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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강해

로마서 8:26-27,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는 성령

작성자바람이어라|작성시간15.12.02|조회수2,548 목록 댓글 2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는 성령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 하시느니라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8:26-27).

 

 

 

 

 

 



 

본문은 “이와 같이 성령도” 하고, 시작이 됩니다. 이 말씀은,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라고 한, 23절과 연결되는 말씀입니다. 성령께서 믿음주시고, 거듭나게 하신 성도들, “탄식하며, 몸의 구속을 기다리는” 성도들을,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신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고아(孤兒)가 아닙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한, 9절 말씀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들은 홀몸이 아니라, 내주(內住)하고 계시는 성령을 모신 사람들입니다. 그 성령께서 “참으로 기다리고 있는(25), 우리 연약함”을 도우신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본문의 요점입니다.

 


 

①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26상) 합니다.

 

㉠ 성령께서 강림하셔서,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요 14:17) 하신 목적(目的)이 무엇이며, 행하시는 일이 무엇인가? 형제의 연약(軟弱)함을 도와주신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연약함을 인하여 탄식해 보신 적이 있으시겠지요. 결단력도 없고 의지력도 약하고 끈기나 인내심도 부족한 자신의 연약함을….

 

㉡ 그러했던 제가 이 구절이 제 마음에 이르게 되자 위로(慰勞)와 용기를 얻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자신의 연약(軟弱)함을 인하여 탄식하기 이전부터,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약함을 먼저 알고 계셨습니다. 아시고만 계신 것이 아니라, 주님이 승천하시자 우리들을 고아(孤兒)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시고, “또 다른” 보혜사 성령님을 보내주신 것입니다.

 


 

② 잡히시던 날 밤 주님은 제자들에게,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요 14:16, 17, 18) 하셨습니다.

 

㉠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점에서 연약합니까?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한 말씀이,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하고 18절부터 이어지는 “고난”이라는 주제에 대한 문맥(文脈)임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의 연약함이란,

 

  ㉮ 고난(苦難)에 직면(18)했을 때에, 하나님의 자녀답게 대처하지를 못하는 연약함,

 

  ㉯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다”(24) 말씀하는데, 소망을 튼튼히 붙잡고 있지를 못한 연약함,

 

  ㉰ “참음으로 기다릴 지니라”(25) 하셨건만, 참을성도 부족하고 기다림도 간절하지 못한 연약함 등입니다.

 

  ㉱ 또한 “몸의 구속”을 받기까지는(23) 우리의 육신이 연약합니다.

 

  ㉲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할 만큼”(26), 영적으로도 연약합니다.

 

  ㉳ 어찌 이뿐이겠습니까? 우리는 몸도 마음도 온통 연약에 싸여 있는 것입니다.

 


 

③ 그러면 우리의 그 많은 연약함 중에 성령께서 도우시는 최우선 순위(順位)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懇求)하시느니라”(26) 하고 말씀합니다.

 

㉠ 첫 번으로 “기도”(祈禱)를 꼽고 있습니다. 어찌하여 기도가 첫 손에 꼽히는지 아시겠습니까? 기도는 하나님과의 교통(交通)이요, 교제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바른 관계만 유지한다면 모든 것이 바르게 되기 때문입니다.

 

㉡ 그런데 하나님 아버지는 하늘에 계시고, 사랑하는 자녀들은 사악한 이 땅에 머물러 있습니다. 이를 연결시켜주는 통로(通路)가 기도인 것입니다. 하나님과 자녀들 사이에 교통(交通)이 두절된 상태가 아니라, 야곱을 통하여 보여주신 대로 기도를 통한 오르락내리락하는 교통함이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이 기도를 성령께서 최우선으로 도우신다는 말씀입니다.

 


 

④ 그러므로 성령의 도우심의 제1순위는 하나님과 자녀들 사이를 “교통”(交通)케 하시는 일입니다. 그래서 축도(祝禱)의 완벽한 형태라고 말하는 고린도후서 13:13절에서는,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 지어다”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도에게 있어서 천만의 원군(援軍)을 얻는 것보다도 소중한 것입니다.

 

㉠ 히브리서 5:2절에, “저가 무식하고 미혹한 자를 능히 용납할 수 있는 것은 자기도 연약(軟弱)에 싸여 있음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이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연약(軟弱)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즉 우리의 연약을 손수 경험하신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 4:15-16) 하십니다.

 


 

⑤ 그런데 형제가 하나님 보좌 앞에 나아갈 때에 혼자서 나아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는 저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聖靈)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엡 2:18) 하십니다.

 

㉠ 모든 형제들이 기도를 드릴 때마다 이 말씀을 먼저 묵상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 보좌 앞에 나아감을 얻게 된 것은 “저로 말미암아”, 즉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입니다. 그런데 혼자 나아가도록 내버려두셨습니까? “성령 안에서” 라고 말씀합니다. 신부(新婦)가 입장할 때에 아버지가 데리고 들어가듯이 성령께서 도우신다는 것입니다. 누구에게 나아가고 있습니까? “아버지께”입니다. 이 한 절속에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님이 다 관계되어 있음을 주목하십시오.

 

㉡ 아무리 비천한 그리스도인이라 하더라도 그가 기도(祈禱)를 드릴 때에는,

 

  ㉮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 “한 성령 안에서”,

 

  ㉰ “아버지께 나아가는”, 삼위일체 하나님과 관련되어 있다는 이 영광스러움을 놓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친히 간구하시나니라”(26)는 의미입니다.

 


 

⑥ 성령의 사명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상에서 “다 이루었다” 하신 구속사역을 각 사람에게 적용을 시키는 사역, 즉 믿게 하시고, 거듭나게 하시고,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들을 보호하시고, 인도하시고, 견인하시는 일을 하십니다.

 

㉠ 그런데 주님께서 “다 이루었다” 선언하셨을 때에 휘장이 찢어졌습니다.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히 10:20)이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 앞으로 들어와도 좋다는 허락이 떨어졌다는 증거입니다. 그런데 우리를 누가 데리고 들어가는가?

 

㉡ 성령께서 우리를 데리고 들어가신다는 것입니다. 성령님의 도우심이 없이 올바른 기도를 드릴 자가 누구이겠습니까? 그래서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되 무시로 성령(聖靈) 안에서 기도하라”(엡 6:18) 하시는 것입니다.

 


 

⑦ 그렇다면 성령께서 어떤 방법(方法)으로 우리의 기도를 도우시는가? 어떤 분들은 우리는 가만히 있어도 성령께서 다 알아서 우리를 위하여 간구해주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 형제 안에, “하나님의 영, 그리스도의 영, 성령”(9)이 내주(內住)하고 계심을 잊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또한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16)하신다고 말씀했습니다. 성령께서는 성도 안에서 도우십니다. 어느 성도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고 탄식하며 엎드려, “주여, 주여”만을 연발하고 있을지라도 성령께서는 그의 영으로 더불어 간구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의 “도우심”의 원어적인 의미는, “함께, 든다”는 뜻이 있습니다. 우리가 무거운 짐을 들지를 못하고 끙끙거리고 있을 때에, 성령께서는 우리와 함께 무거운 짐의 한 쪽을 들어 주심으로 도와주신다는 말씀입니다.

 

㉢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신다”(26하)고 말씀합니다. 성령의 탄식(歎息)은 누구를 위한 탄식인가?

 

  ㉮ 주님께서 우리의 질고를 대신 담당하심과 같이,

 

  ㉯ 성령께서도 우리의 탄식을 대신 담당하신다는 그런 뜻이 있습니다. 우리 때문이 아니라면 성령은 탄식하실 분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니까 형제가 탄식하며 기도를 한다는 것은 내주하시는 성령님의 감화인 것입니다. 

 


 

⑧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27상) 합니다.

 

㉠ 하나님은 마음을 감찰(監察)하시는 분이십니다.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이라는 말을 듣게 될 때에 형제는 어떠한 마음이 듭니까? 싫습니까? 두렵습니까? 불신자들에게는 불쾌하고 두려움을 주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그 분의 사랑을 입은 자녀들에게는, 지극히 위로(慰勞)가 되는 말씀인 것입니다.

 

㉡ 왜냐하면 “마음을 감찰하신다”는 말이 놓여있는 문맥(文脈)이, 심판과 결부된 것이 아니라, “우리 연약(軟弱)함을 도우시나니” 한 말씀과 결부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말로 표현을 해야만 들으시는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여 엎드려 탄식만 하고 있을 지라도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은 형제의 마음을 아시며, 형제의 중심에서 간구하고 계시는 “성령님의 생각”을 아신다는 것입니다.

 


 

⑨ 34절을 보십시오. 하나님 우편에서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그리스도 예수님이 계십니다.

 

㉠ 또한 형제 속에 있는 마음의 성전에서는 하나님의 뜻대로 간구하시는 성령님이 계십니다. 주님은 위에서 잡아당기시고, 성령님은 아래서 밀어 올려주시고 있는 셈입니다.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이것은 현재시제(現在時制)입니다. 전에만 도우신 것이 아닙니다. 현재도, 그리고 앞으로도, 형제가 몸의 구속을 받을 때까지, 성령님은 형제의 연약함을 계속적으로 돕고 계신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는 성령”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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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행함과진실함으로사랑 | 작성시간 17.05.23 감사합니다. 요즘 목사님 구속사 영상 들으면서 매우 힘이나고, 소명과 사명이 선명해지고, 믿음이 든든해 집니다.
    오늘은 마음을 감찰하시는것이 두려운일이 아니라, 매우 위로가 되는 말씀임을 알게되었습니다.

    혹시 오늘 텍스트 중에서 히5장2절에 "저가 연약에 싸여 있다는" 히5장 1ㅡ3절문맥상 구약의 옛 대제사장을 가르키고 있는것으로 보입니다. 제가 맞게 읽었는지요?
  • 작성자왕진교회 | 작성시간 17.05.31 성령님이 도우심을 확신 하니 힘이 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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