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의로우심을 옹호함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3:25-26).
본문(25-26)에서 가장 강조하고 있는 바는, “하나님의 의로우심”입니다. 25절에서는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말씀하고, 26절에서도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하고 말씀하면서, 이어서 “자기도 의로우시며” 하고 재차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의로우심”, 이 보다 더 귀중하고 중요한 문제는 없습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구원보다도 더욱 중요하다는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신 목적은 사람을 구원하시는 것이, 전부도 아니고 먼저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는 것이 먼저요, 사람을 구원함은 다음이었습니다.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이것이 먼저요,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는 나중입니다.
사도는 두 가지 방면에서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옹호(擁護)합니다. 첫째는 “곧 이 때에” 예수를 “화목제물로 세우셨다”면, 그 이전(以前), 즉 구약시대에 범한 죄에 대해서는 어떻게 하셨는가 하는 문제이고, 둘째는 의로우신 하나님께서 의롭지도 못한 죄인(우리)들을 의롭다고 여겨주시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公義)에 모순 되지 않는가 하는 점에 대해 옹호합니다.
①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25중) 하고 말씀합니다. 이는 크게 두 마디로 되어 있는데,
㉠ 첫째는, “전(前)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25중) 라는 말씀입니다. “간과”(看過)라는 말을 새 번역 에서는 “너그럽게 보신 것은” 하고 번역하고, 공동번역에서는 “참고 눈 감아 주심”이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무엇을 보고도 못 보신 척하셨다는 것인가? “죄”(罪)입니다. 구약시대란 하나님께서 죄를 보고도 못 보신 척하신 시대였다는 것입니다.
② 둘째는, “길이 참으시는 중에”(25상) 라는 말씀입니다.
㉠ “참으심”은 “아노게” 라는 말을 번역한 것인데, 그 뜻은 무거운 짐을 들고 참고 있는 모습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약시대에 지은 모든 죄를 마치 무거운 짐을 들고 참고 있는 것같이 하셨다는 것입니다. 구약시대란 “죄를 간과하시면서, 길이 참으신” 기간이었다는 것입니다.
③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25하) 하는 말씀입니다.
㉠ “나타내려하심”이란, 구약시대란 “하나님의 의로우심”(공의)을 나타내지 못한 시대였다는 것이 됩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길이 참으셨다”는 말씀과 결부(結付)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의로우심을 나타내지” 않으시고, 언제까지 길이 참으셨다는 말인가?
④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26상) 합니다.
㉠ “곧 이 때”란, “이 예수를 하나님이,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25) 한 때를 가리킵니다. 즉 온 인류의 모든 죄를 자기 아들에게 담당시키실 때까지 참으셨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십자가사건은 첫째로,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나타낸 사건이었다는 말씀입니다.
㉡ 이를 요약을 한다면, 하나님은 자기 아들에게 온 인류의 죄를 담당시키시기까지는,
㉮ 죄 짓는 것을 보고도 못 보신 척 길이 참고 계셨다,
㉯ 그렇게 하실 때에 죄를 묵과할 수 없는 하나님의 “공의”(公義)는 나타내시지를 못하고 계셨다,
㉰ 언제까지 참고 계셨는가? “곧 이 때”, 즉 자기 아들을 화목제물로 삼으실 때까지 참으셨다는 말씀입니다.
⑤ 이것이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라”(25하)는 뜻입니다. 왜 그렇게 하셨습니까?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그렇게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주님이 담당하신 십자가에는, “하나님의 공의와, 하나님의 사랑”이 동시에 나타내신 사건이었던 것입니다.
㉠ “목사님, 구약시대는 정결한 짐승을 속죄제로 드림으로 죄 사함을 받지 않았습니까?”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 제사는 그림자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그것은 장차 오실 어린양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짐승이 죽는다고 죄 값이 지불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는 황소와 염소의 피가 능히 죄를 없이 하지 못함이라”(히 10:4), 그것은 참 것이 오기까지 죄를 참으시고 간과하시는 방편(方便)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⑥ 나는 두 가지를 반문하겠습니다.
㉠ 첫째로 짐승의 피가 죄를 대속해 줄 수 있었다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셔야할 필요가 어디 있습니까? 성경은 “매일 서서 섬기며 자주 같은 제사를 드리되 죄를 없게 하지 못하거니와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히 10:11-12) 하고 말씀합니다.
㉡ 둘째로 짐승의 피가 죄를 대속해줄 수 있었다면 죄로 말미암아 굳게 닫힌 휘장이 어찌하여 열리지가 않았습니까? 히브리서 9:8절에서는, “성령이 이로써 보이신 것은 첫 장막이 서 있을 동안(구약시대)에 성소에 들어가는 길이 아직 나타나지 아니한 것이라” 하고 말씀합니다.
⑦ 히브리서 9:15절은 말씀합니다. “이를 인하여 그는 새 언약의 중보니 이는 첫 언약(구약시대) 때에 범한 죄를 속하려고 죽으사”, 아시겠습니까? 신구약(新舊約)시대를 막론하고 죄 사함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말미암아 뿐입니다. 차이가 있다면 구약의 성도들은 장차 오실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믿었고, 신약의 성도들은 이미 오신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차이뿐입니다.
㉠ 그러므로 구약의 성도들은 예표로 주신 속죄제, 유월절을 지키면서 실체(實體)가 오시기를 기다렸고, 신약의 성도들은 성찬(聖餐)을 행하면서 재림의 주를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아브라함도 나의 때 볼 것을 보고 기뻐하였느니라”(요 8:56) 하고 말씀하셨고, 욥도 “내가 알기에는 나의 구속자가 살아계시니 후일에 그가 땅위에 서실 것이라”(욥 19:25) 하고 고백했던 것입니다.
⑧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던 죄에 대한 진노를, “곧 이 때에” 자기 아들에게 쏟으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26상) 합니다.
㉠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셨다”는 “의”는, 우리에게 입혀주신 칭의(稱義)가 아니라, 죄에 대해 진노하시는 하나님의 공의(公義)를 말합니다. 저수지에 물이 고이듯 쌓이고 쌓였던, 참으시고 참으셨던 진노가 남김이 없이 자기 아들에게 부어졌습니다. 이때에 하나님의 의는 비로소 만족히 여김을 받으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26상)의 뜻입니다.
㉡ “자기도 의로우시며” 하는데, 그렇다면 하나님이 불의하신 때가 있으셨다는 말인가? 아닙니다. 이는 “하나님이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신” 상태를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사건은 죄인을 구원하는 것이 먼저도, 전부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사 하나님은 참으로 의로우시다 하고 천명하는 것이 먼저입니다. 그 진노를 자기 아들에게 쏟으셨다는 것입니다.
⑨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26하) 합니다.
㉠ 여기에 하나님의 두 가지 큰 속성(屬性)이 나타납니다.
㉮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한 것은, 하나님은 의로우시다는 “공의”의 나타남이고,
㉯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은, 우리에 대한 “사랑”의 나타내심입니다.
㉡ 하나님께서는 형제의 죄를, 죄를 알지도 못하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대신 담당케 하신 후에 그를 믿는 형제를 의롭다고 여겨주셨는데, 이 일에 무슨 하자(瑕疵)라도 있단 말이오? 하나님의 의로우심에 무슨 손상이라도 입으셨단 말이오? 하고, 사도는 묻고 있는 셈입니다.
㉢ 이점을 호세아서에서는, “내가 네게 장가들어 영원히 살되 의(義)와 공변됨과 은총(恩寵)과 긍휼히 여김으로 네게 장가들며 진실(眞實)함으로 네게 장가들리니”(호 2:19-20)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구원은 공명정대하게 이루어주신 것입니다. 첫 창조 때는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셨으나, 재창조 때는 “하나님 보시기에 의로우셨더라”인 것입니다.
⑩ 이렇게 행해주심으로 구약시대의 모든 죄와, 현재의 모든 죄와, 앞으로의 모든 죄도, 나와 여러분의 죄까지도,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요 1:29) 하고, 그에게 담당시키셨습니다.
㉠ 누구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하는가? “예수 믿는 자들”이 아니라 “예수 믿는 자”라고 단수(單數)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로 “너”를 의롭다 하시려고 이렇게 행해주셨다는 말씀입니다. 8:2절에서도,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하시고, 갈라디아서 4:7절에서도 “그러므로 <네>가 이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합니다. “구원은 도매금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각각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믿는 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 눈을 감고 십자가를 바라보십시오.
㉮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그곳에 그렇게 나타난 것을 봅니다.
㉯ 또한 우리의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지 않을 수 없는 하나님의 공의가 그렇게 나타난 것을 봅니다. 우리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의 사랑의 높이와, 우리의 죄의 깊이를 바라보면서 입술을 깨물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