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생에 대한 바른 이해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8:9).
앞에서 상고한 대로 “허물과 죄로 죽었던” 한 영혼이 하나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난다는 중생이 너무나 귀하고 중요한 사건이기에 이에 대한 바른 이해를 위해서 좀더 말씀을 드리기를 원합니다. 저는 신학자의 입장에서 로마서를 주석하고 있지 않습니다. 강해를 위한 강해를 하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저는 설교자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는 고린도전서 2:16절에서,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주를 가르치겠느냐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 하고 말씀하는데, 목회자의 입장에서, 주의 마음을 가지고 한 영혼의 중생을 생각하며 고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심정으로,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하는 9절 말씀을 음미해 본다면 목회자로써 고민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① 그리스도인이란 어떤 사람들인가?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9) 합니다.
㉠ 자기 안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는 사람,
㉡ “그리스도의 영”이 있는 사람,
㉢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는 사람이라고 말씀합니다.
② 한 절 안에 “하나님의 영, 그리스도의 영, 성령”, 삼위 하나님이 다 언급되어 있습니다.
㉠ 이 영광스러움을 에베소서 1장을 가지고 말씀드린다면 그리스도인이란,
㉮ 하나님이 “택하시고”(4),
㉯ 그리스도께서 “구속하시고”(7),
㉰ “성령으로 인치심을”(13) 받은 사람인 것입니다. 인간이 들을 수 있는 이보다 영광스러운 말씀은 달리는 없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의 신분(身分)인 것입니다.
③ 그런데 9절을 다시 관찰해보면, “만일 너희 속에,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하고, “만일”이라는 조건부(條件附)적인 말과, “누구든지” 하고 무제한(無制限)적인 표현을 하고 있다는 점을 주목하게 됩니다.
㉠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교회 내에 있다고 자동적(自動的)으로 다 거듭난 사람이 아니요, “주여, 주여” 부른다고 무조건적(無條件的)으로 다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는 뜻이 내포되어 있는 것입니다.
㉡ 사도는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9하) 하고 단언합니다. “그리스도의 영을 모시지 못한 사람은 아주 어린 그리스도인이다” 하고,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누구든지” 말입니다. 직분이 무엇이냐? 믿은 연수가 얼마나 되었느냐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 속에 그리스도의 영을 모셨느냐? 모시지 못했느냐를 묻고 있는 것입니다.
④ 다시 강조합니다만 사도는 한절 안에서 조건부(條件附)적인 말씀을 두 번이나 반목해서 사용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 긍정적인 조건부로,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그런 사람만이 4절에서 언급한 “영을 좇아 행하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 이번에는 부정적인 조건부로,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합니다. 그 사람이 누구이냐를 묻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에게 그리스도의 영이 있느냐 없느냐 만을 확인해 보아라” 말씀하고 있는 셈입니다.
㉢ 달리 말씀드린다면 이 지구상에는 그리스도의 영을 모신 사람과, 모시지 못한 두 부류(部類)의 사람만이 있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모든 사람은 둘 중의 어느 하나일 뿐입니다. 그런데 사도는 우리에게 묻고 있습니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고전 6:19), 너는 그렇게 행동하며, 그런 삶을 살아가고 있느냐?
⑤ 저는 지금 이 말씀을 주석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말씀하는 사도의 의도가 어디에 있는가? 왜 이 말씀을 하고 있는가? 나 자신에게 맡겨주신 양 무리들이 어떤 상태에 있는가를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 김선운 목사는 그의 로마서 주석에서,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을 가지지 아니하였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니 라고 말한 것은 당시의 그 독자들이 모두 그리스도의 영을 가졌음을 인정하는 말이라고 해석할 수 없다” 합니다.
㉡ 농사를 짓다 보면 어느 해는 쭉정이가 유난히 많은 해가 있습니다. 로마서를 최초로 받은 로마교회에도 쭉정이가 있을 수 있었다면 현대교회에는 그리스도의 영을 모시지 못한 쭉정이가 유난히 많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 본 목회자의 두려움인 것입니다.
⑥ 요한복은 3장에 등장하는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찾아 왔을 때에 주님의 관심은 그의 신분이나 지위에 있지 않았습니다. 니고데모는 교양적이고 도덕주의적인 사람이었으며 존귀한 공회원이었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이 하나님께로 오신 분임을 믿고 있었습니다.
㉠ 그러나 주님의 첫 말씀은,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는 말씀이었습니다. 간음하다 현장에서 끌려온 여인, 일곱 귀신을 쫓아냄을 받은 막달라 마리아 같은 사람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다면 이해가 되었을 겁니다. 그런데 도덕적으로 흠이 없을 정도로 존경을 받던 니고데모에게 주님의 관심은 동일하게 거듭나야 한다는 점에 있었습니다.
㉡ 제게 맡겨주신 양 무리의 얼굴들을 떠올려 봅니다. 그리고 그 위에다가,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하신 말씀을 포개어 놓습니다. 목회자의 최종적인 목적이 무엇입니까? 바울은 고린도후서 1장에서, “우리 주 예수의 날에 너희가 우리의 자랑이 되고 우리가 너희 자랑이 되는 것이라”(14) 하고 말씀합니다. 지금이 아니라 그날에, “목사님 우리들을 이렇게 올바로 인도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목사님이 자랑스럽습니다”, 바울은 그 말을 듣기를 원했습니다.
㉢ 목회자의 “소망, 기쁨, 자랑”이 무엇이겠습니까? 몇 명이나 모이느냐 하는 머리수가 아닙니다. 한 사람도 낙오됨이 없이 주의 영광에 참여하게 됨을 볼 때에,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이냐 그의 강림하실 때 우리 주 예수 앞에 너희가 아니냐(살전 2:19) 한 말씀이 아니겠습니까?
⑦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고린도전서 3장을 보면 사도 바울은,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3:6) 하고 “심는 것”을 물주는 일보다 우선시하고 있습니다.
㉠ “내가 … 터를 닦아 두매 다른 이가 그 위에 세우나”(10)하고, 세우는 것보다 터를 닦는 일이 먼저임을 말씀합니다.
㉡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비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복음으로써 내가 너희를 낳았음이라”(고전 4:14) 하고, 태어나게 하는 것이, 가르치는 선생보다 우선임을 말씀합니다. 그런데 태어나게 하는 “아비는 많지 않다”고 말씀합니다. 민수기 1장과 26장에는, “20세 이상으로 능히 싸움에 나갈만한 자를 계수하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명심하십시다. 최우선은 선민 이스라엘의 가문에 태어나는 일입니다. 태어나야 양육, 훈련, 무장을 시킬 수가 있다는 점입니다.
㉢ 제가 왜 이처럼 “거듭남”에 대해서 강조하고 있는지 아십니까? 사도가 “내 음성을 변하려 함은 너희를 대하여 의심이 있음이라”(갈 4:20) 한, “의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14:7-8) 한 기준에 너무 어긋난 채, “저희가 다 자기 일을 구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일을 구하지 아니하는”(빌 2:21), “육신의 일”만을 생각하는 추세인 것 같기 때문입니다.
⑧ 그러면 언제, 어떻게 거듭남이 일어납니까? 이점을 에베소서 1:13절이 분명하게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합니다. 이를 요약을 하면,
㉠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 “믿어”,
㉢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합니다.
㉣ 그런데 듣기 위해서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10:14) 한, 전파하는 자가 있어야만 한다는 점입니다.
⑨ 그런데 현대교회는 “진리의 말씀 곧 구원의 복음”을 전파하는 자가 점점 희소하여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 말씀은 홍수를 이루고 있으나 모든 설교가, “진리의 말씀 곧 구원의 복음”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아무 설교나 듣기만 하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 즉 거듭나는 것이라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께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 1500년 동안이나 가로막혀 있던 휘장은 주님께서 십자가상에서, “다 이루었다” 하고 선언하실 때에야 비로소 찢어지고 열려졌다는 점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5병2어의 광야에서가 아닙니다. 나사로의 무덤에서도 아닙니다. 오직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4:25) 한, 갈보리 십자가를 통해서였습니다.
⑩ 그러므로 설교자가 할 일은, “진리의 말씀 곧 구원의 복음”을 선포하여 회중들에게 듣게 해주는 일뿐입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기 때문입니다.
㉠ 성령님은 선포되는 “구원의 복음”과 함께 역사를 하십니다. 왜냐하면 강림하신 성령의 사명은 주님께서 “다 이루었다” 하신 구원의 복음(福音)을 각 사람에게 적용(適用)을 시키는 사역이기 때문입니다.
㉡ 그러므로 구원의 복음을 먼저, 그것도 자주자주 전해주어야만 합니다.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1:16) 하십니다. 그렇다고 구원의 복음을 한두 번 전했다고 모두가 거듭나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光彩)가 비취지 못하게”(고후 4:4) 하기 때문입니다. 설교는 전투(戰鬪)입니다.
㉡ 많은 분들이 교회로 인도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거듭남의 기회를 잃을 수도 있습니다. 그들은 복음을 듣지도 못한 채 시간만 흘러, 중생하지도 못하고 세례 받고, 직분 자가 됩니다. 그렇게 되면 신앙의 자존심이 생겨, “되지도 못하고 된 줄로 여겨” 겸비한 마음으로 거듭나야 할 시기를 놓치고 마는 것입니다.
⑪ 거듭남을 주는 것은 설교자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성령님의 전결 사항이라는 점을 명심, 또 명심하십시다.
㉠ 이를 알았기에 사도 바울은, “내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였다고 말씀합니다. 그는 지혜로운 말로 설득할만한 학문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왜 그랬습니까? 지혜로운 말로는 거듭남을 줄 수 없다는 점을 인식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임무는 “구원의 복음”을 증거하는 것이요, 거듭나게 함은 성령의 나타남과 역사하심이라는 점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이점이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고전 2:4-5)의 뜻입니다.
㉡ 한 영혼이 그리스도인으로 탄생한다는 것은 천하를 얻는 것보다도 귀하고도 경이로운 일입니다. 이를 인식하는 설교자라면 사람들을 듣기 좋게 하려고 영합하지도 않을 것이요, 자신의 유식을 뽐내듯이 지혜의 말로 설득하려 하지도 않게 될 것입니다. 오직 성령님의 나타나심과 능력만을 의지하고 구원의 복음을 전하게 될 것입니다.
㉢ 바울은 자신을, “하나님의 동역자”(고전 3:9)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너희를 권하노니”(고후 6:1)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감히 성령님과 동역하고 있는 것입니다. 형제여, 거듭났다는 이 한 가지 사실만으로도 우리는 천하보다 귀한 축복을 받은 것입니다. 기뻐하십시다. 감사하십시다. 반면 모든 회중이 거듭났는가를 고민하십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