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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강해

로마서 8:34, 그리스도의 중보 사역

작성자바람이어라|작성시간15.12.02|조회수711 목록 댓글 0

 

 

그리스도의 중보사역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8:34).

 


사도는 본문을 통해서 소극적으로는 누구도 우리를 정죄(定罪)할 수 없는 근거를 말씀하고, 적극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사역을 통한 구원의 확실성(確實性)과 안전성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모세는 죽기 전에 유언과 같은 설교에서,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너를 위하여 일으키시리니”(신 18:15) 하고 예언을 했습니다. “나와 같은” 이라는 것이 중보사역입니다. 그런데 모세는, “사환으로 충성하였고, 그리스도는 아들로 충성하였다”(히 3:5, 6)는 점과, 모세는 “율법을 주었고, 그리스도는 은혜(恩惠)를 주셨다”(요 1:17)는 점이 다른 것입니다.

 

①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34중) 합니다.

 

㉠ 이 말씀에는 짝이 있습니다. 예수와, 그리스도를 떼어놓아서는 아니 되듯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다시 살아나심”도 떼어놓아서는 아니 됩니다. 왜냐하면,

 

㉮ “죽으심”을 통해서 구속(救贖)하셨고,

 

㉯ “살으심”을 통해서 사망(死亡)권세를 이기고 승리하셨기 때문입니다.

 

㉡ 사도들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인하여 죽으신 것만이 아니라,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을 증거하는데 목숨을 걸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기에 “구원과, 승리와,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어 못 박아 죽였으나, 하나님께서 사망의 고통을 풀어 살리셨다”(행 2:23-24),

 

㉯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그러나 하나님은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으니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로라”(행 3:15),

 

㉰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행 4:10),

 

㉱ “너희가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를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살리시고 이스라엘로 회개케 하사 죄사함을 얻게 하시려고 그를 오른손으로 높이사 임금과 구주를 삼으셨느니라”(행 5:30-31) 하고 담대히 증거하다가 죽임을 당한 것입니다. 현대교회에 세움을 받은 증인들은 무엇을 외치는데 열을 올리고 있단 말인가?

 

㉢ 사도가 이 문맥에서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다시 살아나심”을 거론하는 의도가 무엇인가를 인식해야만 합니다. 그것은 우리를 “의롭다” 하심이 하나님의 공의(公義)에 모순 되는 일이 아니라는 점과, 그러므로 “송사를 당하고 정죄를 당할” 이유가 없다는 점을 확신시키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② 또한 34절 한 절속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사역이 요약되어 있습니다.

 

㉠ 죽으심이 있고, 다시 살아나심이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우편에 계심이 있고,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심이 있습니다. 이 한 단계 한 단계(段階)는 우리와 떼어 놓을 수 없는 중요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聯合)한 자에게는, 그리스도에게 되어진 일이 동일하게 우리들에게도 되어진 일이기 때문입니다.

 

㉡ 다시 강조합니다만 예수 그리스도에게 일어난 일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에게도 되어진 일이라는 것입니다. 사도는 이점을 6장에서 이미 증거했기 때문에 본문에서는 되풀이 하고 있지는 아니 합니다. 그러나 본문을 상고할 때에 이점을 염두에 두고 있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③ “죽으실 뿐 아니라” 합니다. 누가 죽으셨는가? 왜 죽으셨는가? 누구를 위해서 죽으셨는가?

 

㉠ 죽으신 분은 “그리스도 예수시니” 합니다. 그리고 “우리를 위하여” 라고 말씀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죄인 된, “우리를 위하여,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신 대속적인 죽으심이었습니다. 그래서 “정죄(定罪)와, 죽으심”을 결부해서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를 위함이 아니었다면 죽으셔야할 이유가 전혀 없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5:8) 합니다.

 

④ 그런데 “죽으신” 것이 끝이 아니라 그 뿐만이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34중) 합니다.

 

㉠ 주님의 죽으심이 우리를 위한 것이었듯이, 주님의 부활(復活)도 우리를 위한 것이었다는 점을 명심해야만 합니다. 물론 예수 그리스도는 사망에 매어 계실분이 아니십니다. 그러나 주님의 부활은,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4:25하), 즉 우리 죄가 다 속량이 된 것만이 아니라, “의롭다”함에 대한 확증이었던 것입니다. 또한 우리 부활에 대한 보증(保證)이 되는 것입니다.

 

㉡ 사도는 부활 장에서,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지 못하셨으리라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또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라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고전 15:13, 17-18, 20) 하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첫 열매”인 것입니다. 사망을 이기시고 무덤을 깨치고 부활하셔서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첫 열매를 거둔 후에는 본격적인 추수(秋收)가 시작되듯이, 그를 믿는 모든 자들도 부활에 참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죽으심과 부활”은 떼어 놓아서는 아니 됩니다. 금요 구역 예배 때에 “주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신 이 날에” 라는 기도를 듣게 됩니다. 마치 추도식 같은 분위기입니다. 기독교는 죽음이 끝이 아닙니다. 그것은 또 하나의 출발인 것입니다.

 

⑤ 그런데 사도는 한 단계(段階) 더 올라갑니다. “다시 살아나신” 것만이 아니라,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합니다.

 

㉠ 이는 주님께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영광 받으신 승귀를 의미합니다. 사도는 빌립보서에서도,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셨다”(빌 2:9) 하고 말씀합니다. 주님은 잡히시던 날 밤 아버지와 독대(獨對)하신 기도에서, “아버지여 창세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요 17:5)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 하나님을 찬양하십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을 택하셔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고전 1:30) 집어넣어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주와 합하여 한 영”(고전 6:17)을 이루게 해주셨습니다. 그리하여 주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실 때에 우리는 구경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 옛 사람이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고 함께 죽었던(6:6-8) 것입니다.

 

㉢ 함께 죽은 것만이 아니라, 주님이 다시 살아나실 때에 나도 함께 새사람으로 살리심을 받아,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늘에 앉히시니”(엡 2:6), 즉 벌써 하늘에 앉혀주셨다고 말씀합니다. 주님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으시어 영광 받으심까지도, 우리들이 장차 받을 영광에 대한 보증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⑥ 사도는 여기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하여 간구(懇求)하시는 자시니라”(34하) 하고, 한걸음 더 나아갑니다.

 

㉠ 주님은 “너희를 위해서 내가 할 일은 다 끝났다”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중보사역은 끝난 것이 아닙니다. 끝이 났다니요? 주님께서 피로 사신 주의 성도들이 영화(靈化), 즉 구원이 완성이 될 때까지는 끝이 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간구하신다” 하고 말씀합니다. 그렇다면 무엇이라 간구하고 계실까요?

 

㉡ 주님은 대답하십니다.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요 6:39). 주님은 베드로가 부인할 것을 아시고,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눅 22:32), 아시겠습니까?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요 10:28), 이를 위해서 간구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⑦ 사도가 “우리를 위해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하고 말씀하는 의도가 무엇인가? 어찌하여 이 말씀이 여기에 있는지 아시겠습니까?

 

㉠ 사도는 목회자입니다. 어느 성도가 이렇게 물을 것을 예상하고 있는 것입니다. “목사님 제가 지금은 믿음에 서 있지만 만일 믿음이 약하여져서 실수하고 넘어지게 되면 그 때는 어떻게 됩니까? 이 모든 영광을 잃어버리고 마는 것이 아닐까요?”

 

㉡ 아닙니다. 요한일서 2:1절을 보십시오.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罪)를 범치 않게 하려 함이라” 하고 이점을 먼저 다짐을 하면서,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代言)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하고 말씀합니다. 형제를 잃지 않기 위하여 간구하여 주시는 주님이 계시다는 것입니다.

 

㉢ 그러므로 사도의 논증은,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누가 정죄하리요” 하는 부정적이고 소극적인 면을 뛰어 넘어, 구원의 완성인 영화에 대한 확신을 확고하게 심어주고자 하는 것입니다.

 

⑧ 끝으로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하는 말씀을 좀더 상고하고자 합니다.

 

㉠ 이 말씀은 시편 110:1절에서,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으라 하셨도다” 하고 예언 된 말씀입니다. 주님께서도 이 예언을 인용하셔서,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主)라 칭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마 22:45, 막 12:36, 눅 20:43) 하고 당시 지도자들을 벙어리 되게 하신 말씀입니다.

 

㉡ 주님은 재판을 받으실 때 대제사장에게, “이 후에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마 26:64)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유념할 점은 초대 사도들이 주님의 “우편 재위”(在位)를 가장 힘을 주어 담대히 증거한 말씀이라는 점입니다.

 

㉮ 베드로 사도는 성령강림 후에 행한 첫 설교에서, “다윗은 하늘에 올라가지 못하였으나 친히 말하여 가로되 주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고 이를 인용하여,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행 2:33-36) 하고 증거했습니다.

 

㉯ 베드로는 서신서에서도, “저는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우편에 계시니 천사들과 권세들과 능력들이 저에게 순복하느니라”(벧전 3:22) 하고 말씀합니다.

 

㉰ 사도 바울도,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엡 1:20) 하고 증거합니다.

 

㉱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공 3:1) 합니다.

 

㉲ 스데반은 돌에 맞아 죽어가면서도,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행 7:56) 하고 증거했습니다.

 

㉳ 히브리서에는 무려 5번(1:3, 13, 8:1, 10:12, 12:2)이나 우편 재위를 증거하면서, “이제 한 말에 중요한 것은 이러한 대제사장이 우리에게 있는 것이라 그가 하늘에서 위엄의 보좌 우편에 앉으셨으니”(8:1) 합니다.

 

⑨ 이점에서 기억해야할 점은 구약시대의 제사장들은 “매일 서서”(히 10:11) 섬겼습니다. 왜냐하면 “황소와 염소의 피가 능히 죄를 없이하지 못했기”(히 10:4)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대제사장 되시는,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히 10:12) 합니다.

 

㉠ 우리에게 해결되지 않은 채 놓아두신 것이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서 우리의 영화까지가 보증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신 주님을 바라본다는 것은 얼마나 큰 위로와 용기를 줍니까? 스데반 집사님이 돌에 맞아 순교 당할 때에도 다른 광경이 아닌 바로 이 주님을 보여 주셨습니다.

 

⑩ 주님의 공생애는 3년에 불과하였으나 주님의 중보사역은 2천년을 하루같이 계속하고 계시다는 점을 잊지 마십시다.

 

㉠ 그러므로 히브리서에서는, “예수는 영원히 계신 고로 그 제사 직분도 갈리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서 저희를 위하여 간구(懇求)하심이니라”(히 7:24-25) 하고 말씀합니다. 형제가 하나님 앞에 가게 될 때에 그리스도의 영접을 받게 될 것입니다.

 

㉡ 형제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이루어 놓으신 “죽으심과, 다시 살아나심, 승천하심과, 하나님 우편에 앉으심, 그리고 우리를 위해 간구하심”이 있는데, 이런 것들을 박탈하고 우리를 송사하고 정죄할 자가 누가 있단 말입니까? 그리스도에게 되어진 일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들에게도, 동일하게 이루어진 일임을 확신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구원은 안전합니다. 우리의 영화는 확실합니다.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8:34), 이것이 “그리스도의 중보사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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