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뇨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뇨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뇨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뇨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11:32-36).
본문은 교리부분(1-11장)의 대단원이요, 도달하게 된 총 결론인 것입니다. 믿음으로 구원 얻는다는 1-8장까지의
복음 증거를,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8:39) 하고 승리의 개가로 끝 마쳤던 사도는,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11:36) 하는 장엄한 송영으로 교리부분을 끝마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1:1) 하고, “복음”으로 시작하여, 우리의 선두(先頭)에 서서 하나님이 보여주신 구원의 길을 따라 여기까지 우리들을 안내 해왔습니다. 그러나 사도는 이 지점에 이르러,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33) 하고, 여기서 멈추어 서고 마는 것입니다.
①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33) 합니다.
㉠ 하나님의 지혜(智慧)와 지식(智識)은 너무나 부요하고 깊어서 이루다 측량치 못하겠고, 그의 길은 찾고 찾아도 끝이 어딘지를 몰라서 여기서 멈추어 설 수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개혁자들은, “성경이 가는 곳에 우리도 가고, 성경이 멈추는 곳에 우리도 멈춘다” 하고 말했던 것입니다.
㉡ 지금 사도 자신도 복음을 증거하다가 장엄하게 펼쳐지는 하나님의 구원계획 앞에 압도되어 찾기를 멈춘 채 감탄하고 있다함이 옳을 것 같습니다.
②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뇨 누가 주의 모사가 되었느뇨”(34) 합니다.
㉠ “주의 마음”이란, 주의 뜻이니 곧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을 가리킵니다. “누가 주의 모사가 되었느뇨” 한 말씀은, 이사야 40:13절의 반영인데 이사야 선지자는, “누가 여호와의 신을 지도하였으며 그의 모사가 되어 그를 가르쳤으랴 그가 누구로 더불어 의논하셨으며 누가 그를 교훈하였으며 그에게 공평의 도로 가르쳤으며 지식을 가르쳤으며 통달의 도를 보여주었느뇨”(사 40:13-14) 하고 말씀합니다.
㉡ “너희는 눈을 높이 들어 누가 이 모든 것을 창조(創造)하였나 보라”(사 40:26) 하십니다. 이는 첫 창조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오직 비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이니 곧 감취었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고전 2:7) 한, 재창조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은 더욱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천지 만물을 창조하실 때에 누구로 더불어 의논하였으며, 하나님께서 구원계획을 세우실 때에 누가 조언을 한 자가 있으랴. 그 불가능성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 교리부분을 끝마치면서 바울 자신도 이제까지 기록한 증거가, “영원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추었던
비밀의 경륜”(엡 3:9) 전부를 드러냈다고 여기고 있지는 아니 합니다. 또한 사도는 자신이 전한 복음이 듣는 모든 사람들에게 이해가 되고,
받아들여 지리라고도 생각하지 않은 듯 합니다. 어떤 자는 의심할 것이며, 어떤 자는 비방하고 폄론하며 배척할 것도 짐작하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뇨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뇨”(34) 하는 것입니다.
③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뇨”(35) 합니다.
㉠ 이는 욥기 41:11절의 인용인데 하나님은 욥에게, “누가 먼저 내게 주고 나로 갚게 하였느냐 온 천하에 있는 것이 다 내 것이니라” 하십니다. 이를 알았기에 사도는 고린도교인들의 교만을 책망하면서,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뇨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 같이 자랑하느뇨”(고전 4:7) 하고 책망을 했던 것입니다.
㉡ 이제까지 전한 복음을 올바로 인식했다면, “내가 하나님께 먼저 드렸기 때문에, 나는 하나님께 청구할 권리가 있으며, 하나님은 나에게 갚아 주셔야할 의무가 있다고 말할 자가 있단 말이냐” 하고 묻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부터 천 가지 만 가지가 하나님의 사랑이요, 은혜일뿐입니다.
㉢ 구원의 은총에 있어서는 더 더욱 그러합니다. 이를 알았기에 바울 자신은,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고전 15:10) 하고 말하고, 루터는 임종시에 “우리는 하나님 앞에 참으로 비렁뱅이다”라고 고백했던 것입니다.
④ 34-35절 안에는 질문 형식으로 된 세 가지 말씀이 있습니다.
㉠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뇨?”,
㉡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뇨?”,
㉢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뇨?”, 이 질문형식의 말씀들은 대답을 기대하고 한 질문들이라기보다는, 여기까지 인도해온 우리들을 하나님 앞에 세워 놓고 겸비하게 자신을 돌아보게 해줍니다.
⑤ “이는 만물이 주(主)에게서 나오고 주(主)로 말미암고 주(主)에게로 돌아감이라”(36상) 합니다.
㉠ 이는 앞 절에서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와 결부되는 것으로, “우리 것, 내 것”이란 아무 것도 없고 모든 “만물이 주에게 나온 것”임을 가리킵니다. 36절은 교리부분의 대단원을 이루는 가장 적절하고 장엄한 표현으로, 우주만물을 달관(達觀)하고 통달(通達)한 경지를 대하게 됩니다. 이 짧은 표현 속에는 우주의 생성(生成)과 운행(運行)과 귀결(歸結)이 함축적으로 표현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 또한 기독교사상이 요약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개혁주의를 요약한 것이라고도 말합니다.
㉮ 만물(萬物)이 어디서부터 나왔는가 하는 그 기원과,
㉯ 만물의 주관자는 누구이신가 하는 섭리 자와,
㉰ 또한 만물의 종국(終局)은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종말을 말씀해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 철학자 탈레스는 만물이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가? 나는 누구인가?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을 터인데, 그 끝은 어떻게 끝날 것인가 하는 의문을 제기하였습니다. 철학이 이 물음에서부터 시작되었다 하여 그를 철학자의 할아버지라 부르고 있습니다만, 인간의 머리로는 이를 알 길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교의 화두(話頭)가 “내가 뭐꼬” 하는 것입니다.
⑥ 사도는 이에 대한 명쾌한 답변을 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 “만물이 주(主)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이것이 신본주의입니다.
㉡ “만물이 물질(物質)에서 나오고 물질로 말미암고 물질로 돌아감이라”, 이것이 유물사관입니다.
㉢ 어떤 분은 이 말씀을 삼위 하나님과 결부시켜 해석하기도 합니다. 계획하신 분은 성부(聖父)이시니 그에게서 “나오고”, 성취하신 분은 성자(聖子)이시니 그로 “말미암고”, 완성하시는 이는 성령(聖靈)이시니 그에게로 “돌아감이라”.
⑦ 이와 같은 사상은 고린도전서 8:6절에도 나타납니다.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또한 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니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았느니라” 합니다.
㉠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36하).
형제여, 우리도 언젠가 “주에게로 돌아갈” 날이 옵니다. 그 날은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빌 1:6) 한 “완성”의 날입니다. 성삼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십시다. 그리고 우리도 “아멘”으로 화답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