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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주일의 설교

나훔서 한 번에 설교하기

작성자유도순|작성시간17.07.29|조회수725 목록 댓글 0

나훔서 한 번에 설교하기

 

본문 : 1:1-3절

1:1 니느웨에 대한 경고 곧 엘고스 사람 나훔의 묵시의 글이라

1:2 여호와는 질투하시며 보복하시는 하나님이시니라 여호와는 보복하시며 진노하시되 자기를 거스르는 자에게 여호와는 보복하시며 자기를 대적하는 자에게 진노를 품으시며

1:3 여호와는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권능이 크시며 벌 받을 자를 결코 내버려두지 아니하시느니라 여호와의 길은 회오리바람과 광풍에 있고 구름은 그의 발의 티끌이로다

 

주제 : 경건치 아니함과 불의에 임하는 하나님의 진노

 

강론

“나훔서”를 아십니까? 나훔서를 설교하는 것을 들으신 적이 있으십니까? 나훔서는 전체가 하나님의 진노(震怒)와 보응에 관한 두렵고 떨리는 심판(審判)의 말씀입니다. 이는 듣기에 좋은 말씀이 아닙니다. 사람들로부터 환영을 받지를 못합니다. 그러므로 나훔서를 선포하는 설교자는 별로 없을 것입니다.

나훔서는 “니느웨에 대한 경고 곧 엘고스 사람 나훔의 묵시의 글이라”(1:1)고 시작이 됩니다. 그러니까 나훔서의 1차적인 내용은 “니느웨”에 대한 심판경고입니다. “니느웨”는 앗수르의 수도입니다. 그러면 어찌하여 “니느웨에 대한 경고”라 하시는가? 이사야 10:5절을 보면 “앗수르 사람은 화 있을진저 그는 내 진노의 막대기요”하십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하나님께서는 앗수르를 금송아지 우상을 섬기면서 끝끝내 회개하지 않은 북 이스라엘을 심판하시는 “진노의 막대기”로 사용하셨습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앗수르 사람은 화 있을진저”하시는가? “진노의 막대기”로 쓰임을 받았다는 점을 모르고 “그가 이르기를 내 고관들은 다 왕들이 아니냐, 그들이 조각한 신상들이 예루살렘과 사마리아의 신상들보다 뛰어났느니라”(사 10:8, 10)고 자신들이 섬기는 우상이 이스라엘의 여호와 하나님 보다 뛰어난다고 머리끝까지 교만했기 때문입니다.


나훔 선지자가 예언할 당시는 “그들이 비록 강하고 많을지라도”(1:12)한 앗수르의 전성시대(1:12)라 할 수가 있습니다. 북쪽 이스라엘은 앗수르에 의해서 이미 멸망을 당했고, 남쪽 유다도 그들의 위협을 받고 있던 때입니다. 이런 시기에 하나님께서는 나훔 선지자를 세우셔서 하나님을 대적하는 앗수르에 대한 심판을 선언하게 하셨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를 들어서 바벨론의 심판을 경고하신 시점도 예루살렘을 정복한 전성시대(렘 50:1)였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대적자가 영구히 영화를 누릴 줄로 알고 기세가 등등할 때 심판을 선언하십니다. 그리고 예언은 문자적으로 응하였음을 역사가 증언하고 있습니다.

 

나훔서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집니다. 앞부분인 1장은 주로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하는 하나님의 자기계시입니다. 그래서 “여호와”라는 말이 9번, 하나님을 가리키는 “그”라는 대명사가 10번 이상 나옵니다. 뒷부분인 2-3장에서는 주로 하나님께서 니느웨에 행하실 일, 즉 심판에 대한 내용입니다.

㉠ 먼저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신가를 살펴보겠습니다. 1:2절입니다. “여호와는 질투하시며 보복하시는 하나님이시니라 여호와는 보복하시며 진노하시되 자기를 거스르는 자에게 여호와는 보복하시며 자기를 대적하는 자에게 진노를 품으시는”(1:2) 하나님으로 계시되어 있습니다. “보복과 진노”가 반복적으로 등장합니다. 이는 나훔서의 내용을 한마디로 요약해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캠벨 몰간은, “참으로 엄숙한 마음가짐이 없이는 나훔서를 읽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첫 말씀이, “질투하시는” 하나님이라고 말씀합니다. 출애굽 당시 시내산에 강림하신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십계명을 주실 때에도 우상을 만들지 말고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하시면서, “네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이라”(출 20:5)고 말씀하셨습니다. 어찌하여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신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사랑과 질투”는 동전 앞뒤와 같은 것입니다. 질투가 없는 사랑은 거짓 사랑인 것입니다.

야고보서는, “너희는 하나님이 우리 속에 거하게 하신 성령이 시기하기까지 사모한다 하신 말씀을 헛된 줄로 생각하느냐”(약 4:5)고 묻고 있습니다. “질투와 보복”은 사랑을 배신당했을 때에 일어나는 분노(憤怒)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진노는 하나님의 사랑을 배반한 자에 대한 보응임을 인식해야만 합니다.

 

그런데 3절을 보시면 “여호와는 노하기를 더디하시며”합니다. 이는 2절의 “진노하심”이 얼마나 오래 참으시던 끝에 발하여지는 진노인가를 말씀해줍니다. 그런데 사악한 인간은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에 대해 얼마나 멸시하고 있는지요.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이 풍성함을 멸시하느냐”(롬 2:4)합니다.

1:6절입니다. “누가 능히 그의 분노 앞에 서며 누가 능히 그의 진노를 감당하랴 그의 진노가 불처럼 쏟아지니 그로 말미암아 바위들이 깨지는도다”합니다.


㉡ 다음은 니느웨가 무엇 때문에 심판을 당하게 되는가 하는 점을 살펴보겠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언제나 “경건치 아니함과 불의”(롬 1:18)에 대해 임합니다. “경건치 아니함”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의 죄인데 먼저 앗수르의 “경건치 아니함”이 무엇인가? 1:14절입니다. “내가 네 신들의 집에서 새긴 우상과 부은 우상을 멸절하며 네 무덤을 준비하리니 이는 네가 쓸모없게 되었음이라”하신 대로 우상을 숭배하는 자들입니다. 그런 자들이 이스라엘을 정복하고는 자기의 신이 이겼다고 자랑을 했습니다.


또 1:11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 악을 꾀하는 한 사람이 너희 중에서 나와서 사악한 것을 권하는도다”(11)합니다. 이 “한 사람”이 열왕기하 18장-19장에 등장하는 앗수르 왕 산헤립입니다. 그는 히스기야 왕 당시 대군을 이끌고 예루살렘을 침략하여 포위하고 군대장관 랍사게로 하여금 “네가 믿는 네 하나님이 예루살렘을 앗수르 왕의 손에 넘기지 아니하겠다 하는 말에 속지 말라”(왕하 19:10)고 말하면서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을 하게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네가 누구를 꾸짖었으며 비방하였느냐 누구를 향하여 소리를 높였으며 눈을 높이 떴느냐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에게 그리하였도다”(왕하 19:22)고 꾸짖으셨습니다. 이것이 “경건치 아니함”입니다.

 

다음은 “불의”(不義)인데 이웃과의 관계에서의 죄입니다. 3:1절입니다. 니느웨를 가리켜 “화 있을진저 피 성이여”(3:1)합니다. 얼마나 많은 무죄한 자의 피를 흘렸으면 “피 성”이라 하시겠습니까? 그래서 나훔서는 앗수르가 심판을 당했다는 “네 소식을 듣는 자가 다 너를 보고 손뼉을 치나니 이는 그들이 항상 네게 행패를 당하였음이 아니더냐”(3:19)고 마치고 있습니다. 이것이 “불의”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진노는 언제나 “경건치 아니함과 불의”에 임합니다.

 

㉢ 성경은 문제에 대한 해답으로 주어진 것입니다. 그러면 나훔서에는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라는 “문제”(問題)만 있고 해답은 전연 없는 것입니까? 1:15절을 보겠습니다. “볼지어다 아름다운 소식을 알리고 화평을 전하는 자의 발이 산 위에 있도다”하십니다. 이 “아름다운 소식, 화평을 전하는 자”가 1차적으로는 앗수르가 심판을 받았다는 소식을 전하는 것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궁극적인 “아름다운 소식”이란 앗수르가 멸망했다는 소식이 아닙니다.


나훔서의 중심주제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분노, 하나님의 진노”입니다. 이는 앗수르에 국한 된 “분노와 진노”가 아니라 인간이 범한 “죄”라는 문제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행해주실 궁극적인 “좋은 소식”이란, “누가 능히 그의 분노 앞에 서며 누가 능히 그의 진노를 감당하랴”(1:6)한 “진노”에 대한 해답이 “좋은 소식”인 것입니다. 성경 마지막 책에서도 “그들의 진노의 큰 날이 이르렀으니 누가 능히 서리요”(계 6:17)합니다. 그러면 진노의 날에 설 수 있게 하는 “아름다운 소식”은 무엇입니까?

 

그러므로 다시 한 번 1:15절을 주목해보시기 바랍니다. “볼지어다 아름다운 소식을 알리고 화평을 전하는 자의 발이 산 위에 있도다 유다야 네 절기를 지키고 네 서원을 갚을지어다”하고, “아름다운 소식”이 “절기를 지키라”는 말씀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들은 대적자로 말미암아 절기를 지키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절기를 지키라”하신 “유월절, 오순절, 초막절”등 3대 절기가 무엇에 대한 예표인가 하는 점입니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실 “구속”과 결부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름다운 소식, 화평을 전하는 자”란 이사야 52:7절에서 “좋은 소식을 전하며 평화를 공포하며 복된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구원을 공포하며 시온을 향하여 이르기를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하는 자의 산을 넘는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가”하는 말씀과 결부되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이 말씀하는 궁극적인 아름다운 소식이란 사도 바울이,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롬 10:15)한 복음인 것입니다. 복음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진노의 날에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큰 소리로,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계 7:9-10)하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입니다.

나훔서를 통해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불변의 진리는 행악하는 자가 한때 흥왕하나 마지막에는 심판을 당하고, 경건한 자가 한 때 고난을 당하나 결국에는 영광과 위로로 갚으시는 공의의 하나님이심을 계시해 주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점을, “너희로 환난을 받게 하는 자들에게는 환난으로 갚으시고 환난을 받는 너희에게는 우리와 함께 안식으로 갚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라”(살후 1:6-7)고 말씀합니다. 이는 나훔서에 대한 좋은 해설이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나훔서가 현대교회에는 어떤 의미가 있는가? 바울은 로마서 1:17절에서,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하고 “복음”(福音)을 전합니다. 그리고 18절에서는, “하나님의 진노가, 나타나나니”하고 “복음과 진노”(震怒)를 함께 전해주고 있습니다. 저들에게 복음이 왜 필요한 것입니까? 복음을 전해주지 않으면 저들은 어떻게 된다는 말입니까? 그런데 현대교회는 하나님의 진노의 교리에 대해서 부인하거나 듣기 싫어합니다. “진노, 심판, 지옥”을 설교하면 교회가 부흥이 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그러면 성경 전체의 요절이라고 말하는 요한복음 3:16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영생과 멸망, 사랑과 진노”가 함께 나타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진노”가 없다면 하나님의 “복음”도 필요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노를 전해주지 않는 것은 복음을 부인하는 것과 다름이 없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대신 진노를 담당하신 십자가를 헛된(갈 2:21)것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갈보리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사랑과 진노를 함께 보지 못한다면 그는 하나님도, 그리스도도, 사랑도, 은혜도, 복음도 모르는 사람입니다. 어찌하여 죄인들을 위하여 자기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셨습니까? 그렇게까지 우리들을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어찌하여 우리 죄를 그냥 용서해주시지 못하고 자기 아들에게 대신 정죄하시고야 우리를 받아주실 수가 있으셨습니까?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실 뿐만이 아니라 죄를 묵과할 수 없는 공의(公義)의 하나님도 되시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를 통해서 사랑의 높이를 봅니다. 십자가를 통해서 죄를 얼마나 미워하시는가 하는 하나님의 진노의 깊이를 봅니다. 사랑은 아름다운 것입니다. 그러나 그 사랑에 진실성이 없다면 그것은 거짓입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하나님의 사랑은 진실하시고 의로우시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므로 “사랑과, 진노”는 동전의 앞뒤와도 같습니다. 이 둘을 함께 전해주어야만 합니다. 그래서 “좋으신 하나님,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하고 “사랑”만을 강조하고 있는 현대교회에 나훔서가 절실히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지금 지구상에는 앗수르라는 나라는 없습니다. 그러나 “경건치 아니함과 불의”는 날이 갈수록 기승을 부리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날도 “니느웨”는 있다는 것이 됩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설교자는 “나훔서”를 힘 있게 선포해야 마땅한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교회 내에도 하나님의 “사랑”만 알고, 공의는 모르는 사람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습니다. “오냐, 오냐”하고 키운 자식은 자기밖에 모릅니다. “아비 없는 후레자식”같이 자기중심적이 됩니다. 이는 우려가 아니라 증상이 아주 깊은 상태라 하겠습니다. 그들을 균형 있게 양육하기 위해서 나훔서를 선포하지 않으시렵니까? 이것이 “경건치 아니함과 불의에 임하는 하나님의 진노”입니다.

 

사랑의 주 예수 친히 이 땅에 내려오사

문 밖에 서서 기다리니 참 놀라운 사랑이라

피하지 말라 피하지 말라

우리가 곁길로 피해도 맘속에 오시리

심판날 당할 때 주님을 너 맞을 준비해

맘속에 주님을 영접하라 주 영접하라 (529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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