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전들아
“상전들아 너희도 그들에게 이와 같이 하고 위협을 그치라 이는 그들과 너희의 상전이 하늘에 계시고 그에게는 사람을 외모로 취하는 일이 없는 줄 너희가 앎이라”(9).
먼저 주목하게 되는 것은 성경의 완벽한 균형과 조화입니다. 종들에게, “성실한 마음으로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하라”는 말씀을 대했을 때 너무나 일방적이고 무정한 듯이 느낄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논란의 대상이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상전들아 너희도 그들에게 이와 같이 하라고”는 말씀을 대하게 되자 완벽한 균형과 공정에 감복하게 됩니다. 이는 아내들과 남편들, 부모와 자녀들의 경우에서도 확인한 바입니다. 그렇다고 사도의 진술은 공평성을 유지하기 위한 궁색한 변명 같은 것을 찾아볼 수가 없다는 점입니다. 그러하기는커녕 육에 속한 사람은 도저히 미칠수 없는 지극히 선하며 경건의 극치를 맛보게 됩니다. 한마디로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모습인 것입니다. 그리하여 말씀을 대하는 자들의 마음을 숙연하게 하고 경건에 이르게 한다는 점입니다.
사도는 상전들에게 첫째로, “상전들아 너희도 그들에게 이와 같이 하고 위협을 그치라”(9상) 합니다. “이와 같이”가 어느 말씀을 가리키는가? 5-8절 전부와 관련이 됩니다만 그 중에서 특히, “주께 하듯 하라(5), 그리스도의 종들처럼,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6), 기쁜 마음으로 섬기기를 주께 하듯 하라”(7)는 말씀을 가리킨다 하겠습니다. 종들에게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하기를 그리스도께 하듯하라” 한 권면을 그대로 상전들에게도 적용을시켜서 상전들도 종들에게, “이와 같이”, 즉 종들에게 “주께 하듯” 하라고 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5:16절의 들어 설명한다면,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즉 종들도 외모로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 그리스도의 영, 성령”(롬 8:9)을 모신 자들로 여기고 “주께 하듯 하라”는 것입니다. 상전들도 이렇게 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종으로써,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이점이 “이는 그들과 너희의 상전이 하늘에 계시고”(9중)라는 말씀에 나타납니다. 이 말씀 앞에서는 노예의 신분도 상전의 지위도 존재하지 않고 오직 한분 하늘의 상전이신 하나님만 계실뿐입니다. 변화산상의 제자들이 목격했듯이 모세도 엘리야도 사라지고 오직 한 분 예수 그리스도만이 보일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주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하여 주심 앞에는 종이나 자유자의 구별 없이 오직 한 분 주가 계실 뿐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사회생활입니다. 얼마나 감동적인 일인가!
특성을 적시함
사도의 권면을 유의해 보면 원리적인 말만 하는 것이 아니라 종과 상전에게 오랜 세월 동안 몸에 배 있는 특성 하나씩을 꼬집어 구체적으로 적시하는 것을 대하게 됩니다. 종들의 특성은, “눈가림”(6)입니다. 상전이 볼 때는 하는 척 하고 안 볼 때는 꾀를 부리는 행위입니다. 사도는 그리스도의 종인 너희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사람만을 의식하는 인본주의적 처신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보고 계시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면 상전들의 특성은 무엇인가? “위협”(9), 즉 공갈입니다. 이는 자신이 하나님인 양 행세하는 인본주의적인 태도요, 하늘에 상전이 계시다는 것을 망각하고 하나님 두려운 줄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의 신학
사상을 축약한다면 “그리스도 안과, 하나님 앞에서”(엔 크리스토, 콜람데오)라 할 것입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하나님 앞과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가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딤후 4:1) 합니다. 지금 사도는 “종들과, 상전들”을 하나
님 앞에 세워놓고, “너희도 이와 같이 하라”고 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명령은 우리를 또다시,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5:18),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5:21) 하신 원리적인 말씀으로 되돌아 가게 합니다. 이와 같이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 그리스도를 경외하는 그리스도인들만이 범사에 “주께 하듯”이 행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늘에 상전과 땅의 상전
“그에게는 사람을 외모로 취하는 일이 없는 줄 너희가 앎이라”(9하), 즉 그가 종이냐 상전이냐 하는 외모로 보시지 않는 다는 말씀입니다. 사도는 로마서에서도, “이는 하나님께서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아니하심이라”(롬2:11) 합니다. 사도 베드로도,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심판하시는 이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너희가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벧전 1:17)고 말씀합니다.
상전들도 사람을 외모로 보시지 않는 “하늘에 상전”이 계심을 바라보기 때문에 종들을 다루는데도 “두려워하고 떨며 성실한 마음”(5)으로 대해야 한다는 논리인 것입니다. “너희가 앎이라”, 즉 종들이 주리고 목마르고 헐벗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아 주는 것이 곧 주님께 하는 것이요,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이 주님께 하지 않는 것이라는 점을 너희가 배워서 알고 있지 않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한 실제적인 사례가 빌레몬서에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주인의 물건을 훔쳐 도망쳤던 노예 오네시모를 상전인 빌레몬에게 돌려 보내면서, “이 후로는 종과 같이 대하지 아니하고 사랑 받는 형제로 둘 자라”(몬 1:16)합니다. 이런 말씀을 2천년 전에 하고 있는 것이 성경입니다. 이런 불가해 한 일이 어떻게 가능하단 말인가?
형제는 빌레몬서에 등장하는 중요 인물들이 누군지 알고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바울, 빌레몬, 오네시모”입니다. 그런데 여기 가장 중심적인 또 한분이 계시는데 그 분은 한 장 밖에 안 되는 빌레몬서에 11번이나 등장하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바울, 빌레몬, 오네시모”는 남남이었습니다. 그런 그들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로 묶어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엡 2:19), 즉 형제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는, “그를 영접하기를 내게 하듯 하라”(몬 1:17), 곧 주님을 영접하듯 하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상전에게 “이와 같이 하라”는 말씀 속에는 이런 의미가 함의되어 있는 것입니다.
5절에는 “육체의 상전”이 있고, 9절에는 “하늘에 상전”이 계십니다. 얼마나 분명합니까? 그들의 영원한 상전은 하늘에 계시고 땅에 있는 상전은 육체에 머물 동안만 상전입니다. 그리스도인 된 종들이 현재에 받는 고난이 제아무리 크다 하더라도 그것은 육체에 머물 동안뿐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영원에 비할 때 잠시요, 장차 받을 영광 앞에는 비교도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종과 상전의 차이는 육체에 머물 동안만 상전입니다.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습니다. 사도는 “그들과 너희의 상전이 하늘에 계시다”고 우리의 시선을 스데반처럼 하늘을 향하게 합니다. 낮고 천한 몸이 주님의 영광의 몸과 같이 구속 될 날이 옵니다. 그러므로 “너희의 상전이 하늘에 계시다”(9)는 말씀은 우리에게 경각심을 주는 동시에 소망과 격려가 되는 말씀인 것입니다.
부언할 점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이스라엘을 회복하기 위해서 혁명을 일으키로 오신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감당하심으로 우리에게 근본적인 해답을 주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육체의 투쟁을 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자기 십자가를 지고 하나님의 사랑, 주님의 은혜를 전해주는 자들입니다. 그 사랑과 은혜로 중간에 막힌 담이 무너지고 유대인과 이방인을 하나가 되게 하듯, 노예와 상전도 화평을 이루게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형제여, 사도는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고 말씀합니다. 종도, 상전도, 직업도 모든 것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거룩하고 새롭습니다. 하나님께서 거룩하게 하신 것을 우리가 속되게 하지 마십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