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나서 한 번에 설교하기
본문 : 욘 4:9-11절
4:9 하나님이 요나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 박 넝쿨로 말미암아 성내는 것이 어찌 옳으냐 하시니 그가 대답하되 내가 성내어 죽기까지 할지라도 옳으니이다 하니라
4:10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가 수고도 아니 하였고 재배도 아니 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말라 버린 이 박 넝쿨을 아꼈거든
4:11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가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
주제 :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강론
요나서의 이야기는 유년 주일학교 어린이들도 뚜르르 할 정도로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정작 요나서를 통해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주제(主題), 즉 하나님의 의도(意圖)는 잘못 전해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러면 요나서의 중심주제(主題)가 무엇일까요? 선교(宣敎)사명입니까? 요나의 불순종입니까? 이방인의 구원문제입니까? 물론 요나서를 통해서 이런 문제에 대해 교훈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요나서를 통해서 말씀하시려는 중심주제는 아닌 것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해석들이 요나서의 주제를 이방인에 대한 선교사명으로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성경의 역사성과 점진(漸進)성을 무시하고 요나서를 동떨어진 독립적인 책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성경에서 교훈만을 구하고 하나님께서 이루어 오신 구속사(救贖史)라는 맥락을 무시하기 때문에 범하게 되는 곡해입니다.
당시는 이스라엘을 가리켜, “내가 땅의 모든 족속 가운데 너희만을 알았나니”(암 3:2)하신 선민 이스라엘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보내시려는 구원계획을 이루어오시던 시대입니다. 이방인에게 선교의 문이 열리게 되는 것은 그리스도가 오셔서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둘로 하나를 만드신”(엡 2:14) 후에야,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막 16:15)고 사명이 주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까지는 이스라엘은 메시아가 오실 통로로 거룩하게 구별(區別)이 되어야 할 시기입니다.
그러면 요나서를 통해서 말씀하시려는 중심주제가 무엇일까요? 이를 알기 위해서는 아모스 1:1절과 열왕기하 14:25절을 통해서 역사적인 좌표와 맥락을 이해해야만 합니다. “요나와, 아모스”는 다 같이 여로보암 2세가 40년 동안 왕위에 있을 때에 세움 받은 선지자들임을 확인하게 됩니다. 당시는 정치적으로는 번영을 누리고 있었으나 신앙적으로는 여로보암1세가 세운 송아지우상을 섬기고 있던 암흑기였습니다.
그런 시기에 하나님께서는 ㉠ 아모스를 부르셔서 북쪽 이스라엘로 보내시면서, “가서 내 백성 이스라엘에게 예언하라”(암 7:15)고 명하셨고, ㉡ 요나를 부르셔서 니느웨로 보내시면서,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향하여 외치라”(욘 1:2)고 명하신 것이 역사적인 배경입니다.
그러면 아모스를 북 이스라엘로, 요나를 이방 니느웨로 보내신 하나님의 의도가 무엇인가 하는 점입니다. 사도 바울은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주를 가르치겠느냐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고전 2:16)고 말씀합니다. 이를 알아야만 요나서를 통해서 말씀하시려는 바를 바르게 깨달을 수가 있습니다.
이를 알기 위해서 아모스서와 요나서에서 각각 한 절씩을 인용하도록 하겠습니다. ㉠ 먼저 요나서 3장 마지막 절입니다. “하나님이 그들(니느웨)이 행한 것 곧 그 악한 길에서 돌이켜 떠난 것을 보시고 하나님이 뜻을 돌이키사 그들에게 내리리라고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지 아니 하시니라”(3:10)합니다.
㉡ 다음은 아모스 4:6-11절입니다. 이 여섯 절 안에는 “너희가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 하였느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는 언급이 5번(6, 8, 9, 10, 11)이나 반복적으로 강조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기근, 가뭄, 재앙, 전염병, 지진”등으로 회개를 촉구하셨으나 “너희가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 하였느니라”하십니다.
북 이스라엘에 보냄을 받은 아모스 선지자는 “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 그렇지 않으면 그가 불 같이 요셉의 집에 임하여 멸하시리니 벧엘에서 그 불들을 끌 자가 없으리라”(암 5:6)고 외쳤습니다. 요나도, “그 성읍에 들어가서 하루 동안 다니며 외쳐 이르되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욘 3:4)고 외쳤습니다.
자, 이스라엘과 니느웨가 각각 어떻게 반응했습니까? 이방 “니느웨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고 금식을 선포하고 높고 낮은 자를 막론하고 굵은 베 옷을 입은지라”합니다. 백성들만이 아니라 “그 일이 니느웨 왕에게 들리매 왕이 보좌에서 일어나 왕복을 벗고 굵은 베 옷을 입고 재 위에 앉으니라”(욘 3:5-6)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선민인 이스라엘에서는 더 큰 회개운동이 일어났어야 마땅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아모스 4장에서는 “너희가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 하였느니라”고 5번이나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제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시는 셈입니다. 멸망 받아 마땅한 이방 니느웨 사람들이 회개하는 것을 보고도, “너희가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 하였느니라, 그러므로 이스라엘아 내가 이와 같이 네게 행하리라 내가 이것을 네게 행하리니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만나기를 준비하라”(암 4:12), 즉 심판 받을 각오를 하라는 말씀입니다. 얼마나 답답하고 안타까운 일입니까?
여러분은 이제 요나서를 통해서 말씀하시려는 바가 무엇인지 하나님의 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까? 그것은 여섯 번째로 이방 니느웨가 회개함으로 멸망당하지 않는 것을 보면서도 “너희가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였다”는 점을 말씀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심판 때에 니느웨 사람들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들이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하였음이거니와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눅 11:32)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요나서의 중심주제는, “회개를 촉구하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최우선적으로 누가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바라시는 것일까요? 요나서의 1차 독자는 누구들이었다고 여겨지십니까? 요나서의 내용은 니느웨에 관한 것이지만, 요나서의 기록 목적은 니느웨 사람들에게 들려주기 위해서 기록하게 하신 것이 아닙니다.
이점을 바울의 증언을 빌어서 말한다면, 니느웨가 구원 얻는 것을 보고 이스라엘로 “시기 나게”(롬 11:11)하여 그들로 구원 얻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긍휼이요, 오래 참으심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요나서의 1차 독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요, 1차적으로 회개하기를 기대하신 것은 선민 이스라엘이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요나서가 신약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어떻게 적용이 되는가 하는 점입니다. 이에 대해 주님께서는, “이 세대는 악한 세대라 표적을 구하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나니”고 말씀하십니다. 요나가 삼일 삼야 물고기 뱃속에 있다가 살아 나온 사건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장사한지 사흘 만에 부활하실 것에 대한 “표적”으로 해석해 주고 계십니다.
그런데 여기서 멈추신 것이 아니라, “요나가 니느웨 사람들에게 표적이 됨과 같이 인자도 이 세대에 그러하리라”(눅 11:29-30)고 말씀하심을 명심해야만 합니다. 이방 니느웨가 요나의 경고를 듣고 배성들로부터 짐승과 왕까지 금식하며 베옷을 입고 회개했다는 것은 참으로 불가사의한 일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니느웨가 회개할 수 있었던 것은 “요나가 니느웨 사람들에게 표적”이 되었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요나가 니느웨 사람들이 회개하지 않을 수 없게 한 결정적인 표적이 무엇인가 하는 점입니다. 그것은 “요나가 밤낮 삼 일을 물고기 뱃속에 있다가”(1:17) 살아난 사건인 것입니다.
요나서는 압축적으로 기록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추론을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요나가 니느웨에 가서 하루 동안 다니면서,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3:4)고 외쳤을 때에 어떻게 반응했을 것 같습니까? 미친 사람으로 취급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계속해서 “40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고 외치자 악담하는 자로 여기고 돌로 치는 자도 있었으리라는 것은 상상하기에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던 중에 결정적인 증인이 나타났을 것입니다. 그 사람은 요나가 다시스로 도망가려고 탔던 배의 사공이었을 것입니다. 그 증인은 요나가 하나님의 선지자라는 것과, 하나님께서 니느웨에 가서 외치라는 명을 거역하고 다시스로 도망을 가는 요나를 큰 풍랑으로 막으신 일과, 그리하여 “요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매 바다가 뛰노는 것이 곧 그친”(1:15) 일등을 말해주었을 것입니다. “분명히 던졌습니다. 분명히 죽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여기에 와서 외치고 있단 말인가?”고 증언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40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는 말을 미친 사람의 말, 악담하는 자의 말로 흘려버릴 수가 있단 말인가!! 물론 이때에 회개의 영이 역사하셨을 것입니다. 이것이 “요나가 니느웨 사람들에게 표적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이제 그리스도의 증인들이 증언(證言)해야 할 결정적인 요점이 무엇인가 하는 점은 분명해졌습니다. “인자도 이 세대에 그러하리라”하신 “그리스도의 표적”인 것입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이 증인된 자들이 증언해야 할 표적인 것입니다.
이는 요나의 표적보다 더 큰 표적입니다. 왜냐하면 요나는 그 후에 죽었으나 예수 그리스도는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 28:20)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그 분이 심판주로 다시 오시기 때문입니다. 만일 증언하는 이 표적을 듣고도 회개하지 않는다면 그에게 더 보여줄 표적은 없는 것입니다.
이점을 마태복음에서는 “요나가 밤낮 사흘 동안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 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 동안 땅 속에 있으리라 심판 때에 니느웨 사람들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들이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하였음이거니와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마 12:40-41)고 말씀하십니다. 이제 분명합니까?
그렇다면 오늘의 “니느웨”를 회개케 할 표적이 무엇인가 하는 점은 분명해진 것입니다. 그것은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도, 축복도, 교회 프로그램”도 아닙니다. 요나서를 통한 불변의 진리는 “요나가 니느웨 사람들에게 표적이 됨과 같이 인자도 이 세대에 그러하리라”하신 “그리스도의 표적”인 것입니다. 즉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한지 삼일 만에 다시 살아나셨다는 십자가 복음(福音)인 것입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의 표적”을 외친 증인이 사도 바울입니다. 철학의 도시 아덴에서 바울은,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간과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에게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행 17:30-31)고 증언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요나서를 통해서 도달하게 되는 결론은 회개가 아니라, “하나님이 그들이 행한 것 곧 그 악한 길에서 돌이켜 떠난 것을 보시고 하나님이 뜻을 돌이키사 그들에게 내리리라고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니라”(3:10)한 구원(救援)인 것입니다. 그리고 요나서가 주는 도전은 오늘의 그리스도의 증인들, 즉 요나처럼 보냄을 받은 복음전도자, 선교사들이 무엇을 증언하라고 보냄을 받은 자인가 하는 사명과 직결된 사활적으로 중요한 요점인 것입니다.
이런 맥락으로 2장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요나는 물고기 뱃속에서 육신만을 살려 달라고 간구하고 있지 않습니다. “물이 나를 영혼까지 둘렀다”(2:5)고 영적인 문제로 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요나의 고백은, “구원은 여호와께 속하였나이다”(2:9)하는 성경의 대주제로 마치고 있는 것입니다. “구원은 여호와께 속했다”, 이것이 요나서의 핵심입니다. 그러므로 요나서는 회개를 촉구하는 하나님의 구원초청이라고 말씀드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누가 회개하기를 기대하고 계시는 것일까요? ㉠ 제일 먼저는 이 시대의 요나, 즉 주의 종들입니다. 요나서에서는 “선지자”가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고 도망가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요나서에서는 풍랑도, 물고기도, 박 넝쿨도, 심지어 벌레도 순종하는 모습으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종은 불순종하고 반대방향으로 도망을 쳤던 것입니다.
㉡ 다음은 오늘의 이스라엘, 즉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요나서는,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4:11)는 말씀으로 끝맺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니느웨를 아끼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니느웨 보다도 이스라엘을 더욱 아끼셨습니다.
㉢ 마지막으로 오늘의 니느웨인 불신자들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에 이르기를 기뻐하십니다. 요나도 회개했고, 니느웨도 회개의 표적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니느웨의 표적을 보고도 끝내 회개하지 않다가 니느웨(앗수르)에 의하여 멸망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요나서를 통해서 완악하고 패역한 이 세대를 향하여 이렇게 말씀하고 계시는 셈입니다. “요나서를 보라, 이방인의 성 니느웨는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하여 멸망당하지 않고 구원을 얻었다. 이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도 회개하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면 살수가 있다. 그러나 이것을 보고도 회개하지 않는다면 더 이상 보여줄 표적은 없다. 이것이 최후통첩이다”!!!
끝으로 요나서에서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으로 계시되어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4:2절을 보겠습니다.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4:2)으로 계시되어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여호와라 여호와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라”(출 34:6)고 친히 말씀하신 자기계시입니다.
이처럼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신” 하나님께서 회개하기를 원하시는 궁극적인 사람은 이 말씀을 듣고 있는 바로 형제입니다. 형제여, 당신은 요나처럼 도망을 치고 있지는 아니합니까? 요나처럼 “배 밑층에 내려가서 누워 깊이 잠이 든”(1:5) 것은 아닙니까? “요나가 여호와의 말씀대로 일어나서 니느웨로 가니라”(3:3), 주님은 “일어나라 함께 가자”(마 26:46)하십니다.
다시 강조합니다만 하나님은 니느웨를 아끼셨습니다. 더욱 이스라엘을 아끼셨습니다. 그리고 더욱 더 형제를 아끼십니다. 이것이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입니다.
어서 돌아오오 어서 돌아만 오오
우리 주는 날마다 기다리신다오
밤마다 문 열어놓고 마음 졸이시며
나간 자식 돌아오기만 밤새 기다리신다오 (527장)
* 두 주간 선교여행 다녀 오겠습니다.
기도로 동력해주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