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도의 탄식과 기다림
『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 지니라』(8:23-25).
본문 23절은 “이뿐 아니라”, 이렇게 시작하고 있습니다. 탄식하며 고통하고 있는 것은 피조물뿐만이 아니라 성도들도 그러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찌하여 성도들을 피조물 속에 함께 포함시켜서 말씀하지 않고 별도(別途)로 말씀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피조물과 성도의 다른 점이 무엇입니까? 구별되는 핵심은,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는 우리까지도”(23상) 한, “성령”(聖靈)을 모셨다는 점입니다.
첫 창조 때에도 다른 피조물은 말씀만으로 창조하셨으나, 사람만은 코에다 생기를 불어 넣어 “생령”(生靈)이 되게 하셨습니다. “영”이 있고, 성령을 모셨다는 것은 사람에게만, 그 중에서도 그리스도인들에게만 주어진 특별은총인 것입니다.
① “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23) 합니다.
㉠ 피조물들만이 아니라, “우리도, 기다린다” 하고 말씀합니다.
㉮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지만,
㉯ 성도들의 기다림은, 자신(自身)이 하나님의 아들들이요, 그러므로 성도들은, “우리 몸의 구속”, 즉 영화(靈化)될 것을 기다린다는 것입니다.
② 그러므로 피조물이 고대하는,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21)와, 성도들이 탄식하며 기다리는 “몸의 구속”(23)은 다른 것이 아니라, 같은 것이요, 결국 동일한 기다림임을 알게 됩니다.
㉠ 이는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성취되는 것으로, 모든 만물의 기다림이 주님의 재림(再臨)으로 모아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때에야, “이루었도다”(계 21:6) 하고, 재창조의 역사가 완성이 되기 때문입니다.
③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23중)라고 말씀합니다.
㉠ 이들은 성령으로 거듭났으며, 법적으로는 양자로 입적이 되었으나, 영광은 아직 나타나지 않은 상태이기 때문에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만 받았을 뿐, 몸의 구속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는 아직 이르지 못하고 있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예를 들면 계약금을 받은 정도요, 약혼한 상태라는 뜻입니다.
④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23하) 합니다.
㉠ 성도들의 탄식(歎息)은, 첫째는 “양자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는”(23하) 탄식입니다. 이런 탄식은 오직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23중) 사람들뿐입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9) 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 중에도 “영화”(靈化)에 대해서 모르거나, 확고하지 못한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몸의 구속을 기다리는 “탄식”을 모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 믿다가 죽으면 그 영이 하늘나라에 간다는 식으로 막연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렇지가 않습니다.
㉡ 우리의 영은 그리스도와 함께 있고, 몸은 흙으로 돌아가는 분리(分離)된 상태는 오래 계속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 주님이 재림하시는 날까지 뿐입니다. 그것은 임시적이요, 중간적(中間的)인 상태입니다. 그래서 잠자고 있다고 말씀합니다. 잠자는 상태에서 깨어남이 있습니다. 그리하여 “영광의 자유”함에 영원토록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⑤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死亡)이 왔다면, 온전한 구원은,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어야”(고전 15:54)만, 온전한 회복이 되는 것입니다.
㉠ 그런데 구원을 받았다는 것이 몸은 죽어 장례지낸바 되고, 영만이 구원을 받은 것이라면 이것은 온전한 회복이 아니요, 사탄에 대한 완전(完全)한 승리가 아닌 것입니다. 주님의 십자가의 대속은 그렇게 불완전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 죽을 몸도 살리십니다. 몸의 구속이 있습니다. 이때 구원은 완성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는 사망(死亡)이니라(고전 15:26), 사망(死亡)이 이김의 삼킨바 되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응하리라”(고전 15:54) 하시는 것입니다.
⑥ 결론은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24상) 합니다. “영화”될 그 날은 성도들에게 “소망”(所望)으로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다” 하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 우리는 이미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영적(靈的)자유입니다. 그러나 앞으로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이것은 몸의 구속 곧 “영광(榮光)의 자유”인 것입니다. 이 영화는 아직 소망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23중)라 한 것입니다.
⑦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24하) 합니다.
㉠ 묻습니다. 형제의 고백도 이러합니까? 보이는 것에 소망을 두지 않고 있습니까? “누가 바라리요”, 정말 그러합니까?
⑧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 지니라”(25) 합니다.
㉠ 이러한 “소망”에 대한 확신이 없기 때문에 고난의 날에 낙망하는 것입니다. 임종 머리에서 흔들리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는 참고, 이기는 것만이 아니라,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5:3) 하고 말씀합니다. 고난(苦難)을 극복하는 길은, 고난 대신 소망(所望)을 붙잡는 것입니다.
⑨ 둘째로 성도들의 탄식은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가증한 일들 때문에 탄식하게 되는 것입니다.
㉠ 베드로후서 2장에는 롯이 음란한 도성 소돔에 거하는 동안, “저 불법한 행실을 보고 들음으로 그 의로운 심령이 상하니라”(8) 합니다. 그래서 “무법한 자의 음란한 행실을 인하여 고통 하는 의로운 롯을 건지셨다” 하고 말씀합니다. 우리도 이 시대에 일어나고 있는 모든 가증한 일로 인하여 탄식하며 울고 있습니까? 우리도 무법한 자의 음란한 행실을 인하여 고통하고 있습니까? 이것이 몸의 구속을 기다리는 성도들의 탄식인 것입니다.
㉡ 22절에는 “피조물의 탄식”이 있습니다. 23절에는 “성도들의 탄식”이 있습니다. 26절에는 “성령의 탄식”이 있습니다. 그런데 “불신자”의 탄식은 없다는 것입니다. 22절을 보십시오. “피조물”은 “함께 탄식하고 함께 고통한다” 하고 말씀하고 있는 반면, 모든 사람들은 “함께 탄식하고, 함께 고통하고” 있지 않다는 점입니다. 이것이 허물과 죄로 죽은 자의 비참함입니다. 그들은 탄식할 줄조차 모르고 있습니다. 다만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자들만 탄식하면서 몸의 구속을 기다린다는 것입니다.
㉢ 그런데 탄식하지 않는 사람들은 교회 밖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도 많다는 사실입니다. 이 사실을 인정한다면, 에스겔 9:4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너는 예루살렘 성읍 중에 순행하여 그 가운데서 행하는 모든 가증한 일로 인하여 탄식하며 우는 자의 이마에 표하라” 하십니다. 이들이 “남은 자”입니다. 형제의 이마에도 표시가 되어 있습니까?
㉣ 이제 해답을 얻게 된 것 같습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성도들이 어찌하여 고난에 약합니까? 왜 견뎌 내지를 못합니까? 그렇게 쉽게 낙심하고 좌절하는 원인이 어디에 있습니까? 보이는 소망을 소망으로 삼고 있기 때문입니다. 보이는 것에 너무 집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성도들의 눈을 아래로, 아래로 끌어내린 저와 같은 설교자들의 책임이 크다 하겠습니다.
⑩ 소망을 가진 자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참음으로 기다릴 지니라” 하신, “참음”입니다.
㉠ “참음과, 기다림”, 이 둘은 소망을 가진 자만의 특성입니다. 히브리서 10:36절에서는,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을 받기 위함이라” 하십니다. 극심한 고난 중에 있는 형제는 이사야 선지자처럼, “주여 어느 때까지입니까?”(사 6:11) 하고 묻고 싶은 분이 있을 것입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잠시 잠깐 후면 오실 이가 오시리니 지체하지 아니하시리라”(히 10:37).
㉡ 형제여,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습니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라고 말씀합니다.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 지니라”(25) 하십니다. 참읍시다. 기다리십시다. 소망 중에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