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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강해

로마서 1:5-7절 그 이름을 위하여

작성자바람이어라|작성시간15.12.02|조회수347 목록 댓글 0

 

6, 그 이름을 위하여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아 그 이름을 위하여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케 하나니』(1:5).

 


 

사도는 첫 절에서 자신의 신분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고, “종과, 사도”라고 소개를 했습니다. 본문에서는 자신이 “사도”로 부름을 받은 경로와 부여된 사명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경로는 “은혜”를 먼저 받고 그 후에 “사도의 직분”을 받았노라고 말씀하면서, 자신의 사명을 “그 이름을 위하여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케 하는” 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너무나 절실하고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①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아”(5상) 합니다.

 

㉠ “그로 말미암아”, 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세 가지 요점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 첫째는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아”,

 

  ㉯ 둘째는 “그 이름을 위하여”,

 

  ㉰ 셋째는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케 하는” 일을 하기 위해서 라고 말씀합니다.

 

② 먼저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았다”는 점을 상고해 보겠습니다.

 

㉠ 우선 생각해야할 것은 “은혜”(恩惠)입니다. 은혜란 받을만한 자격이나 공로가 없음에도 값없이 주는 선물을 의미합니다. 받을만한 자격이나 공로가 없는 것만이 아니라, 반대로 진노를 받아 마땅한 우리들이었습니다.

 

㉡ 사도 바울은 남달리 “은혜”라는 감격에 젖어 있었던 듯싶습니다. 은혜라는 말만 들어도 눈시울이 뜨거워지고, 가슴이 뭉클해지는 것이 바울이었습니다. 고린도전서 15:9절을 보면 “나는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 내가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였음으로 사도라 칭함을 받기에 감당치 못할 자로다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하고 고백합니다.

 

㉢ 에베소서 2:5절에서도,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한 바울은, 계속하지를 못하고 괄호를 치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하고 말씀하고서야 계속합니다.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누군가? “내가 전에는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딤전 1:13)였다고 말합니다. 그런 자신의 지난날의 과오를 생각할 때에 바울은 은혜에 대한 남다른 감격이 있었을 것입니다.

 

③ 이점에서 말씀하는 순서(順序)를 주목해야만 합니다. “은혜”를 받는 것이 먼저이고, 직분은 나중입니다.

 

㉠ 1절에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합니다. 종 됨이 먼저이고, 그 후에 사도입니다. 은혜는 구원과 관련이 있고, 사도라는 직분은 사명과 결부가 됩니다. 교회 안에는 여러 가지 직분이 있습니다.

 

㉡ 그러나 직분을 받는 것보다 은혜를 받는 것이 먼저입니다. 직분이란 은혜를 받은 자가 감사함으로 수행하는 헌신입니다. 그러므로 직분보다 은혜를 받는 것이 먼저입니다. 직분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은혜와 직분을 받았다”는 은총(恩寵)의식과 사명감(使命感)이 투철해야만 합니다.

 

④ 둘째로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주신 목적(目的)이 무엇인가 하는 점입니다. 최우선적으로 “그 이름을 위하여”라고 말씀합니다.

 

㉠ 그분의 거룩하신 이름을 위하여, 오직 그 분의 영광을 위하여, 이것이 그리스도인 된 우리의 궁극적인 목적(目的)인 것입니다. 전도의 목적도, 교회부흥의 목적도, 우리의 삶의 목적도, “그 이름을 위하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고백한 사람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죽도록 충성을 다짐한 사람들입니다.

 

⑤ 사도는 선교의 목적을 어디에 두고 있는가? 물론 멸망 받을 영혼들을 예수 믿고 구원 받게 하는데 있습니다. 그 대답은 틀리지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는, “그 이름을 위하여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케 하나니” 하고 말씀합니다.

 

㉠ 먼저는 “그 이름”을 위해서이고, “믿어 순종케”는 다음인 것입니다. 전도란 일차적으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빌 2:10) 하는데 있습니다. 예수 믿기를 거부하는 것은 그 이름 앞에 무릎 꿇기를 거절하는 것입니다. “그 이름을 위하여”가 먼저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가 최우선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기까지 복종하심도 인간의 구원이 먼저가 아닙니다.

 

⑥ 주님은 십자가를 앞에 놓고,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요 12:28) 하고 기도하셨습니다.

 

㉠ 로마서 3:26절을 보십시오. “곧 이 때(자기 아들을 화목제물로 세우신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합니다.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만족시켜 드림이 먼저요,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는 다음입니다. “내가 이렇게 행함은 너희를 위함이 아니요 너희가 들어간 그 열국에서 더럽힌 나의 거룩한 이름을 위함이라 열국 가운데서 더럽힘을 받은 이름 곧 너희가 그들 중에서 더럽힌 나의 큰 이름을 내가 거룩하게 할지라”(겔 36:22-26) 하고 말씀하십니다.

 

⑦ 셋째로 전도의 목적은 입으로만 “주여, 주여” 하는 사람들을 양산(量産)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시 말하면 머릿수만 채우는 것이 아니라, “믿어 순종케 하나니”까지 나아가야만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도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라 하라”(마 28:20) 하셨습니다.

 

㉠ “믿어 순종케 하나니”의 뜻은, 어떤 그리스도인은 “믿고 순종”하는가 하면, 어떤 이는 믿으면서도 순종하지 않는다는 그런 뜻이 아닙니다. “믿어 순종케 한다”는 뜻은, 믿는다는 것은 순종(順從)을 의미한다는 말씀입니다. 반대로 순종하지 않는 것은 믿지 않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믿음과, 순종”은 둘이 아니요, 하나입니다. 순종이 뒤따르지 않는 믿음은 이미 “죽은 믿음”인 것입니다. 한마디로 “믿고 순종”치 않는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 누가복음 6:46절에서 주님은, “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어찌하여 나의 말하는 것을 행치 아니하느냐” 하십니다. “주인님” 하고 부르는 종(노예)은 주인의 명령대로 복종해야함은 너무나도 당연하지 않느냐는 말씀입니다. 결국 불순종의 믿음이란 모래위에 지은 집과 같아서 무너져 파괴됨이 심하니라 하십니다.

 

㉢ 사도바울이 이방인의 사도로 세움을 입은 것은 입으로만, “주여, 주여” 하는 교인들을 불러 모으기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믿어 순종”케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믿어 순종”하는 자들이야말로 “그 이름을 위하는” 자들이며,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마 6:33) 그리스도인들인 것입니다.

 

㉣ 그렇다면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인 나 자신은 어떠한가를 돌아보게 합니다. 우리를 위하여 죽으시고, 우리를 위하여 다시 사셨으며, 머지않아 우리를 영접하러 다시 오실 그 분을 위하여, “그 이름을 위하여 믿어 순종”의 삶을 살아야만 하지 않겠습니까?

 


 

묵상해 봅시다.

 

1.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바울에게 베푸신 두 가지가 무엇입니까?

 

2. 그것을 주신 목적이 어디에 있습니까?

 

3. 그리스도인이란 삶의 목적이 어떻게 바뀐 사람들입니까?

 


 


 


 

7 부르심을 입은 사람들

 


 

『너희도 그들 중에 있어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입은 자니라 로마에 있어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입고 성도로 부르심을 입은 모든 자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1:6-7).

 


 

바울 사도는 로마서를 기록하면서 먼저 기록하는 자신이 누구인가를 말씀했습니다. 다음에 복음에 대해서 요약해서 말씀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이 편지를 받는 사람들이 누구인가를 말씀하기 시작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라고 말씀합니다.

 


 

① “너희도 그들 중에 있어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입은 자니라”(6) 하고, 로마서의 수신자(受信者)들에 대해서 말씀하기 시작합니다.

 

㉠ “예수 그리스도의 것”(6상)이라고 말씀합니다.

 

㉡ “부르심을 입은 자”(6하)라고 말씀합니다.

 

㉢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입은 자”(7상)라고 말씀합니다.

 

㉣ “성도”(7중) 곧 거룩한 무리들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 이 말씀을 대하는 형제의 느낌이 어떠합니까? 사도는 그들을 정중하고 소중하게, 그리고 매우 귀하게 대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마치 왕자나 공주를 대하듯, 사도의 호칭에 담긴 의미는 실은 그 이상입니다. 

 

② 바울뿐만이 아니라 사도 베드로도 성도들을,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들이라고 말씀합니다. 이 보다 더 귀한 호칭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 자신에게 섬기라고 위임하여주신 성도들의 신분(臣分)과 지위(地位)가 이러한 자들임을 인식한다면, 그들을 어떤 자세로 섬겨야 할 것인가는 자명한 일입니다. 이점은 우리가 교회를 어떤 자세로 섬겨야만 하는가 하는 문제와 직결이 됩니다. 

 

③ 이점에서 송신자(送信者)인 바울의 자기소개와, 수신자(受信者)인 로마 성도들의 호칭을 대조해서 함께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 바울은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입은 자”라고 말씀했는데, 로마 성도들을 가리켜,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입고 성도로 부르심을 입은 자”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에는 공통분모가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에 의해서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라는 점입니다. 바울은 로마 성도들과, 사도인 자신을 동등(同等)한 위치에 올려놓고 있습니다.

 

㉡ 나나 너희나 우리는 다 같이 한분 하나님에 의해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직분 상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 같이 하나님에 의해 부르심을 받았다는 “소명”(召命)에 있어서는 차별이 없습니다. 핵심은 부르심을 받았다는 점입니다.

 

  ㉮ 그래서 6절에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입은 자”라 말씀하고,

 

  ㉯ 7절에서도 “사랑하심을 입고 성도로 부르심을 입은 모든 자”라고, “부르심”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④ 은혜에 대해서 남다른 감격을 갖고 있던 바울에게는, “부르심”에 대해서도 특별한 감격을 갖고 있었을 것입니다.

 

㉠ 그에게 있어서 “부르심”은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은 전환점이 되었던 것입니다. 바울이, “사울아, 사울아” 하고 부르심을 받을 때에 동행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나와 함께 있는 사람들이 빛은 보면서도 나더러 말하시는 이의 소리는 듣지 못하더라”(행 22:9), 즉 그들은 부르심을 받지 못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은 이처럼 감격스러운 것입니다.

 

㉡ 로마에는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들 중에”서 몇 몇 사람들의 이름만이 부르심을 입은 것입니다. 부름을 받는다는 것은 언제나 가슴을 설레게 하는 일입니다. 입상자 발표 때가 그러하고, 형을 집행하기 위하여 사형수를 불러낼 때에 더욱 그러합니다. 그런데 우리들의 부르심은 세상 임금에 의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에 의해 부르심을 받는다는 것은 비할 데 없는 경이로움입니다.

 

㉢ “오, 하나님 영원한 사형에 처해져야 마땅한 저를, 하나님께서 자녀로 삼으시기 위해서 불러 주시다니…”, 구원은 부르심으로 말미암는 것입니다.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8:30) 하고 말씀합니다. 되고 싶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불러 주셔야만 하는 것입니다.

 

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을 이렇게 부르셔서 예수 그리스도의 것이 되게 하셨다고 말씀합니다.

 

㉠ “너희도 그들 중에 있어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입은 자니라” 합니다. 주님은 잡히시던 날 밤에 하신 대제사장적인 기도에서, “저희는 아버지의 것이었는데 내게 주셨으며”(요 17:6)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고전 1:30) 합니다. 우리는 본래 하나님께서 택하신 하나님의 것이었는데, 우리를 구속하시도록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게 하심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것”이 되게 해주셨습니다.

 

⑥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것”이 된 자란, 그의 세계관, 인생관, 가치관, 인생의 목적이 180도 바뀐 사람들임을 의미합니다.

 

㉠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14:7-8) 합니다.

 

㉡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 6:19-20),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 하십니다.

 

㉢ 이처럼 삶의 목적이 바뀐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입니다. 주님은 “내가 주를 좇겠나이다마는 나로 먼저 내 가족과 작별하게 허락하소서” 하는 자를 향해서,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 하니라”(눅 9:61-62)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된 것입니까? 2천년이 지난 오늘날은 “그리스도의 것”이 되는 기준(基準)이 완화가 된 것입니까? 언제 제도가 바뀐 것인가요? 

 

⑦ 6절에서는 “너희도 그들 중에 있어” 하고, 7절에서는 “로마에 있어” 합니다. 당시 세계중심으로 불리었던 로마에는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 많은 사람들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입었다는 것이 어마나 경이로운 일이며, 이것이 어떻게 가능하게 되었는가?

 

㉠ 그들에게 공로가 있었기 때문입니까? 자격이 있었던가요? 아니면 남보다 선했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오직 한 가지 답변만이 있을 뿐인데 사도는 7절에서,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입고 성도로 부르심을 입은 모든 자”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기 때문에 택하시고 불러주셨다는 것입니다.

 

㉡ 에베소서에서는 더욱 놀라운 말씀을 듣게 되는데,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셨다”(엡 1:4) 하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부르심”을 받는 것보다 먼저 되어진 일입니다. 이런 일이 어떻게 가능하여졌단 말입니까? “사랑 안에서, 그 기쁘신 뜻대로”(엡 1:4, 5), 즉 하나님이 사랑하셔서, 우리를 택하시는 것이 기쁘셔서 그렇게 해주셨다는 것입니다. 달리는 설명할 길이 없는 것입니다.

 

⑧ 우리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하심”이 5:8절에서는,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하고, 우리를 얼마나, 어디까지 사랑하셨는가 하는 점을, “확증”(確證)하여 주심을 대하게 됩니다.

 

㉠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을 제한하지 말라”는 말을 자주 듣습니다. 저는 어느 날 “하나님의 사랑을 제한하지 말라”는 내면의 음성을 듣게 되었습니다. 형제는 시련과 역경과 고난을 당했을 때에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해 본적은 없으십니까? 형제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제한하신 적은 없으십니까? 이에 대한 시금석이 7절 하반 절인데,

 

⑨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쫓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하고 말씀합니다.

 

㉠ “은혜와, 평강”은, 은쟁반에 금 사과처럼 조화를 이루는 한 쌍입니다.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입고, 성도로 부르심을 입어,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입은 자”, 이것이 전적인 “은혜”입니다. 그리하여 “자신이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입은 자요, 성도요,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입은 자”임을 확신(確信)하게 될 때에 “평강”(平康)이 있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 그렇다면 형제에게 “평강”이 있습니까? 시험을 만났을 때에 형제의 마음속에 평강이 있습니까?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형제의 마음과 생각을 지켜 주시던(빌 4:7) 가요? 만일 없다면 원인이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하나님 편에 있습니까? 아니면 형제에게 문제가 있는 것일까요?

 

⑨ 어디서부터 오는 은혜와 평강이라고 말씀합니까? 하나님입니까? 좀더 자세히 보십시오. “하나님 우리 아버지”입니다.

 

㉠ 그리고 은혜와 평강은 나를 위하여 죽기까지 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좇아” 옵니다. 그 “은혜와, 평강”을 성령님이 운반하여 형제의 마음에 부어주신다(5:5) 하고 말씀하십니다. 그래도 버림받은 자처럼 낙망하시렵니까?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그뿐 아니라 나의 주가 되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좇아 은혜와 평강”은 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입고 성도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7)입니다.

 


 

묵상해 봅시다.

 

1. 바울은 로마서의 수신자들을 무엇이라 불러주고 있습니까?

 

2. 사랑하심을 입고 부르심을 입었다는 감격을 나누어 봅시다.

 

3. 이제 형제에게 은혜와 평강이 임하게 되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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