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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 1

에베소서 2:18절, 만나고 명하리라

작성자바람이어라|작성시간15.11.23|조회수616 목록 댓글 0

 

 

만나고 명하리라

 


이제 하나님 존전에서 추방을 당했던 자들이,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2;18),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 4:16) 한, “나아감”이 가능해진 것입니다.
하나님의 보좌 앞에 나아가는 것이 지상에서는 예배와 기도를 통해서 이루어지는데, 보좌는 비어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그러므로 보좌 앞에 나갔다가만 돌쳐서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예배와 기도에 두 가지 요점이 따르게 되는데 “만남과, 말씀하심”입니다. 이점을 예표를 통해서 보여주셨습니다.
대제사장이 속죄의 피를 가지고 지성소에 들어가듯 우리도,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히 10:19)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지성소에 있는 법궤 위 속죄소, “거기서 내가 너와 만나고 속죄소 위 곧 증거궤 위에 있는 두 그룹 사이에서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네게 명령할 모든 일을 네게 이르리라”(출 25:22) 하십니다. 그러면 “속죄소”에 어떤 의미가 있기에 “거기서 만남”이 가능해지는가?
이에 대한 해설이 레위기 16:15절에 있습니다. “또 백성을 위한 속죄제 염소를 잡아 그 피를 가지고 휘장 안에 들어가서, 속죄소 위와 속죄소 앞에 뿌릴지니”, 즉 속죄소 위에 뿌려진 “피”로 말미암아 가능해진다는 것입니다. 이점을 본문 13절에서는,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고 말씀하고 18절에서는, “그로 말미암아”라 합니다. 보좌 앞에 나아갈 때, 즉 기도를 드린다는 것은 청구서를 제출하듯 자신의 요구만을 진술하는 것이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과, “만나고, 명하신는 말씀”을 듣는 것이라는 점을 명심하십시다.

 

우리 둘이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18), 그러면 아버지께 함께 나아가는 “우리 둘”은 누군가? 유대인과 이방인, 즉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가리킵니다. 15절에서는, “둘로 지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으셨다” 했는데 18절에서는 우리 둘이 함께 “아버지께 나아간다”고 말씀합니다. 이점에서 “개인과, 공동체”를 분별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구원, 즉 “부르심, 거듭남, 의롭다 하심” 등은 개별적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구원얻은 후에는 더 이상 개인(個人)이 아니라 몸 된 교회의 지체, 즉 공동체의 일원이라는 사실입니다.
이 공동체(共同體)가 다름아닌 교회인 것입니다.
“주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비밀을 그 종 선지자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고는 결코 행하심이 없으시리라”(암 3:7) 합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즉흥적으로 하시는 것이 아니라 “언약, 예언 예표” 등으로 말씀하신 후에 성취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이 함께,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18)도 레위기에서 보여주셨던 예표에 대한 성취라는 점을 유념하시기 바랍니다.
“일곱 안식일 이튿날까지 합하여 오십 일을 계수하여 새 소제를 여호와께 드리되, 떡 두 개를 가져다가 흔들지니”(레 23:16-17) 합니다. 설명이 필요합니다.  “오십 일을 계수하여”란 오순절을 의미하고,  “새 소제를 여호와께 드리되” 하는 것은 오순절에 성령께서 강림하심으로 “새 소제”, 즉 신약교회가 탄생하게 될 것에 대한 예표요,  “떡 두 개”를 흔들지니 하는 것이 지금 본문에서 다루고 있는 유대인과 이방인이 하나가 되어 함께 하나님께 드려지게 될 것에 대한 예표인 것입니다.
전에는 진설병으로 12지파를 상징하는 12개를 드렸으나 “새 소제”를 드릴 때는 “두 개”를 드리라 하시는 것입니다. 참으로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시키며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를 지혜롭게”(시 19:7) 하십니다.
그런데 이 엄청난 축복을 받기 위하여 혼자만 나아가지 마시기 바랍니다. 형제에게 있는 “우리 둘”은 누구입니까? 남편입니까? 아내입니까? “먼데 있는 자와,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의 복음을 전하셔서 함께 나아가시기를 바랍니다. 기차의 맨 뒤칸에도 연결 고리는 달려 있습니다. 또 다른 칸을 달기 위해서입니다. 형제 혼자서 들어가지 마십시오. 이 복음을 전하십시오. 그래 제자를 삼아서 아버지께 함께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령 안에서” 말입니다. 아멘.

 

아버지께 나아감
이상의 말씀을 대하면서 혹시 기도가 움추려들지는 않습니까? 그렇다면 다시 18절을 확인해보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 나아간다”고 말씀하는가? 아닙니다. “아버지”라고 말씀합니다. 사도는 2장에서 5번(4, 8, 10, 12,16)이나 “하나님”이라 말할 뿐 “아버지”라 부르지를 않았는데, 결정적인 시점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하기 위해서 아껴 둔 것으로 여겨집니다. 형제는 “그로 말미암아,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고”(18) 있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산상수훈을 말씀하는 중 마태복음 6장에서만 하나님을 “너희 아버지”라 말씀하시기를 11번(1, 4, 6, 8, 9, 14, 15, 18, 18, 26, 32)이나 하셨습니다. 심지어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마 6:6)고 “네 아버지”, 곧 형제의 아버지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기도의 또다른 요점은, “담대함”입니다. “우리가 그 안에서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함과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감을 얻느니라”(3:12)고 말씀합니다. “확신”이란 말이 개역본에서는 “당당히”로 되어 있는데 “담대함과 당당히”가 무엇과 결부되어 있는가? “믿음으로 말미암아”라 한 “믿음의 담대함”입니다.
자신에게 자격이나 공로나 의롭기 때문에 담대한 것이 아니라, “그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간다”(18)는 담대함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 4:16),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히 10:19) 합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은혜의 보좌앞에 담대히 나아갈지니라”고 말씀하는데, “은혜의 보좌가 있고, 심판의 보좌”가 따로 있는 것은 아닙니다. 불신자들에게는 “심판의 보좌”가 되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즉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힘입어 아버지께 나아가는 성도들에게는 “은혜의 보좌”가 되는 것입니다. 다시 강조합니다. 보좌 앞에까지만 나아갔다가 그냥 돌아서지 마십시오. 보좌에 좌정하신 하나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만나고만 오지 마시고 말씀을 드리고 분부하시는 말씀을 듣고 오십시오. 하나님은 형제의 아버지이십니다. 그러므로 담대하지 못한 것은 겸손이 아니라 불신앙인 것입니다.
본 단원을 마치기 전에 상기시키는 의미에서 사도가 추구하는 점진성(漸進性)을 말씀드려야 하겠습니다.  전에 멀리있던 이방인들을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지게 하셔서,  둘로 하나가 되게 하시되,  “한 새사람을 지어”(15),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시고(16),  결론적으로,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18)고 말씀합니다. 이것이 사도가 증언하고 있는 영광스러운 점진(漸進)성인 것입니다.
하나님 존전에서 추방을 당했던 아담의 후예들이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되었다면 그 이상은 없습니다. 그곳은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주하며 전능자의 그늘 아래에 사는 자여”(시 91:1) 한 지성소요, 은혜의 보좌 앞이기 때문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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