는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말미암아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골 3:3) 하고, 그리스도인들이 주와 함께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하게 된 것입니다. 왜 “하나님의 은밀한 곳”이라 하지 않고, “지존자”(至尊者)의 은밀한 곳이라 하는가? 본질상 진노의 자식이었던 자들을 그토록 높여주셨다는 영광스러움을 깨닫기를 원하셨기 때문일 것입니다.
㉯ 둘째로 “전능하신 자의 그늘 아래 거하리로다”(1하) 합니다. “그늘 아래”란 보호아래, 은혜 아래 있음을 의미합니다. 어찌하여 “하나님의 그늘 아래”라 하지 않고 “전능자”(全能者)의 그늘이라 하는가? 안전성(安全性)을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전능자의 그늘 아래 거하는 자를 누가 감히 건드릴 수가 있단 말인가? “저희를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음”(요 10:29)을 깨닫기를 원하셔서입니다.
㉡ 1절 안에는 “거한다”는 말이 두 번이나 강조되어 있는데,
㉮ 홍수심판 당시 “방주 안”에 거한 자는 “전능하신 자의 그늘 아래 거한” 자들입니다.
㉯ 애굽을 심판하실 때에 유월절 어린양의 피가 뿌려진 “대문 안에” 거한 자는 “전능하신 자의 그늘 아래 거한” 자들입니다.
㉰ “그리스도 예수 안”에 거하는 자는 “전능하신 자의 그늘 아래 거하는” 자들입니다.
② 그래서 “내가 여호와를 가리켜 말하기를”,
㉠ “저는 나의 피난처요,
㉡ 나의 요새요,
㉢ 나의 의뢰하는 하나님이라 하리니”(2) 하는 것입니다. “내가 말하기를”, 이는 일종의 신앙고백입니다.
㉣ 그러면 묻습니다. 오늘날의 “피난처, 요새”가 무엇입니까? 요한일서 2:18-19절에는 “속(屬)하다”는 말과, “거(居)하다”는 말이 강조되어 있습니다. 모든 사람은 어느 진영(陣營)엔가 소속이 되어 있고, 그가 거하는 위치(位置)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전에는 사탄의 진영에 속하여, 사망에 거하던 자들입니다. 이제는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이 “피난처와 요새”인 것입니다.
둘째 단원(3-13) 독사와 뱀을 발로 밟으리로다
둘째 단원은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하는 자”는 구체적으로 어떤 보호를 받게 되는가를 말씀하는 내용입니다. 중심점은 결론적으로 말씀한, “네가 사자와 독사를 밟으며 젊은 사자와 뱀을 발로 누리로다”(13)에 있다 하겠습니다. 이것이 문자적인 의미이겠습니까?
이는 “평강의 하나님께서 속히 사단을 너희 발아래서 상하게 하시리라”(롬 16:20)에서 성취될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에 열거된 보호하심이 다니엘과 세 친구의 경우처럼 기적적으로 나타날 수도 있지만, 신약의 성도들에게는 보다 영적인 보호로 적용이 된다 하겠습니다.
③ “이는 저가 너를 새 사냥꾼의 올무에서와 극한 염병에서 건지실 것임이로다”(3) 합니다.
㉠ “새 사냥꾼의 올무”에서 구원되리라는 것은 육적인 말이 아니라, “우리 혼이 새가 사냥꾼의 올무에서 벗어남같이 되었나니 올무가 끊어지므로 우리가 벗어났도다”(124:7) 한, 영적인 자유함을 가리키는 비유입니다.
㉡ “극한 염병”이란 흑사병과 같은 전염병을 연상하게 되는데 구약시대 사람들을 두려운 공포에 떨게 했던, “너는 밤에 놀램과 낮에 흐르는 살과 흑암 중에 행하는 염병과 백주에 황폐케 하는 파멸을 두려워 아니 하리로다 천인이 네 곁에서, 만인이 네 우편에서 엎드러지나 이 재앙이 네게 가까이 못하리로다”(5-7) 하고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 그러나 “저가 너를 그 깃으로 덮으시리니 네가 그 날개 아래 피하리로다 그의 진실함은 방패와 손 방패가 되나니”(4) 합니다. 여기 “날개와, 방패”가 있는데, 날개란 암탉이 그 날개 아래 병아를 품듯 하는 사랑의 보호를, “방패”는 용사가 적군으로부터 방어해주는 능력을 나타냅니다.
④ “오직 너는 목도하리니 악인의 보응이 네게 보이리로다”(8) 하는데, 목도하게 되리라는 “보응”(報應)이란 궁극적으로 종말적인 개념입니다.
㉠ 그 날에 “네가 말하기를 여호와는 나의 피난처시라 하고 지존자로 거처를 삼았으므로 화가 네게 미치지 못하며 재앙이 네 장막에 가까이 오지 못하리니”(9-10) 하십니다. 결정적인 근거가 “지존자로 거처를 삼았다”는데 있습니다. 이는 첫 절에서 말씀한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하는 자”와 상응하는 말씀입니다.
㉡ 다시 강조해야만 하겠습니다. “천인이 네 곁에서, 만인이 네 우편에서 엎드러지는” 재앙의 날에 어떤 사람이 안전하다고 말씀하고 있는가?
㉮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하는 자”,
㉯ “전능하신 자의 그늘 아래 거하는 자”(1),
㉰ “저는 나의 피난처요 나의 요새요 나의 의뢰하는 하나님이라고 고백하는 자”(2),
㉱ “여호와는 나의 피난처시라 하고 말하면서 지존자로 거처를 삼은 자”(9)입니다.
㉢ 이들이 누구들인가? 출애굽 당시는 유월절 어린양의 피가 뿌려진 대문, “안에 거하는 자”요, 신약시대에는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 8:1-2) 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입니다.
⑤ “저가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사 네 모든 길에 너를 지키게 하심이라”(11) 하십니다.
㉠ 여기 성도들을 지키라는 임무를 받은 “사자”는 천사를 가리키는 말인데 신약성경에서는, “모든 천사들은 부리는 영으로서 구원 얻을 후사들을 위하여 섬기라고 보내심이 아니뇨라”(히 1:14) 하고 말씀하십니다.
㉡ 그런데 주목해야할 점은, “저가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사 네 모든 길에 너를 지키게 하심이라 저희가 그 손으로 너를 붙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리로다”(11-12) 한 이 말씀은, 사탄이 주님을 시험할 때에 인용(11-12)한 구절이라는 점입니다. 성경의 많은 말씀 중 어찌하여 이 구절을 인용하였을까를 생각하게 합니다.
㉢ 사탄이 11-12절을 알고 있었다면 이어지는, “네가 사자와 독사를 밟으며 젊은 사자와 뱀을 발로 누르리로다”(13) 한 말씀도, 그리고 그 의미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창 3:15) 하신 원복음은 바로 뱀 곧 사탄에게 하신 선언이었던 것입니다.
사탄은 자신이 여자의 후손에 의해서 멸망당하리라는 것을 창세기에서 이미 선고를 받은 자입니다. 그러므로 “네가 사자와 독사를 밟으며 젊은 사자와 뱀을 발로 누르리로다”(13) 한 이 말씀을 가장 증오하고 있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이점에서 본 단원에 17번이나 등장하는 “너”가 궁극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귀결(歸結)이 된다는 점을 확인하게 됩니다. 그리고 “네가 말하기를 (고백하기를) 여호와는 나의 피난처시라 하고 지존자로 거처를 삼은 자”(9) 곧 예수 그리스도를 피난처요, 유일한 구원의 근거로 고백하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적용이 되는 것입니다.
㉣ 이런 맥락에서 본문의 표현들은 구약적인 개념이라 할 수가 있습니다. 이점이 신약의 성도들에게는 때로는 문자적으로도 주어지지만, 궁극적인 성취는 “용을 잡으니 곧 옛 뱀이요 마귀요 사단이라”(계 20:2) 한, 종말적인 말씀이라 하겠습니다. 이점이 다음 단원에 나타납니다.
셋째 단원(14-16) 구원하여 영화롭게 하리라
셋째 단원의 중심점은 “영화롭게 하리라(15), 구원으로 보이리라”(16)는 말씀에 있습니다. 어떤 자들에게 주어질 구원이요, 영화인가?
⑥ “하나님이 가라사대 저가 나를 사랑한즉 내가 저를 건지리라”(14상) 하십니다.
㉠ 첫째와 둘째 단원 안에는 “네가 말하기를” 하는 고백적인 말이 2절과, 9절에 나타납니다. 이는 인간 편에서, “나는 믿습니다” 하는 그런 뜻입니다. 그런데 셋째 단원에서는 “하나님이 가라사대” 하고, 하나님 편에서 말씀을 하십니다.
㉮ “저가 나를 사랑한즉 내가 저를 건지리라”(14상),
㉯ “저가 내 이름을 안즉 내가 저를 높이리라”(14하),
㉰ “저가 내게 간구하리니 내가 응답하리라”(15상) 하십니다.
이는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라”는 “믿음”이라는 차원을 넘어,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는 “사랑”의 차원으로 진보를 보이고 있는 것입니다.
⑦ 그리고 “저희 환난 때에 내가 저와 함께하여 저를 건지고 영화롭게 하리라”(15하) 하십니다.
㉠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하는 자는”(1) 하고 시작이 된 91편은, “내가 장수함으로 저를 만족케 하며 나의 구원으로 보이리라 하시도다”(16) 하는 말씀으로 마치고 있습니다. 결론이 무엇인가? “구원과(16), 영화”(17)입니다.
이점에서 둘째 단원에서 말씀한 “보호”가 우리에게 어떻게 적용이 되는가가 확연히 드러납니다. 그것은 “구원과, 영화”인 것입니다.
“이는 그 마지막이 사망임이니라, 이 마지막은 영생이니라”(롬 6:21, 22) 한, 마지막이 다르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하는 자”가 받게 될 “구원과, 영화”입니다.
적용 : 91편의 보호가 구약의 성도들에게는 육적인 개념으로 주어졌다 하여도, 신약의 성도들에게는 영적인 문제입니다. 주님은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함이라”(요 6:63) 하십니다. 본문의 보호를 문자적으로 경험할 수도 있지만 보편적인 것은 아닙니다. 만일 육적으로 주어질 것으로 기대했다가 그런 재난이 닫쳐온다면 믿음의 근거마저 흔들리기 쉽습니다.
6절에서 “두려워 아니 하리로다”고 말씀하는데 주님께서는, “몸을 죽이고 그 후에는 능히 더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눅 12:4) 하십니다. 형제는 하나님의 보호와 안전이 이 땅에서 임시적인 것으로 주어지는 것과, 영적인 영원함으로 주어지는 것 중 어느 것을 더 원하십니까?
묵상
㉠ 피난처와 요새라는 개념이 신약에 와서 어떻게 진전되었는가에 대해서,
㉡ 사탄이 주님을 시험할 때에 11-12절을 인용한 의도에 대해서,
㉢ 궁극적이고 영원한 축복인 “구원과, 영화”에 대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