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하나님을 우상으로 바꾼 이스라엘
5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너희 열조가 내게서 무슨 불의함을 보았관대 나를 멀리하고 허탄한 것을 따라 헛되이 행하였느냐.
2장의 내용은 1장에서 소명과, 사명을 받은 예레미야에게 주신 첫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본 장은 예레미야서 전체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이스라엘의 죄는 크게 두 가지로 요약이 됩니다. ①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숭배한 죄(11)와,
②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이방(애굽과 앗수르)을 의지한 죄(18, 36)입니다.
이 둘은 결국 하나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이 이방 신(25)을 섬기게 된 동기가 하나님보다 이방 나라를 의지했기 때문입니다. 즉 이방 나라가 강하고 부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이 섬기는 신 때문이라는 인식에서였습니다. 하나님을 배신하고 우상을 섬긴(음행) 것, 이것이 이스라엘이 심판을 받게 된 주된 원인입니다. 그러므로 본 장의 주제가 “하나님을 우상으로 바꾼 이스라엘”이 될 수가 있습니다. 이를 세 단원으로 나누어 상고하겠습니다.
첫째 단원(1-3) 처음 사랑을 회상케 하심
둘째 단원(4-21) 내게서 무슨 불의함을 보았느냐
셋째 단원(22-37) 내가 너를 심판하리라
첫째 단원(1-3) 처음 사랑을 회상케 하심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가서 예루살렘 거민의 귀에 외쳐 말할지니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네 소년 때의 우의와 네 결혼 때의 사랑 곧 씨 뿌리지 못하는 땅, 광야에서 어떻게 나를 좇았음을 내가 너를 위하여 기억하노라”(1-2).
첫 단원은 변절한 고멜과 같은 유다 백성에게 첫 사랑을 회상케 하는 내용입니다.
①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가라” 하십니다.
② 그리고 “예루살렘 거민의 귀에 외쳐 말할지니라”(2) 하십니다. 무엇이라 외치라 하시는가?
③ “소년 때의 우의와, 결혼 때의 사랑을 기억하노라” 하십니다.
이방 신을 섬기는 저들을 일깨우기 위해서 하신 첫 말씀은 결혼 비유입니다. “결혼 때의 사랑”이란 출애굽 때를 가리키는 말씀인데 출애굽 이전,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세워주신 언약 하에 있었을 때를 약혼시절이라고 말한다면, 고역으로 인하여 탄식하며 부르짖는 이스라엘 자손들을 편 팔과 큰 재앙으로 구속하여 내시고 시내산에서 만나시던 때는 “소년 때의 우의와, 결혼 때의 사랑”에 비유할 만한 것입니다. 그들은 출애굽을 통하여 하나님과 신혼살림을 차린 셈입니다.
④ “그 때에 이스라엘은 나 여호와의 성물(聖物) 곧 나의 소산 중 처음 열매가 되었나니”(3상) 하십니다. 이는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출 19:5-6)를 의미합니다.
⑤ 그러므로 “그를 삼키는 자면 다 벌을 받아 재앙을 만났으리라”(3하) 하십니다. 이는 “무릇 너희를 범하는 자는 그의 눈동자를 범하는 것이라”(슥 2:8)는 말씀과 같은 뜻입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처음관계가 이와 같았다는 것입니다. 이보다 귀한 대접이란 달리는 없습니다. 그들이 “소년 때의 우의와 결혼 때의 사랑”을 변함 없이 유지했다면 거룩한 나라와 소유된 백성으로서의 복된 삶을 자자손손, 길이길이 누렸을 것입니다.
너의 난 것을 말하건대
이와 같은 하나님의 극진하신 사랑이 에스겔 선지자를 통해서도 나타나고 있는데(겔 16:4-22) “너의 난 것을 말하건대” 하고 이스라엘 민족의 출신성분을 들어 말씀합니다. “네가 날 때에 네 배꼽 줄을 자르지 아니하였고 너를 물로 씻어 정결케 하지 아니하였고 네게 소금을 뿌리지 아니하였고 너를 강보로 싸지도 아니하였나니” 합니다. 이는 이스라엘의 근본과 출생 성분이 보잘것없음을 가리키는 묘사입니다. 그런 상태로 “들에 버리웠었느니라” 합니다.
그런데 임금이 그 곁을 지나다가 이 비참한 모습을 발견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죽은 줄로 알았는데 꼼틀거리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내가 네 곁으로 지나갈 때에 네가 피투성이가 되어 발짓하는 것을 보고 네게 이르기를 너는 피투성이라도 살라 다시 이르기를 너는 피투성이라도 살라 하고”(6) 그를 데려다가 물로 씻기고 기름을 바르고 양육하기를 수놓은 옷을 입히고 가죽신을 신기고 패물을 채우고 장성한 후에는 머리에 면류관을 씌워주며 “왕후(王后)의 지위에 나아갔느니라”(7-13) 하고 그를 왕후로 삼았다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나는 너희 남편임이니라”(3:14)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레미야에게 말씀하시는 “소년 때의 우의와, 결혼 때의 사랑”인 것입니다.
⑥ 하나님께서 이런 비유를 들어서 말씀하심은 그렇게 하여 왕후의 지위에 오르게 된 그가 “그러나 네가 네 화려함을 믿고 네 명성을 인하여 행음하되 무릇 지나가는 자면 더불어 음란을 많이 행하므로 네 몸이 그들의 것이 되었도다” 하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배신하고 우상을 숭배하는 저들의 배은망덕을 책망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런 일은 전무후무하니라”(겔 16:15-16) 하십니다.
⑦ 형제여, 신앙생활이 무미건조합니까? 부르심에 대한 감격도 없고 사명감도 잃어버렸습니까? 그럴 때는 “소년 때의 우의와, 결혼 때의 사랑”을 회상함이 도움이 됩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 성도들에게 “그러므로 생각하라 너희는 그 때에 육체로 이방인이요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당이라 칭하는 자들에게 무할례당이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라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엡 2:11-12) 하고 소망이 없고 비참했던 과거를 회상하게 하고 있습니다.
그런 다음에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가 외인도 아니요 손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엡 2:19) 하고 지금의 영광스러운 신분과 지위를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에베소 성도들만이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이방인이었던 우리들이 바로 그런 처지에 있었으나 하나님께서 “양자로, 왕 같은 제사장”으로 삼아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처음 사랑을 회상케 하시는” 하나님의 의도입니다.
둘째 단원(4-21) 내게서 무슨 불의함을 보았느냐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너희 열조가 내게서 무슨 불의함을 보았관대 나를 멀리하고 허탄한 것을 따라 헛되이 행하였느냐”(5).
둘째 단원은 첫 사랑을 버리고 변절한 백성을 책망하시는 내용입니다.
① “무슨 불의함을 보았관대”, 이 말은 “내가 네게 무슨 잘못을 했기에” 라는 뜻입니다. 31절에서도 “무슨 연고로” 내 백성이 말하기를 우리는 놓였으니 다시 주께로 가지 않겠다 하느냐고 따지고 있습니다. 미가 선지자를 통해서도 “내 백성아 내가 무엇을 네게 행하였으며 무엇에 너를 괴롭게 하였느냐 너는 내게 증거하라”(미 6:3). 도대체 무엇으로 너를 괴롭게 했단 말이냐? 하십니다. 그러므로 이는 분통이 터지는 말씀인 것입니다. 도대체 너희에게 무엇을 잘못했기에 등을 돌렸느냐고 묻고 있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듣는 형제의 심정은 어떠합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들은 어떻게 응답했습니까?
② 하나님을 멀리(5하)했다고 말씀합니다. 이는 상대적으로 우상을 가까이했다는 말인 것입니다.
③ 하나님을 찾지를 않았다(6)고 말씀합니다. 어려운 일을 당할 때에 “여호와가 어디 계시냐” 하고 하나님께 도움을 구한 것이 아니라 우상을 찾았다는 말인 것입니다. 백성들만이 그러한 것이 아니라 “제사장들과, 법관들과, 관리들과, 선지자들도”(8) 하나님을 찾지 않았다고 말씀합니다.
④ 하나님을 우상으로 바꾸었다(11)고 말씀합니다. “어느 나라가 그 신을 신 아닌 것과 바꾼 일이 있느냐 그러나 나의 백성은 그 영광을 무익한 것과 바꾸었도다”(11) 하십니다. 깃딤에서 게달까지 사람을 보내어 이 같은 일의 유무를 자세히 살펴 보라”고 말씀합니다. 즉 이런 뜻입니다. 이방인들은 헛된 우상을 숭배하면서도 그것을 바꾸려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의 백성은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다”(롬 1:23)는 것입니다. 이는 “너 하늘아 이 일을 인하여 놀랄지어다 심히 떨지어다 두려워할지어다”(12) 하신 대로 하늘이 놀라고 두려워할 일이라는 것입니다.
⑤ 하나님을 떠났다(17)고 말씀합니다.
⑥ 하나님을 버렸다(13, 19)고 말씀합니다.
⑦ 이를 요약해서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하십니다. 두 가지 악이란 ㉠ “생수의 근원 되는 나를 버린 것과, ㉡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물을 저축치 못할 터진 웅덩이니라”(13) 합니다. “생수의 근원”과, 물을 저축할 수 없는 “터진 웅덩이”를 대조해서 말씀합니다. “터진 웅덩이”란 우상숭배 즉 애굽과 앗수르를 가리킵니다. “네가 시홀의 물을 마시려고 애굽 길에 있음은 어찜이며 또 그 하수를 마시려고 앗수르 길에 있음은 어찜이뇨”(18) 하십니다.
어찌하여 하나님을 우상으로 바꾸었는가?
구약성경을 상고하다보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을 대하게 되는데 그것은 구약의 성도들이 하나님을 버리고 번번이 우상을 섬겼다는 사실입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단 말인가? 그 이유를 25절 말씀에서 찾을 수가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간곡한 권면을 뿌리치면서 “아니라 이는 헛된 말이라 내가 이방 신을 사랑하였은즉 그를 따라 가겠노라” 하고 막무가내로 따라갔다는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 “이는 헛된 말이라”고 여겼습니다. 이런 일은 인류의 시조로부터 시작이 되었습니다.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아니라 이는 헛된 말이라” 하고 사탄을 따라갔던 것입니다. 아담 하와가 왜 하나님의 말씀보다 마귀의 유혹을 따라갔습니까? “먹음직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창 3:6) 했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이방(異邦)이라 하면 애굽, 앗수르, 바벨론 등을 말합니다. 그 이방들은 모두다 이스라엘보다 크고 강했습니다. 그리고 부를 누리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를 “먹음직하고 보암직”한 것으로 부러워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저들의 부강은 저들이 섬기는 신이 가져다주는 것으로 여겼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방이 누리고 있는 그 축복을 받으려고 그들의 신을 섬기게 이른 것입니다.
㉡ “이방 신을 사랑한다”고 말합니다. 즉 하나님보다 세상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이 고질적인 우상숭배가 신약의 성도들과도 무관하지 않음을 깨닫게 됩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숭배니라”(골 3:5). 아시겠습니까? “탐심”이 우상숭배라고 말씀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니라 이는 헛된 말이라” 하고 십자가복음보다는 “축복”을 사랑하였은 즉 그를 따라 가겠노라“고 말한다면 이는 변명의 여지가 없는 우상숭배인 것입니다.
⑧ 현대교회를 진단하는 시금석이 “내가 너를 순전한 참 종자 곧 귀한 포도나무로 심었거늘 내게 대하여 이방 포도나무의 악한 가지가 됨은 어찜이뇨”(21) 하신 말씀이라 할 수가 있습니다. “순전, 참 종자, 귀한 포도나무”라 말씀하십니다. 현대교회가 “순전한 참 종자 곧 귀한 포도”가 되었다면 우상과는 무관한 것이요, 만일 이방 포도나무의 악한 가지가 되었다면 변명의 여지가 없이 “이방 신을 사랑”한 것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이방 포도나무의 악한 가지”란 세속화(世俗化)를 의미합니다. 우리에게 경종이 되는 것은 “왕들과 족장들과 제사장들과 선지자들”(26, 8)이 백성들의 세속화를 주도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과연 오늘의 교회상이 주님께서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마 16:18) 하신 교회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가? 나 자신이 “내가 참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요 15:5) 하신 그리스도를 닮고 있는가? 심각히 물어야할 것입니다. 문제는 “내게서 무슨 불의함을 보았느냐” 물으시는 하나님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처음 사랑을 버린 우리에게 있는 것입니다.
셋째 단원(22-37) 내가 너를 심판하리라
“주 여호와 내가 말하노라 네가 잿물로 스스로 씻으며 수다한 비누를 쓸지라도 네 죄악이 오히려 내 앞에 그저 있으리니 네가 어찌 말하기를 나는 더럽히지 아니하였다 바알들을 좇지 아니하였다 하느냐 골짜기 속에 있는 네 길을 보라 네 행한 바를 알 것이니라” (22-23).
본 단원은 심판하시겠다는 경고입니다. “죄 때문에 멸망하는 것이 아니라 회개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을 우상으로 바꾸었으면서도 “나는 더럽히지 아니하였다” 하고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려하지 않고 변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① 그래서 “네가 잿물로 스스로 씻으며 수다한 비누를 쓸지라도 네 죄악이 오히려 내 앞에 그저 있으리니”(22) 하십니다. 빌라도가 “물을 가져다가 무리 앞에서 손을 씻으며 가로되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다”(마 27:24)고 말한다고 해서 죄를 면할 길이 없음과 같이, 잿물과, 수다한 비누로 씻는다해도 그들이 범한 죄악은 변명의 여지가 없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② 그런데도 “그러나 너는 말하기를 나는 무죄하니 그 진노가 참으로 내게서 떠났다”(35)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③ 그러므로 “보라 네 말이 나는 죄를 범치 아니하였다 함을 인하여 내가 너를 심판하리라”(35하)고 선고하시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이 멸망을 당한 후, 예레미야는 애가(哀歌)를 통해서 이렇게 호소하고 있습니다.
입을 티끌에 댈지어다 혹시 소망이 있을지로다
때리는 자에게 뺨을 향하여 수욕으로 배불릴지어다
이는 주께서 영원토록 버리지 않으실 것임이며
저가 비록 근심케 하시나
그 풍부한 자비대로 긍휼히 여기실 것임이라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며 근심하게 하심이
본심이 아니시로다(애 3:29-33).
그리스도와의 만남
① 하나님께서는 저들이 “생수의 근원”(13)을 버렸다고 책망하십니다. 구약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복의 근원, 생수의 근원, 목자, 왕, 반석, 피난처, 구원자” 등은 일차적으로 하나님을 가리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구속사의 맥락으로 바라보면 그 하나님이 “임마누엘”하심으로 그리스도가 “생수의 근원”이 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생수의 근원”을 버렸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배척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실로 그리스도는 구약시대로부터 버림을 당하셨다는 말씀이 됩니다.
② 한 걸음 더 나아가 성경이 “생수의 근원”에서 생수가 솟아나게 되는 것이 어떻게 해서 가능하게 되었다고 말씀하고 있는가를 확인해보십시오. 성경은 말씀합니다. “너는 반석을 치라 그것에서 물이 나리니”(출 17:6) 하고 반석이 치심을 받음으로 가능해졌음을 알게 됩니다. 주님께서 고난을 당하심으로 말미암아 생수는 비로소 솟아나게 되었던 것입니다(고전 10:4). 만일 이를 떠나서도 생수가 솟아날 수가 있다면 그리스도는 헛되이 죽으신 것이 됩니다.
모세는 마지막 말을 통해서 “그러한데 여수룬이 살찌고 발로 찼도다 네가 살찌매 부대하고 윤택하매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을 버리며 자기를 구원하신 반석을 경홀히 여겼도다”(신 32:15) 합니다. 저들이 살찌고 부대하고 윤택하매 그 반석을 “발로 찼도다”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게”(마 21:42) 하셨습니다.
결론은 분명합니다. 유다가 멸망당한 죄, 즉 하나님을 우상으로 바꾼 죄란 다름 아닌 “다른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행 4:12) 하신 그리스도를 배척한 죄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배척한다면 “내가 너를 심판하리라” 하신 “심판”만이 있을 뿐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우상으로 바꾼 이스라엘"입니다. 이것이 현대교회의 실상은 아닌지 경성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