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고보서 한 번에 설교하기
본문 : 2:1-13절
주제 :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너희가 받았으니
2:1 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너희가 가졌으니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말라
2:2 만일 너희 회당에 금 가락지를 끼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오고 또 남루한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이 들어올 때에
2:3 너희가 아름다운 옷을 입은 자를 눈여겨 보고 말하되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소서 하고 또 가난한 자에게 말하되 너는 거기 서 있든지 내 발등상 아래에 앉으라 하면
2:4 너희끼리 서로 차별하며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냐
2:5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들을지어다 하나님이 세상에서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상속으로 받게 하지 아니하셨느냐
2:6 너희는 도리어 가난한 자를 업신여겼도다 부자는 너희를 억압하며 법정으로 끌고 가지 아니하느냐
2:7 그들은 너희에게 대하여 일컫는 바 그 아름다운 이름을 비방하지 아니하느냐
2:8 너희가 만일 성경에 기록된 대로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하신 최고의 법을 지키면 잘하는 것이거니와
2:9 만일 너희가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면 죄를 짓는 것이니 율법이 너희를 범법자로 정죄하리라
2:10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를 범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
2:11 간음하지 말라 하신 이가 또한 살인하지 말라 하셨은즉 네가 비록 간음하지 아니하여도 살인하면 율법을 범한 자가 되느니라
2:12 너희는 자유의 율법대로 심판 받을 자처럼 말도 하고 행하기도 하라
2:13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
강론
야고보서를 열면서 최우선적인 관심은 성령께서 야고보서를 통해서 교회들에게 하시고자 하는 말씀이 무엇인가 하는 점입니다. 달리 말하면 기록목적이 무엇인가를 탐색하는 일입니다. 야고보서의 시작은,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는 흩어져 있는 열두 지파에게 문안하노라”(1:1)로 되어 있습니다.
이점에서 두 가지 질문이 제기되는데 첫째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가 누구인가 하는 점입니다. 야고보라는 이름은 당시에 흔한 이름이었습니다. 신약성경에도 여러 명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여러 정황으로 볼 때에 주의 형제 야고보라는 것이 전통적인 학설입니다. 육적인 동생 야고보는 주님의 공생애 기간에는 믿지 않았으나(요 7:3, 막 3:21), 부활하신 주님을 목격(고전 15:7)하고는, 오순절에 동참(행 1:14)하게 되었고, 첫 번 종교회의를 주관(행 15:13)하는 등 예루살렘교회의 초대감독(갈 2:12)이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둘째는 야고보서의 수신자인 “흩어져 있는 열두 지파”는 누구를 가리키는가 하는 점입니다. 문자적으로 이스라엘 12지파인가? 아니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유대인 12지파를 가리키는가? 이처럼 한정할 것이 아니라 야고보서는 당시 각처에 흩어져있는 모든 교회를 염두에 두고 보내진 서신으로 보는 것이 합당할 것입니다. 이점이 베드로전서의 수신자들을, “흩어진 나그네---택하심을 입은 자들”(벧전 1:1, 2)이라 한 것과 상통한다 하겠습니다.
그러면 어찌하여 “열두 지파”라고 불렀을까 하는 물음이 제기 될 수가 있습니다. 초대교회는 유대주의자들로부터 “나사렛 이단”이란 취급을 당하던 처지라 정통성(正統性) 확립이 중요한 과제였던 것입니다. 바울은 할례당이라 하는 자들을 염두에 두고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할례파>라”(빌 3:3), 참 할례당이라고 역설했습니다. 야고보도 우리가 “아브라함, 이삭, 야곱에게 세워주신 메시아언약을 계승한 영적 이스라엘이요 참 열두 지파라”는 정통성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으로 볼 수가 있습니다.
이런 점이 기독교의 실천윤리를 “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1:25, 2:12)이라고 표현한 데서도 엿볼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율법이 없는 사람들이 아니라 모세 율법보다 우월한 “온전한 율법”(律法)을 가지고 있다는 논리입니다.
이점에서 중요하게 대두되는 문제는 야고보서의 신학적인 입장이 무엇인가 하는 점입니다. 루터는 “집 쑤시게 같은 글”이라 혹평했는데 이유는 “율법적이고 복음 적이지 않다”는데 있습니다. 그렇다면 야고보가 어찌하여 이처럼 율법적인 색채가 농후한 말씀을 기록하게 되었는가 하는 점입니다.
이점을 육적 이스라엘 12지파가 출애굽을 하던 예표에서 빛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구속하여 내신 후에 시내산에 이르러 십계명을 주셨습니다. 이는 십계명을 행함으로 구원을 얻으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십계명의 서문은,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여호와로라”(출 20:2)하십니다. 그들은 이미 유월절 어린양의 피로 “너희를 속량하여 너희로 내 백성을 삼고”(출 6:6-7)하신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조상 대대로 노예 신분이었던 그들이 하루아침에 하나님의 백성으로 신분(身分)이 바뀐 것입니다.
문제는 신분은 바뀌었으나 그들의 몸에 배어 있는 애굽의 풍습과 노예근성은 바뀌지 않았다는데 있습니다. 그리하여 법 없는 자가 되지 않고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가게 하기 위해서 암송하기 쉬운 십계명(十誡命)과 시행세칙인 율법을 주셨던 것입니다.
이처럼 하루아침에 신분이 하나님의 자녀로 바뀐 것은 믿는 유대인은 물론 이방인이었다가 그리스도인이 된 신약의 성도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우리의 신분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바뀌었다는 점을 야고보서에서는 “그(하나님)가 그 피조물 중에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의 뜻을 따라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다>”(1:18)고 말씀합니다.
그렇다면 야고보서의 수신자들은 “하나님의 자녀”들임이 분명합니다. 또한 “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너희가 가졌으니”(2:1)한 그리스도인들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야고보서의 수신자인 “흩어져 있는 열두 지파”란 “그리스도인”들인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의 자녀”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1:1)이라는 신분(身分)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고 있지를 못하다는데 있습니다.
왜냐하면 태어났어도 아직은 어린아이와 같아서 구습(舊習)을 벗어버리지를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십계명도 이제 막 애굽 바로의 노예에서 벗어난 어린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주어진 계명입니다. 그래서 10계명 중에는 “---하지 말라”는 금지 명령이 13번이나 강조되어 있습니다.
야고보서도 전체 108절 안에 “---하지 말라”는 금지명령이 54개나 된다고 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야고보서가 차지하는 위치는 분명해집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구약교회에 율법을 주셨듯이, 모교회인 예루살렘교회 초대 감독인 야고보를 들어서 신약교회에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가도록 “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주신 셈입니다. 이것이 야고보서가 차지하는 신학적인 위치인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야고보서는 “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너희가 가졌으니”한 2:1절 말씀에 의하여 해석이 되어야 마땅합니다. 왜냐하면 야고보서가 행함을 강조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아무에게나 행함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받은 사람들에게 강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호칭(呼稱)을 주목해보시기 바랍니다. “영광의 주”라 부릅니다.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라고 최대의 영광스러운 이름으로 높이고 있습니다. 그 분을 “나의 주”로 고백한 사람들에게 야고보서는 주어진 것입니다.
야고보서의 내용으로 볼 때에 갓 태어난 당시의 “어린 양”들은 많은 문제를 안고 있었음을 알게 됩니다. 그들을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1:4), 즉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기 위해서 야고보서는 주어진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야고보서가 행함을 강조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더욱 분명한 것은 행함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야고보는,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2:22)고 “온전한 믿음, 온전한 율법”을 강조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야고보 신학과 바울 신학이 충돌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로마서를 기록한 목적과 야고보서를 기록한 목적이 다르고 이에 따른 강조점의 차이일 뿐입니다. 이에 도움을 주는 말씀이 유다서에 있습니다. 유다는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일반으로 받은 구원(救援)에 관하여 내가 너희에게 편지하려는 생각이 간절하던 차에”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유다는 본래 “구원에 관한”, 즉 “복음”(福音)을 증언하려는 마음이 간절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는 편지로 너희를 권하여야 할 필요를 느꼈노니”합니다. 왜냐하면, “이는 가만히 들어온 사람 몇이 있음이라”(유 1:3-4), 즉 이단이 침투했다는 소식을 접하고는 전투적인 내용으로 바꾸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바리새인이었던 바울을 들어서 복음의 진수인 로마서를 기록하게 하신 주 성령께서는 예루살렘교회 감독인 야고보를 들어서 실천윤리들을 말씀하게 하심으로 조화와 균형을 이루게 하셨다는 것은 너무나 합당한 일이라 하겠습니다.
여기 중요한 요점이 있는데 야고보가 어디에 근거해서 “--행하라, --하지 말라”고 경계하고 있는가를 주목하는 일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렇게 행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이며 야고보서를 행할 수 있는 능력은 누구로부터 주어지는가 하는 점입니다. 이점이 중요한 것은 거듭나지 못한 사람은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롬 8:7)고 실천할 힘도 없다고 말씀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야고보서는 덮어놓고 명령만 하는 것이 아니라 실천해야 하는 근거도 역설하고 있다는 점을 주목해야만합니다.
㉠ 하나님의 “뜻을 따라 진리(眞理)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1:18), 즉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났기 때문에 불신자와 달라야 한다는 점입니다. 그러므로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1:17), 즉 하나님 아버지께서 행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너희가 가졌으니”(2:1), 즉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을 믿기 때문에 달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 “우리 속에 거하게 하신 성령이 시기하기까지 사모한다 하신 말씀을 헛된 줄로 생각하느냐”(4:5), 즉 성령이 내주하시기 때문에 실천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주목해 보셨습니까? 야고보는 “성부(1:17), 성자(2:1), 성령”(4:5) 삼위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근거해서 실천윤리를 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세상에서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상속으로 받게 하지 아니하셨느냐”(2:5)고 “택하심, 약속, 상속”자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야고보도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를 범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2:10)하고, 율법을 행함으로는 의롭다함을 얻을 자가 없다는 점을 인정합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이루어졌다”고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다는 점을 진술합니다.
문제는 의롭다함을 얻는 “믿음”이 어떤 믿음인가 하는 점입니다.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2:23, 21), 즉 자신의 믿음의 진실성을 “행함”으로 입증을 했다는 여기에 야고보서의 강조점이 있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다는 점을 강조한 사도 바울도 로마서를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하게 하나니”(롬 1:5)라고 시작하여, 끝마치면서도 “모든 민족이 믿어 순종하게 하시려고”(롬 16:26)라고 “믿음과, 순종”을 하나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결코 믿음과 행함을 둘로 여기고 있지 아니합니다. 출애굽의 1세대들이 어찌하여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하였는가? “곧 순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에게가 아니냐 이로 보건대 그들이 믿지 아니하므로 능히 들어가지 못한 것이라”(히 3:18-19)고, “순종치 아니함과 믿지 아니함”을 하나로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믿음”을 강조하는 로마서와 “행함”을 강조하는 야고보서는 한 성령에 의하여 주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로마서와 함께 야고보서를 주신 하나님을 찬양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믿음과, 행함”은 양자택일이 아니라 믿음에 행함이 뒤따름으로 구비(具備)하여 온전케 되는 것입니다.
야고보는 짧은 서신에서 “형제들아”하고 사랑스럽게 부르기를 15번이나 하면서 하나님의 자녀답게 믿음을 실천할 것을 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야고보서는 설교자에게 강해하라고 주신 것도 아니요, 내용은 해설을 해야만 알 수 있는 교리가 아닙니다. 야고보서의 명령을 목회자는 솔선수범을 하고, 성도들은 듣고 행하라고 주신 실천윤리임을 명심하십시다.
그러면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2:1)을 가진 자들은 어떤 삶을 살아야만 마땅한가? 우리가 명심해야 할 점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하지 말라”는 점입니다. 구호처럼 함께 읽도록 하겠습니다.
㉠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1:6),
㉡ “너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1:22),
㉢ “자기 혀를 재갈 물리지 아니하면 그 경건은 헛것이라”(1:26),
㉣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말라”(2:1),
㉤ “한 입에서 찬송과 저주가 나오는도다 내 형제들아 이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3:10),
㉥ “서로 비방하지 말라”(4:11),
㉦ “서로 원망하지 말라”(5:9)합니다.
다음은 적극적으로 “---하라”는 점인데 함께 읽겠습니다.
㉠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1:2),
㉡ “낮은 형제는 높음을 자랑하고, 부한 자는 자기의 낮아짐을 자랑하라”(1:9-10),
㉢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1:19),
㉣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2:8), 이것이 최고의 법이다.
㉤ “너희는 자유의 율법대로 심판 받을 자처럼 말도 하고 행하기도 하라”(2:12),
㉥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2:22),
㉦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4:7),
㉧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4:8),
㉨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4:10),
㉩ “주께서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5:7),
㉪ “너희 중에 고난당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찬송할지니라”(5:13)합니다.
마지막으로 야고보는 “보라 심판주가 문 밖에 서 계시니라”(5:9)고 “심판”이 있다는 점을 경고합니다. 그러면 “심판”과 결부하여 목회자가 명심해야 할 말씀이 무엇이겠습니까? “선생 된 우리가 더 큰 심판(審判)을 받을 줄 알라”(3:1)는 경계일 것입니다. 어찌하여 목회자가 “더 큰 심판”을 받게 되는가?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라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3:2)고 “말의 실수”를 꼽고 있습니다. “말의 실수”중 성도들의 사활이 걸려 있는 실수는 “너희가 나를 가리켜 말한 것이 내 종 욥의 말 같이 옳지 못함이라”(욥 42:7)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곡해하는 일입니다.
그러면 “심판”과 결부하여 성도들이 명심할 말씀이 무엇이겠습니까? “너희는 자유의 율법대로 심판 받을 자처럼 말도 하고 행하기도 하라”(2:12)는 점일 것입니다 또한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2:13)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받은 자들”(2:1)이 행해야 할 “자유하게 하는 율법”입니다.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된다”는 경계가 어찌 초대교회에 국한된 문제이겠습니까? 그러므로 야고보서는 로마서와 함께 "복음과 사랑"을 잃어버린 현대교회에 더욱 절실하다 하겠습니다. 그리고 누구보다도 목회자들이 솔선수범을 해야 할 말씀들입니다. 그리하여 “온전하고 구비하여 부족함이 없는 교회”(1:4)가 되어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