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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서 강해

현대교회에 보내는 갈라디아서

작성자바람이어라|작성시간15.12.02|조회수661 목록 댓글 0

 

 

현대교회에 보내는 갈라디아서

 


들어가는 말

 

① 갈라디아서는 “참 복음과 다른 복음”을 분별하는 변증서(辨證書)라고 말할 수가 있다. 그러므로 갈라디아서는 2000년 전 갈라디아 지방에 보내진 편지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초대교회로부터 종말에 이르기까지 지상에 존재하게 될 모든 교회를 향하여 성령께서 하시는 말씀인 것이다. 그리하여 강단에서 선포되고 있는 말씀들이 참 복음인가? 아니면 변질된 다른 복음인가를 검증하고 감시하고 있다 하겠다.

 

② 그러므로 “현대교회에 보내진 갈라디아서”라는 표현이 가능한 것이다. 그렇다면 현대교회의 설교를 갈라디아서에 비취어 보면 어떻게 되는가?

 

③ 바울은 “어떤 사람들”이 전한 메시지를 “다른 복음”으로 규정하고 있다. 그렇다면 갈라디아서는 우리에게 이러한 물음을 갖게 한다. “설교도 비평(批評)이 가능한 것인가?” 그리고 갈라디아서에 의하여 오늘의 설교를 비평한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④ 복음전도자는 바른 신학과 참신한 신앙으로 이에 도전해야 마땅하리라. 이것이 본 소고가 지향하는 바다.

 


어떤 사람들

 

① “어떤 사람들”이 바울과 바나바가 제1차 선교 여행 때에 복음의 씨를 뿌린 갈라디아 지방(비시디아 안디옥, 이고니온, 루스드라, 더베, 행13-14장)에 들어와 “다른 복음”을 전하여 교회를 요란케 하고 참 복음에서 떠나도록 했다는 것이다.

 

② 그렇다면 다른 복음을 전한 “어떤 사람들”이란 도대체 누구들이란 말인가? 이점은 현대교회에 다른 복음을 전하는 “어떤 사람들”은 없는가를 정검하게 하는 중요한 경계가 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빛을 비춰주는 말씀들이 있다. 2:12절에서 “야고보(예루살렘 교회 초대 감독)에게서 온 어떤 이들이 이르기 전에 게바(베드로)가 이방인과 함께 먹다가 저희가 오매 그가 할례자들을 두려워하여 떠나 물러가는” 일이 있었다고 말씀한다. 이로 미루어보아 갈라디아 지방에 내려와서 다른 복음을 전한 “어떤 사람들”이란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사람들로 보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이다. 베드로가 물러간 것은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그들이 무할례자들과 교제함을 불법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③ 이처럼 다른 복음을 전하는 “어떤 사람들” 때문에 예루살렘 교회가 공회로 모이게 되었는데 “바리새파 중에 <믿는 어떤 사람들>이 일어나 말하되 이방인에게 할례 주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라 명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주장하여 “많은 변론”(행15:5-6)이 있었다고 전한다. 이 공회에서 일치 가결하여 여러 이방인 교회에 보낸 편지에 “들은즉 우리 가운데서 <어떤 사람들>이 우리의 시킨 것도 없이 나가서 말로 너희를 괴롭게 하고 마음을 미혹하게 한다 하기로”(행15:24),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④ 이상의 정황으로 볼 때 갈라디아 교회에 와서 다른 복음을 전한 “어떤 사람들”이란 밖에서 들어온 불신 유대인들이 아니라, ㉠ 예루살렘 교회에서 내려온, ㉡ 바리새파 중에 믿는 “어떤 사람들”임을 알게 된다. ㉢ 이런 권위가 있었기 때문에 갈라디아 성도들이 바울이 전하여준 복음을 “속히 떠나 다른 복음”(6)을 좇아가게 되었던 것이다.

 


⑤ 그렇다면 예수가 구약에서 언약하신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사람들이 어찌하여 다른 복음을 전하게 되었을까? 하는 물음을 갖게 한다. ㉠ 이에 대한 답을 고린도 후서 3:12-18절에서 구할 수가 있는데, “우리는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들로 장차 없어질 것의 결국을 주목치 못하게 하려고 수건을 그 얼굴에 쓴 것같이 아니하노라 그러나 저희 마음이 완고하여 오늘까지라도 구약을 읽을 때에 그 수건이 오히려 벗어지지 아니하고 있으니 그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질 것이라”고 말씀한다. 모세가 수건을 얼굴에 씀으로 발하는 광채를 가렸던 사실을 들어서 율법주의자들이 그리스도를 믿으면서도 “오늘까지라도 구약을 읽을 때에 그 (마음을 덮고 있는 의문이라는) 수건이 오히려 벗어지지 않고” 있기 때문에 “이방인에게 할례 주고 모세의 율법을 지켜야” 된다는 “다른 복음”을 전했다는 대답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⑥ 그렇다면 이 “어떤 사람들”이란 “그리스도인인가? 아닌가?, “형제인가? 아닌가?”, 하는 물음을 갖게 한다. ㉠ 이들은 자신들을 신령한 자로 자처했을지 몰라도 바울이 지적한,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고전3:1) 한 “육신에 속한 자”로 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 바울은 말씀한다.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신령(神靈)에 있고 의문(儀文)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롬3:29). 이점은 율법의 대명사인 모세까지도 “그러므로 너희는 마음에 할례를 행하고 다시는 목을 곧게 하지 말라”(신10:16)고 말씀하지 않았던가? ㉢ 그러므로 이 “다른 사람들”이란 “때가 오래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될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가 무엇인지 누구에게 가르침을 받아야 할 것이니 젖이나 먹고 단단한 식물을 못 먹을 자들”(히5:12)이었던 것이다. 이제 분명한 것은 이들은 “가르침을 받아야 할 자들”이지 가르칠 수 있는 “교사”는 아니라는 결론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⑦ 그런데 예루살렘 교회의 공회원들 중에 이러한 육신에 속한 자, 즉 영적으로 어린 아이와 같은 자들이 있었을 뿐만이 아니라, ㉠ 바울이 선교한 각 지방에 내려와서 “다른 복음”을 가르쳤다는데서 문제가 발생하게 된 것이다. “할례당”(빌3:2)이라 지칭한 이들이 바울의 선교사역에 가장 큰 걸림돌이 되었던 것이다. ㉡ 그렇다면 현대교회 내에는 이러한 사람들이 없는 것인가? 설교자 중에, 장로 중에, 총회 총대 중에, 신학자 중에 이런 “어떤 사람들”이 없다고 장담할 수가 있을까?

 


저주를 받을지어다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의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8-9) 라고 말씀한다. 우리가 주목하게 되는 것은 두 번이나 “저주를 받을지어다” 라고 강조하고 있다는 점이다.

 

① 현대교회에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는가? 만일 이렇게 말한다면 어떤 취급을 받게 될 것인가? 사람들은 독선적이고, 편협하고, 사랑이 없고, 교회일치를 해치는 자로 낙인을 찍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점을 예의(銳意) 관찰해보아야만 한다.

 


② 먼저 바울은 “어떤 사람들”을 저주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러하기는커녕 “그러나 우리나” 하고 자신을 제일 먼저 꼽고 있다. ㉡ 다음으로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8) f고 그의 소속이나 지위를 불문하고, ㉢ 맨 마지막으로 “만일 누구든지 너희의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9) 라고 일반적(一般的)으로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만일 누구든지”라는 말씀 속에는 오늘의 설교자들도 예외일 수는 없다는 것이 된다. 우리 중에는 더 큰 심판, 다시 말하면 “저주”를 받아 마땅한 그런 자는 없다고 말할 수가 있는가?

 


다른 복음

 

 

그렇다면 “어떤 사람들”이 전한 “다른 복음”이란 무엇이기에 바울이 이처럼 격앙되고 분개하고 있는 가를 생각해 보아야할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크게 두 가지를 들어 바울을 공격했다. 첫째는 바울은 참 사도가 아니며 자신들이야말로 예루살렘에서 파송 된 참 교사로 자처했다. 둘째는 바울이 전해준 복음을 믿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며 할례를 받아야 하고 율법에 명시된 절기들(4:10)을 지켜야 한다고 가르쳤던 것이다.

 

① 그리하여 바울은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및 죽은 자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 된 바울은”(1:1) 하고 자신의 사도 권을 옹호한다. 여기서 유념해야 할 점은 바울은 자신의 명예나 지위를 옹호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자신의 사도 권을 옹호하는 것은 자신이 전한 복음의 권위를 수호하기 위해서였던 것이다. 이점은 말씀을 선포하는 모든 설교자들에게도 적용이 된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네가 이것들을 명하고 가르치라” 한 다음에 “누구든지 네 연소함을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라”(딤전4:11-12)고 권면했던 것이다.

 


② 바울은 어떤 사람들의 메시지를 “다른 복음”이라고 배격한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를 믿어야함을 결코 부인하지 않았다. 오늘의 표현대로 하면 사도신경으로 신앙을 고백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할례” 쯤이야 포용해도 되지 않는가 하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현대교회가 취하고 있는 태도대로라면 그들이 예수를 부인하는 것도 아닌데, 할례문제가 무엇이기에 다른 복음으로 규정하고, “저주를 받을지어다” 하고 정죄한단 말인가? 너무나 편협한 것이 아닌가? 여길 법도 하다. 그런데 이는 지엽적인 것이 아니라 복음의 본질적인 문제였던 것이다.

 

③ 복음이란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났나니”(고후 5:18) 하신 말씀대로 구원에 필요한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을 통하여 이루어주신 것이다. 거기다가 무엇인가 첨부시키려 한다면 이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7) 한 “다른 복음”이 되고 마는 것이다. <십자가+할례=복음>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께서 행해주신 대속에다가 인간이 할례를 보태야 구원이 온전해진다는 변질된 복음이 되기 때문이다. 그들이 전한 것은 “행위의 복음, 율법적인 복음”이라 말할 수는 있어도 “그리스도의 복음, 은혜의 복음, 십자가 복음”은 아니었던 것이다. 이를 받아드린다면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5:4) 하고 말씀한다.

 


④ 이점은 구약의 예표에도 나타나고 있는데 하나님께서는, “내게 토단을 쌓고 그 위에 네 양과 소로 네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라 내가 내 이름을 기념하게 하는 모든 곳에서 네게 임하여 복을 주리라 네가 내게 돌로 제단을 쌓거든 다듬은 돌로 쌓지 말라 네가 정으로 그것을 쪼면 부정하게 함이니라”(출 20:24-25)고 경고하신다. “번제”가 누구의 무엇에 대한 그림자인가를 생각해 보라. 우리의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단독적으로 단번에 성취하신 것이다. 거기에다가 “정으로 쪼듯” 첨부해야 되는 것이 아닌 것이다. 그렇게 한다면 “부정하게 함이라”, 즉 다른 복음이 된다고 말씀하신다.

 


⑤ 또한 “다른 복음”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육체를 자랑하려는”(6:13) 교만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런 미혹 때문에 갈라디아 성도들이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좇게” 되었다고 여겨진다. 다시 말하면 볼 수 없는 “믿음”보다는 볼 수 있는 “증거”를 몸에 지니기를 원하는 심리가 미혹에 빠지게 했다는 말이다.

 

사람들에게,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다 마련해주신 것입니다. 값없이 거저 주시는 것입니다” 라고 말해주면 사람들이 환영하고 기뻐할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가 않다. 왜냐하면 타락한 인간은 자기중심적이 되어서 자신이 무엇인가 해야 하고, 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하나님이 90%를 해주시고 자신도 10% 정도는 보태야 된다고 생각한다는 말이다. 이는 자신을 내세우고 자랑거리를 갖기를 원하는 타락의 심성 때문이다. 6:13절을 보면 “할례 받은 저희라도 스스로 율법은 지키지 아니하고 너희로 할례 받게 하려 하는 것은 너희의 육체로 자랑하려 함이니라” 말씀한다. 이 “자랑하려”는 자기중심성이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는”(롬 10:2-3) 것으로 나타났던 것이다. 이것이 깨어지고 부서지기까지는 그는 진정 복음을 이해한 것이 아니다.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라”고 자고하던 바울은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다”(6:14)고 선언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⑥ 그러므로 궁극적으로 “다른 복음”은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신”(2:21) 것으로 만들기 때문에 배격해야 하는 것이다. 바울을 그처럼 분개케 한 것은 사사로운 감정의 발로가 아니라 그리스도에 대한 감사와 감격, 복음에 대한 열정, 영혼 사랑에서 우러나온 의분이었던 것이다. 로마서 9:3절을 보라.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다” 하고 동족의 구원을 위해서라면 자신이 저주를 받아도 원하는 바로라고 말씀하고 있다. 아가서는 “사랑은 죽음같이 강하다”(아 8:6)고 말씀한다. 하나님은 자신을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출 20:5)이라 하신다. 복음에 대한 사랑과 사모, 열정이 없는 사람은 복음을 위한 분 냄도 없는 것이다.

 

⑦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이 상실한 것 가운데 하나가 대적자(사탄, 비진리)에 대한 적개심이 없다는 점이다. 적개심이 없으면 실상은 사랑도 없는 것이다. 생각해 보라. 이리가 당신의 닭을 물어갔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닭이 아니고 당신의 사랑하는 자식을 물어갔다면 당신은 어떻게 반응하겠는가? 바울은 지금 그런 분한 마음으로 갈라디아서를 쓰고 있는 것이다.

 


사람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①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10)고 말씀한다. 여기에 ㉠ 거짓 교사(거짓선지자)의 특성이 드러나고 있다. 그들은 사람들을 좋게 하여 사람들에게서 기쁨을 구하려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혹하게 되고 그를 좇게 되는 것이다. 바울은 “누가 너희를 꾀더냐”(3:1) 라고 말한다. ㉡ 주님께서도 말씀하신다. “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면 화가 있도다 저희 조상들이 거짓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눅 6:26).

 

② 많은 목회자들이 “라오디게아 교회”를 꿈꾸고 있지만 주님은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아노니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계2:9)고 서머나 교회를 칭찬하심을 유념해야만 한다.

 


복음의 핵심

 

그렇다면 사도 바울이 전파한 복음의 핵심이란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구속사의 난제가 무엇인지 아는가? 그것은 어떻게 하면 하나님 앞에 “의롭다함”을 얻는가 하는 문제인 것이다.

 

① 이점을 2:16절이 명백하게 말씀해주고 있는데,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 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고 단언한다. 16절 한 절 속에는 “의롭다 함, 율법의 행위, 믿음”이라는 말이 각각 세 번이나 등장한다. 의롭다함을 얻는 길이 율법의 행위로 가능한가? 믿음으로만이 가능한가를 강력하게 증언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결론은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함을 얻을 육체가 없다”고 단언한다. 오직 “믿음”으로만이 가능하다고 말씀한다. 그러하기 때문에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다”고 말씀한다. 이것이 바울이 전한 복음의 핵심인 것이다.

 


그런데 거짓 형제들은 복음+율법=구원을 전했고, 믿음+할례=구원을 주장함으로 복음을 변하려 했던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 앞에 의롭다함을 얻는 길은 오직 믿음으로만이 가능하여진다는 이신칭의(以信稱義) 교리가 로마서의 중심주제인 것이다. 죄인이 구원함을 얻는데 있어서 가장 큰 난제는 인간이 하나님 앞에 어떻게 의롭다함을 얻을 수가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이 난제만 해결되면 다음은 자연히 풀려나가게 되기 때문이다. 한 번 이렇게 말해 보라. “하나님은 의로우시다. 그런데 나는 의롭지 못하다”. 이 말에 동의하는가? 그렇다면 의로우신 하나님과 의롭지 못한 나와의 관계는 어떤 상태에 놓이게 되는가?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다”(사 59:2)고 말씀한다. 성경은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두움이 어찌 사귈 수가”(고후 6:14) 있단 말이냐고 묻고 있다.

 

갈라디아서는 우리 앞에 두 길을 제시한다.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길과, 행함으로 의롭게 되는 길”(3:11-12)이 놓여 있다. 어느 길이 우리들에게 의롭다 함을 줄 수가 있는가에 관건이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의롭다함을 얻어야만 의로우신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가 있기 때문이다. 행함으로 의롭게 되려는 시도는 실패로 끝났다.

 


② 이 복음 진리는 신약의 성도들에게만 해당되는 구원의 길이 아니라 구약의 성도들에게도 유일한 구원의 길이라고 말씀한다. 갈라디아서는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했다”(3:8)고 말씀하고 있다. 그리하여 아브라함도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었다(3:6)고 말씀한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 자의 조상, 곧 “믿음의 조상”이 된 것이다. 그렇다면 율법은 왜 주셨는가? “그런즉 율법은 무엇이냐 범법함을 인하여 <더한 것>”(3:19)이라고 말씀한다. 3장의 구도를 도식(圖式)으로 나타내면,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함(3:8)→모세를 통하여 율법을 주심(더한 것, 3:19)→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심(3:22)이 된다. 그렇다면 복음(아브라함에게 전한)과 복음(신약에 나타난) 사이에 끼어있는 율법의 기능은 무엇인가?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3:24)이라고 말씀한다.

 


③ 우리가 “나는 의롭지 못하다”는 것은 주님을 만나기 이전 상태만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다. 주님을 만난 이제도 나의 행위로는 하나님 보시기에 계속적으로 의롭지가 못한 것이다. 그러므로 정죄감에서 헤어나지 못하게 되고 탄식의 연속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이 복음이란 말인가? 아니다. 복음은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느니라”(롬 8:1, 33)고 선언한다. 어떻게 정죄감에서 해방될 수가 있단 말인가?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다고 여겨주신 것은 그냥 하신 것이 아니었다. 성경은,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롬 8:3) 행해주셨다고 말씀한다. 이점을 갈라디아서에서는,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리심”(1:4)으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3:13) 가능하여 졌다고 말씀한다. 즉 우리를 위하여 대신 정죄를 받으셨기 때문에 우리에게 정죄가 없고, 대신 저주를 받아주셨기 때문에 저주에서 해방이 된 것이다.

 


④ 그렇다면 인간이 행해야 할 일이 무엇이 남았는가? 없다. 오직 이 대속의 은총을 “듣고 믿기만”(3:2, 5) 하면 된다고 말씀한다. 오직 이 한 길만이 하나님께 의롭다함을 얻을 수 있는 길이요,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길이요,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할 수 있는 길이라고 말씀한다. 만일 “십자가의 도” 외에 다른 길, 다른 방도가 있다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2:21)고 말씀한다.

 

⑤ 그렇다면 율법, 즉 행함은 필요 없단 말인가? 하는 문제가 대두되게 된다. 여기에 “자유와, 종”이라는 상반된 개념이 도입이 된다. 그리스도인이란 자유인이면서 동시에 사랑의 종이라고 말씀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5:1) 한다. 또한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5:13) 하신다. 어떻게 자유하면서도 종노릇하는 것이 가능하게 되는가? 이는 성령으로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에게만 가능하다고 말씀한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5:16)고 “성령”으로만이 가능하여진다고 말씀함으로 “믿음과 행함”의 조화와 균형을 잡아주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의롭다함을 얻음으로 그 몸이 성령이 거하시는 전이 된 자들만이 의로운 삶을 살아갈 수가 있다는 말씀인 것이다.

 


현대교회에 보내는 갈라디아서

 

① 기록된 갈라디아서가 이 시대에 어찌하여 선포되는 갈라디아서가 되어야만 하는가? 현대교회 안에는 할례를 받아야 구원을 얻는다고 주장하는 거짓 형제들은 더 이상 없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시어 값없이 거저 주시는 복음에다가 무엇인가 첨부해야 구원에 이르는 양 복음을 변케 하려는 시도는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기승을 부리고 있고, 현대교회가 더욱 극에 달해 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 그렇게 하는 것이 합리적이고 인간의 이성으로 옳게 여겨지고 사람들에게 어필이 되기 때문이다. ㉡ 그리하여 성공(?)적인 목회자가 되고 싶기 때문이다.

 


② 이에 대한 증거가 현대교회의 강단에서 칭의교리에 대한 설교가 희소하여 지고 사라졌다는 점이다. 이는 복음이 살아지고 있다는 명백한 증거인 것이다. 그들은 말한다. “우리는 복음을 받아드렸다, 거듭났다, 이제는 성장이요, 성화다”. 이것은 복음을 일탈하여 율법으로 돌아가고 있는 현대판 “다른 복음”일 수가 있는 것이다. 복음은 한 번 통과하고 마는 그런 것이 아니다. 복음으로 구원 얻고, 복음으로 의로운 삶을 살아가고, 승리의 삶을 살아갈 수 있게 해주는 것도 오직 복음만이 가능하게 해주는 것이다. 율법은 칭의만을 주지 못한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성화도 주지 못했음을 명심해야만 한다. 강단에서 칭의교리가 사라지게 되면 성도들에게서는 기쁨도 사라진다는 사실을 명심하자. 왜냐하면 복음만이 “큰 기쁨의 좋은 소식”(눅 2:10)이기 때문이다. 복음이 살아지게 되면 성도들은 “다른 복음”이라는 멍에 하에서 신음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서 이것이 구원을 얻기 위한 힘씀으로 여기고 있는 것이다. 이 속박으로부터 자유케 하기 위해서 갈라디아서는 현대교회에 보내진 것이다. 기뻐 뛰면서 감사하며 찬양하게 하기 위해서이다. 그리하여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게” 하기 위해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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