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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 1

계시록 5장 : 봉인을 떼기에 합당한 어린 양 1

작성자유도순|작성시간17.01.21|조회수753 목록 댓글 0

5장 :  봉인을 떼기에 합당한 어린 양

 

5, 장로 중에 한 사람이 내게 말하되 울지 말라 유대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겼으니 그 두루마리와 그 일곱 인을 떼시리라 하더라.

 

요한은 4장에서 하늘 “보좌 위에 앉으신 이”(4:2) 곧 하나님을 보았는데, 5장에서는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의 오른 손에 “봉인된 두루마리”가 있는 것과 “어린 양”을 보게 됩니다. 이점에서 몇 가지 물음을 제기하게 되는데 ㉠ “인봉한 두루마리”는 무엇인가? ㉡ “인봉한 두루마리와, 어린 양”이 어떤 상관관계가 있는가? ㉢ 그런데 하늘 위에나 땅 위에나 땅 아래에 능히 두루마리를 펴거나 보거나 할 이가 없다는 의미가 무엇인가?

㉣ 두루마리를 펼 자가 없다고 요한이 크게 울 이유가 무엇인가? ㉤ 그리고 유대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기었다”는 이김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 두루마리의 인봉을 떼는 시기는 언제인가? 등입니다. 여기가 계시록의 해석이 갈리게 되는 두 번째 분기점이 됩니다. 여기서 단추를 잘못 끼게 되면 계시록 전체가 뒤틀리게 되고 맙니다. 이를 세 단원으로 나누어 상고하겠습니다. (두 번으로 나누어 올리겠습니다)

 

첫째 단원(1-5) 봉인된 두루마리

둘째 단원(6-10) 일찍 죽임을 당한 어린 양

셋째 단원(11-14) 천사와 만물의 찬양

 

첫째 단원(1-5) 봉인된 두루마리

① “내가 보매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 두루마리가 있으니 안팎으로 썼고 일곱 인으로 봉하였더라”(1) 합니다. 너무나 중요한 대목이기에 시간이 걸리더라도 차근차근 말씀을 드려야만 하겠습니다. 우선적으로 도표를 통해서 5장 전체의 구조를 파악해보시기를 바랍니다.

첫째 단원(1-5)을 보면 첫 절에서,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 두루마리가 있으니”(1) 하고 첫 초점을 “일곱 인으로 봉한” 두루마리(1)에 맞추고 있습니다. 이 두루마리가 무엇일까 하고 모두가 궁금해 하고 있는데, “누가 그 두루마리를 펴며 그 인을 떼기에 합당하냐”(2)고 질문을 하므로 그 초점이 인봉한 두루마리에서 인을 뗄 자가 “누구인가”로 옮겨집니다.

요한은 그 “누구”가 없기 때문에 크게 울게(4) 되는데, “유대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겼으니 그 두루마리와 그 일곱 인을 떼시리라”(5)고 그 초점이 유대 지파의 〈사자〉에게로 모아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첫 단원의 핵심이 봉인 된 두루마리인 것 같으나, 실상은 “유다 지파의 사자”인 것입니다. 어찌하여 사자(獅子)라고 말하는가? “이기셨으니까” 사자라 하는구나 라고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② 그런데 둘째 부분(6-10)에서는 “사자”가 아니라 “어린 양이 섰는데”(6) 하고 어린 양이 등장함으로 첫 초점이 어린 양에게 맞춰집니다. 요한이 들은 것은 분명 “유다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기었다”(5)는 말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요한은 당연히 “사자”가 등장을 해서 인을 떼게 될 것을 기대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한의 기대와는 달리 등장한 것은 나약한 양, 그것도 “어린 양”이었습니다.

그리고는 “어린 양이 나아와서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 손에서 두루마리를 취하시니라”(7)고 말씀합니다. 인을 떼기 위해서 두루마리를 취하신 것은 사자가 아니라 〈어린 양〉입니다. 계시록에는 “어린 양”이라는 말이 29회나 등장하고 있는데, 여기가 첫 언급입니다.

왜 어린 양이 등장을 하는가? 봉인된 두루마리의 인을 떼기 위해서입니다. 이점을 구속사라는 맥락으로 보게 되면 하나님의 구원계획은 어린 양이 등장하여 봉인된 두루마리의 인을 떼는, 즉 감추어졌던 하나님의 지혜를 드러냄으로 펼쳐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 사실이 얼마나 놀랍고도 중요한지요.

 

그리스도를 어린 양이라 하는 의도

③ 요한은 1장에서 주님을 “예수 그리스도”라고 세 번(1, 2, 5)이나 부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이 지점에 이르러서 “어린 양”이라는 새로운 이미지로 부르고 있는 것일까요? “일찍 죽임을 당했다”(6, 9, 12)는 “죽으심” 때문입니다. 인을 떼기 위해서 두루마리를 취하신 분도 어린 양이요, 우리의 죄를 위하여 죽어준 것은 사자가 아니라 “어린 양”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5장의 핵심은 “어린 양”에서, “일찍 죽임을 당한 것 같더라”(6, 9, 12) 하고 어린 양의 “죽으심”으로 모아지고 있음을 놓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이를 정리하면 5장은 “인봉한 두루마리→사자→어린 양→어린 양의 죽음”으로 모아지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정리하면, “계시록에서 어린 양은 인으로 봉한 두루마리와 함께 등장을 하는데, 봉인한 인을 떼심이 죽으심과 결부되어 있다”라고 정리할 수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어린 양보다는 늠름한 사자를 좋아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도 자신들이 어린 양이 되기보다는 사자가 되기를 원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유다 지파의 사자(창 49: 9)를 어린 양으로 보내셨습니다. 그리하여 물어뜯게 하신 것이 아니라 죽임을 당하게 하셨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주여 그리 마옵소서”(마 16:22)하고 간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죄와 사망과 사탄을 정복하는 비결, 곧 “감추어졌던 비밀(골 1:26), 하나님의 지혜”(고전 2:7)였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인이 떨어지고 두루마리는 열려지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정리하면 “봉인된 두루마리”와, “유다 지파의 사자”에게 모아졌던 초점이 “어린 양”에게로 모아지고, 그 초점은 다시 “죽임을 당하심”으로 모아지고 있다가, “일곱 인을 떼시리라”(5)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④ 봉인된 “두루마리”에 대한 여러 해석이 가해지고 있는데, 해석의 원리는 5장의 문맥과, 계시록 전체의 문맥과, 복음서의 맥락과 나아가 신구약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구속사의 맥락으로 해석되어야만 안전한 것입니다.

요한은 안 것으로 여겨집니다. 왜냐하면, “하늘 위에나 땅 위에나 땅 아래에 능히 그 두루마리를 펴거나 보거나 할 자가 없기”(3) 때문에 크게 울었다고 말씀하기 때문입니다. 크게 운 까닭이 무엇이겠습니까? 이 두루마리가 무엇이며, 만일 이 두루마리의 인을 뗄 자가 없다면 우리가 어떻게 된다는 것을 알았기에 그토록 크게 울었을 것입니다.

봉인된 두루마리가 무엇을 의미하는 지를 네 생물과 24장로들도 알고 있었다고 여겨집니다. 왜냐하면 “두루마리를 가지시고 그 인봉을 떼기에 합당하시도다”(9)하고 기뻐 찬양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요한이 알고, 생물들과 장로들이 알고 있는데 정작 성도들이 이를 모르고 있거나 이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면 부끄러운 일이라 하겠습니다.

 

⑤ 그러므로 1절을 주의 깊게 관찰해보면 일곱 인으로 봉했다 하면서 “안팎으로 썼다”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두루마리의 내용이 “비밀”이라는데 강조점이 있는 것이 아님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만일 비밀문서라면 안팎으로 쓰지도 않았을 것이요, 이를 알 길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강조점이 어디에 맞춰져 있는가? “펼 자, 뗄 자”, 즉 해결할 자가 없다는데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봉인된 두루마리를 성경과는 별개의 비밀문서인 양 말하는 것을 조심해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10:2절에는 “펴 놓인 작은 두루마리”가 또 등장합니다. 만일 이 두루마리들을 성경과는 별개의 것으로 여긴다면 성경이 충족(充足)된 계시가 되지 못한다는 뜻이 되고 맙니다. 그리고 성경보다는 이 비밀문서(秘密文書)에 더 관심을 갖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계시록을 암호문서처럼 여기고 이를 해독했노라고 기발한 해석들이 등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충족된 계시 성경

⑥ 이점에서 인봉한 두루마리의 내용을 “일곱 인, 일곱 나팔, 일곱 대접”과 결부되어 전개되는 “심판의 책”으로 여기지 말아야 한다는 점입니다. 그런 심판의 내용을 담은 두루마리였다면, 전개되는 재앙으로 볼 때에 인봉할 이유를 발견할 수가 없고, 봉인을 뗄 자가 없다고 요한이 크게 울지도 않았을 것이요, 장로들과 생물들과, 천사들이 그토록 찬양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다섯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보니 하나님의 말씀과 그들이 가진 증거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제단 아래서”(6:9) 자신들의 피를 갚아주시기를 호소하고 있는데 이것이 봉인된 두루마리의 내용이겠습니까?

그러므로 어린 양이 “그 인봉을 떼기에 합당”(9) 하시고, 그리하여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12)하시고, “하늘 위에나 땅 위에나 땅 아래에 능히 두루마리를 펴거나 보거나 하기에 합당한 자가”(3) 달리는 없다면, 성경 전체의 통일성(統一性)으로 볼 때, 이 두루마리는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행 4:12)하신 구원계획이라고 밖에는 다른 해석을 용납하지 않게 만듭니다. 주님은 “내가 이를 위하여 이때에 왔나이다”(요 12:27) 하십니다.

 

이런 맥락에서 봉인된 두루마리가 무엇인가 하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담당하신 구속사역과 결부시켜 해석되어야 마땅합니다. 왜냐하면 요한이 크게 울었다는 것은 낙망(落望)함을 나타냄인데, 주님께서 구속사역을 “단번”에 다 이루어주셨음에도 낙망할 일이 남아있다고 말한다면 결과적으로 주님께서 “다 이루었다”고 선언하신 구속사역의 성취를 훼손하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일곱 인으로 봉하였더라”(1)는 이미지는 구약시대의 규례를 그대로 차용한 표현임을 인식해야만 합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명에 의하여 아나돗에 있는 밭을 사게 되는데, “증서를 써서 봉인하고 증인을 세우고 은을 저울에 달아 주고 법과 규례대로 봉인”(렘 32:10-11)을 했다고 말합니다.

언제까지 봉인해두어야 하는가? 기업 무를 자가 나타날 때까지입니다. 왜 기업 무를 자가 나타나야만 하는가? 자신의 힘으로 되찾는 다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인봉을 뗄 기업 무를 자가 없게 되면 크게 울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⑦ 이런 전체적인 맥락으로 볼 때 “일곱 인으로 봉했다”는 이미지는 죄 값에 팔린 “매매증서, 노비문서(奴婢文書)”와 같은 것을 상징적으로 묘사한 것으로 볼 수가 있습니다. 이점이 네 생물과 24장로들의 찬송 중에,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9하)한 점이 증언해주고 있는데 “피로 샀다”는 말은 우리가 팔렸기 때문입니다.

이점을 사도 바울은, “우리를 거스르고 불리하게 하는 법조문으로 쓴 증서를 지우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무력화하여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으시고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느니라”(골 2:14-15)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기업 무를 자가 되셔서 봉인을 떼시고 값을 대신 지불해주신 것입니다.

 

기업 무를 자

여기에 중요한 조건이 있는데 기업 무를 근친(近親)이 있다하여도 회복시켜줄 능력(能力)이 없다던가, 자원(自願)하지 않는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점입니다. 룻기서의 중심주제가 “기업 무를 자”인데, “아무개”라는 사람은 “내 기업에 손해가 있을까 하여”(룻 4:6) 기업을 무르지 못하겠다고 기피합니다. 그래서 다음 차례인 보아스가 자원하여 무르게 되는데 성경은 그를 가리켜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의 친족 중 유력(有力)한 자가 있으니 이름은 보아스더라”(룻 2:1)고 말씀합니다.

 

⑧ 이 “유력한 자”라는 점을 계시록에서는 “이기었으니 그 두루마리와 그 일곱 인을 떼시리라”(5)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만일 유력한(이긴 자) 기업 무를 자가 없다면 팔린 자에게는 절망이요, 크게 울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찬송할지로다 여호와께서 오늘날 네게 기업 무를 자가 없게 아니 하셨도다”(룻 4:14)고 찬양하는데, 우리에게 기업 무를 자가 없게 아니 하신 하나님과, 우리의 잃었던 기업을 찾아주기 위해서 자원(自願)하여 대신 죽어주신 어린 양은 찬양을 받으시기에 너무나 합당하신 것입니다.

믿는 마음으로 말씀을 드립니다만, 주 성령께서는 인봉한 두루마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쯤은 성도들이 알고 있으려니 여기신 것으로 믿어집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은 죄 값에 팔려 그 기업을 상실하고 사탄의 노예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히 2:15)하는 신세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 지파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 그리스도께서 기업 무를 자가 되어주셔서 “그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기를 속전으로 주셨으니”(딤전 2:6)한 대로 우리를 속량하사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을 삼아”(10하) 주심으로 잃었던 기업을 회복시켜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이 글이 오늘날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눅 4:21)고 선언하신 희년(禧年)의 기쁜 소식이었던 것입니다.

 

⑨ 만일 인을 떼심이 구속사역과 결부되는 것이 아니라면, “내가 보매 어린 양이 일곱 인 중에 하나를 떼시는데”라고 “어린 양”이 뗀다고 말하지 않고, “사자가 떼었다”고 말했을 것입니다. 아닙니다. 두루마리를 취하신 분도 “어린 양”(5:7)이요, 인을 떼시는 분도 분명히 “어린 양”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봉인된 두루마리는 “곧 감추어졌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고전 2:7)한 하나님의 구원계획이라 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인으로 봉한 두루마리가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1)에 있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는 것이 성경 전체의 증거와 부합합니다.

이점이 “사람들을 피로 사서”(9)라는 말씀이 뒷받침합니다. 그러면 어린 양이 “죄 값(속전)”을 누구에게 드렸느냐는 문제가 대두될 수가 있는데, 사탄에게 지불했다는 것은 어불성설이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라”하십니다. 왜냐하면 “죄인을 의롭다”고 선언하심이 하나님의 공의와 관련이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대속하심이 없이 그냥 의롭다고 여겨주셨다면 사탄의 참소를 면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⑩ 그러므로 “유대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기었다”(5)는 표현을 구속사라는 맥락으로 보면 넓고도 깊은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왜냐하면 첫째는 창세기 49:10절에서 그리스도가 유다 지파를 통하여 오시리라 한 성취요, 둘째는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 할 것이요”(사 11:1)에 대한 성취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유다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라는 말은 창세기로부터→이사야서까지 뻗쳐있는, 구약을 요약하는 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것입니다.

이점에서 “이기었으니, 인을 떼시리라”는 시제(時制)를 문제 삼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만, 묵시문헌에서 시제는 절대적으로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주님은 잡히시던 날 밤 행하신 다락방 강화에서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3)고 과거시제로 말씀하셨는데 주님의 승리는 부활에서 온전히 성취될 미래(未來)에 되어 질 일이었던 것입니다.

어린 양이 인을 뗄 때마다 전개되는 내용도 시간 순서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 주제 별로 다루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겼으니, 인을 떼시리라”는 것을, “유력한 자이기 때문에 해결할 수가 있으시다”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아무튼 “어린 양이 “인을 떼심과 이기심”은 우리의 죄 값을 대신 지불하신 “죽으심”과, 사망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신” 하나의 사건으로 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의 이기심이 없었다면 인을 떼실 수도 없었고, 떨어지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예를 들면 빚을 갚으러 간 사람이 붙들려서 돌아오지 않고 있다면 빚이 다 해결이 되지 않았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예수는 우리 범죄 한 것 때문에 내어줌(죄 값을 지불)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이기심)”(롬 4:25). 이것이 인을 떼시기에 합당한 어린 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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