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이 다릅니다.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 이니라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6:22-23).
본문은 6장의 결론(結論)부분입니다. 그러므로 6장은 물론 이제까지 진술한 모든 말씀들을 상기하면서 만원경적으로 바라 볼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나무는 보면서 숲은 보지 못하는 잘못을 범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두 가지 “마지막”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는 “그 마지막이 사망”(21하)이요, 다른 하나의 “마지막은 영생(永生)이라”(22하) 말씀합니다.
①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니라”(22) 합니다.
㉠ 사도는 5장 마지막 절(21)에서 두 왕국이 있음을 말씀했습니다. 그것은,
㉮ 죄의 왕국과,
㉯ 의의 왕국입니다.
㉡ 모든 사람은 이 두 왕국 중 어느 하나에 속해 있다는 사실도 말씀했습니다. 우리도 전에는 죄가 왕 노릇 하는 사망의 나라에 속해 있었으나, 이제는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어떻게 해서 가능하게 되었는가?
② 6:1-11절까지에서 이를 설명해 주었습니다.
㉠ 형제는 우리가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것이 어떻게 가능하게 되었는가를 말해줄 수가 있습니까? 그것은 “연합교리”라는 신비를 통해서 이루어졌는데, 그것을 한마디로 표현한 것이,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 지어다”(11) 하고 말씀했습니다.
③ 5:20절에서는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쳤나니” 하고 말씀했고, 6:14절에서는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 하고 말씀했습니다.
㉠ 이 말은 죄를 지어도 괜찮다는 말인가? 그럴 수 없느니라 하고 단언하면서, 6:12-20절까지에서,
㉮ “불의의 병기와, 의의 병기”(13),
㉯ “죄의 종과, 의의 종”(17-18),
㉰ “전과 이제, 그 때와 이제”(19-21)를 대조(對照)시켜 말씀했습니다.
④ 그런 후에 6:21-22절에 와서는,
㉠ “너희가 죄의 종이 되었을 때에 무슨 열매를 얻었느뇨 이제는 너희가 그 일을 부끄러워하나니 이는 마지막이 사망(死亡)임이니라”(20절),
㉡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永生)이니라”(22) 하고, 6장은 “사망과, 영생”이라는 결론(結論)에 도달하는 문맥(文脈)입니다.
㉢ 모든 사람들은 두 부류 중 어느 한편에 속해 있다는 것입니다. 형제는 “죄의 왕국과 은혜의 왕국, 불의의 병기와 의의 병기, 죄의 종과 의의 종” 중에 어디에 속해 있는지 자신의 정체(正體)성에 분명합니까?
⑤ 이제 본문을 살펴보면,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에서 해방되었다”(22상) 하고 말씀하는데, 이점은 이미 18절에서 “죄에게서 해방되어” 하고 말씀한 바를 상기시키는 말씀입니다.
㉠ 죄에게서 해방되었다는 말은, “나는 이제 자유자다. 행동에 구애 받을 필요가 없다. 죄를 지어도 죄가 나를 주관치 못할 터이니까”, 이런 뜻이 절대로 아닙니다.
㉡ 반대로 죄에게서 해방되었다는 뜻이, “이제는 죄를 전연 안 짓게 되었다”는 그런 의미도 아닙니다. 우리 몸에는 아직도 죄의 요소가 남아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란 점진적으로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자들입니다.
㉢ “죄에게서 해방되었다”는 말은, 죄의 영역(領域)에서 벗어났음으로 죄가 주장하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사도는 같은 말을 다른 각도에서 반복적으로 강조하면서, 조금씩 전진(前進)해 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⑥ “하나님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22중) 합니다.
㉠ 그리스도인들을,
㉮ 16절에서는, “순종의 종”이라 부르고,
㉯ 18-19절에서는 “의의 종”이라고 부르고,
㉰ 22절에서는 “하나님의 종”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 그리스도인의 신분(身分)이 “순종의 종, 의의 종, 하나님의 종”임을 명심하십시다. 그렇게 한다면 필연적으로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22중)를 맺게 된다는 것입니다. 19절에서도 “거룩함에 이르라” 하고 권면한바 있습니다. “거룩”은,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 지어다”(벧전 1:16) 하는, 하나님의 속성이기 때문입니다.
㉢ 성경 다른 곳에서는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의의 열매”(빌 1:11, 약 3:18)라고도 말씀합니다. “의의 열매와,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가 어떻게 다른 것일까요. 넓은 의미에서는 같은 뜻입니다만, “의의 열매”란 의로운 행실을 가리키는 반면, “거룩함”이란 경건한 신앙상태를 의미합니다. 하나님께 드리기 위하여 선택된 “번제 양”처럼 거룩하게 구별하여 놓은 상태, 하나님께서 쓰시기 위하여 택하여 따로 세워 놓으신 상태를 의미합니다.
⑦ 결국 “거룩한 나무에 의의 열매”가 맺힌다고 말할 수가 있겠지요.
㉠ “불순종과, 순종”의 진행과정을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 불순종은 → 불의를 낳고 → 부정과 불법에 이릅니다.
㉯ 순종은 → 의를 낳고 → 거룩함에 이릅니다.
㉡ 그런데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나니”(22절) 하지 않고, “영생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나니” 하면 어떻게 될까요? 그랬다가는 큰 일이 벌어집니다. 왜냐하면 영생은 순종의 열매가 아니라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은사(恩赦)이기 때문입니다. 사망(死亡)은 당연한 죄의 삯으로 주어지는 열매입니다.
⑧ 그러나 영생(永生)은 받을 만한 공로나 자격이 없는 자에게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은사인 것입니다.
㉠ 그러므로 사도는 “하나님의 은사는 영생이니라” 직행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하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영생은 “그리스도 우리 주 안에”만 있기 때문입니다.
㉡ 5:21절에서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니라” 하고 말씀합니다. 영생은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만 있고, 말미암아”로만 연결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생”(永生)을 말하면서 사도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빼놓을 리가 있겠습니까?
⑨ 이제 말씀을 요약하겠습니다.
㉠ 첫째는 두 주인(主人)만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너희 아비는 마귀다”(요 8:44) 하신 것은, 네 주인은 마귀다 하는 것과 같은 뜻입니다. 얼마나 충격적인 말씀입니까? “당신의 주인은 누구요? 당신은 죄의 종이요? 의의 종이요?”, 이는 모든 사람에 대하여 물어야할 질문인 것입니다.
㉡ 둘째는 어느 상전을 섬기느냐에 따라 그 마지막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사도는 특히 “마지막이 다르다”는 이점을 강조하면서 6장을 끝맺고 있습니다. 죄의 종이 되어, 죄라는 상전을 섬기면 그 마지막은 “사망”(20절)입니다. 의의 종으로써 하나님을 섬기면, 그 마지막은 “영생”(22)이라고 말씀합니다.
㉢ 비가 오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닥치기 전에는 모래위에 지은 집이나 반석위에 지은 집이 다 안전한 듯이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이 다릅니다. 5:12절에서부터 6장 마지막까지, 계속 두 줄기가 흐르고 있었습니다. 두 줄기의 마지막이 하나는 사망(死亡)이요, 하나는 영생(永生)입니다. 마지막이 다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