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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 1

에베소서 1:5-6절 기쁘신 뜻대로 (수정)

작성자바람이어라|작성시간15.11.23|조회수753 목록 댓글 0

 

 

 

 

기쁘신 뜻대로

 

그렇다면 이처럼 엄청난 은혜를 우리에게 베푸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제가 먼저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모릅니다. 웬 은혜인지 웬 사랑인지 저는 모릅니다. 우리에게 자격이나 공로가 있기 때문이 아닌 것만은 분명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도 모른다는 것이 바른 고백입니다. 다만 성경은 5절에서 그 기쁘신 뜻대로라고 말씀할 뿐입니다. 우리에게 이런 은혜와 복을 베푸시는 것이 하나님의 기쁘신 뜻이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창세 이전에 택하신 것도, 우리들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신 것도 전적인 하나님의 기쁘신 뜻이었다는 것입니다. 달리는 설명할 길이 없는 것입니다.

 

이점을 로마서에서는,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9:11) 라고 “오직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라 합니다.

 

 

 

말미암아의 연결고리

 

이 모든 축복을 가능하게 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5, 7)라는 연결고리 때문에 가능해졌다는 점을 놓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개혁자들은 말하기를 복음은 말미암아라는 고리에 연결되어 있다고 역설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7),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3:23-24, 5:1). 구원은 전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에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미암아”가 끊어지거나 놓치게 되면,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 5:4)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은 이를 놓지고 있거나 아주 끊어진 상태가 아닌가 심히 우려되는 상황인 것입니다.

 

 바울은 생각건대”(2:11, 8:17, 고후 5:14) 하고 생각해 보라고 호소합니다. 신앙생활에 묵상은 영혼을 소성하게 하는 활력소가 됩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행해주신 일에 우리가 무엇인가 보탠 일이라도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선택하셨을 때에 우리가 관여하였습니까? 아니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거들어 드렸습니까? 또한 성령님께서 우리들을 거듭나게 하셨을 때 도와 드렸던가요? 우리는 아무 것도 한 것이 없습니다. 또한 할 수도 없었습니다. 우리의 구원은 전적으로 찬양 받으실 삼위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이루어 주신 은혜인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났다”(고후 5:18)고 말씀합니다. 이점을 구속사라는 넓은 문맥으로 살펴보게 될 때 더욱 확고해 질 수가 있는데 하나님은, “내게 토단(土壇)을 쌓고 그 위에 네 양과 소로 네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라 내가 내 이름을 기념하게 하는 모든 곳에서 네게 임하여 복을 주리라” 하시면서, “네가 내게 돌로 제단(祭壇)을 쌓거든 다듬은 돌로 쌓지 말라 네가 정으로 그것을 쪼면 부정하게 함이니라”( 20:24-25)고 경계하십니다.

 

무슨 뜻인가? 드려지는 “번제와 화목제”는 그리스도께서 대속제물이 되실 예표인데 우리의 구원은 그리스도께서 “단독적(單獨的)으로, 단번”(單番)에 이루어주신 것임을 드러내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다듬은 돌, 정으로 그것을 쪼면”, 즉 십자가 복음에 무엇인가를 첨부하려 한다면 “부정하게 함”, 즉 다른 복음이 된다는 경계인 것입니다.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6).

 

6절은 성부 하나님의 행사에 대한 결론입니다. 1 첫째로 거저 주시는바 그의 은혜라고 말씀합니다. 이 모든 은혜는 거저 주시는 것입니다. 로마서 3:24절에서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하심을 얻은 자 되었다고 말씀합니다. 값 없이 주셨습니다. 거져주셨습니다. 그런데 이점에서 우리들이 꼭 기억해야 할 말씀이 있는데 그것은,

 

 

 

2 둘째로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자가 누구인가?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3:17) 하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사도는 1-6절까지에서, “그리스도 예수, 예수 그리스도, 주 예수 그리스도”라고 부르기를 7번이나 했습니다.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부르기를 얼마나 사모하는지를 보셨을 것입니다. 그랬던 사도가 6절에서는 어찌하여 예수 그리스도라 부르지 않고,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라고 표현을 바꿔서 말씀하는 의도가 무엇이겠습니까?

 

이는 무심한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부를 수 밖에 없도록 한 것은 뒤따라 오는 말씀 곧 우리에게,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거저 주시는 바라는 말씀 때문입니다. 우리들은 구원을 거저 받습니다. 값 없이 받았습니다. 구원이 이렇게 쉬운 것이냐구요? 이렇게 헐한 것이냐구요? 그런 생각이 드십니까? 아닙니다. 우리는 거저 받으나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자기의 “사랑하는 아들”을 우리의 대속물로 십자가에 내어주시고야 가능했다는 이 감사와 감격이 바울로 하여금,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라고 부르게 하였던 것입니다. 복음송 가사 그대로 그러나 한가지 잊지는 말라는 뜻에서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요일 4:9-10), 아시겠습니까? 이것을 알기를 원하셔서, 이것을 잊지 말라고 그리스도 예수라 하지 않고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라고 호칭을 바꾸었던 것입니다.

 

 

 

은혜의 영광을 찬양하게 하려 함

 

그렇다면 우리가 할 일이 무엇입니까?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아시는 말씀들이지요. 결코 새로운 말씀이 아닙니다.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시려고 우리들을 택하셔서 자녀로 삼아주시되 거저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 번 정직하게 자신에게 묻고 대답해 보십시다. 은혜의 영광을 찬미한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는 것입니까? 어떻게 하는것이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는 것입니까? 찬송을 부르는 것입니까? 감사합니다를 연발하는 것입니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오니 영광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고래 고래 외치는 것입니까?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냐 말입니다. 그것이 다입니까?

 

영광을 돌리니 받으시옵소서 하고 돌린다는 “영광”은 도대체 어디 있습니까? 말로만 하는 것입니까? 언어가 없고 들리는 소리가 없는 대자연들도,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19:1) 합니다. 오곡 백과는 가뭄과 태풍 속에서도 각양 각색의 열매들을 맺어 창조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있습니다. 비록 가시와 엉겅퀴가 나는 저주받은 땅이요, 비바람이 휘몰아치는 악조건 속에서도 꽃들은 제각기 다투어 아름다운 모습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며 그 향기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셨을 때의 목적을 이루어 드리려고 최선을 다하는 모습들입니다.

 

 

 

그런데 유독 하나님의 형상 대로 지음을 받은 인간은 어떠하냐고 묻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시고 만물을 다스릴 권세를 주신 것은,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 43:21)고 말씀합니다. 그러나 부족함이 없는 에덴 낙원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감으로 배신을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또다시, “내가---하리라”( 3:15)고 재창조를 시작하셨습니다. 그리하여 구속하셔서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2:10), 즉 “새로운 피조물, 하나님의 작품”이 되었다고 말씀합니다. 이렇게 하신 의도는,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합니다.

 

그렇다면,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재 같은 성령의 열매들을 맺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또한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5:16)는 삶을 살아야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주님은 빌립이,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하는 말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14:8-9)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 1:3)이십니다. 같은 논리로 예수님을 닮은 우리를 통해서 세상은 하나님을 보고, 예수님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불신자의 성경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오늘의 교회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데 실패했다면 우리들은 하나님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시시한 경치를 구경하려고 사람들이 몰려들거나 관심을 기울이지는 않는 법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의 복음진리에 관심이 없고 교회를 등지는 원인이 어디에 있는가? 먼저 그리스도인 된 우리들의 모습이 아름답지 못하고 그들에게 감탄을 자아내는 삶을 살아가고 있지를 못하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서정적으로 한 장면을 묘사함으로 이 문단의 말씀을 마치고자 합니다. 봄입니다. 농촌 어느 아늑한 마을에 개나리 복숭아 살구 꽃이 만발했습니다. 보기에 아름답습니다. 이런 데서 살고 싶습니다. 가을입니다. 시골집 뒷 뜰에 감나무에 감이 주렁주렁 노랗게 익었습니다. 참 멋있습니다. 이런데서 살고 싶습니다.

 

교회 안에 백합 꽃이 만발하고 향기가 가득하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이 복숭아꽃, 살구꽃처럼, 뒷 뜰의 감나무처럼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고 찬미하고 있다면 얼마나 멋이 있고 보기에 좋을까요?

 

  나도 이런 데서 살고 싶다, 나도 예수 믿고 싶다, 하지 않겠습니까? “태초에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였다면 그의 아들의 피로 구속하신 재창조의 열매들은 더욱 보시기에 좋았더라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형제여, 이것이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6)는 의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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