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 믿음을 가지고 있으라
이러므로 우리가 화평의 일과 서로 덕을 세우는 일을 힘쓰나니 식물을 인하여 하나님의 사업을 무너지게 말라 만물이 다 정하되 거리낌으로 먹는 사람에게는 악하니라 고기도 먹지 아니하고 포도주도 마시지 아니하고 무엇이든지 네 형제로 거리끼게 하는 일을 아니함이 아름다우니라 네게 있는 믿음을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가지고 있으라 자기의 옳다 하는 바로 자기를 책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의심하고 먹는 자는 정죄되었나니 이는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한 연고라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하는 모든 것이 죄니라(14:19-23).
앞 문단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17) 하고 경계한 사도는, 본문 20절에서는 “하나님의 사업(事業)을 무너지게 말라”(20) 하고 엄숙히 경고합니다. “하나님의 나라건설, 하나님의 사업”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나의 믿음, 나의 자유대로 행할 수 있으나, 하나님의 나라건설이라는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위해서 나의 자유(自由)가 사랑에 의해서 제한을 받는 다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우리가 화평의 일과 서로 덕을 세우는 일을 힘쓰나니”(19) 합니다.
이점에서 조심해야할 점은 사도가 “믿음이 연약한 자”(1)의 편에 서서 그들을 옳다하거나, 그들을 두둔하고 있는 것이 결코 아니라는 점입니다. 그래서 강한 자를 향해서, “네게 있는 믿음을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가지고 있으라 자기의 옳다 하는 바로 자기를 책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22) 하고 격려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① “이러므로 우리가 화평의 일과 서로 덕을 세우는 일을 힘쓰나니”(19) 합니다.
㉠ “이러므로” 라는 접속사는 근접문맥으로는, “하나님의 나라는 의와 평강과 희락”(17)이라한 말씀과 접속하고 있으나, 1-18절까지의 모든 말씀들을 받고 있다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19-23절의 내용이 요약과 같은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그 중에서도 특히,
㉮ “그리스도께서 대신하여 죽으신 형제를 네 식물로 망케 하지 말라”(15),
㉯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17),
㉰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는 하나님께 기뻐하심을 받으며 사람에게도 칭찬을 받느니라”(18)는 말씀 등을 염두에 두고 하는 말씀입니다.
② “이러므로” 즉, 이를 생각한다면, “화평의 일과 서로 덕을 세우는 일을 힘쓰지” 않을 수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 통찰력을 가지고 관찰을 하면, 19-23절 안에는 “자유(自由)자와, 보수(保守)자”에게 경계하는 두 방면의 말씀이 있는 것을 파악하게 됩니다.
㉮ “화평(和平)의 일”을 힘쓰라는 말은, 형제를 판단하여 분열을 일으키는 보수(保守)자들에게 경계하는 말씀이고,
㉯ “덕(德)을 세우는 일”을 힘쓰라는 말은, 약한 자를 배려하지 않는 자유자들에게 조심하라는 뜻으로 볼 수가 있습니다.
③ 20절의, “식물을 인하여 하나님의 사업을 무너지게 말라 만물이 다 정하되 거리낌으로 먹는 사람에게는 악하니라”(20) 한 말씀은, 자유자에게 하는 경계입니다.
㉠ “식물을 인하여 하나님의 사업을 무너지게 말라”는 말씀은, 사랑으로 행하지 않고 자신의 자유만을 내세우는 자들에게 하는 경계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사업을 무너지게 말라”는 말은, 좁은 의미로 한 말입니다. 한 영혼을 구원하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를 그만큼 세우는 것이요, 주께서 구속하신 성도 한 사람을 실족시킨다면 그만큼 하나님의 사업을 무너지게 하는 것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 그런데 “만물이 다 정(淨)하되”(20중) 한 것은 분명히 14절에서 언급한, “무엇이든지 스스로 속된 것이 없으되 다만 속되게 여기는 그 사람에게는 속되니라” 한, 약한 자들을 염두에 두고 하는 말씀입니다. 약한 사람이 강한 자들이 먹는 것을 보고 따라서, “거리낌으로 먹는 사람에게는 악하니라”(20하) 한, “악함”이란, 거리낌으로 먹은 후에 “정죄감”에 빠지는 것을 가리킵니다.
④ 그래서 “고기도 먹지 아니하고 포도주도 마시지 아니하고 무엇이든지 네 형제로 거리끼게 하는 일을 아니함이 아름다우니라”(21) 하는 것은, 강한 자들에게 하는 경계인 것입니다.
⑤ 그런데 사도는 여기서 끝이는 것이 아니라, “네게 있는 믿음을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가지고 있으라”(22상) 하고 말씀합니다.
㉠ 이는 반대로 강한 자들을 향해서 하는 격려(激勵)입니다. 왜냐하면 사도는 14장 전체를 통해서 자유 한 자들에게 집중적으로 권면을 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그렇다고 사도가 믿음이 약한 자들을 두둔하고 있는 것은 아니고, 강한 자 쪽에서 연약한 자들을 받아주라는 뜻에서였습니다. 그것은 마치 형과 동생이 싸우면 어머니가 형을 야단을 치듯이, 자유한 자들을 심하다 할 정도로 일방적으로 야단을 쳤던 것입니다. 그렇게 하다보니 “믿음이 강한 자”, 즉 믿음 안에서 자유 함을 누리고 있던 자들이 위축될 염려가 있었을 것입니다.
㉡ 그래서 “네게 있는 믿음을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가지고 있으라” 하고 격려하는 것입니다. 믿음이 약한 자들 앞에서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말입니다. 어찌하여 “하나님 앞에서” 라고 말씀하는 것일까요? 교회 내의 약한 자들을 배려하여 외적(外的)인 자유는 억제하되, 내적(內的)인 믿음의 확신(確信)은 그대로 간직하고 있으라는 의미에서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 앞에서는 자유 함을 누리되, 형제들 앞에는 사랑으로 행하라는 말씀입니다.
⑥ 이점이 “자기의 옳다 하는 바로 자기를 책하지 않는 자는 복이 있도다”(22하) 하는 축복에 나타납니다. 이는 분명 강한 자들을 향해서 하는 축복입니다.
㉠ 바울은 고리도전서에서,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 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 나도 나를 판단치 아니하노라”(고전 4:3) 합니다.
⑦ 그런 후에, “의심하고 먹는 자는 정죄되었나니 이는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한 연고라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하는 모든 것이 죄니라”(23) 하고 명쾌한 결론을 내립니다. 이는 분명 약한 자들을 염두에 두고 하는 말씀입니다.
㉠ 같은 음식이라도 믿음으로 먹을 때에는 괜찮지만, 의심하면서 먹으면 죄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19-23절 안에는 “자유자와, 보수자”에게 번갈아가면서 언급하는 두 방면의 경계가 있는 것입니다. 만일 사도가 이렇게 한 마지막 격려의 말을 빼놓았다면 “약한 자를 강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강한 자를 약하게 만드는” 결과를 가져왔을 뻔했을 것입니다.
⑧ 그래서 사도는 결론 부분(22-23)에서, “믿음”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 이제까지 받아주어라, 사랑으로 행하라고 권면했던 강한 자들에게,
㉮ “네게 있는 믿음을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가지고 있으라, 자기의 옳다 하는 바로 자기를 책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22),
㉯ “의심하고 먹는 자는 정죄되었나니 이는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한 연고라”(23상),
㉰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하는 모든 것이 죄니라”(23하) 합니다. 이 말씀을 듣고야, “믿음이 강한 자”들은 비로소 안위(安慰)를 받았을 것입니다.
⑨ 초대교회는 구약교회에서 신약교회로 “개혁”(히 9:10)이 일어나고 있는 과정에 있었습니다.
㉠ 그래서 몇 가지 문제로 진통을 겪고 있었는데,
㉮ 첫째가 할례를 받아야 하느냐? 안 받아도 되느냐 하는 문제였고,
㉯ 레위기 11장에서 금한 식물들을 먹어도 되느냐? 안 되느냐 하는 결례(潔禮) 문제였고,
㉰ 날과 달과 절기를 지켜야 하느냐? 지키지 않아도 되느냐 하는 “날을 중히 여기는” 문제 등입니다.
㉡ 이점이 얼마나 심각한 문제였는가 하는 점이 목회서신에 나타납니다. 디모데에게 보낸 서신에서는, “혼인을 금하고 식물을 폐하라 할 터이나 식물은 하나님이 지으신 바니 믿는 자들과 진리를 아는 자들이 감사함으로 받을 것이니라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 짐이니라”(딤전 4:3-5) 하고 지도합니다.
㉢ 디도에게도, “깨끗한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깨끗하나 더럽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에게는 아무 것도 깨끗한 것이 없고 오직 저희 마음과 양심이 더러운지라”(딛 1:15) 하고 말씀합니다. 이런 의식법적인 문제로 갈등을 빚고 있는 것은 현대교회 내에도 아직도 남아 있습니다.
⑩ 이점에서 중요한 요점을 언급해야만 하겠습니다. 그것은 “네게 있는 믿음을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가지고 있으라” 한, “믿음”이 어떤 믿음인가 하는 점입니다. 왜냐하면 오늘날은 거짓 확신(確信)이 기승을 부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 “의심하고 먹는 자는 정죄되었나니”(23상) 한, “의심”(疑心)은 확신(確信)이 없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그런데 “열심이나, 확신”으로 말하면 유대인들의 열심(10:2)에서 보는 바와 같이, 이단에 속한 자가 더욱 뛰어난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 믿음은 “지식을 좇은”(10:2) 바른 믿음이 아닌 위험천만한 거짓 확신인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믿음을 좇아 하지 아니하는 모든 것이 죄니라”(23하) 한 “믿음”은, 무조건적인 믿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 그래서 12:1절의, “그러므로 형제들아” 한, “그러므로”를 놓쳐서는 아니 된다고 역설했던 것입니다. 사도가 말씀하는 “믿음”이란 1-11장에 근거한 “믿음”을 가리킵니다.
㉮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3:24)를 믿는 믿음,
㉯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행방하였음이라”(8;2)를 믿는 믿음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⑪ 14장을 마치기 전에, “화평(和平)의 일과 덕(德)을 세우는 일을 힘쓰면서”, 내 믿음은 믿음대로 가지고 있을 수가 있을까를 좀더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신앙생활에서 당면하게 되는 실제적인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 기독교 윤리에 있어서 이와 같은 신앙 양심에 관한 문제들을 “아디아포라”, 즉 성도 자신의 판단과 신앙 양심의 자유에 맡겨야할 문제라고 말합니다. 그렇다고 아무에게나 판단(判斷)할만한 지각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하기 위해서는 신앙적으로 성숙해져야만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세 가지 기준이 있다고들 말합니다.
㉮ 첫째는, 이것을 성경이 무엇이라 말씀하고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최우선적으로 성경에 근거를 두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예를 들어 요즘 사회문제로 대두되고 있는 낙태하는 것이 죄가 되는가? 물었을 때 그것은 단연 “예” 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 둘째는, 그것 자체는 죄가 아닐지라도 그로 인하여 유혹과 시험에 빠져들 여지가 있는가를 생각해 보아야만 합니다. 예를 들면 기혼남성이 묘령의 여성과 단 둘이 영화관에 가는 행위를 들 수가 있을 것입니다.
㉰ 셋째로, 나의 이 행위가 믿음이 약한 형제를 자극하거나 실족시키지는 아니하는가를 검토해 보아야만 합니다. 14장의 말씀은 특히 세 번째 조항에 해당된다고 말할 것입니다.
⑫ 이 세 가지 기준들을 적용하는데 있어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 첫째로 중요한 것은 성경을 아는 지식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딤후 4:16)하기 때문입니다. “우상의 제물에 대하여는 우리가 다 지식이 있는 줄 아나”(고전 8:1) 하고 말씀합니다. 분별할 만한 성경지식이 있어야만 합니다.
㉡ 두 번째로 양심의 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만 합니다. 사도는 9:1절에서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로 더불어 증거하노니” 하고 말씀했습니다. 성령님께서는 양심을 통하여 말씀하십니다. 양심의 소리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무시하다 보면, 점점 양심의 소리에 둔감해지고 말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성령을 소멸”(살전 5:19)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될 것이요, “성령의 교통”(고후 13:13)은 기대할 수 없게 되고 맙니다.
㉢ 그러므로 세 번째로 마음에 거리끼는 것이나 기쁨이 없는 일은 하지 말아야만 합니다. 주일에 예배드리지 않고 드라이브를 떠나는 데도 마음에 거리낌이 없다면 그의 신앙은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4:30절에서,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하십니다. 성령을 근심시켜 드리는 것인지 여부를 어떻게 하면 알 수가 있을까요? 내주하시는 성령께서 근심하시게 되면 내 속에 기쁨이 없어집니다. 형제 속에 기쁨이 없습니까? 그렇다면 내주하시는 성령께서 근심하고 계신다는 증거입니다. 어디서 좁아지고 무엇에 막혔는지 반성해보아야만 합니다.
⑬ 사도는 14장을 끝마치기 전에 믿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제까지는 어떻게 행할 것인가 하는 “행함”을 강조했다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 형제의 믿음은 성경에 입각한 “하나님 앞에서”(22)의 믿음입니까? 그렇다면 아무도 그 믿음을 간섭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23절에는 “믿음과, 의심”이 함께 있음을 주목하십시오. 의심은 정죄를 가져오나, 믿음은 해방과 자유를 선언합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하지 아니하는 모든 것이 죄”(23)라고 말씀합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한다”(히 11:6)고 말씀합니다.
㉡ 형제에게 있는 믿음의 자유가 비록 연약한 형제를 위하여 사랑에 의해 제한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형제에게 있는 믿음이 교회의 화평과 덕을 세우기 위하여 다 행사할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형제여!
㉢ 형제에게 있는 믿음을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가지고 계십시오. 형제에게 있는 자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사셔서 형제에게 주신 고귀한 자유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