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의 영과 양자의 영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라』(8:15).
본문에는 “종의 영과, 양자의 영”이 있습니다. 사도는 14절에서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고 말씀했습니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무서워하는 종의 영이 아닌,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즉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종의 영과, 양자의 영”은 무엇인가?
①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15상) 합니다.
㉠ 15절 안에는 “종의 영과, 양자의 영”이 대조(對照)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가 말씀하려는 의도는 “종의 영과, 양자의 영” 자체를 규명하려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너희는 이제 “종이 아니라, 양자”로 입적(入籍)이 된 “하나님의 자녀”라는 점을 확신시켜주려는데 있는 것입니다. 종의 영”을 받은 자는 “종”의 신분이요, 양자(養子)의 영을 받은 자는 “아들” 신분이라는 말씀입니다.
② 그러면 “종의 영”은 무엇이고, “양자의 영”은 무엇을 가리키는가?
㉠ 먼저 “종의 영”입니다.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15상) 합니다.
㉮ “무서워하는 종의 영”이라고 말씀합니다.
㉯ “다시…받지 아니하였고” 하는 것은, 전에는 종의 영을 받은 때가 있었음을 나타냅니다.
㉡ 그래서 어떤 분은, “양자의 영”이 성령이라면, “종의 영”은 마귀의 영일 것이라고 속단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피상적인 관찰이요, 자세히 주목해 보면 “종의 영과, 양자의 영”은 상반되는 대조(對照)가 아니라, 종의 영을 받은 단계(段階)에서 양자의 영을 받는 단계로 나아갔다는 진행과정(進行過程)임을 알게 됩니다.
③ “종의 영과, 양자의 영”은 다 같이 “받았다” 하고 말씀합니다.
㉠ 그렇다면 “종의 영”은 무엇이며, 누구로부터 “받은” 것일까요?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를 성령께서 율법을 통하여 사람 속에 일으키는 특별한 효과, 즉 회개(悔改)케 하는 과정으로 보고 있습니다. 율법을 주신 목적이 어디에 있다고 했습니까? “죄를 깨닫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렇다면 성경을 읽기만 하면 자동적으로 죄를 깨닫게 된단 말인가?
④ 7:9절에서 “전에 법을 깨닫지 못할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 하고 말씀했습니다. “계명(誡命)이 이르매”라는 뜻은 바울이 십계명의 마지막 계명인 “탐내지 말라”는 말씀을 이때에 처음으로 알았다는 그런 뜻이 아닙니다. 성령께서 그 계명을 조명(照明)해주심으로 비로소 그 “탐심”과 죄를 깨닫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무서워하는 영에 사로잡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 사도가 7:24절에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하는 것은, 인위적(人爲的)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항거할 수 없는 어떤 영에 의한 것임이 분명합니다. 이것이 바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은” 상태라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분명히 성령의 활동으로 죄를 깨닫고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는 것입니다.
⑤ 성령 강림 후 최초로 행한 베드로 사도의 설교를 듣고는, “저희 마음에 찔려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고”(37) 하고 부르짖는 장면이 있습니다. 설교를 듣는 자는 누구나 이런 반응을 일으킵니까? 누가 그들 속에 이러한 마음을 일으키게 했습니까? 그들은 “종의 영”을 받은 것입니다.
㉠ 빌립보 옥 사장은 무서워 떨며 바울과 실라 앞에 엎드려서, “선생들아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으리이까”(행 16:30) 하고 탄원하는 것을 봅니다. 기사와 이적을 보면 다 이런 반응을 일으키게 되는 것입니까? 주님의 부활을 목격했던 수직하던 군사들, 소경이 눈을 뜨고, 앉은뱅이가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는 것을 본 제사장들은 그러하지 않았습니다. 옥사장의 마음속에 성령께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 바울 자신도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 자부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러했던 그가 “다메색 도상에서 빛 가운데 주님을 만난 후에 눈을 떴으나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사람의 손에 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가서 그는 사흘 동안을 보지 못하고 식음을 전폐하니라”(행 9:8) 하고 말씀합니다. 말하자면 이런 상태가 사도가 말씀하고 있는 종의 영을 받은 상태가 아닐까요?
㉢ 넓은 의미에서는 율법(律法) 하에 있을 때가 종의 영을 받는 때요, 좁은 의미에서는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기 위한 성령의 특별하신 역사라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다루시는 방법과 순서에 주목하게 됩니다.
⑥ 신약을 주시기 전에 구약을 주셨으며, 그리스도를 보내시기 전에 죄를 깨닫는 율법을 먼저 주셨으며, 사도 바울도 복음을 말씀하기에 앞서서 죄부터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양자의 영을 받기에 앞서 종의 영을 먼저 경험하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 병든 자가 아니면 의원이 쓸데없는 것과 같이, 자신이 죄인임을 깨달은 자가 아니면 구주의 필요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현대교회가 이런 과정(過程)을 명심하고 있느냐 하는 점입니다. 형제는 “종의 영”을 받고 두려움과 정죄감에 빠져 괴로워 하다가, “아들의 영”을 받고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짖게 되었습니까? 형제는 율법을 통과해서 복음에 들어 왔습니까? 율법이라는 몽학선생의 인도를 받아 그리스도를 만나셨습니까?
㉡ 그리하여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 하는 비명을 지른 후에, 자신의 죄를 가려주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1:17) 하는 복음을 만나게 되었느냐 하고 묻고 있는 것입니다. 율법의 정죄를 당해 본 자만이 의롭다함의 감격을 압니다. 종의 영을 받고 무서워 떨어 본 자만이, 양자의 영을 받고 “아바 아버지” 하고 부르짖는 환희를 맛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 오늘날에는 이 순서가 무시된 채 “좋으신 하나님,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서 태어난 사람”으로 직행(直行)하고 있는 감이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主)로 고백한 것이 아니라, 자기가 주인(主)이 되어 예수 그리스도를 자기의 필요를 채워줄 종처럼 이용해 보려는 것입니다.
⑦ 그렇다면 “양자의 영”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는 점은 분명해진다 하겠습니다.
㉠ 사도는 이점을 갈라디아서에서,
㉮ “유업을 이를 자가 모든 것의 주인이나 어렸을 동안에는 종과 다름없어서 그 아버지의 정한 때까지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 있나니 이와 같이 우리도 어렸을 때에는 세상 초등학문 아래 있어서 종노릇 하였더니”(갈 4:1-3) 한 것이 “종의 영”의 단계라면,
㉯ “너희가 아들인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갈 4:6) 하는 단계가, “양자의 영”의 단계라 할 수가 있습니다.
㉡ 그러므로 “양자의 영(15)과, 아들의 영”(갈 4:6)은 같은 의미의 다른 표현일 뿐입니다. 그러면 “아들의 영”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 어떻게 가능하게 되었는가? “마지막 아담은 살려주는 영이 되었나니”(고전 15:45) 합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음으로 많은 열매를 맺듯이”(요 12:24),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말미암아 “살려주는 영”이 되심으로 가능해진 것입니다.
⑧ 그러면 어찌하여 “아들의 영이라 하지 않고, 양자의 영”이라 부르고 있는가? 사도는 로마서 1장부터 8:14절에 이르기까지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부르기를 6번(1:2, 3, 4, 9, 5:10, 8:3)이나 했습니다. 그랬던 사도가 8:14절에 이르러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게 되자, 잠시 생각에 잠겼을 법합니다.
㉡ “너희가 아들이다” 하고 말씀하는 사도의 의중에는, “그러나 이것은 잊지 말아라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친아들이시고, 너희는 양자로 아들이 되었다” 하고 말씀하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 또한 당시 로마에서는 노예를 “양자”(養子)로 맞이하는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양자”가 된다는 것은 그 가문(家門)의 일원으로 입적되었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는 자신만의 문제가 아니라, 가문의 명예에 수치를 돌리지 않도록 책임 있는 삶을 살아야만 한다는 책임이 따르는 것입니다 비천한 노예 신분이었던 자를 양자로 삼아주신 하나님 아버지의 영예를 최우선으로 생각해야만 한다는 뜻이 들어 있는 것입니다.
⑨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15하) 합니다.
㉠ 노예로써 상전(上典)으로 섬기던 분을, 양자가 되어 “아버지”라 부르게 된 최초의 감격이 어떠했을 것인가? 그러므로 갈라디아서에는 “부르게 하셨다”(갈 4:6)로 되어 있는데 본문에서는 “부르느니라”가 아닌, “부르짖느니라”로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폭발적으로 터져 나오는 외침입니다. 과거에 부르짖었던 때가 있었다는 뜻도 아니고, 미래에 그렇게 부를 날이 온다는 것도 아닙니다. 지금 현재 “아바 아버지” 하고 터져 나오는 부르짖음인 것입니다.
㉡ 초대교회 예배 시에는 이처럼, “아바 아버지” 하고 부르짖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고 합니다. 형제는 예배 시에 이런 감격을 맛봅니까? 기도할 때에 이러한 외침이 있습니까? “아바 아버지”라는 말씀 속에는 어린이가 아빠를 부르는 것 같은 친근감이 있습니다. 따스함이 있습니다. 사랑스러움이 있습니다. 우리의 예배에 이러한 숨결을 느낍니까? 형제여 어서 “아바 아버지” 하고 부르짖어 보십시오.
㉢ 하나님의 양자가 되어 생명책에 녹명이 된 형제를 성령님이 인도해주고 계십니다. 이제 후로는 하나님의 자녀답게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서, 성령을 좇아 행하여야 하겠습니다. 형제가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은 최초의 경험이 언제였습니까? 이것이 “종의 영과 양자의 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