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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 1

에베소서 3:16-19절, 사도가 간구하는 내용

작성자바람이어라|작성시간15.11.23|조회수1,590 목록 댓글 0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케

 

사도의 기도는 1:16-19절에 이어 두 번째인데 무엇을 간구하고 있는가를 주목해 봄으로 우리의 기도를 점검하게 합니다. 당시 성도들이 처한 생활 형편이 오늘의 그리스도인의 처지에 비해 얼마나 더 어려운 역경과 환난 중에 있었으리라는 것은 짐작하기에 어렵지 않습니다. 서신을 기록하고 있는 바울 자신도 옥중에 갇혀 있는 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환경을 변화시켜 달라든가 물질적인 것을 구하고 있지를 않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처지에 있다면 구했을 기도내용과는 얼마나 다른것입니까? 그 사람의 영적상태를 알아보는 첩경은 그의 기도의 내용이 무엇인가를 알아보는 것입니다.
사도는 크게  “속 사람의 강건”(16),  “그리스도께서 마음에 계시기를”(17상),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지기를”(17하),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기를”(18),  결론적으로 “하나님의 충만으로 충만해지기를”(19) 구하고 있습니다.

 

 

 

속사람을 강건하게
“그의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시오며”(16).
첫째 간구가,”속사람이 강건”해지기를 구합니다. 사도는 고린도후서에서,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고후 4:16) 합니다.현대교회의 문제가 무엇인가? 공통적인 약점은 “속 사람”이 너무나 허약하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교회의 구성원인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이 허약할 때 그들의 공동체인 하나님의 교회가 약해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속 사람이 능력으로 강건해져야 함은 그 무엇보다 우선해야 하는 일입니다.
사도는 고린도교회에 보낸 서신에서,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고전 3:1)고 말씀합니다. 그렇습니다. 자신들은 은사와 지식이 풍족해 영성이 뛰어난 자들로 여기고 있었으나 어린 아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강건해지는 비결이 무엇인가? “그의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능력으로” 속사람을 강건하게 해주시기를 구합니다. 세 마디로 되어 있는데 첫째는, “그의 영광의 풍성” 곧 “측량할 수 없는 그리드도의 풍성”(3:8)을, 둘째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셋째는 우리의 “속사람”에게 전해주심으로 능력으로 강건해진다는 것입니다.

 

속사람이 강건하게 되는 것은 어떤 능력의 주입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그의 영광의 풍성함”, 즉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통하여 행해주신 “은혜의 풍성”(1:7)인 복음을 통해서 강건하게 해주는 것입니다.
그 예를 사도행전에 나타난 증인들의 사역에서 볼 수가 있는데, 베드로, 스데반, 바울 등은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말씀을 선포함으로 성도들을 강건하게 했던 것입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에 이르러, “성경을 가지고 강론하며, 증언하고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전하는 이 예수가 곧 그리스도라”(행 17:2-3)했는데 이점을 데살로니가전서에서는, “이는 우리 복음이 너희에게 말로만 이른 것이 아니라 또한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임이라”(살전 1:5)고 말씀합니다. 그리스도인 안에는 성령께서,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요 14:17),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 안에 거하시며”(요일 2:14)
하십니다.  왜 이점을 강조하느냐 하면, “말씀이 없는 성령의 능력과, 능력이 없는 말씀”으로는 성도들의 속 사람을 강건하게 해주지를 못한다는 점에 경각심을 갖자는 뜻에서입니다. 그런데 “능력과, 말씀”을 갈라 놓는데 현대교회의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성령은 말씀과 함께 역사하신다
남녀노소, 지위와 우무식에 관계 없이 모든 사람이 거듭날 때는 갓난 어린애로 태어난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갓난 아기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그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벧전 2:2) 말씀하는데, “자라게 함”이 강건해지는 것입니다. 그것은 “신령한 젖”으로 시작하여 “단단한 음식”으로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밀레도에서 에베소교회 장로들에게 행한 고별설교에서, “지금 내가 여러분을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에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여러분을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하게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행 20:32)고, “주와, 말씀”에 부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속 사람이 강건하게” 되기를 사모하는 것이 아니라, 환난, 시험, 고난이 없게 하시고 환경을 변화시켜주기를 구하고 있으니 이는 꺼꾸로 된 기도인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두 사람에게 똑같은 시련이 닥쳤습니다. 그런데 한 사람은 넘어지고 한 사람은 일어섭니다. 어떤 차이인가? 그것은 환경에 있는 것이 아니라 문제는 “속 사람”입니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라”(벧전 5:8-9) 합니다. 문제만을 해결하려고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하지 마십시오. 그러다가는 일평생 동안 고달프고 가련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마귀를 대적할 수 있는 “속사람을 강건”하게 하는 것이 급선무입니

 

다.

 

그리스도께서 마음에 계시게 하시옵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시옵고”(17상). 둘째로 사도는, “그리스도께서 너의 마음에 계시게”, 즉 에베소 성도들 마음에 계시게 해달라고 구합니다. 에베소 성도들은,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은”(1:13), 거듭난 자들이며 이미 마음에 그리스도를 영접한 사람들이 아닌가? 그런데 어찌하여 새삼스럽게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시옵고” 라고 구하고 있단 말인가?
이점에서 사도가 구하는 순서를 주목하게 되는데 먼저는, “속 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해달라는 기도를 드린 다음에,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시옵고” 라고 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에베소 성도들은 성령으로 거듭난, “그리스도의 영 곧 성령”이 내주하는 자들입니다. 이점은 하등의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러나 거듭난 자라고 다 성숙한 그리스도인, 즉 속사람이 강건한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헬라어에는 “거하다”는 말이 두 가지가 있는데, “파로이케오”는 일시적으로 거하는 것이고, “카토이케오”는 주인이 되어 영원히 안주하는 것을 나타내는데 사도가,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시옵고” 할 때 사용한 말은 “카토이케오”인 것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이스라엘의 소망이시요 고난 당한 때의 구원자시여 어찌하여 이 땅에서 거류하는 자 같이, 하룻밤을 유숙하는 나그네 같이 하시나이까”(렘
14:8)고 탄원합니다.

 

 

 

신앙이 어린 성도들이 시련을 당하게 되면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버리시고 함께 계시지 않는 것 같은 때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에 계시게 하시옵고”는 “거류(居留)하는 자, 하룻밤을 유숙하는 나그네” 같은 상태가 아니라, 마음에 좌정(坐定)하셔서 그를 통치하심을 뜻합니다.
이는 회심이나 거듭남 이상의 성숙한 상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어린 아이와 같은 고린도성도들에게,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전 3:16)고 책망한 것도 같은 맥락인 것입니다. 그들은 성령의 내주하심을 자주 자주 잊고 지냈으며 모시지 않은 사람들처럼 행동했던 것입니다. 사도는 성도들의 속사람이 강건하여지고 그리스도와 깊은 교제가 이루어져 그와 동행하는 삶을 살기를 간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시옵고” 라는 간구는,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롬 8:35, 37) 한 이런 자들이 되게 해달라는 간구인 것입니다.

 

 

 

형제는 어떠합니까? 주님께서 형제의 마음에서 하룻밤을 묵고 가는 나그네 같은 분으로 여기고 있지는 아니합니까? 기분이 좋을 때는 계신 것 같다가도 짜증이 날 때에는 떠나신 것 같은 그런 신앙상태는 아닙니까? 아니면 마음 보좌에 좌정하셔서 영원토록 통치하고 계시는 나의 왕 나의 주로 모시고 있습니까? 그러므로 사도의 간구는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해 달라는 기도가 아니라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게 해주시기를 구하는 것입니다. 이점이 이어지는 말씀에 분명히 나타납니다.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17하)지기를 간구합니다.
이는 셋째 간구인데,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한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이 아니고, 성도들인 우리가 소유해야 할 사랑인 것입니다. 우리는 1장에서 그리스도인 됨의 표지가, “믿음과, 사랑”(1:15)이라는 점을 확인했습니다. 교회는 하나님에 의해 불러냄을 받은 사람들의 공동체요, 천국백성들이요 하나님의 가족들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교회라는 공동체, 하나님의 나라 헌법이 무엇인가? 오직 한 계명이 있을 뿐인데 그것은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계시록에서 에베소교회를 향해서,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계 2:4-5)고 경고하십니다. 그러면 성숙한 그리스도인이란 어떠한 사람인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 있는 사람”, 다시 말하면 모든 행동원리가 사랑이라는 뿌리에서 우러나오는 사람, 인생관과 가치관이 사랑의 터 위에 굳게
세워진 사람이 성숙한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에베소 성도들은 식물(植物)에 비하면 아직 묘목과 같아서 뿌리가 깊지가 못해서 환난의 태풍에 뽑힐 염려가 있고, 건물에 비한다면 “터”, 즉 기초(基礎)가 아직 튼튼하지 못한 상태인 것입니다. 사도는 지금 레바논의 백향목 같이 뿌리를 든든히 박고 우뚝 서 있는 한 그루의 나무와, 하나님의 성전처럼 기초가 튼튼한 건물을 그려보면서,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라고 간구하는 것입니다. 사도의 간구는 우리로 하여금 현대교회의 실상이, “사랑 가운데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 있는가 돌아보게 합니다.

 

바울의 옥중 사역
대적은 사도 바울을 옥에 가둠으로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게 하려 하였으나, 하나님께서는 이를 선으로 바꾸시어,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마 6:6) 하심 같이 각 교회를 향하여 “기도”하게 하셨던 것입니다. 또 있습니다. 입으로 증언할 말씀을 문자로 기록하게 하시어 후대에 전해주게 하셨는데 만일 “로마서, 갈라디아서, 에베소서” 등을 기록하여 전수하게 하지 않으셨다면 어떻게 되었을 것인가?
사도는 “복음으로 말미암아 내가 죄인과 같이 매이는 데까지 고난을 받았으나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아니하니라”(딤후 2:9)고 선언하는데 그렇습니다. 바울의 육신은 쇠사슬로 매어둘 수 있었어도, 하나님과 교통하는 기도의 문만은 막을 수가 없었고, 시공(時空)을 초월하여 역사케 하실 말씀을 기록하게 하셨던 것입니다. 이를 감당하노라 사도는 옥중에서도 바빴다는 말씀입니다. 바쁜 것만이 아니라 말씀을 기록하고, 기도하는데 쏟는 그 어려움은 선교여행에서 당한 육신의 고난과는 또다른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골 1:29) 한 고통이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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