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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 1

로마서 8:28, 합력하여 선을 이르시는 하나님

작성자유도순|작성시간20.02.01|조회수7,192 목록 댓글 0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8:28).

 

 “모든 것이 합력(合力)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하는 본문 말씀은 많은 성도들이 애송(愛誦)하는 성경 구절 중 하나입니다. 왜냐하면 개인의 삶 속에 일어나는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주실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모든 것이 합력(合力)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하는 말씀은, 구속사(救贖史)를 대변해주는 결론(結論)이기도 합니다.


요셉은 형들에게,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善)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창 50:20) 하고 말합니다.

사탄은 해하려고 대적하나 그 때마다 하나님은 “악을 선으로 바꾸사” 천하 만민을 구원하시려는 계획을 추진해 오셨던 것입니다. 성경은 문제에 대한 해답입니다. 문제는 언제나 미련한 인간이 저지르고, 하나님은 이를 “선으로” 바꾸어 놓으십니다. 이 말씀은 참으로 많은 성도들에게 위로와 격려와 용기(勇氣)를 준 말씀입니다.

 

①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28) 합니다.

㉠ 사도는 우선적으로, “우리가 알거니와”(28상) 합니다. 이는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26중) 한 것과 대조(對照)를 이루는 말씀입니다. 이를 문맥적으로 보면,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18상) 한, “고난”(苦難)과 결부가 되는데, 이런 뜻입니다. 어떤 시련을 당하게 될 때에, 왜 이런 고난을 당해야 하는지 그 원인(原因)은 알지를 못하나, 그러나 “우리가 알거니와”, 즉 내가 확신하는 것은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28하) 하는, 결과(結果)만은 안다는 것입니다.

 

② 그런데 아무나 다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만 해당이 된다는 것입니다.

㉠ 성경의 많은 말씀 중에서, 시험과 고난을 당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말씀만큼 위안과 용기를 주는 말씀이 달리는 없다 하겠습니다. 지금은 내가 왜 이런 고난을 당해야 하는 지도 모르고, 또 빌 바를 알지 못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것을 합력(合力)하여 결과(結果)는 선을 이루어주실 것이라는, 이것 하나만은 확신(確信)한다는 것입니다.

 

㉡ “모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모든 것”은 글자 그대로 모든 것입니다. 그렇다 해도 모든 것 속에는 좋은 것, 그래서 누구나 바라고 갖기를 원하는 것보다는 원치 않는 것들, 즉 앞에서 말씀한바 그리스도인들이 현재 당면하고 있는 여러 가지 고난들을 가리킨다 하겠습니다. 좋은 것을 가지고 선을 이루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입니다.

 

③ 그러나 우리가 연약하여 실수하고 넘어져서 더럽힌 것들, 다른 사람들에 의해서 상처입고 괴로움 당하는 것들, 대적 마귀로부터 침노를 받아서 겪게 되는 정신적 물질적 신체적 시험과 고난들, 이런 것들을 빚어서,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 사도는 어떤 근거에서 이것을 확신할 수가 있었을까요? 사실 고난을 당하면 바울만큼 당한 사람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참고 고후 11:23-33). 그런 중에서도 바울은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 첫째로 “하나님의 전지”(全知)하심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29절의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라는 말씀에 나타나 있습니다.

㉯ 둘째로 “하나님의 전능”(全能)하심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이점이 31절의 “누가 대적하리요” 하는 말씀에 나타나 있습니다. 능력이 없다면 “합력하여 선”을 이룰 수는 없는 것입니다.

 

㉰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사랑”이심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이점이 32절의 “자기 아들을 내어주셨다”는 표현에 나타납니다. 이러한 사랑의 하나님께서 결국은 선을 이루어 주실 것을 믿었습니다.

㉱ 무엇보다도 하나님은, “시작하신 것을 반드시 이루신다”는 주권(主權)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이점이 “끊어지지 않는 연결고리”(29-30)에 나타나 있습니다. 그래서 8장은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39) 하고 마치고 있는 것입니다.

 

㉡ 사도는 전지(全知) 전능(全能)하신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 한번 시작하신 일은 반드시 이루시는 신실(信實)하신 하나님이심을 믿었기 때문에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하고 말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④ “합력하여 선을 이루신다”는 표현 속에는, 우리의 모든 삶을 주관하시고 섭리하신다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그런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합력하여 선”을 이루실 수가 있으신 것입니다.

㉠ 전지(全知)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계획하셨고, 사랑의 하나님께서 섭리(攝理)하시며, 전능(全能)하신 하나님께서 성취해 나가신다면,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실 것”을 확신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⑤ 구속사(救贖史)에 있어서 “합력하여 선을 이루신” 가장 대표적인 사건이 십자가사건입니다.

㉠ 십자가사건 자체는 비참한 것이며, 저주의 십자가였고, 악의 극치(極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십자가사건을 통해서 죄인이 의인이 되고, 사탄의 노예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지옥에 떨어져야할 자들이 천국에 들어가게 되는, 놀라운 선을 이루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을 박은 사건이 인간이 저지른 “악”(惡)의 극치였다면, 하나님의 구속사역은 “악을 선”으로 바꿔 놓으신, “선”(善)의 극치였던 것입니다.

 

⑥ 그러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한, “선”(善)이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요?

㉠ 성경이 말씀하는 선은 인간이 생각하고 기대하는 것 같은, 모든 것을 잘되게 한다, 즉 만사형통과는 다른 것입니다. “선을 이루느니라”는 말은 유익(有益)하게 한다는 뜻입니다. 때로는 실패가 유익이 될 수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병듦이 유익이 될 수도 있습니다. 시편 기자는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시 119:71) 하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 그러므로 “선”이란 인간이 당장 보기에 좋다고 여기는 그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시는, 최종적인 선, 곧 우리의 영원한 구원(救援)을 의미합니다.

 

⑦ 사도는 빌립보서 1:6절에서,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 하고 말씀합니다. “모든 것을 합력하여” 이 “선”(善)을 이루어 나가신다는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 예수의 날”이라고 말씀합니다. “세상의 날” 동안 잘 된다 하여도, “그리스도 예수의 날”에 잘못된다면 이것을 어찌 “선”이라고 말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하는 말씀은, 어느 한 부분(部分)이나 과정(過程)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최종적(最終的)인 결과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사도는 “그 마지막은 사망이니라,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6:21, 22) 하고, 마지막이 다르다고 말씀했습니다.

 

㉡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한 과정(過程)만을 보고 낙망해서는 아니 됩니다. 멀리 그 날을 내다보는 원시(遠視)하는 안목이 필요합니다. “이런 것이 없는 자는 소경이라 원시치 못한다”(벧후 1:9) 하고 말씀합니다. 성경도 구속사라는 선(線)으로 보지를 못하고, 점(點)으로 보기 때문에 길을 잃고 방황하게 되는 것입니다.

 

⑧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말씀이,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18상) 한, “고난”에 관한 문맥(文脈)에서 주어지고 있다는 점을 놓치지 말아야만 합니다. 11장에는 토기장이 이야기가 나옵니다. 진흙 한 덩이로 귀히 쓸 그릇을 만들고자 하는데 굽는 과정에서 견디지 못하고 뛰쳐나왔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시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같이 이상이 여기지 말고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벧전 4:12-13) 하십니다.

 

㉡ 형제여, 고난이란 “환난→ 인내→ 연단→ 소망”을 이루는 과정이라는 점을 명심하십시다. 이점을 요셉의 생애가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의 운명은 기구하다고 밖에는 표현할 길이 없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으므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이다”(창 45:5) 하고 진술합니다. 요셉은 모든 사건들 배후에 하나님의 섭리의 손이 있다는 점을 믿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창 50:20) 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⑨ 다음으로 생각할 점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28중)이라는 표현입니다.

㉠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었다”는 표현은, 하나님의 절대주권(主權)을 세우는 말씀입니다. 사도의 표현방식을 주목해 보십시오.

 

㉮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라고 말씀하다가,

㉯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하고 표현을 바꾸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 왜 그렇게 하고 있을까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라고만 말한다면,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되는” 근거(根據)가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오해될 소지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면 초점이 사람에게 맞춰지게 되고, 인과응보(因果應報) 사상이 되어서 인본주의(人本主義)가 되고 맙니다. 그래서 사도는 얼른,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하고 표현을 바꾸고 있는 것입니다.

 

㉢ “합력해서 선을 이루게” 되는 근거는,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택하시고 구원계획 속에 포함시켜 주셨기 때문에, 이를 성취하시기 위해서 그렇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사랑에 강조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주권적인 “하나님의 뜻”에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⑩ 그렇다면 어찌하여 먼저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라고 말씀을 했을까요? 왜 하나님을 믿는 자라고는 하지 않았을까요?

㉠ 형제여, 사도가 로마서 1장에서 이 말씀을 했다면, “하나님을 믿는 자”라고 말을 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본문이 놓여 있는 위치(位置)는 영광스러운 복음진리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여기까지 인도함을 받은 사람이라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의 단계(段階)에 이르게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을 믿는다고 다 사랑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란 하나님을 끝까지 믿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만이 고난 중에도 “우리가 알거니와” 하고 말할 수 있는 자입니다.

 

⑪ 말씀을 마치기 전에 다시 한번 28절이 놓여 있는 문맥을 상기시키고자 합니다.

㉠ 26절에서는,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말하고,

㉡ 28절에서는 “우리가 알거니와” 하는 문맥입니다. 이 두 말씀을 결부시키면 어떤 뜻이 되는가? 이 사람은 자기가 왜 이런 고난(苦難)을 당해야만 하는지 그것은 알지를 못하나, 그러나 한 가지 아는 것은 사랑의 하나님, 전능의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주신다”는 것, 이것만은 확신한다는 뜻인 것입니다.

 

⑫ 결론(結論)은 선(善)입니다. 이 원리(原理)만은 확신한다는 것입니다.

㉠ 형제여,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그리스도인 밖에는 없습니다. 이 사람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28상)입니다.

 

㉮ 형제여, 고난이 닥치거든, “제가 하나님을 사랑하나이다” 하고 말씀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위로 중에,

㉯ “내가 너를 택하였노라” 대답하실 것입니다.

㉰ 그러면 형제는,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하고,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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