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광스러운 교회 영광스러운 가정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라”(26-27).
사도는 “아내들이여, 남편들아” 하고 권면하다가 갑자기 “영광스러운 교회”를 언급합니다. 이렇게 하는 것은 “교회와, 가정”은 둘이 아니라, 가정은 하나님의 교회의 모델하우스요, 남편과 아내란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에 대한 예표이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구성원인 성도들의 몸이 성전이고 성령이 거하신다면 그들의 공동체인 교회가 얼마나 영광스럽겠는가?
핵심은 “영광스라운 교회”에 있는데, 교회론이 대 주제인 에베소서를 상고하면서 이것 하나만은 절대로 놓쳐서는 아니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영광스러운 교회”(27)입니다. 모형으로 주신 모세의 성막과, 솔로몬의 성전에 하나님의 영광이 충만하여 모세와 제사장이 들어갈 수가 없었다면 하나님의 아들의 피로 값주고 사신 몸된 교회에 하나님의 영광이 충만 중에 충만함은 너무나 분명하다는 확신입니다.
그런데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는” 영광스런 교회로 세우려 하심이라 합니다. 가현적인 교회는 “티도, 흠도, 주름도” 많은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종래는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실 것이라 합니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해지는가?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란 반석되시는 그리스도께서 치심을 당함으로 가능해진다는 점을 나타내는데 이점을 25절에서는,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셨다”고말씀했습니다.
어떤 분은 말하기를, “남편이 복종할만 해야 복종하지요, 아내가 사랑할만 해야 사랑하지요” 라고 말할 것입니다. 이 점에 관한한 우리는 모두 불합격자들입니다. 사도의 답변을 들어보십시오. 그리스도께서는 교회를 사랑하셨습니다. 말로만 사랑하신 것이 아니라 교회를 위해서 죽기까지 자신을 주셨습니다. 그러면 교회가 사랑할만 해서였습니까? 교회가 거룩하고 흠이 없기 때문이었습니까? 아닙니다. 교회가 영광스럽고 아름다와서가 아니라 영광스럽고 아름다운 교회로 세우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렇습니다.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하듯 하노라면, 그리고 남편이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자신을 주심같이 하노라면 영광스러운 가정으로 세워질 날이 온다는 것이 우리가 믿는 소망인 것입니다. 이러한 가정을 세우기 위해서 남편은 아내를 사랑해야만 합니다. 사랑은 주는 것이요, 아가페 사랑은 희생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남편들도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자기 자신과 같이 할지니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28).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는 말씀은,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창 2:24) 하신 창조원리에 근거한 논리입니다. 또한 1:22-23절에서,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느니라 교회는 그의 몸이니” 한, 구속의 원리에 입각한 권면인 것입니다. 여기에 현대교회, 가정이 안고 있는 문제의 원인과 해답이 있는데, “영광스런 교회, 영광스런 가정”을 이루는 비결도 “은혜의 영광, 은혜의 풍성”(1:1:6, 7)이라한 복음으로만이 가능하여진다는 것입니다.
어찌하여 라오디게아교회가,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계 3:17) 상태가 되었으며, 현대교회가 맛을 잃은 소금이 되어 밟히게 되었는가? 한마디로 복음의 능력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라고 밖에는 달리는 설명할 길이 없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언제나 자기 육체를 미워하지 않고 오직 양육하여 보호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에게 (보양)함과 같이 하나니 우리는 그 몸의 지체임이라”(29-30).
혹시 “주님은 우리교회를 사랑하시지 않는가 보다, 나를 사랑하시지 않는가 보다”고 생각한 적은 없습니까? 구약교회도 그러했습니다. “오직 시온이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나를 버리시며 주께서 나를 잊으셨다 하였거니와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사 49:14-15) 하십니다.
사도는 말씀합니다. “자기 육체를 미워하는 자가 있느냐”, 교회는 주님의 몸이다, 그래서 보호하고 약육하신다.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는 것은 이웃 사랑하듯 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주님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라 합니다. 그리고 성도들, 즉 형제는 “그 몸의 지체임이니라” 하십니다.
사도는 지금 남편들에게 “아내를 사랑하라”는 말을 하다가 “영광스러운 교회”로 비약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남편에게 있어 아내란, 그리스도에게 있어 교회와 같은 존재라는 점을 일깨워주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그래서 “아내 사랑하기를 자기 몸 같이 할지니, 아내를 사랑함이 곧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니라”(28) 하는 것입니다. 이제 교회와 가정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존재인가 하는 점에 확고하게 되었습니까?
둘째 단원(31-33) 이 비밀이 크도다
“그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이 비밀이 크도다 나는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
(31-32).
사도는 지금 “아내, 남편”에 대해 권면을 하는 중입니다. 그런데 구속의 원리에 입각해서 실천윤리를 말씀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다시 말하면 머리(아담, 그리스도)와 몸(하와, 신부)을 떼어놓고 있지 않다는 점입니다. 그러므로 에베소서는 물론 바울의 서신들을 다룰 때에 한 편의 설교라는 점을 염두에 두고 접근해야만 합니다. 교리와 윤리를 떼어놓게 되면 복음이 사라져서 윤리를 실천할 능력도 없게 된다는 점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31), 이는 창세기 2:24절의 인용인데, “이 비밀이 크도다” 합니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주를 가르치겠느냐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고전 2:16)고 말씀하는 사도는,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배필을 지어주시되 특이한 방법으로 지어주신 사건을 통해서 계시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 비밀이 크도다” 하는데 그러면 “큰 비밀”이란 무엇인가? 아담 하와의 관계를 통해서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계시하신 것을 가리킵니다.
창세기 1장에는 “좋았더라”는 말이 7번이나 등장합니다. 그런데 2장에서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창 2:18) 하고, “좋지 않다”는 말이 나옵니다. 그러면 이를 미쳐 모르셨단 말인가? 아닙니다. 아담에게 배필을 지어주시는 것을 통하여 계시하시려는 바가 있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와를 흙으로 지으실 수도 있으셨습니다.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창 2:21-22) 합니다. 이는 마지막 아담(고전 15:45)이신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깊이 잠들게 하시고 그의 신부인 교회를 탄생시킬 것에 대한 절묘한 예표였던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교회를 위하여 다름 아닌 자기 자신을 주신 것입니다.
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한 것은 감격해서 환성(歡聲)을 지른 것인데, 신랑이 신부를 맞이할 때의 심정이 이러한 것이며, 궁극적으로는 신랑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신부인 우리를 맞이 하셨을 때의 심정을 나타내는 환성인 것입니다. 주님은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셔라 그래야만 너희 속에 생명이 있느니라” 하십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주님의 살 중에 살이요, 뼈 중에 뼈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 비밀이 크도다”하는 것입니다.
이점을 스바냐 선지자는,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습3:17)고 말씀합니다.
연합교리의 신비
이를 신학적으로는 연합교리라 하는데 이점을 1장에서는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느니라, 교회는 그의 몸이라”(1:22-23)고, “머리와, 몸”의 관계로 말씀했습니다. 이를 통해서 말씀하시려는 바가 무엇인가? 첫째로 “그에게서(머리되시는 그리스도)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받음으로 연결되고 결합되어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4:16) 하신 대로 몸은 “머리”에 의하여 통치되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둘째는 “머리와, 몸”은 떼어놓을 수 없는 관계를 나타냅니다. 주님은 “하나님이 짝지어주신 것을 사람이 나눌지 못할지니라”(마 19:6) 하시고 사도는,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롬 8:35) 합니다.
셋째는 “둘이 한 몸”이 되었다면 머리에 되어진 일은 몸에도 되어진 일이라는 점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머리”만 달린 것이 아니요,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고, 함께 죽고,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2:6) 하는 논리가 성립이 되는 것입니다. 얼마나 큰 비밀인가?
아담은 하와 없이는 완전해질 수가 없는 존재이 듯이 머리되시는 그리스도께서도 몸된 교회의 지체인 형제를 필요로 하신다는 점입니다. 다시 말하면 형제의 입, 손, 발을 주님의 지체로 쓰신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나귀새끼를 풀어오라 하시면서, “주께서 쓰시겠다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나귀새끼까지도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기 위해서 그 때 그 자리에 있었다면 나는 무엇을 위해서 이때에 여기 있는가 하고 자문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신부들은 앞으로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 요한계시록 19:7절에서는,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다”고 말씀합니다. 현재 상태를 약혼에 비한다면 그 때는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는 결혼에 비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신랑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심이 되면 우리의 낮고 천한 몸도 그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이 변화 될 것이요, 그 때 우리는 “이 비밀이 크도다”한 비밀의 완성을 보게 될 것입니다.
복음에 미친 사람
바울은, “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고후 5:13) 한대로 복음에 미친 사람이었습니다. 사도는 지금 분명히 “아내들이여, 남편들아” 하고 아내와 남편에 대해서 권면하고 있는 중입니다. 그러다가 “그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31) 하는 대목에 이르게 되자, “이 비밀이 크도다 나는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32)고 문맥을 벗어나 복음으로 빨려들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그러나 너희도 각각 자기의 아내 사랑하기를 자신 같이 하고 아내도 자기 남편을 존경하라”(33)고 다시 본론으로 돌아옵니다.
“이 비밀이 크도다”고 말하는 사도는 분명 벅찬 감격과 흥분에 상기 되어 있었을 것입니다. 이 말씀을 상고하는 우리가 그러하거든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아 기록하는 사도는 어떠하였겠습니까? 그러므로 그리스도와 교회와의 관계를 알기 전에는 남편과 아내의 관계를 온전히 깨달을 수가 없으며, 남편과 아내 노릇도 바로 행할 수 없다는 것은 진실입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결혼의 의미를 아는 자는 그리스도인 뿐이라 해도 독단은 아닌 것입니다.
지금 상고하고 있는 가정문제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을 만큼 중요한 주제입니다. 왜냐하면 오늘의 세태가 종말적인 상태로 치닫고 있기 때문이요, 그리스도인 가정들도 너무나 허약하여 성경적인 가정으로 뿌리 내리지 못하고 있는 부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한국교회는 성도들을 가정에서 끌어 내려고만 할 것이 아니라 온전케 하여 제 위치로 돌려보내는 데 눈을 떠야 할 때인 것입니다. 악한 사탄은 우는 사자와 같이 삼킬 자를 두루찾는 다는 경계를 명심한다면 우리의 가정들을 무방비 상태로 버려둔 채 달리 무엇을 찾아 헤매고 있을 것입니까?
우리는 가현적인 교회가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교회상과 너무나 닮지 않은데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우리의 가정이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가정과 너무나 동떨어진 것 같은데 대해 우울해 집니다. 그러나 너무 깊은 상심에 빠지지 마십시다.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포기하시지 않고 결국은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는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시고야 말듯이
우리들의 가정도 그렇게 세워주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