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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 1

계시록 2:1-7절: 촛대를 옮기리라는 선고를 받은 교회

작성자유도순|작성시간16.11.27|조회수1,052 목록 댓글 2

1.에베소교회(2:1-7):  촛대를 옮기리라는 선고를 받은 교회


첫 수신자로 에베소 교회를 지목하십니다. 이는 1:11절의 순서와 일치하는데 주님께서 “에베소 교회”, 하고 말씀하셨을 때에 요한의 가슴은 철렁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요한이 유배되기 전까지 섬긴 교회가 에베소 교회였기 때문입니다. 에베소 교회는 바울에 의하여 개척이 되었고, 요한에 의하여 양육을 받은 교회답게 끝까지 진리를 보수한 교회입니다. 그러나 이 교회에도 문제는 있었습니다. 사랑의 사도가 사역한 교회가 처음 사랑을 버렸다는 책망을 받다니! 신앙에 균형과 조화를 이룬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깨닫게 됩니다. 이를 세 단원으로 나누어 상고하겠습니다.


첫째 단원(1-3, 6) 칭찬
둘째 단원(4-5) 책망
셋째 단원(7) 권면과 약속


첫째 단원(1-3, 6) 칭찬
① “에베소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오른손에 있는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 사이를 거니시는 이가 이르시되”(1) 합니다. 수신인(受信人)을 “에베소 교회의 사자”라고 말씀합니다. 앞에서도 언급 했습니다 만, “사자”란 그 교회의 대표성을 나타내는 묘사로서, 그러니까 편지는 에베소 교회 전체 성도들에게 보내진 것으로 보아야만 합니다.
② 그리고 송신자(送信者)를 “오른 손에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 사이에 다니시는 이” 라고 말씀합니다. 그렇다면 이 분이 누구란 말인가? 이를 당연히 아는 것으로 여기고 넘어가서는 아니 됩니다. 이를 알 수 있는 방도는 1장에서 “보여주신 계시와, 말씀하신 계시”에 의해서 뿐입니다. 그러므로 1장은 2장-3장을 말씀하기 위한 전문(前文)인 것입니다.
㉠ 그렇다면 “보여주신 계시” 에 의해서 “오른 손에 일곱 별이 있고(1:16), 일곱 금 촛대” (1:12, 20) 사이에 다니시는 분은 “인자” (1:13), 즉 죽으시고 다시 사신 주님이심을 알게 됩니다.
㉡ 그러면 “말씀하신 계시” 를 통해서는 무엇을 알게 되는가?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니 곧 살아 있는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17-18), 즉 피로 값을 주고 사신 교회의 머리되시는 분임을 알게 됩니다.  이를 정리하면 교회에 편지를 보내시는 송신자는 교회를 위하여 “전에 죽어주신 분”이요,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오른 손에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 사이에 다니시는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③ 이는 에베소 교회에 국한 된 것만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일곱 별, 일곱 금 촛대”라고, “일곱”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일곱 교회에만 해당되는 말씀도 아닌 것입니다.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도 있을, 주님 오시는 날까지 지상에 존재하게 될 모든 교회에게 적용이 되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계시록을 통해서 우리 주님은,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 사이에 다니시는” 분이시라는 이 한 가지만이라도 확신하게 되고, 그리하여 목회 현장에서 자주 자주 묵상하며 놓치지 않는다면, 얼마나 큰 위로와 용기를 얻게 되겠습니까? 또한 그래야만 주님께서 일곱 교회를 향하여 칭찬하실 때, 책망하실 때, 그리고 격려하실 때, 그 말씀을 우리교회, 그리고나 자신에게 하시는 말씀으로 받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다시 강조합니다만 주님은 형제를 오른 손에 붙잡으시고, 형제가 섬기시는 교회 중에도 다니시고 계시다는 깨달음입니다.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신 이후에 우리 주님의 관심은 피로 사신 교회에 있으며, 그러므로 계시록의 초점은 교회에 집중되어 있음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지상의 모든 교회가 이 한 가지 사실만이라도 명심한다면 크게 달라진 모습이 될 것입니다.


④ 주님은 칭찬부터 하십니다.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2),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3) 하십니다. “내가, 안다” 하심은 일곱 교회에게 공통적(2:3, 9, 13, 19, 3:1, 8, 15)으로 하신 말씀입니다. 주님께서 “아신다” 하심은 의사가 환자를 진찰하듯 교회를 진단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주님께서 에베소 교회를 보실 때 칭찬 받을 일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칭찬이 무엇에 집중되어 있는가를 주목해야만 합니다.
㉠ 악한 자들을 용납지 아니한 것과,
㉡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2)이라고 구체적으로 적시(摘示)하고 계십니다. “에베소 교회” 하면, 대번에 “아, 첫 사랑을 버린 교회” 로 인식하기 쉽습니다만, 에베소 교회는 진리를 굳게 지킨 교회입니다. 이 점이 “네가 니골라당의 행위를 미워하는도다 나도 이것을 미워하노라” (6) 하신 점에서도 드러납니다. 이것이 에베소 교회에 대한 칭찬입니
다. 형제의 교회는 어떠합니까?


둘째 단원(4-5) 책망
①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하십니다. 책망 받을 일이 전연 없는 교회가 있을까 싶습니다. 그런데 책망이 무엇에 집중되어 있는가를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라”(4) 하십니다.


②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5)고 책망하십니다. 사랑을 버렸다는 것이 어찌 하여 이처럼 치명적인 잘못이 되는가 하고 심각해지고, 긴장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해석하기가 쉬운 문제가 아닙니다.
㉠ 에베소 교회에게는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5) 하시고,
㉡ 사데 교회를 향해서는,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3:1)하시고,
㉢ 라오디게아 교회에게는,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 (3:16) 하시는데, 생각해보십시오. 한국 교회 중 촛대가 옮겨지지 않을 교회, 입에서 토하여 버리시지 않을 교회가 몇이나 되겠습니까? 


참 교회의 표지
언뜻 생각하기에 “진리와 사랑”은 양립(兩立)하기가 어려운 듯이 여길수가 있습니다. 〈진리〉를 보수하려다 보면 에베소 교회처럼 사랑을 잃게 되기가 쉽고 반대로 〈사랑, 사랑〉하다보면 두아디라 교회에서 보는 바대로 “사랑”(19)은 있으나 진리를 잃게 되어(20) 혼합종교로 타락하게 될 위험성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현대교회도 진리를 보수(복음주의)하는 자와, 사랑(자유주의)을 실천하는 자로 나누어진 듯이 보입니다.
그렇다면 “진리와 사랑”은 만날 수가 없고, 공존할 수가 없단 말인가? 아닙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인애와 진리가 같이 만나고
의와 화평이 서로 입 맞추었으며
진리는 땅에서 솟아나고
의는 하늘에서 굽어보도다(시 85:10-11).


③ “진리와 사랑”의 만남이 주님께서 담당하신 십자가 사건으로 나타났습니다. 주님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진리)가 함께 나타나고, 하나님의 의로우심과 사랑을 함께 충족시켜드린 사건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이란 “진리와 사랑”의 조화요, 참 교회의 표지는 진리의 말씀이 바르게 선포되고, 사랑이 시행이 되는 교회인 것입니다.
그리고 “진리와 사랑”의 조화란 “믿음과 행함”의 조화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그 사람이 그리스도인인가 아닌가 하는 그리스도인의 표지는, “주 예수 안에서 너희 믿음과 모든 성도를 향한 사랑을 나도 듣고” 한 “믿음과 사랑”(엡 1:15, 골 1:4)의 소유자인 것입니다.  진리와 사랑이 조화를 이루고 있는 모습을 요한 서신을 통해서 대하게 되는데, “〈진리〉를 행하는 자를 내가 보니 심히 기쁘도다. 부녀여 내가 이제 네게 구하노니 서로 〈사랑〉하자”(요이 1:4-5) 합니다. “형제들이 와서 네게 있는 〈진리〉를 증언하되 네가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하니 내가 심히 기뻐하노라, 그들이 교회 앞에서 너의 〈사랑〉을 증언하였느니라”(요삼 1:3, 6) 합니다. 어떻게 “진리와 사랑”의 조화를 이룰 수가 있는가? 복음 진리를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이 마음에 부은바 된(롬 5:5) 사람만이 가능하여지는 것입니다.


④ 이런 맥락에서 에베소 교회를, “진리는 보수하였으나 사랑은 잃어버린 교회”인양 말하는 것을 조심해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진리와, 사랑”은 둘이 아니라 떼어놓을 수 없는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은 “진리와 사랑”의 조화입니다. 에베소 교회가 처음 사랑을 버렸다는 것은 은혜에 대한 감사와 감격은 잃어버리고, 형식적이고 교조주의적인 마치 조화와 같은 교회가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하면 “복음”을 잃어버렸다는 것이 됩니다. 이점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5) 하신 치명적인 책망에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에베소 교회가, “처음 사랑을 버렸다”는 점을 윤리적인 차원으로 생각해서는 아니 됩니다. 왜냐하면 “촛대를 옮기리라” 하심은 거짓교회가 된다는 사형선고와 같기 때문입니다. 결국 에베소 교회는 복음을 잃어버렸고, “이긴 자”가 아닌 패배한 교회가 되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구약교회의 그림자
이점을 구약교회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가 있는데 바벨론으로 추방을 당한 원인이 무엇인가? 하나님께서는, “나는 네 제물 때문에 너를 책망하지는 아니하리니 네 번제가 항상 내 앞에 있음이로다”(시 50:8) 하십니다. 무슨 뜻인가? 예배(번제)는 끊임없이 드렸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된 것이 아닌가?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잊어버린 너희여 이제 이를 생각하라” 하시면서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시 50:22-23) 하십니다.
감사를 잃어버렸다는 것은 하나님을 잃어버린 것이요, “사랑”을 잃어버렸다는 것은 복음에 대한 감사와 감격을 잃어버린 것이 되는 것입니다. 이점에서 에베소 성도들이 잃어버린 “사랑”이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냐? 성도 상호간의 사랑이냐를 구별하려는 것은 무의미합니다. 주님은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하고 묻는 율법사에게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 둘로 요약해주셨는데(마 22:40), 이는 십계명(율법)이 두 돌비에 기록되어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두고 있는 율법사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그러나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요 13:34) 하심으로 둘을 하나로 묶어주셨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두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마 25:40)는 말씀이 성립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갈라놓으려 해서는 아니 됩니다.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 사랑은 쉽습니다. 우리는 입으로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얼마나 쉽게 말하고 있습니까? 그러나 이웃 사랑은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행함”(5)이 따라야 하기 때문입니다.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엡 4:3)을 지키지 못하게 될 때, 그 교회는 이미 패배한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또한 사랑의 띠로 하나(골 3:14)가 되지 못한 공동체는 영적 전투에서 승리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는 무서운 책망은 “처음 사랑을 버린” 경우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닙니다. 가령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3:16)는 책망은 표현만 다를 뿐이지 의미는 같은 것입니다. 에베소 교회가 사랑은 지키고 진리를 잃어버렸다 해도 같은 책망을 받았을 것입니다. 에베소 교회에게 하신 말씀을 통해서 참 교회란, 그리고 승리하는 교회란 “진리와 사랑”을 지키는 교회임을 깨닫게 된다는 점입니다.


셋째 단원(7) 권면과 약속
①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 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주어 먹게 하리라”(7) 하십니다. 이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이라 하십니다.
서두에서는 주님이 말씀하시는 것으로 시작하였으나 “이겨라” 하는 격려와 결부해서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으로 되어 있음을 주목해야만 합니다.  주님께서 구속사역을 “다 이루었다” 하시고 승천하신 후(행 1장), 성령은 강림(행 2장)하셨습니다. 말하자면 임무교대를 하신 셈입니다. 이는 교회가 승리하기 위해서는 성령의 능력을 의지해야만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② 이점에서 주목해야 할 점이 있는데,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 지어다” 하고 교회 공동체에게 하시는 말씀임이 분명한데, “이기는 그들에게는” 하지 않고 〈이기는 그에게〉 라고 단수(單數)로 말씀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영적 전투는 단체전(團體戰)이면서도 동시에 개인전(個人戰)임을 명심해야만 합니다.
이 점이 바울 서신에서도 나타나는데, “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으라” 하고 〈전쟁〉에 비유해서 말씀하던 바울은 갑자기, “우리의 씨름은”(엡 6:11-12) 하고, 〈씨름〉 비유로 전환을 합니다. 왜냐하면 “전쟁”하면 단체전이니까 개개인이 느끼게 되는 긴박감(緊迫感)은 덜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씨름”은 1:1의 상황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1:1에서 이긴 자 한 사람, 한 사람들이 모일 때, 그 교회가 승리하는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③ 이러한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광야교회를 향하여 “이십세 이상으로 싸움에 나갈 만한 모든 자”(민 1:3)를 계수 하라고 명하신 이점이 중요합니다. 우선적으로 태어나야, 즉 거듭나야 하고, 이십 세 이상으로 성숙해져야 하고, 싸움에 나갈 만큼 훈련되고 무장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마다 이러한 수가 몇 명이나 되는가? 이것이 문제입니다. 다시 강조합니다만, 이것이 영적인 전투라는 점입니다. 그러므로 이 전투는 2000년 전에 아시아에 존재했던 에베소 교회에 국한 된 “지나간 일”이 아니라 지상의 모든 교회가 주님 오시는 날까지 싸워야 할 “이제 있는 일”임을 잊지를 말아야만 합니다.  


④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주어 먹게 하리라”(7) 하십니다. 이 약속은 우리를,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창 3:24) 하신 실낙원(失樂園)으로 인도해줍니다.
하나님께서는 실낙원(失樂園)을 복낙원(復樂園)으로 회복시켜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이 약속이 22:2절에 이르러,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 두 가지 열매를 맺히되 달마다 그 열매를 맺히는” 생명나무가 등장하고, “이는 그들이 생명나무에 나아가며”(22:14) 하고 성취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일곱 교회에게 하신 약속이 각각 다른 듯이 보이지만 결국 약속은 하나입니다. 영적 싸움, 즉 주님의 고난에 참여한 자들에게는 영원한 영광이 주어진다는 약속인 것입니다. 


⑤ “이기는 그에게는” 하시는데, 주님은 그냥 이기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이길 수 있는 여건과 능력을 주시고 이기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점을 주님은,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3) 하십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대표자간의 싸움에서 승리해 놓으신 싸움을 싸우고 있는 것입니다. 이점을 다윗과 골리앗의 예표를 통해서 볼 수가 있습니다. 다윗이 골리앗을 넘어뜨리기 전에는 이스라엘의 진영은 공포에 싸여있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이 승리하자 “이스라엘과 유다 사람들이 일어나서 소리지르며 블레셋 사람들을 쫓아”(삼상 17:52) 승리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2장의 요절이라고 말씀드린 바 있는 “이기는 자와 끝까지 내 일을 지키는 그에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리니 그가 철장을 가지고 그들을 다스려 질그릇 깨뜨리는 것과 같이 하리라 나도 내 아버지께 받은 것이 그러 하니라 ”(26-27) 하신 권세로써 이길 수가 있는 것입니다. 
“나도 내 아버지께 받은 것이 그러 하니라” 하시는데, 이점이 시편 2:9절에서 “네가 철장으로 그들을 깨뜨림이여 질그릇같이 부수리라 하시도다”라고 예언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주님은 이 권세로 승리하셨습니다. 그런데 승천하시면서 이 권세를 가지고 가신 것이 아니라 교회들에게 주고 가신 것입니다.

이 권세를 주셨기에 지상명령으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으로 제자를 삼으라”(마 28:18-19) 하신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생명나무의 열매를 주어 먹게 하리라”는 약속은 장차 받게 될 약속만은 아닌 것입니다. “이제도” 생명의 말씀으로 주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⑥ 이제 에베소 교회가 아니라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어야 할 차례입니다. 현대교회는 “진리와 사랑”을 지키는 싸움에서 승리하고 있는가? 진리를 빼앗긴 것은 아닌가? 사랑을 잃어버린 것은 아닌가? 아니면 진리도 사랑도 둘 다 빼앗기고 만 것은 아닌가?
아무리 많은 사업실적이 있다하여도 단 한 가지 강단에서 선포되는 말씀이 혼잡(고후 2:17) 되어 있다면 주님 앞에 참 교회로 인정받지를 못할 것입니다. 또한 “보수니 정통이니” 내세우면서도 사랑을 버렸다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는 치명타를 받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그런 경고를 받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다만 들을 귀가 없어서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듣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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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손승호 | 작성시간 16.12.01 할렐루야~ 참 많은걸 배우고 깨닫고 갑니다...
  • 작성자퐁이세븐 | 작성시간 17.03.09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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