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이번 주일의 설교

요한3서 한 번에 설교하기

작성자유도순|작성시간17.12.09|조회수1,533 목록 댓글 0

요한3서 한 번에 설교하기

 

본문 : 1:1-6절

1:1 장로인 나는 사랑하는 가이오 곧 내가 참으로 사랑하는 자에게 편지하노라

1:2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1:3 형제들이 와서 네게 있는 진리를 증언하되 네가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하니 내가 심히 기뻐하노라

1:4 내가 내 자녀들이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함을 듣는 것보다 더 기쁜 일이 없도다

1:5 사랑하는 자여 네가 무엇이든지 형제 곧 나그네 된 자들에게 행하는 것은 신실한 일이니

1:6 그들이 교회 앞에서 너의 사랑을 증언하였느니라 네가 하나님께 합당하게 그들을 전송하면 좋으리로다

 

주제 : 진리를 위하여 함께 수고하는 자

 

강론

요한3서는 “장로인 나는 사랑하는 가이오 곧 내가 참으로 사랑하는 자에게 편지하노라”(1:1)고 시작이 됩니다. 이처럼 요한3서는 사도 요한이 “사랑하는 가이오”에게 보낸 서신입니다. 그러면 편지를 기록한 목적이 무엇인가? 1:5절입니다. “사랑하는 자여 네가 무엇이든지 형제 곧 나그네 된 자들에게 행하는 것은 신실한 일이니”합니다. 여기서 “나그네 된 자들”이란 순회전도자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 대표적인 전도자가 바울일 것입니다. 당시는 무명의 순회전도자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가이오가 이 순회전도자들을 극진히 후원을 했던 것입니다. 6절에서 “그들이 교회 앞에서 너의 사랑을 증언하였느니라”한 것을 보면, 순회전도자들이 요한과 교회 앞에서 가이오의 선교후원을 증언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이를 듣고 “가이오”를 격려하기 위해서 편지를 쓰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 요한2서와 3서의 특성이 나타납니다. 요한2서는 “택하심을 받은 부녀와 그의 자녀들에게, 진리와 사랑을 행하라”는 개인적인 신앙을 격려하기 위한 것이라면, 요한3서는 “이는 우리로 진리를 위하여 함께 일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함이라”(8)는 동력(同役)을 격려하기 위한 서신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특성이 인사에도 나타나는데 요한2서에서는 “택하심”(1)을 강조한 반면 요한3서에서는 “사랑하는 가이오, 참으로 사랑하는 자”(1)라고 “사랑”을 강조하는 데서도 드러납니다. 짧은 요한3서에 “사랑하는 자”라는 언급이 3번(2, 5, 11)이나 강조되어 있습니다. 가이오의 선교동참이 얼마나 고마웠으면 이처럼 극진한 애정을 나타냈겠습니까?

 

그러면 2절입니다.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고 마음껏 축복을 합니다. “영혼, 범사, 강건”이라 하기 때문에 “3박자 축복”이라 하는데 모든 성도들이 받기를 원하는 축복입니다.

그런데 이 축복은 내용상으로 하면 8절 다음에 놓여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런 축복은 아무나 받을 수 있는 복이 아니라 “진리를 위하여 함께 일하는 자”(8)에게 한 축복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착각하고 있는 것 중 하나가 목회자가 모든 좋은 말을 다 동원하여 축복을 하면 그대로 임할 줄로 여기는 것입니다.


그 믿음은 가상하지만 주님은 제자들을 파송하실 때에 “그 집에 들어가면서 평안하기를 빌라”하시면서 “그 집이 이에 합당(合當)하면 너희 빈 평안이 거기 임할 것이요”(마 10:13)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도가 가이오에게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고 아낌없이 축복한 것은 가이오가 이런 축복을 받기에 합당하게 행했기 때문인 것입니다. 요한3서는 내용상으로 4부분으로 되어 있습니다.

 

① 첫째 부분은 1-4절인데 중심점은 “진리 안에서 행하는 자”입니다. 3절을 보겠습니다. “형제들이 와서 네게 있는 진리를 증언하되 네가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하니 내가 심히 기뻐하노라”합니다. 두 마디로 되어 있는데 첫째는 “네게 있는 진리를 증언”했다 합니다. 이는 가이오 안에 복음진리가 있었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둘째는 “네가 진리 안에서 행한다”는 말입니다. 이는 가이오가 복음진리를 받은 것만이 아니라 실천했다는 점을 나타냅니다.


㉠ 그래서 4절에서는 “내가 내 자녀들이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함을 듣는 것보다 더 기쁜 일이 없도다”하는 것입니다. 우리들도 “복음진리”를 받은 자들입니다. 중요한 점은 우리가 “진리 안에서 행하고 있느냐”하는 점입니다. 진리를 실천함으로 사도 요한이 아니라 우리 주님께서 “내 자녀들이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함을 듣는 것보다 더 기쁜 일이 없도다”하시도록 해드려야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② 둘째 부분은 5-8절인데 중심점은 “진리를 위하여 함께 수고하는 자”입니다. 5절입니다. “사랑하는 자여 네가 무엇이든지 형제 곧 나그네 된 자들에게 행하는 것은 신실한 일이니”(1:5)하고 가이오의 봉사를 칭찬합니다. 요한3서의 중심점이 여기에 있습니다. 가이오는 진리 가운데 거한 것만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복음진리를 전파하는 일에 동역(同役)했던 것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애가(哀歌)에서 “지나가는 모든 사람들이여 너희에게는 관계가 없는가 나의 고통과 같은 고통이 있는가”(애 1:12)하고 “지나가는 사람들이여”합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예루살렘이 멸망하고 백성들이 포로로 끌려갔는데도 자신과는 상관이 없는 “지나가는” 아웃사이더(Outsider)처럼 여긴 자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교회에는 이런 구경꾼들과 같은 사람들이 있어서는 아니 되겠습니다.


㉠ 6절입니다. “그들이 교회 앞에서 너의 사랑을 증언하였느니라”합니다. 주목해보셨습니까? 3-4절에서 “진리”를 언급한 사도는 진리에다 “사랑”을 짝을 지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진리와, 사랑”은 요한서신의 두 기둥과 같은 것입니다. 이로 보건대 가이오는 “진리” 위에 서서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임을 알게 됩니다. 가이오는 복음전도자들을 주님의 사랑으로 영접하고 필요한 선교 비를 주님의 이름으로 지원해주었던 것입니다.

 

㉡ 그러므로 “네가 하나님께 합당하게 그들을 전송하면 좋으리로다”(6하)합니다. 순회전도자들은 또다시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떠나게 될 것입니다. “합당하게 전송하라”는 것은 전에도 그러했지만 앞으로도 필요한 것을 공급해주라는 부탁입니다.


㉢ 왜냐하면 1:7절을 보십시오. “이는 그들이 주의 이름을 위하여 나가서 이방인에게 아무 것도 받지 아니함이라”(1:7)합니다. 여기 중요한 요점이 등장하는데 그것은 “주의 이름을 위하여”라는 말씀입니다. 주님은 바울을 부르실 때에,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행 9:16)하셨고, 바울은 “주의 이름을 위하여”(롬 1:5) 그 많은 고난을 받으면서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했던 것입니다. 전도자들은 “주의 이름을 위하여” 싸우러 나가는 십자가군병들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의 이름을 위하여” 수고하는 주의 종들을 주의 이름으로 영접하는 것은 곧 주님을 영접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들이 “나가서 이방인에게 아무 것도 받지 아니함이라”하는데 받지 않은 것은 대접이었지 가는 곳마다 배척과 박해를 받았던 것입니다. “주의 이름을 위해서” 말입니다.


㉣ 8절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같은 자들을 영접하는 것이 마땅하니 이는 우리로 진리를 위하여 함께 일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함이라”합니다. “함께 일하는” 참여한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방청객이 되어서는 아니 됩니다. 여러분도 “진리를 위하여 함께 일하는 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③ 요한3서의 세 번째 부분은 9-12절인데 중심점은 “진리를 위하여 함께 일하지 않는 자”입니다. 교회 내에는 가이오와 같은 신실한 성도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9절에 보면 “내가 두어 자를 교회에 썼으나 그들 중에 으뜸 되기를 좋아하는 디오드레베가 우리를 맞아들이지 아니”했다고 말합니다. 사도는 순회전도자를 후원하라는 요청을 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 그런데 디오드레베가 이를 거절한 것입니다. 그는 거절만 한 것이 아니라 “악한 말로 우리를 비방하고도 오히려 부족하여 형제들을 맞아들이지도 아니하고 맞아들이고자 하는 자를 금하여 교회에서 내쫓았다”합니다. 그래서 “내가 가면 그 행한 일을 잊지 아니하리라”합니다. 누가 가면 그 행한 일을 잊지 않겠다는 것입니까?


㉡ 서신서를 보면 사도들이 “내가 가면, 또는 갈 때에”라고 말하는 것이 자주 등장합니다. “내가 가면”한 “나”라는 분이 1차적으로는 사도 요한이지만 우리에게는 재림하시는 주님으로 적용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가 행한 대로 갚아 주리라”(계 22:12).

 

㉢ 11절입니다. “사랑하는 자여 악한 것을 본받지 말고 선한 것을 본받으라 선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고 악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을 뵈옵지 못하였느니라”고 격려합니다. 여기 요한1서에서 여러 번 언급한 “속(屬)하다”는 말이 또 등장합니다. 소속(所屬)이 없는 자는 한 사람도 없습니다. “하나님께 속한”자와 “하나님을 뵈옵지 못할”자 둘 중 하나입니다. “진리를 위하여 함께 수고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한”자인 것입니다.

여기서도 요한 3서의 특성이 나타나는데 요한2서는 교회 밖에서 침투하려는 이단을 경계하기 위해서 기록이 된 반면, 요한3서는 교회내부에 도사리고 있는 교권주의 자를 경계하고, 신실한 성도들을 격려하기 위해서 기록이 되었던 것입니다.


㉣ 12절에 보면 또 한 사람이 등장하는데 “데메드리오”입니다. “뭇 사람에게도, 진리에게서도 증거를 받은”자라합니다. 그를 언급하는 의도가 무엇인가? 그러니까 “디오드레베”는 본받지 말아야 할 사람으로, “데메드리오”는 본받아야 할 사람으로 대조해서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이들이 누군지 우리는 알 길이 없으나 분명한 것은 현대교회 내에도 “가이오, 디오드레베, 데메드리오”는 있다는 사실입니다.

 

④ 요한3서의 마지막 부분은 13-15절인데 중심점은 “내가 네게 쓸 것이 많으나 먹과 붓으로 쓰기를 원하지 아니하고 속히 보기를 바라노니 또한 우리가 대면하여 말하리라”(13-14)는 말씀입니다. 신기하게도 이 말씀은 요한2서 1:12절과 동일합니다. 그렇다고 우리는 지금 사도 요한을 만나기를 바라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면대(面對), 즉 얼굴과 얼굴을 대면하여 말씀하기를 원하십니다.

성령께서 요한3서를 통해서 교회들에게 하시고자 하는 말씀은 분명합니다. 3서에 등장하는 “가이오, 디오드레베, 데메드리오” 등을 예표적인 인물로 사용하셔서 교회를 격려하며 교훈하며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3서에 8번 등장하는 “나”라는 송신자(送信者)가 1차적으로는 사도 요한이라 해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으로 받는다면 이 작은 서신은 현대교회에 없어서는 아니 될 중요한 말씀으로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 말은 “평강이 네게 있을지어다”(15)한 “평강”입니다. 그리고 “여러 친구가 네게 문안하느니라 너는 친구들의 이름을 들어 문안하라”합니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일일이 문안하라는 뜻입니다. 이것이 여러분에게 향하신 우리 주님의 마음이기도 합니다. 으뜸 되기를 좋아하는 디오드레베가 있는가 하면 이런 신실한 성도들은 어느 시대 어느 교회에나 있는 것입니다. 저도 주님의 이름으로 문안을 합니다. “평강이 여러분의 교회와 가정과 심령에 있을지어다”. 이것이 “진리를 위하여 함께 수고하는” 요한3서입니다.

 

나 받은 달란트 얼마런가 나 힘써 그것을 남기어서

갑절로 주님께 바치오면 충성된 종이라 상주시리 (597장)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