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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 2

사무엘하 21장, 여호와의 기업과 이스라엘의 등불

작성자유도순|작성시간16.10.29|조회수309 목록 댓글 0

사무엘하 21장, 여호와의 기업과 이스라엘의 등불


21장은, “다윗의 시대에 해를 거듭하여 삼 년 기근이 있으므로”(1) 하고 시작이 됩니다. 이 연대가 언제였는가는 재위 초기로, 또는 말기로 견해가 갈리고 있습니다. 이는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중요한 점은 다윗이 여호와 앞에 간구했더니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이는 사울과 피를 흘린 그의 집으로 말미암음이니 그가 기브온 사람을 죽였음이니라”(1)하시는데 있습니다. 
이점에서 주목할 점은 사울 왕이 기브온 사람을 죽인 지난 날에 있었던 사건이 어떤 의미가 있기에 이 시점에 놓이게 되었는가 하는 문맥입니다. 이는 다윗이 기브온 사람들에게, “내가 너희를 위하여 어떻게 하랴 내가 어떻게 속죄하여야 너희가 여호와의 기업을 위하여 복을 빌겠느냐”(3)고 말한 “여호와의 기업”이라는 주제 때문인 것입니다. 20장에서 약한 자를 들어서 “여호와의 기업”을 보존하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21장 전반부에서는 약한 자의 원한으로 말미암아 여호와의 기업이 재난을 당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어찌하여 여호와의 기업에 화가 미친 것일까요? 이 재난의 원인이 어디에 있으며 이를 속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만 하는가? 
후반부에서는 블레셋과의 전장에서 다윗이 죽을 위기를 모면하게 됩니다. 만일 다윗이 대적에 의하여 죽임을 당했다면 어떻게 되는가? 백성들은 다윗에게 다시는 전장에 나가지 말아서 “이스라엘의 등불이 꺼지지 말게 하옵소서”(17) 하고 간청을 합니다. 다윗이 죽는다면 등불이 꺼지게 된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21장의 메시지는 분명합니다. 중심점은 “여호와의 기업”에 있고 그 핵심은 “이스라엘의 등불”입니다. 이에 근거하여 21장의 주제를 “여호와의 기업과 이스라엘의 등불”이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호와의 기업과, 등불”의 구속사적 의미가 무엇일까요? 이를 두 단원으로 나누어 상고하겠습니다.


첫째 단원(1-14) 여호와의 기업
둘째 단원(15-22) 이스라엘의 등불


첫째 단원(1-14) 여호와의 기업
“다윗의 시대에 해를 거듭하여 삼 년 기근이 있으므로 다윗이 여호와 앞에 간구하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이는 사울과 피를 흘린 그의 집으로 말미암음이니 그가 기브온 사람을 죽였음이니라”(1) 하십니다.
여호수아가 가나안을 정복할 당시 기브온 사람들에게, “그들과 화친하여 그들을 살리리라는 조약을 맺고 회중 족장들이 그들에게 맹세”(수 9:15)한 일이 있습니다. 그리하여 기브온 사람들이, “그 날에 여호수아가 그들을 여호와께서 택하신 곳에서 회중을 위하며 여호와의 제단을 위하여 나무를 패며 물을 긷는”(수 9:27) 직무를 수행해 왔던 것입니다. 이는 그들이 여호와의 기업에 참여하게 됨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사울이 이스라엘과 유다 족속을 위하여 열심이 있으므로 그들을 죽인”(2하) 일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사울은 이들을 제거함으로 백성들에게 환심을 얻으려 했던 모양입니다. 예를 들면 히틀러가 유대인 말살 정책을 쓴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이것이 기브온 사람들이, “우리를 학살하였고 또 우리를 멸하여 이스라엘 영토 내에 머물지 못하게 하려고 모해”(5)했다는 뜻입니다. 이는 잘못된 충성이요, 열심이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어째서 중한 죄가 되며 이로 인하여 계속 3년이나 하늘이 닫히고 비가 내리지 않았단 말인가? 이점을 성경은, “그가 이미 손을 내밀어 언약하였거늘 맹세를 업신여겨 언약을 배반하고 이 모든 일을 행하였으니 피하지 못하리라 그러므로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그가 내 맹세를 업신여기고 내 언약을 배반하였은즉 내가 그 죄를 그 머리에 돌리되”(겔 17:18-19) 라고 말씀합니다. 이런 뜻입니다. 당초에 언약을 말든지, 일단 맹세를 했으면 끝까지 지켜야지 이를 파기하는 것은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한 “여호와의 이름”을 업신여긴 것이 된다는 말입니다. 다윗은, “내가 너희를 위하여 어떻게 하랴 내가 어떻게 속죄(贖罪)하여야 너희가 여호와의 기업을 위하여 복을 빌겠느냐”(3)고 묻습니다. 기브온 사람들은 대답하기를,
㉠ “사울과 그의 집과 우리 사이의 문제는 은금에 있지 아니하오며” , 즉 돈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럴 경우 성경은, “너희는 너희가 거주하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피는 땅을 더럽히나니 피 흘림을 받은 땅은 그 피를 흘리게 한 자의 피가 아니면 속함을 받을 수 없느니라” (민 35:33)고 말씀합니다.
㉡ 그런데 “이스라엘 가운데에서 사람을 죽이는 문제도 우리에게 있지 아니 하니이다” (4) 즉 복수할 권리가 자신들에게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다윗은 사울 집 족속 일곱을 처형하도록 내어주게 됩니다. “기브온 사람이 그들을 산 위에서 여호와 앞에 목매어 달매 그들 일곱 사람이 동시에 죽으니”(9상) 합니다. 이 비극적인 사건을 통해서 하시고자 하는 메시지가 무엇일까요? 이 말씀을 대할 때에 불가해(不可解)한 마음이 들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우리가 범한 죄를 속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달도록 내어주신 사건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므로 이 사건의 중심점은 다윗이, “내가 어떻게 속죄(贖罪)하여야 너희가 여호와의 기업을 위하여 복을 빌겠느냐”(3) 한 “속죄”(贖罪)에 있고, 속죄의 방도는 위에서 인용한 대로(민 35:33) “피가 아니면 속할 수가 없다”(레 17:11)는데 본문의 핵심이 있는 것입니다. 다윗도 이를 알았기에 여호와의 기업을 위한 대국적인 견지에서 그들의 요구대로 사울의 족속 일곱을 내어주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저들을 “목매달았다”는 말은 “저주”를 받았음을 의미합니다. 성경은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신 21:23)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늘에서 비가 시체에 쏟아지기까지”(10중), 즉 저주가 물러가기까지는 시체를 치울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비가 쏟아짐은 저주가 물러갔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이 사건은 우리를 죄가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이 나무에 달려 저주를 받은 사건으로 인도해줍니다. 사울의 족속들은 자신들의 죄 값으로 저주를 받은바 되었으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저주를 받으신 것입니다. 이점에서 “기브온” 사람들은,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要求)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롬 8:4) 한, “율법의 요구”를 하는 자로 등장합니다. 율법은 “죄 값은 사망이라” 한, 죄를 범한 자를 내어주기를 요구하였던 것입니다.   
이점에서 사울의 족속들이 기브온 사람들을 위하여 죽었다고 말해서는 아니 됩니다. 기브온 사람들에게 맹세한 “여호와의 이름”이 업신여김을 받았기 때문에 거룩하시고 의로우신 하나님의 이름과 영예를 위하여 죽어야만 했던 것입니다. 같은 논리로 우리 주님께서 죄 값을 사탄에게 지불했다고 말해서는 아니 됩니다. 하나님의 의로우심, 즉 공의(公義)를 위해서 우리 대신 저주를 받으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한 언약을 어기고 기브온 사람들을 죽임으로 저주가 임한 사건은, 인류의 시조가 “먹으면 반드시 죽으리라”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업신여기고 범함으로 저주가 임한 것과 대칭을 이룹니다. 그리고 사울의 족속이 죽임을 당함으로 저주가 물러가게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신 저주를 받으심으로 인류의 시조의 범죄로 말미암아 임한 저주가 물러가고 여호와의 기업에 복이 임하게 되었던 것과 짝을 이루게 됩니다. 본문은 사울의 족속들이 받은 저주를 통해서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 대신 저주를 받으신 십자가를 바라보기를 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구속사의 맥락에서 이 사건은 사울 족속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우리들의 이야기로 다가 오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의 궁극적인 기록목적은 우리를 대신하여 나무에 달리신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인도하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무에 달려 죽은 사울의 족속과, 전에 블레셋에 의하여 죽임을 당한 사울의 뼈와 그의 아들 요나단의 뼈를, “함께 베냐민 땅 셀라에서 그의 아버지 기스의 묘에 장사하되 모두 왕의 명령을 따라 행하니라 그 후에야 하나님이 그 땅을 위한 기도를 들으시니라”(13-14), 즉 하나님의 의로우심이 충족이 되었다 합니다. 


둘째 단원(15-22) 이스라엘의 등불
“블레셋 사람이 다시 이스라엘을 치거늘 다윗이 그의 부하들과 함께 내려가서 블레셋 사람과 싸우더니 다윗이 피곤하매 거인족의 아들 중에 무게가 삼백 세겔 되는 놋 창을 들고 새 칼을 찬 이스비브놉이 다윗을 죽이려 하므로”(15-16) 하고, 전쟁 이야기로 이어집니다.
블레셋의 “거인족의 아들”이란 골리앗의 아들을 가리키는 것이 아닐까요? 다윗이 탈진하여 그에게 죽을 위기에 직면한 것입니다. 이때 아비새가 다윗을 도와 그 블레셋 사람을 쳐죽이니, “왕은 다시 우리와 함께 전장에 나가지 마옵소서 이스라엘의 등불이 꺼지지 말게 하옵소서”(17) 합니다.
다윗이 어떤 의미에서 이스라엘의 “등불”이란 말인가? 이는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예표일 뿐 다음 장은 “구원을 감사하는 다윗의 노래”인데 다윗은, “여호와여 주는 나의 등불이시니 여호와께서 나의 어둠을 밝히시리이다”(22:29) 라고 찬양하고 있음을 봅니다.
다윗 자신도 “흑암”에 쌓여있는 자라고 말합니다. 이를 밝혀달라고 간구합니다. 그렇다면 어찌 다윗이 등불이 될 수가 있단 말인가?
다윗의 흑암뿐만이 아니라 온 인류의 “흑암”을 밝혀줄 진정한 등불이 누구란 말입니까?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요 1:8) 라고 증언하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약시대 내내 풍전등화와 같은 상황에서도 등불이 꺼지지 않도록 보존(왕하 8:19)하여주셨던 것입니다.
22장은 블레셋의, “이 네 사람 가드의 거인족의 소생이 다윗의 손과 그의 부하들의 손에 다 넘어졌더라”(22) 하고 마치고 있습니다. 이 말씀도 사탄을 발등상 되게 할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를 지향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여호와의 기업과 이스라엘의 등불”입니다.


나누어 봅시다
① 사울이 기브온 사람을 죽임으로 훼손된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② 기브온 사람들이 “율법의 요구”하는 자로 등장한다는 점에 대해서,
③ 저주가 임했다는 주제가 우리를 어디로 인도해주고 있는가에 대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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