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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 2

예레미야 12장, 자기 집을 버린 하나님의 슬픔

작성자유도순|작성시간17.02.18|조회수353 목록 댓글 0

렘 12장, 자기 집을 버린 하나님의 슬픔

 

  7내가 내 집을 버리며 내 산업을 내어 던져 내 마음의 사랑하는 것을 그 대적의 손에 붙였노라.

 

  예레미야서의 중심주제는 심판에 대한 경고입니다. 이럴 경우 하나님의 의지(意志)만이 부각되기 쉽습니다. 감정과 눈물도 없으신 차디찬 하나님으로 말입니다. 그런데 본 장과 다음 장을 통해서 하나님의 감성(感性)을 대할 수가 있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가 자신의 고난을 호소하자 하나님은 자기 집을 버리며 산업을 내어 던질 수밖에 없는 하나님 자신의 슬픔을 나타내십니다. 그러므로 12장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과 인간의 배은망덕을 대하게 됩니다. 이를 세 단원으로 나누어 상고하겠습니다.

 

첫째 단원(1-6) 요단의 창일한 중에서는 어찌하겠느냐

둘째 단원(7-13) 내 산업이 삼림 중의 사자같이 되었도다

셋째 단원(14-17) 산업으로 다시 인도하리니

 

 

첫째 단원(1-6) 요단의 창일한 중에서는 어찌하겠느냐

 ① “여호와여 내가 주와 쟁변할 때에는 주는 의로우시니이다 그러나 내가 주께 질문하옵나니 악한 자의 길이 형통하며 패역한 자가 다 안락함은 무슨 연고니이까”(1).

본 단원은 예레미야의 질문에 하나님께서 답하시는 구도입니다. 예레미야는 믿었던 고향 사람들에게 배척을 당하고 죽이려는 음모가 있음을 알게 되자 깊은 회의에 빠진 듯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질문을 합니다. “악한 자의 길이 형통하며 패역한 자가 다 안락함은 무슨 연고니이까”. 이런 의문은 시편에서도 대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참으로 이스라엘 중

마음이 정결한 자에게 선을 행하시나

나는 거의 실족할 뻔하였고

내 걸음이 미끄러질 뻔하였으니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시하였음이로다(시 73:1-3).

 

그리고 이런 말씀을 성경에 기록케 하심은 이러한 의구심이 성도들에게 일반적으로 제기되는 의문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② “주께서 그들을 심으시므로 그들이 뿌리가 박히고 장성하여 열매를 맺거늘”(2상) 합니다.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시는”(마 5:45) 일반 은총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뿐만이 아니라 불신자들도 하나님의 은총을 입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③ 그런 은총을 입었으면서도 “그들의 입은 주께 가까우나 그 마음은 머니이다”(2하) 합니다. 이는 불신자들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이라 하면서 형식적으로 섬기는 자들을 가리킵니다. 주님께서도 “외식하는 자들아 이사야가 너희에게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일렀으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마 15: 7-9) 하고 책망하셨습니다.


④ 여기 악인의 특성이 나타나는데 “이 땅 거민이 악하여 스스로 말하기를 그가 우리의 결국을 보지 못하리라(4하) 한다는 말입니다. “결국을 보지 못한다”는 말은 예레미야가 경고하는 심판, 그런 종말이 자신들과는 상관이 없는, 그런 결국이 자기들에게는 미치지 않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즉 그들은 천년만년 “형통과, 안락”(1)을 누리게 되리라고 여기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 말대로 “결국”을 보지 못하게 될까요?

⑤ 예레미야가 이렇게 말함은 악한 자의 길이 형통함을 질시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에게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네가 보행자와 함께 달려도 피곤하면 어찌 능히 말과 경주하겠느냐 네가 평안한 땅에서는 무사하려니와 요단의 창일한 중에서는 어찌하겠느냐”(5). 여기 “보행자, 평안한 땅”은 고향 아나돗을 가리키고, “달리는 말과, 요단의 창일”은 앞으로 예루살렘에서 겪게 될 더 혹심한 환난과 핍박을 의미합니다. 아나돗이란 작은 고을에서의 핍박을 두려워하고 불평한다면 “요단의 창일한 중에서는 어찌하려느냐” 하십니다.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격려하심으로 앞으로 닥칠 환난을 대비시키고 계십니다.


⑥ 그렇다면 “우리의 결국을 보지 못하리라” 한 대로 악인이 영영 형통하고 안락할 것인가? 앞에서 인용한 시편 73편에서는 “내가 어찌면 이를(악인이 형통함) 알까 하여 생각한즉 내게 심히 곤란하더니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저희 <결국>을 내가 깨달았나이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주께서 참으로 저희를 미끄러운 곳에 두시며 파멸에 던지시니 저희가 어찌 그리 졸지에 황폐되었는가 놀람으로 전멸하였나이다”(시 73:16-19) 하고 그들의 결국이 졸지에 황폐하게 되고, 전멸하였다고 진술하고 있습니다.

 

 

둘째 단원(7-13) 내 산업이 삼림 중의 사자같이 되었도다

 본 단원은 예레미야가 하나님께 “내가 주께 질문하옵나니 악한 자의 길이 형통하며 패역한 자가 다 안락함은 무슨 연고니이까”(1) 하면서 “양을 잡으려고 끌어냄과 같이 그들을 끌어내시되 죽일 날을 위하여 그들을 예비하옵소서”(3) 하고 호소한 데 대한 답변이라 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예레미야가 고발하고 있는 그들을 가리켜,

① “내 집”(7상),

② “내 산업”(7중),

③ “마음의 사랑하는 것”(7하),

④ “내 포도원”(10상),

⑤ “나의 낙토(樂土)(10하)라고 말씀합니다.

그런 내 집을 “버리며”, 내 산업을 “내어 던져”, 내 마음의 사랑하는 것을 “그 대적의 손에 붙였노니”(7) 하십니다. 그리하여 낙토가 “황무지”(10)가 되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하심은 “마음의 사랑하는” 자를 징벌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어떠하심을 나타내시는 말씀입니다.


⑥ “이 땅이 슬퍼하며, 그 황무지가 나를 향하여 슬퍼하는도다”(4, 11) 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이는 땅이 슬퍼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을 나타낸 것이 아니겠습니까? 다음 장에서는 “너희가 이를 듣지 아니하면 나의 심령이 너희 교만을 인하여 은근히 곡할 것이며 여호와의 양 무리가 사로잡힘을 인하여 눈물을 흘려 통곡하리라”(13: 17) 하십니다. 어찌하여 성전(내 집)을 버리셔야만 했고, 택하신 산업을 내어 던져, 마음에 사랑하는 것을 그 대적의 손에 붙이셔야만 하는가?

⑦ 마음에 사랑하는 “내 산업(이스라엘)이 삼림 중에 사자같이 되었다”(8상)고 말씀합니다. 그들은 더 이상 목자가 인도하는 대로 따라가는 순한 양이 아니라 “사자”(獅子)가되었다고 말씀합니다.

⑧ “나를 향하여 그 소리를 발하고”(8중), 즉 포효하면서 대어들고 있다고 말씀합니다.


⑨ “내 산업이 내게 대하여 무늬 있는 매가 아니냐”(9) 하십니다. “무늬 있는 매”란 고기를 뜯어먹는 사나운 육식조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러한 묘사는 시편 22편에 수록된 메시아 예언으로 우리를 인도해줍니다. ㉠ “많은 황소가 나를 에워싸며 바산의 힘센 소들이 나를 둘렀으며 내게 그 입을 벌림이 찢고 부르짖는 사자 같으니이다”(12-13), ㉡ “나를 사자 입에서 구하소서”(21) 합니다. ㉢ “개들이 나를 에워쌌으며 악한 무리가 나를 둘러 내 수족을 찔렀나이다”(16) 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박을 당시의 그들은 마치 맹수와 같고, 사나운 육식조와 같았던 것입니다. 이것이 “유다인과 예루살렘 거민 중에 반역이 있도다”(11:9) 하신 반역이었던 것입니다.

⑩ 이 말씀이 어째서 예레미야의 질문에 대한 답변이 되느냐 하면 주님께서 잡히시던 날 밤에 제자들을 향하여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요 15:18)고 말씀하신 그런 뜻에서입니다.

 

 

셋째 단원(14-17) 산업으로 다시 인도하리니

  “내가 내 백성 이스라엘게 산업으로 준 산업을 다치는 나의 모든 악한 이웃에게 대하여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보라 내가 그들을 그 땅에서 뽑아 버리겠고 유다 집은 그들 중에서 뽑아내리라”(14).

① “나의 모든 악한 이웃”이란 하나님의 산업인 이스라엘을 침공하는 이방 나라들을 가리킵니다. 북쪽 이스라엘은 앗수르에 망했고, 남쪽 유다도 바벨론에 의하여 멸망당할 처지에 놓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징벌의 도구로 사용하시지만, 그들이 이스라엘보다 선하기 때문도 아니며, 하나님의 산업(선민 이스라엘)을 “다치는”(침략) 행위가 죄 없다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땅에서 뽑아 버리겠다”, 즉 그들도 심판하시겠다고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② 그런데 본 단원의 중심점은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사로잡고 있는 “유다 집은 그들 중에서 뽑아 내리니”(14하), 즉 해방시켜서 “내가 그들을 뽑아낸 후에 내가 돌이켜 그들을 긍휼히 여겨서 각 사람을 그 산업으로 각 사람을 그 땅으로 다시 인도하리니”(15) 하시는 데 중심점이 있는 것입니다. 즉 포로에서 돌아오게 하여 회복시켜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렇게 말씀하신 하나님께서는 포악한 바벨론을 바사를 들어서 뽑아버리시고 마음에 사랑하는 하나님의 산업은 바벨론에서 뽑아 귀환하게 하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긍휼”입니다.

③ 성경은 한 걸음 더 나아가고 있습니다. 이방 나라들이 바알을 버리고 “그들이 내 백성의 도를 부지런히 배우면” 하나님께로 돌아오면 “그들이 내 백성 중에 세움을 입으려니와”(16), 즉 이방인도 구원에 참여하게 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유대인과 이방인)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엡 2:14) 한 신약시대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취될 말씀인 것입니다. 만일 “그들이 그리하지 아니하면 내가 반드시 그 나라를 뽑으리라 뽑아 멸하리라”(16-17) 하고 복음을 배척하면 그 결국은 멸망임을 말씀하십니다.


④ 그러므로 “내가 내 집을 버리며 내 산업을 내어 던져 내 마음의 사랑하는 것을 그 대적의 손에 붙였노니”(7) 하신 말씀이 예루살렘을 바벨론에 붙이실 것에 멈추는 말씀이 아닌 것입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 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롬 8:32), 이것이 “내 마음의 사랑하는 것을 그 대적의 손에 붙였노니”의 절정인 것입니다. 이는 결코 비약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내 집”을 헐도록 내어주신 그 “성전”이 누구에 대한 모형인가를 아는 사람이라면 그렇게는 말하지 못할 것입니다. 모형인 성전은 저들의 죄 값으로 헐렸지만, 참 성전 되시는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죄 때문에 헐리셔야만 했습니다. 이를 알았다면 좀 어려운 일을 당한다고 “무슨 연고니이까” 하고 하나님과 “쟁변”(1)할 겁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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