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성경강해 1

로마서 10:11-17절 차별이 없는 구원의 방도

작성자유도순|작성시간20.06.07|조회수715 목록 댓글 0

이스라엘의 불순종

 성경에 이르되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저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저희가 다 복음을 순종치 아니 하였도다 이사야가 가로되 주여 우리의 전하는 바를 누가 믿었나이까 하였으니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10:11-17).

 

 사도는 앞 문단에서,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10) 하고 작은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렇다면 믿음은 어디서 오는 것인가?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17) 하고 말씀하면서,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12) 합니다.

 

① “성경에 이르되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差別)이 없음이라” (11-12상) 합니다. 3:30절에서도, “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또는 무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라” 합니다.

㉠ 핵심은 “저를 믿는 자”라 한 “믿음”에 있습니다. “믿느냐? 믿지 않느냐” 하는 외에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差別)이 없음이라” 하고 말씀합니다. 사도는 이미 3:22절에서,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마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差別)이 없느니라” 하고 말씀한 바입니다.

 

㉡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저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富饒)하시도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12하13) 합니다. 11절에서는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고 부정적으로 말씀하고, 13절에서는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하고 긍정적으로 말씀합니다. “저를 부르는 모든 사람(12),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13)란 다름 아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를 가리킵니다.

 

② 11-13절 안에는 믿는 자에게 주어지는 세 가지 축복이 있습니다.

㉠ 첫째는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11) 하십니다. 형제는 최대의 부끄러움이 무엇인지 알고 있습니까?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의 날에 벌거벗은 모습, 즉 예복을 입지 못한 부끄러움입니다. 아담 하와는 영광을 잃어버리자,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창 3:10)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주신 “하나님의 의”로 가림을 받지 못한다면 최대의 부끄러움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 둘째는 “저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12) 하고 말씀합니다. 우리 주님은 본래 대단한 부자십니다. 그렇게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富饒)케 하려 하심이니라”(고후 8:9) 하고 말씀합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후사가 되는(8:17) 말할 수 없는 부요함을 주시기 위해서 스스로 낮추사 가난하게 되셨습니다. 이 부요는 차별이 없이 저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 셋째는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13) 한 “구원”(救援)입니다.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을 뿐만이 아니라, 구원을 얻고, 부요하게” 된다고 말씀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로 모신다는 것은 얼마나 큰 영광이요 축복입니까? 얼마나 안전합니까? 얼마나 든든한 일입니까? 그런데도 당신은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마음에 믿기를” 주저하고 망설일 것입니까?

 

③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14) 합니다.

㉠ 사도는 “의의 법을 좇아간 이스라엘”(9:31)이 어찌하여 의에 이르지 못했는가 하는 유대인의 구원문제를 말씀하다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13)는 말씀을 하게 되자 그만 선교문제로 빨려 들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 사도는 14-15절을 통해서 어느 한 사람이 “주의 이름을 부르게” 되기까지의 과정을 설명합니다. 이 설명은 “믿음”으로부터 시작하는 순서로 되어 있습니다.

㉮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14),

㉱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 “기록된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15) 합니다.

 

이렇게 말씀하는 사도의 의중은, “헬라인이나 야만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1: 14-15) 한, 복음전파 사명의 중대성을 인식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 사도가 인용한 것은 이사야 52:7절인데,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평화를 공포하며 복된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구원을 공포하며 시온을 향하여 이르기를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하는 자의 산을 넘는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고” 한 말씀을 축소해서 인용한 것입니다. 이 말씀이 1차적으로는 바벨론 포로들의 해방을 가리킵니다만, 구속사의 맥락에서 보면 이를 예표로 한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사탄의 포로가 해방되게 될 복음을 가리킵니다.

 

㉣ 그런데 어찌하여 “발이 아름답다” 했는가? 이사야 52:7절에는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라는 말이 두 번 강조되어 있습니다. “발”은 좋은 소식, 즉 “복음을 가져오는” 운반(運搬) 수단이었기 때문입니다. 바벨론에서 시온까지 기쁜 소식을 가지고 광야와 험한 산을 넘으면서 몇 달 동안을 달려오는 모습이 눈앞에 선한 듯하지 않습니까? 오늘날 같으면 “그 입이 아름답다” 하고 말씀했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④ “그러나 저희가 다 복음을 순종치 아니 하였도다 이사야가 가로되 주여 우리의 전하는 바를 누가 믿었나이까”(16) 하고, 예언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 이는 이사야 53:1절 말씀인데, 53장은 메시아의 예언 장으로 유명합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 53:4-6) 합니다.

 

㉡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말씀을 안식일마다 읽었고 들었고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실패의 원인은 어디에 있었습니까? “그가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갔으니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 그렇습니다.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산 자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을 인함이라 하였으리요”(사 53:8), 유대인들은 이사야 53장이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취되었다는 사실을 인식하는데 실패했던 것입니다.

㉢ 유대인들은 구약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는데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 성경이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요 5:39) 한, 그리스도를 만나는데 실패하였던 것입니다. 저들은 바벨론 포로가 돌아온다는 소식은 믿었으나, 사탄의 포로가 돌아오게 된다는 것은 믿지를 않았다는 것이 됩니다.

 

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17) 하고, 4절에서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한 “믿음”이라는 주제(主題)로 돌아갑니다.

㉠ 4-17절 안에는 “믿음”이라는 말이 9번이나 등장합니다. 복음전파의 중요성을 강조하다 보니 논리(論理)가 이탈한 감이 있지만 사도가 말씀하려는 바는, “어찌 그러하뇨 이는 저희가 믿음에 의지하지 않고 행위에 의지함이라 부딪힐 돌에 부딪혔다”(9:32)는 말씀을 하려는 것임을 놓치지 말아야만 합니다. 그런데 “믿기 위해서는 들음이 있어야 하고, 듣기 위해서는 전파하는 사람이 있어야 하며, 전파하기 위해서는 보내심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⑥ 이점에서 중요한 핵심은,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는다”(17하)는데 있습니다.

㉠ 아무 말씀이나 듣기만 하면 믿음이 생기고, 구원에 이르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이라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 그리스도의 말씀이란,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9) 한,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셨다”는 십자가 복음인 것입니다. 즉 “예수는 우리 범죄 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다”(4:25)는 내용이라는 말씀입니다.

㉯ 사도 베드로도,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하면서,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벧전 1:23, 25) 합니다.

 

⑦ 복음전파의 과정을 다시 한번 정리하면,

㉠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요 20:21) 하고, 제자들을 “보내십니다, 전파합니다, 듣습니다, 믿음이 생깁니다, 주의 이름을 부릅니다, 구원을 얻습니다”. 묻습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 말씀하는데, 무엇을 들어야 한다는 것입니까?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17) 합니다. 전파해야할 말씀은, “그리스도의 말씀”입니다.

 

㉡ 형제여, 우리는 보내심을 받은 새 언약의 일꾼들입니다. 듣든지 아니 듣든지,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딤후 4:2), “믿음의 말씀”(8)을 전파하십니다. 전파하는 자들을 얼마나 아름답게 보시면,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15) 하시겠습니까? “발”은 활동(活動)에 대한 상징입니다. 전파하는 자의 입도 아름다운 것입니다.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