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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주일의 설교

시온산과 에서의 산

작성자유도순|작성시간20.07.18|조회수210 목록 댓글 0

시온 산과 에서의 산

 

본문 : 1:11-15절

1:11 네가 멀리 섰던 날 곧 이방인이 그의 재물을 빼앗아 가며 외국인이 그의 성문에 들어가서 예루살렘을 얻기 위하여 제비 뽑던 날에 너도 그들 중 한 사람 같았느니라

1:12 네가 형제의 날 곧 그 재앙의 날에 방관할 것이 아니며 유다 자손이 패망하는 날에 기뻐할 것이 아니며 그 고난의 날에 네가 입을 크게 벌릴 것이 아니며

1:13 내 백성이 환난을 당하는 날에 네가 그 성문에 들어가지 않을 것이며 환난을 당하는 날에 네가 그 고난을 방관하지 않을 것이며 환난을 당하는 날에 네가 그 재물에 손을 대지 않을 것이며

1:14 네거리에 서서 그 도망하는 자를 막지 않을 것이며 고난의 날에 그 남은 자를 원수에게 넘기지 않을 것이니라

1:15 여호와께서 만국을 벌할 날이 가까웠나니 네가 행한 대로 너도 받을 것인즉 네가 행한 것이 네 머리로 돌아갈 것이라

 

주제 : 시온산과 에서의 산

 

강론

오바댜서는 전체가 21절 밖에 안 되는 구약성경 중에서 가장 짧은 선지서입니다. 오바댜서는, “주 여호와께서 에돔에 대하여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1)고 시작이 됩니다. 오바댜서는 1차적으로는 “에돔”, 즉 에서의 족속들을 심판하시겠다는 내용입니다. 이점에서 오바댜서의 내용과 기록목적이 일치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인식해야만 합니다. 다시 말하면 오바댜서의 내용은 “에돔을 심판하신다”는 내용이지만 이를 기록하게 하신 목적은 에돔을 위해서가 아니라 환난 중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로하고 격려하기 위해서 기록이 된 것입니다.

 

오바댜서는 크게 3부분으로 되어 있습니다. ㉠ 첫째 부분은, 1-9절까지인데, “이로 말미암아 에서의 산에 있는 사람은 다 죽임을 당하여 멸절되리라”(9)는, 에돔을 심판하시겠다는 선언이요, ㉡ 둘째 부분은, 10-14절까지인데 에돔이 심판을 당하게 된 이유를 말씀합니다. 10절을 보시면 “네가 네 형제 야곱에게 행한 포학으로 말미암아 부끄러움을 당하고 영원히 멸절되리라”하십니다. ㉢ 셋째 부분은, 15-21절까지인데 15절은, “여호와께서 만국을 벌할 날이 가까웠나니”합니다. 그러니까 오바댜서는 에돔에 대한 심판을 예표로 하여 “만국을 심판”하실 것으로 확대되고 있습니다. 여기에 오바댜서의 중심주제가 있고 우리에게 적용되는 바가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앞에 심판을 받아 마땅한 족속은 에돔만이 아닙니다. “애굽, 앗수르, 바벨론” 등, 하나님을 대적한 나라들이 이미 심판을 받았으며, 종내는 만국이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바댜서를 통해서 위로와 격려를 하시려는 대상도 이스라엘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고난 중에 있는 모든 시대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 곧 여러분들을 위한 격려인 것입니다. 그래서 오바댜서는 “나라가 여호와께 속하리라”(21)는 말씀으로 끝을 맺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구약성경 중 가장 짧은 선지서인 오바댜서가 함축(含蓄)하고 있는 구원계시는 높고도 깊은 광대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바다서를 바르게 접근하기 위해서는 먼저 “에서와, 야곱”족속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를 인식해야만 합니다. “에서와 야곱”은 쌍둥이로 어머니 리브가의 모태에서부터 싸웠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하나님은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창 25:22-23)하셨습니다. 어떤 기준에 의해서 나누어지게 되는가? 이를 깨달은 사람이 바울 사도입니다.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롬 9:11)에 의하여 나누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택하심은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 기쁘신 뜻대로”(엡 1:5)라고 말씀합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택하시는 것이 기쁘시기 때문에 택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았다는 것은 무엇에도 비할 수 없는 축복인 것입니다.

 

이처럼 나누이게 된 근본원인은 인류의 시조의 범죄로 말미암아 발생하게 된 비극입니다. 원 복음이라 말하는 창세기 3:15절은 3마디로 되어 있습니다. ㉠ 이제 후로는 “네 후손과 여자의 후손”, 즉 믿는 자와 믿지 않는 두 부류로 나누이게 되리라. ㉡ 두 사이는 원수, 즉 싸움이 있게 되리라. ㉢ 결국 여자의 후손이 사탄의 머리를 상하게 하고 승리하게 되리라는 말씀입니다. 그런 갈라짐과 싸움이 리브가의 복중에서 일어나고 있었고, 우리가 살펴보고 있는 오바댜서 안에서도 일어나고 있는 사건인 것입니다.

구속사의 맥락으로 바라보면, “에서와 야곱, 에서의 산과 시온 산”의 두 줄기는 결국 두 사람의 만남으로 귀결(歸結)이 됩니다. 야곱의 줄기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가 탄생하셨고, 에서의 줄기에서는 헤롯 왕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두 사이는 누가 진짜 왕이냐 하고, 왕위를 놓고 대결(마 2:2)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바댜서를 통한 불변의 진리는 무엇인가? 오바댜서는, “구원 받은 자들이 시온 산에 올라와서 에서의 산을 심판하리니 나라가 여호와께 속하리라”(21)는 말씀으로 마치고 있습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이 지구는 마치 리브가의 태와 같아서 많은 나라, 많은 민족이 있어도 영적 논리로 하면, “시온 산”에 서 있느냐? “에서의 산”에 서 있느냐 하는 두 부류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심판하리니”의 뜻은 구원과 멸망으로 갈라지게 될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오바댜서의 구속사적인 의미입니다.

 

① 오바댜서의 전체적인 의미를 깨달았으니 첫째 부분인 1-9절을 살펴보겠습니다. 3절입니다. “바위틈에 거주하며 높은 곳에 사는 자여”합니다. 창세기에 의하면 야곱이 하란에서 돌아오자 에서는 야곱을 떠나 사해 남쪽 산악지대인 “세일 산에 거주하니라”(창 36:8)합니다. 이처럼 에서의 후손들은 산악지대에 살고 있었는데 그 중심에 페트라가 있었습니다. 이를 가리켜 본문은 “바위틈에 거주하며 높은 곳에 사는 자여”라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네가 마음에 이르기를 누가 능히 나를 땅에 끌어내리겠느냐”(3)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으로 피난처를 삼은 것이 아니라 “바위틈”(페트라)을 믿고 “누가 능히 나를 땅에 끌어내리겠느냐”고, 하나님께 도전(挑戰)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네 교만이 너를 속였도다”하십니다. 자신의 “교만”에 스스로 속고 있는 자가 어찌 저들뿐이겠습니까? 그러므로 심판에 이르게 하는 치명적인 병은 “교만”이라는 점을 명심해야만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네가 독수리처럼 높이 오르며 별 사이에 깃들일지라도 내가 거기에서 너를 끌어내리리라”(4)하십니다. 이어지는 5-6절은 그들이 얼마나 철저하게 멸망당하게 될 것인가를 말씀함입니다. “혹시 도둑이 네게 이르렀다”해도 몽땅 가져가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혹시 포도를 따는 자가 네게 이르렀을지라도” 얼마쯤 남기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에서”는 철두철미하게 심판을 당하리라 하십니다.

 

② 그러면 둘째 부분인 10-14절을 통해서 에돔이 이처럼 심판을 당하게 된 이유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0절입니다. “네가 네 형제 야곱에게 행한 포학으로 말미암아” 영원히 멸절되리라하십니다. 그런 후에 그들이 야곱 자손들에게 행한 포악의 종목을 낱낱이 고발하십니다.

11절입니다. “네가 멀리 섰던 날 곧 이방인이 그의 재물을 빼앗아 가며 외국인이 그의 성문에 들어가서 예루살렘을 얻기 위하여 제비 뽑던 날에 너도 그들 중 한 사람 같았느니라”(11)하십니다. “네가 멀리 섰던 날”이란 무슨 뜻인가? 구경꾼 노릇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12절에서는 “네가 형제의 날” 곧 야곱 자손의 “재앙의 날에 방관(傍觀)할 것이 아니며”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방관”만 한 것이 아니라 “유다 자손이 패망하는 날에 기뻐할 것이 아니며 그 고난의 날에 네가 입을 크게 벌릴 것이 아니며”(12)하십니다. 무슨 뜻입니까? “기뻐했다, 입을 크게 벌렸다”는 것은 “좋아하면서 조롱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너도 그들 중 한 사람 같았느니라”(11하)하시는 것입니다.

이점에서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모세가 애굽 사람이 자기 동족을 치는 것을 목격했을 때, 두 가지 반응이 가능합니다. 첫째는 모세가 행한 것 같이 애굽 사람을 치고 동족을 돕는 일입니다. 둘째는 “멀리 서서”, 즉 못 본채 방관하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방관하는 것을 동족을 치는 것과 같은 것으로 보신다는 말씀입니다. 이럴 경우 형제라면 어떻게 했겠습니까?

 

13-14절을 보겠습니다.

㉠ “내 백성이 환난을 당하는 날에 네가 그 성문에 들어가지 않을 것이며”,

㉡ “환난을 당하는 날에 네가 그 고난을 방관하지 않을 것이며”,

㉢ “환난을 당하는 날에 네가 그 재물에 손을 대지 않을 것이며”(13),

㉣ “네거리에 서서 그 도망하는 자를 막지 않을 것이며”,

㉤ “고난의 날에 그 남은 자를 원수에게 넘기지 않을 것이니라”(14)합니다.

이 말씀으로 미루어 볼 때 에돔 족속들은 형제 이스라엘이 환난을 당할 때에 소극적으로 방관만 한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성에 들어가 재물을 약탈하고, 도망하는 자를 붙잡아 대적에게 넘기는 범죄에 가담했음을 알게 됩니다. 이점을 시편 137:7절에서는 이렇게 진술합니다.

 

여호와여 예루살렘이 멸망하던 날을 기억하시고

에돔 자손을 치소서

그들의 말이 헐어 버리라 헐어 버리라

그 기초까지 헐어 버리라 하였나이다

이것이 에돔 족속이 심판을 당하게 되는 이유입니다.

 

이점에서 심각하게 고민하면서 각성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10절은 “네 형제”라 말씀하고 12절에서는 “네가 형제의 날” 곧 형제가 재앙을 당하던 날에 방관할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 “에돔”족속이 형제인 야곱족속에게 행한 옛날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형제”에게 나는 어떻게 반응했는가 하는 우리들의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내 형제”가 누구입니까? 바로 옆에 있는 성도가 “형제요, 하나님의 백성”이 형제들인 것입니다. 그 형제가 환난을 당하던 날에, 헐벗고 굶주리던 날에 나는 어떻게 반응했던가 하는 우리들의 이야기인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누가 이 세상의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을 닫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하겠느냐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요일 3:17-18)고 말씀하십니다.

 

더욱이나 13절을 보십시오. “내 백성이 환난을 당하는 날에”라고 “내 백성”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못 본 척 방관한 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에게 그렇게 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마 25:45)고 말씀하십니다.

감히 묻겠습니다. 이 대목의 말씀을 듣는 형제의 마음에 나 자신이 형제에게 사랑으로 행하지 않았던 일, 또는 너그럽게 용납하지 못하고 심하게 대했던 후회스런 일이 생각나지 않으십니까? 왜냐하면 성령께서는 지금도 성경을 통해서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③ 마지막으로 셋째부분인 15-21절을 살펴보겠습니다. 셋째 부분은 “여호와께서 만국을 벌할 날이 가까웠나니”(15상)하고 시작이 됩니다. 첫째 부분(1-14)의 주제가, “여호와께서 에돔을 심판하실 날이 가까웠나니”라면, 마지막 부분의 주제는 “여호와께서 만국을 심판하실 날이 가까웠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이는 무엇을 말씀해주느냐 하면, 오바댜서를 통해서 말씀하시려는 궁극적인 주제가 에돔을 심판하시겠다는 단순한 뜻이 아니라 “만국”을 향하여, “너희가 행한 대로 심판을 받으리라”는 경고라는 점을 말씀해줍니다.

 

이점에서 주목해야 할 점이 있는데 11-14절 안에는 “날”이라는 말이 무려 10번이나 등장한다는 점입니다. 그런 후에 15절에서 “네가 행한 대로 너도 받을 것인즉 네가 행한 것이 네 머리로 돌아갈 것이라”하십니다. 그러면 어떤 뜻이 되는가? 이 땅에서의 삶이란 “날들”의 연속입니다. 50세가 된 분은 17250 날을 산 것입니다. 그 많은 날 동안, “너는 어떻게 살았느냐”라고 묻고 있는 셈입니다. 최후심판의 “날”은 다름이 아니라 그 “많은 날”동안에 행한 대로 받게 된다는 것이 심판의 원칙이라는 점을 명심해야만 하겠습니다.

 

그리고 명심할 점은 하나님은 에돔 족속을, “바위틈에 거주하며 높은 곳에 사는 자”(3상)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을 향해 “너의 마음의 교만이 너를 속였도다”하십니다. 우리는 지금 페트라와 같은 “바위틈, 높은 곳”에 살고 있지는 아니합니다. 그러나 오만이라는 바위틈, 교만이라는 높은 곳에 거하고 있는 에돔 족속은 교회 내에도 있기 마련입니다. “입을 크게 벌리고” 자랑하는 자들도 있습니다. “내가 거기서 너를 끌어내리리라”하시기 전에, 스스로 내려와야만 하겠습니다.

 

그런데 여기 기쁘고도 놀라운 말씀이 있습니다. 성경은 문제에 대한 해답입니다. 17절을 보겠습니다. “오직 시온 산에서 피할 자가 있으리니”하십니다. “피할 자”란 최후심판의 날에 구원 얻을 자를 가리킵니다. 그런데 아무 곳에서나 “피할 자”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시온 산에서”라고 말씀합니다. 요엘 선지자도,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 이는 나 여호와의 말대로 <시온 산>과 예루살렘에서 피할 자가 있을 것임이라”(욜 2:32)합니다.


그렇다면 마땅히 물어야 합니다. “시온 산”이 어디며, 어찌하여 거기 가야만 최후심판의 날에 살아남을 수가 있단 말인가? “산” 자체가 피난처도 아니요, 구원을 주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내가 나의 왕을 내 거룩한 산 시온에 세웠다”(시 2:6)하신 그리스도에 구원이 있는 것입니다. 이를 알았기에 다윗은, “이스라엘의 구원이 시온에서 나오기를 원하도다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을 포로된 곳에서 돌이키실 때에 야곱이 즐거워하고 이스라엘이 기뻐하리로다”(시 14:7)고 찬양했던 것입니다.

 

오바댜서는 “구원 받은 자들이 시온 산에 올라와서 에서의 산을 심판하리니 나라가 여호와께 속하리라”(21)고 마치고 있습니다. “시온 산과, 에서의 산”이 대조되어 있다는 점을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모든 사람은 시온 산과, 에서의 산 중 어느 하나에 속해 있는 것입니다. 중간은 없습니다. 그렇다고 동시에 두 진영에 속할 수도 없습니다.

계시록 14:1절에서는, “또 내가 보니 보라 어린 양이 시온 산에 섰고 그와 함께 십사만 사천이 서 있는데 그들의 이마에는 어린 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을 쓴 것이 있더라”합니다. 이것이 해답인 것입니다. 시온 산과, 에서의 산이 무엇으로 구별(區別)이 되는가? 이점을 로마서 8:9절에서는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고 말씀합니다.

 

오바댜서의 마지막 말은, “나라가 여호와께 속하리라”는 선언입니다. 오바댜 선지자는 이 한마디를 증언하기 위해서 오바댜서를 기록하였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나라」가 “세상”에 속한 줄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것이 세속주의자들입니다. “사람”에게 속한 줄로 생각합니다. 이것이 인본주의사상입니다. “물질”에 속한 줄로 생각합니다. 이것이 유물사관입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롬 11:36). 이것이 신본주의 신앙입니다.

우리도 큰 소리로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의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 노릇 하시리로다”(계 11:15)고 찬양하십시다. 이것이 “시온산과 에서의 산”입니다.

 

주의 은혜 내가 받아 시온 백성 되는 때

세상 사람 비방해도 주를 찬송하리라

세상 헛된 모든 영광 아침 안개 같으나

주의 자녀 받을 복은 영원무궁 하도다 -아멘- (210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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