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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서 강해

갈라디아서 5:5-12절,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뿐이라

작성자바람이어라|작성시간15.12.02|조회수380 목록 댓글 0

 

 

둘째 단원(5-12)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는 할례나 무할례가 효력이 없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6).

 

① 본 단원의 중심점은 도표에 나타나 있는 대로, “믿을 좇아(5), 믿음뿐이니라”(6) 한 “믿음”에 있습니다. 그냥 믿음이 아니라,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6)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믿음만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믿음, 소망(5), 사랑(6)”을 모두 말씀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신(), 망(), 애()”를 온전히 구비함이 신앙인격이기 때문입니다.

 

 

 

② “우리가 성령으로 믿음을 좇아”(5상) 합니다. 참으로 바울의 논리에는 경탄을 금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바울은 지금,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1)는 권면의 말씀을 하고 있는 중입니다. 그리고 그 비결은, “믿음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냥 믿음이라 하지 않고, ㉠ “성령으로 믿음을 좇아” 하고 “성령”을 앞세우고 있음을 놓치지를 말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성경적인 믿음과 신념(信念)의 구별이 있는 것입니다. 신념이란 자기가 자신에게 암시를 주는 인간의 산물입니다. 반면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은 성령께서 주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또한 ㉡ “성령”을 거론하고 있는 것은, 우리의 구원과 기업에 성령께서 보증을 서셨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의 기업에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구속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 하심이라”(엡 1:13 -14).

 

 

 

③ “의의 소망을 기다리노니”(5하) 합니다. “의의 소망”이란 “의롭다 함을 얻을 소망”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미 의롭다함을 얻었으며, 이제도 계속적으로 의롭다(롬 8:33)고 여김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칭의는 현재적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해주었으며,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감을 가능케 해줍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주시는 축복이 이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소망으로 남아있는 것이 있다는 것, ㉡ 이것이 “의의 소망”입니다.

 

 

 

④ 그렇다면, “의의 소망”이란 무엇인가? “의롭다 함을 얻은 자”가 누릴 영광을 말씀함입니다. “의롭다 함을 얻은 자”는 심판 날에, ㉠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게”(롬 5:9) 해줍니다. 그 날에 설 수 있는 자는 오직 의의 옷으로 부끄러운 수치를 가리움을 받은 자뿐입니다. 그러므로 불신자들은, “산과 바위에게 이르되 우리 위에 떨어져 보좌에 앉으신 이의 낯에서와 어린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가리우라 그들의 진노의 큰 날이 이르렀으니 누가 능히 서리요”(계 6:16-17) 하게 되는 것입니다. ㉡ “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며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롬 8:23) 하신 “영화”, 즉 우리 낮은 몸이 주님의 영광의 몸과 같이 변화될 소망을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의롭다 함을 얻은 자는, ㉢ “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이을 자니라”(4:7) 하신 유업을 이을 자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기다리는 바 “의의 소망”인 것입니다.

 

 

 

⑤ “믿음을 좇아…기다리노니”(5) 합니다. ㉠ “의의 소망”, 즉 진노에서의 구원, 영화, 유업을 이을 자 등은 우리에게 약속어음으로 주어졌기 때문에 “믿음을 좇아, 기다린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 또한 일한 대가로 주어지는 품삯과 같은 것이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값없이 거저 받는 것이기 때문에, “믿음을 좇아…기다린다”고 말씀합니다.

 

 

의의 소망을 기다리노니

 

 

①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효력이 없으되”(6상) 합니다. 도대체 “할례”가 무엇이기에 유대인들이 그토록 집념을 보이고 있는 것일까? ㉠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합니다. 혹 그리스도 예수 밖에(엡 2:12), 즉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에는 자랑거리가 될 수 있었을지언정, 그리스도 예수께서 오신 이후에는 할례를 받았느냐, 받지 않았느냐 가 아무 효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할례”가 우리를 의롭다고 여겨주는 것도 아니요, 그렇다고 “무할례”가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해주는 것도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이는, ㉡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있을”(3:19) 몽학선생이요, 예표요, 그림자에 불과한 것입니다.

 

 

 

② “할례나 무할례가 효력이 없다”면 도대체 무엇이 효력이 있다는 말씀인가? ㉠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6하) 합니다. 다시 한 번 감탄을 하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다 이루었다”(요 19:30) 하고 선언하신 이후에는 “오직 믿음”뿐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냥 “믿음 뿐이라” 하지 않고,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뿐”이라 하고 “사랑”을 덧붙이고 있는 것입니다. ㉡ 여기에 온전한 신앙인격인 신망애(信望愛)가 구비하게 되는 것입니다.

 

 

 

③ 우선적으로 “믿음 뿐”임을 생각해보아야만 하겠습니다. 율법은 우리에게, ㉠ “…하라, 또는 …하지 말라” 하고 요구하나, 복음은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통해서 해주신 일을, ㉡ “오직 믿으라” 하고 말씀합니다. 또한 어찌하여 믿음뿐인가? 승천하신 주님께서 다시 오시는 날까지의 기간이란, ㉢ “의인이 믿음으로 살리라”(3:11) 말씀하신 대로, “의의 소망”을 믿는 믿음으로 살아가는 기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말씀하기를, “잠시 잠간 후면 오실 이가 오시리니 지체하지 아니하시리라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저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히 10:37-38) 하고, “오직 믿음으로 사는” 기간(期間)임을 말씀합니다.

 

 

 

④ 그런데 바울은, “오직 믿음”이라 하지 않고 어찌하여, ㉠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이라고 “사랑”을 첨부하고 있는 것일까요? 갈라디아서에 있어서 여기가 “교리와, 윤리”의 분기점(分岐點)이라고 말씀드릴 수가 있습니다. 바울이 1-4장(교리)의 문맥에서라면, “오직 믿음”이라고만 역설(力說)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5장 이하는 1-4장의 논증을 적용(適用)하는 윤리부분이요, 바울의 의중에는 이제까지 강조한 “믿음”에 조화(調和)와 균형(均衡)을 잡아주려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13절에서는 도리어, ㉡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 (13) 합니다. ㉢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 이루었나니”(14) 하고 “사랑”을 강조하고 있는 것을 대하게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기독교윤리란,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뿐”이라는 한 말씀 속에 다 들어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닌 것입니다.

 

 

 

⑤ 좀 더 설명을 드려야만 하겠습니다. 성경이, “오직 믿음, 오직 믿음” 하고 말씀하는 믿음이란, “뻔뻔스런” 그런 믿음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신앙주의”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들은 말합니다. “믿는다고 말만 하라, 고개를 끄떡하기만 하라” 그리하면 구원을 얻는다고 주장하는 자들입니다. 성경이 요구하는 믿음은 그런 유들유들하면서 뻔뻔스런 얼굴로 믿습니다 하는 믿음이 아닙니다.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인 것입니다. 요한복음은 어느 복음서보다도 믿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부활하신 주님은 베드로에게,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요 21:15) 물으십니다. “더 믿느냐” 하고 묻지 않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물과 배를 버리고 주님을 쫓을 때는 오직 믿기만 하면 되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목격한 이제는, “사랑”입니다. 그냥 사랑이 아니라,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뿐입니다”.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 뿐이라

 

 

① 갈라디아서에서 “사랑”이 처음 등장하는 곳은 2:20절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사랑이 아니라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사랑입니다. ㉠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5:6절의 “사랑”은, ㉡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같이 하라” 하신 우리가 해야할 사랑입니다. 우리의 사랑은 앞 부분에 나오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성경은 말씀합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요일 4:10). 하나님의 선수적인 사랑을 받은 자만이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이제까지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통해서 우리들을 위하여 해주신 일을 먼저 말씀했던 것입니다. 이를 듣고 믿어 의롭다함을 얻고 거듭나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을 확신케 한 후에, 5장에 이르러서야,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 하고 “믿음+사랑”을 더하고 있는 것입니다.

 

 

 

② 바울은 5-6절에서 신앙의 중요한 3대 요소인, “믿음, 소망, 사랑”을 언급함으로 조화와 균형을 잡아주고 있는 것입니다. ㉠ “믿음을 좇아”, ㉡ “의의 소망을 기다리노니”, ㉢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 그렇습니다.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살전 1:3)만을 간직하고 있다면 여기에다 무엇인가 부가할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는 것입니다.

 

③ 그러므로, “너희가 달음질을 잘하더니 누가 너희를 막아 진리를 순종치 않게 하더냐”(7) 합니다. ㉠ “그 권면이 너희를 부르신 이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8) 합니다. 즉 삼위 하나님에 의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루살렘 공의회에서도, ㉡ “우리의 시킨 것도 없이 나가서 말로 너희를 괴롭게 하고 마음을 혹하게 한다 하기로”(행 15:24) 하고 “시킨 것이 아님”을 말씀합니다. 그렇다면 누가 시킨 일이겠습니까? 이런 일은 구약시대도 있었습니다. ㉢ “내 백성을 미혹하게 하는 자를 내가 치리라 내가 그들을 보내지 아니하였으며 명하지 아니하였나니 그들이 이 백성에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렘 23:32) 하십니다. 그들을 가리켜, “내 말을 도적질하는 선지자”(렘 23:30)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보내지도 않으셨고, 명하지도 않으셨음에도, “하나님의 말씀을 도적질하는 자”는 어느 시대나 있었으며 오늘날이 더욱 그러한 시대라 할 수가 있습니다. ㉣ “적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지느니라”(9) 하고 거짓 교훈을, “누룩”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이단사상에는 사람을 미혹케 하는 전염성이 있습니다. 바울이 이 누룩을 제거하지 않았다면 복음 진리는 초대교회 때부터 위기에 봉착했을 것입니다

 

 

 

④ “형제들아 내가 지금까지 할례를 전하면”(11상) 합니다. 이 말씀은, ㉠ “너희가 만일 할례를 받으면”, 한 2절 말씀과 절묘한 대칭(對稱)을 이루고 있습니다. “너희가 만일 할례를 받으면” 어찌된다고 말씀하는가? “그리스도께서 너희에게 아무 유익이 없으리라”고 말씀합니다. 그렇다면, ㉡ “내가 지금까지 할례를 전하면” 어찌 될 것이라고 말씀하는가? “어찌하여 지금까지 핍박을 받으리요”(11중), 이를 달리 말하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1:10)는 뜻이 될 것입니다.

 

 

 

⑤ “그리하였으면 십자가의 거치는 것이 그쳤으리니”(11하) 합니다. ㉠ “거치는 것”이라는 말은 “걸려 넘어지게 하는 장애물”이라는 뜻입니다. 여기에 십자가의 양면성(兩面性)이 있습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걸려 넘어지게 하는 미련한 것이요, ㉡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고전 1:18)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복음에는 불가피하게 심판하는 역사가 따르게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을 좋게 하고, 환영을 받는 설교란 철학강의는 될지라도 복음 진리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거치는 것이 그쳤으리니” 하는 말씀은, 바울이 복음을 전파하는 곳곳마다 구원 얻는 자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걸려 넘어져서” 핍박하고 대적하는 반대세력이 있었음을 의미합니다. 호세아 선지자도, “여호와의 도는 정직하니 의인이라야 그 도에 행하리라 그러나 죄인은 그 도에 거쳐 넘어지리라”(호 14:9) 하는 말씀으로 예언을 끝마치고 있습니다.

 

 

 

⑥ “할례”에 대한 논증은 현대교회에도 중요한 논쟁이 될 수가 있습니다. ㉠ “할례”란 인간의 행위(行爲)와 결부가 되고, ㉡ 복음은 전적으로 하나님이 해주신 믿음과 관련이 되기 때문입니다. 믿음보다 행함을 강조하면 율법으로 기울어질 염려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주권(主權)보다는 인간의 책임을 앞세우는 잘못에 빠지게 됩니다. 이는 필연적으로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통하여 행해주신, “은혜”보다는 인간이 행해야 하는 “책임”를 강조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한다면 그것은, “할례의 종교”라고 말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찌하여 하나님의 주권보다는 인간의 의무(제대로 감당하지도 못하면서)를 강조하는 것일까요? 그렇게 하는 것이 열심을 내게 하고 성장의 동력(動力)이 된다고 여기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통해서 다 해주셨다고 말하고 나면 행함이 없을 것을 염려해서일 것입니다. 그럼에도 회중들은, “이렇게 하라, 저렇게 하라” 하고 멍에를 메우듯 하는 것을 좋게 여김은 어째서일까요? 타락한 인간의 심성에는 무엇인가 내세우고 싶고, 자랑하고 싶은 자기중심적인 근성이 남아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자랑하는 곳에는 심령의 가난함이 있습니다. 애통하게 만듭니다. 그리하여 온유하여지고 의에 주리고 목말라(마 5:1-12) 하게 합니다. 한마디로,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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