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131편 개관도표
주제 : 젖 뗀 아이와 같은 사모하는 마음
교만 | 1 ① 여호와여 내 마음이 교만치 아니하고 내 눈이 높지 아니하오며 내가 큰 일과 미치지 못할 기이한 일을 힘쓰지 아니하나이다
|
고요와평안 | 2 ② 실로 내가 내 심령으로 고요하고 평온케 하기를 젖 뗀 아이가 그 어미 품에 있음 같게 하였나니 내 중심이 젖 뗀 아이와 같도다
|
적용 | 3 ③ 이스라엘아 지금부터 영원까지 여호와를 바랄 지어다
|
시편 131편, 젖 뗀 아이와 같은 사모하는 마음
요절 : 3, 이스라엘아 지금부터 영원까지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131편에는 다윗의 시라는 표제가 있습니다. 비록 세 절에 불과하지만 다윗의 경건 성을 엿보게 하고, 신앙생활에 있어서 보다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일깨워주는 중요한 말씀입니다. 의미를 부각시키기 위해서 세 단원으로 나누었는데, 첫째 단원은 “신앙인격”을, 둘째 단원은 “심령상태”를 말씀해주고 있는데, 셋째 단원에 이르러서는 “이스라엘아” 하고 하나님의 백성 모두에게 적용을 시키고 있습니다.
첫째 단원(1) 교만치 아니함
둘째 단원(2) 젖 뗀 아이 같은 심령
셋째 단원(3) 여호와를 바랄 지어다
첫째 단원(1) 교만치 아니함
① 첫째 단원은 신앙인격에 대한 진술입니다. 첫 마디가 “여호와여” 합니다. 그리고 131편은 “여호와를 바랄 지어다”(3) 하고 마치는 구조인데 이것이 하나님 중심입니다.
㉠ “여호와여” 한 후에 첫 고백이, “내 마음이 교만치 아니하고” 합니다. 잠언은,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잠 16:18), 사람의 마음의 교만은 멸망의 선봉이요 겸손은 존귀의 앞잡이니라”(잠 18:12) 하고 경계합니다.
“교만”을 신약성경에서는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29) 하고, “자랑”이라 말씀합니다. 그래서 자랑할 것이 없는 세상의 “미련한 것들, 약한 것들, 천한 것들, 멸시받는 것들, 없는 것들”(고전 1:27-28)을 들어 쓰신다고 말씀합니다.
“자랑”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경향이 있으나 이것이 교만이요, 하나님 앞에서는 치명적인 병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은혜”를 무가치한 것으로 여기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엡 2:8-9) 하고 말씀합니다.
㉡ 다윗은 먼저 내 마음이 교만치 아니하며” 하고, “마음”을 언급한 후에, “내 눈이 높지 아니하오며”(1중) 하고, “눈”을 말합니다. 이점을 욥기에서는, “언제, 내 마음이 내 눈을 따라갔던가”(욥 31:7) 하고 말씀합니다. “무릇 지킬 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 4:23) 말씀하는데, 마음이 눈을 따라가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진정 경건한 사람이라 하겠습니다.
㉢ 그런 후에 “내가 큰일과 미치지 못할 기이한 일을 힘쓰지 아니 하나이다”(1하) 하고, “행위”를 언급합니다. “마음 눈 행위”로 나아가는 구조인데 이점이 하와가 타락할 때에,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실과를 따먹고”(창 3:6) 하고, 이런 순서로 작동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 다윗도 교만한 마음이 고개를 처든 때가 있었습니다.
㉮ “내가 형통할 때에 말하기를 영영히 요동치 아니하리라 하였도다”(30:6), 즉 하나님의 은혜임을 망각하고 우쭐거리자, “주의 얼굴을 가리우시매 내가 근심하였나이다”(30:7) 합니다.
㉯ 자신을 과시하기 위해서 군사력을 조사하였을 때에, “하나님이 이 일을 괘씸히 여기사 이스라엘을 치시매” 합니다. 그러자 다윗은 “종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내가 심히 미련하게 행하였나이다”(대상 21:7, 8) 하고 자복합니다.
“마음이 교만치 아니함, 눈이 높지 아니함, 미치지 못할 큰일을 힘쓰지 아니함”, 여기에 자신의 무능을 깨닫고 하나님만을 신뢰하는 신앙인격이 나타납니다.
둘째 단원(2) 젖 뗀 아이 같은 심령
② “실로 내가 내 심령으로 고요하고 평온케 하기를”(2상) 합니다.
2절은, 1절에서 말씀한 “교만치 아니함, 눈이 높지 아니함”을 한 폭의 그림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서술적인 설명만으로는 충분히 전달이 되지 못했을까 하여 비유를 들어서 설명하는 것입니다.
㉠ 핵심은 “내 심령” 상태가 어떠하냐에 있습니다.
㉮ 1절 안에는 “큰 일, 기이한 일”이 있는 반면,
㉯ 2절 안에는 “고요와, 평온”이 있습니다.
131편의 메시지는 얼마나 “큰 일”을 했느냐 묻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심령이 어떠한 상태에 있는가를 돌아보게 합니다. 이 말씀을 대하는 형제의 느낌이 어떠합니까? 형제의 심령이 “고요하고 평온” 합니까? 내가 잊고 지내던 참으로 귀중한 것이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현대교회는 성공, 성장에 급급하다보니, 심령의 “고요와, 평안”에 별로 관심을 기울이고 있지 아니합니다. 도리어 “교만하고, 눈이 높고, 큰일, 미치지 못할 기이한 일”을 힘쓰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런 가치관으로는 “고요하고 평온한 심령”은 기대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이것이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최고의 선물인데도 말입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 하니라”(눅 12:15) 하십니다. “마음이 교만하고, 눈이 높아, 큰일을 이루었다” 하여도 그 심령에 “고요함과 평안”이 없다면 그것은 “무릇 지킬 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잠 4:23) 한 마음을 잃은 것과 같은 것이 됩니다. 그렇다면 무슨 유익이란 말인가?
㉡ “내가 내 심령으로 고요하고 평온케 하기를 젖 뗀 아이가 그 어미 품에 있음 같게 하였나니”(2) 합니다. 어찌하여 “어미 품에 안겨 젖을 빠는 아이”라 하지 않고 “젖을 뗀 아이”에다 비하고 있을까?
젖을 떼는 시기는 대개 돌이 지나면 시도되는데, 그러나 젖을 떼는 일이 쉬운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첫째는 막무가내로 떨어지지 않으려 하기 때문이요, 둘째는 이를 냉정하게 거절하고 나면 젖을 잃은 어린 아이의 모습이 너무나 가엾어 보이기 때문입니다.
㉮ 그러므로 다윗이 “젖 뗀 아이가 그 어미 품에 있음 같게 하였다” 한 데는 고요하고 평온함만이 아니라,
㉯ 사모하고 그리워하는 마음이 나타나 있습니다. 젖을 빠는 것이 허용되지 아니한다면 만지기만 하겠다, 그것도 용납이 안 된다면 엄마 품에 안겨 있는 것만으로 만족히 여기겠다는 젖 뗀 아이의 애절함이 나타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내 중심이 젖 뗀 아이와 같도다”(2하)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 대목은 주님께서,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 18:3) 하신 말씀을 상기하게 합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8복의 사람은 무슨 일을 행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하는가를 말씀합니다.
심령의 가난함을 깨닫고,
애통해하는 사람,
그리하여 온유하고,
의에 주리고 목말라 하는 사람이 복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131편이 추구하고 있는 것이 이와 같은 사람입니다.
단 시일 내에 교회를 부흥시킨 성공한 목회자도 많고, 기사이적을 행한다는 능력자도 많고, 기이한 체험을 했노라는 간증자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심령으로 고요하고 평온케 하기를 젖 뗀 아이가 그 어미 품에 있음 같은” 성도를 만나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런 분을 만날 수만 있다면 대화는 하지 않아도 좋으니 옆에 앉아 있는 것만으로 족하겠습니다.
현대교회의 추세는 예배당을 지어도 크게 지어야 하고, 사업을 추진해도 미치지 못할 만큼 저질러야만 믿음이 있는 사람이요, 성공한 것으로 여기고 있지 아니한가? 물론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의 일을 힘써야만 마땅합니다. 그러나 보다 우선하는 것이 있음을 잊어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 자신입니다. 하나님의 일에 열중하는 것과, 하나님 자신에 열중하는 것은 엄연히 다른 것입니다.
셋째 단원(3) 이스라엘아 여호와를 바랄 지어다
③ “이스라엘아 지금부터 영원까지 여호와를 바랄 지어다”(3) 합니다. 131편의 중심점이 여기에 있다 하겠습니다.
㉠ 첫째는 다른 시편에서와 마찬가지로 “나”라는 개인으로 출발하였으나 교회, 하나님의 나라로 확대하고 있기 때문이요,
㉡ 이는 1-2절의 말씀이 자신만이 추구해야할 가치관이 아니라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이 추구해야할 기본이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5장에는 세 가지 “즐거움”이 있습니다. ㉮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함”(1)과, ㉯ “환난 중에서도 즐거워함”(3)이 있는데, ㉰ 최고의 즐거움은 “하나님 자신을 즐거워하는”(11) 것입니다. 이것이 “젖 뗀 아이와 같은 사모하는 마음”입니다.
적용 : 형제의 심령은 “고요하고 편온”합니까? 만일 그렇지 못하다면 하던 일을 내려놓고, “젖 뗀 아이” 같은 심령이 되어서 하나님을 바라야 하지 않겠습니까?
묵상
㉠ 첫 절의 아니 하기를 힘쓴 것에 대해서,
㉡ 어미 품에 있는 젖 뗀 아이의 마음에 대해서,
㉢ 자신의 심령상태에 대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