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이 하나요
“몸이 하나요 성령도 한 분이시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느니라”(4).
4절은 3마디로 되어 있는데, 첫째로 “몸이
하나”라 합니다. 에베소서에는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라 하는 말이 8번
등장하는데, “또 십자가로이 둘을 한 몸으로”(2:16), 즉 유대인과
이방인을 “한 몸, 하나의 교회”로 삼아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몸의 지체임이라”(5:30), 그래서 “몸이 하나요” 하는 것입니다.
“성령도 한 분이시니” 합니다. 주님은 잡히시던 날 밤 행하신 다락방
강화에서,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요14:16-17)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우리들과, “영원토록 함께 계시고, 또 우리
속에 내주하시는” 성령은 동일한 “한 성령”이시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를
부르신 분도 성령이시며, 거듭나게 하신 분도 성령이시며, 이들을 연결하여
교회를 세우신 분도 성령의 역사인 것입니다. 성령으로 거듭남이 없이는
교회의 지체가 될 수가 없으며,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다 같은 “한
성령”을 모셨다는 것입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서 말씀 드린다면 구약시대는 성부께서 주도적으로 역사하셨고, 복음서에서는 성자께서 주도적으로 역사하셨는데 사도행전 이후, 즉 교회시대는 성령께서 주도적으로 역사하시는 시기라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을 부르신 분은 그리스도시나,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행 13:2)고 바울을 선교사로 파송하신 분은 성령(聖靈)이신 것입니다.
이를 알았기에 바울은,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고전2:4-5)고 전적으로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에만 의존했던 것입니다. “성령도 한 분”이십니다.
소망이
하나요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느니라”(4하) 합니다. 바울 사도의 논증을 상고하다 보면 경탄을 금할
수가 없는데, “몸이 하나요, 성령도 한 분이시니” 하고 마치는 것이 아니라,
“한 소망”이라고 더 나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찌하여 이 시점에서 “한
소망”(所望)을 언급하는 것일까요? 이는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지키는데 있어서 중요한 요점이 되기 때문입니다. 왜 하나됨을 지키지 못하는가?
그 원인은 “한 소망”이라는 점을 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한 성령에 의해서 거듭남을 받아 한 몸인 교회의
지체들이 된 “하나”임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지금은 여러 면에서 다른 점이
많은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니까 온전히 “하나” 될 날은 “소망”(所望)으로
아직 남아 있다는 말씀입니다. 사도가 로마서에서,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롬 8:24) 한 점도 같은 맥락에서입니다. 우리는 이미 구원을
얻었으나 온전한 구원, 즉 “몸의 구속은, 소망”으로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같은 논리로 온전한 “하나” 됨도 “소망”으로 남아 있다는 뜻에서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느니라” 하는 것입니다. 현재는 얼굴 생김도
다르고 피부색도 다르며 환경과 학벌과 빈부의 차이가 엄연히 존재합니다. 어떤
형제는 몸의 한 부분이 온전하지 못한 장애우이기도 합니다. 자신과 똑같은
형제는 한 사람도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의 낮고 천한
몸이 주님의 영광의 몸과 같이 변화되는 날에는 온전히 하나가 될
것입니다.
그 날이 “소망”으로 남아 있다는 의미에서 “한 소망”이라
말씀합니다. 그래서 사도는,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즉 외모만 보고 판단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고후 5:16) 합니다. 이점을 망각하지 말아야만 “서로 용납”할
수도 있고, “하나되게 하신 것”을 지킬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외모가 각기 다른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의 영광의 몸”과
같이 하나가 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해지는가?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롬 8:11), 즉 “성령도 한 분이시니” 한, “한 성령”으로
거듭난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온전히 하나 될 소망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느니라”(4)는 의미입니다.
주 예수 세상에 다시 오실 그 날엔 뭇 성도 변화하여
주님의 빛나는 그 형상을 다 함께 보며 주 찬양하리
주님의 마음 본받아 살면서 그 거룩하심 나도 이루리
고난을 대처하는 비결도,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롬 8:18)고
현재의 고난만을 내려다보는 것이 아니라 눈을 들어 장차 받을 영광을 바라보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지”(3) 못하고 분쟁하는 원인이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미래(未來)의 “한 소망”을 바라보지 않고 각기 다른 현재(現在)를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이제 아시겠습니까? 그리하여 성격적인 차이라든가 다른 요인으로
해서 하나 됨을 맛 볼 수 없었던 형제에 대해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할
수 있는” 그런 용기가 납니까? 우리는 몸도 하나요, 성령이 하나이니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은 자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