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언 한 번에 설교하기
잠 1:1-7절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다
설교 본문
1 다윗의 아들 이스라엘 왕 솔로몬의 잠언이라
2 이는 지혜와 훈계를 알게 하며 명철의 말씀을 깨닫게 하며
3 지혜롭게, 공의롭게, 정의롭게, 정직하게 행할 일에 대하여 훈계를 받게 하며
4 어리석은 자를 슬기롭게 하며 젊은 자에게 지식과 근신함을 주기 위한 것이니
5 지혜 있는 자는 듣고 학식이 더할 것이요 명철한 자는 지략을 얻을 것이라
6 잠언과 비유와 지혜 있는 자의 말과 그 오묘한 말을 깨달으리라
7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거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
하느니라
강론
여러분은 “잠언서”하면 어떤 선입관을 갖고 있습니까? 사람들은 잠언서를 격언, 명언집, 처세술과 같은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잠언서도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리고 성경의 기록목적은 그리스도를 증언하는데 있습니다. 그러면 8:17절을 보겠습니다.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8:17)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잠언서에서도 그리스도를 간절히 찾고 그리스도를 만나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너는 사망으로 끌려가는 자를 건져주며 살육을 당하게 된 자를 구원하라”(24:11)는 복음전도에 대한 도전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잠언서의 구조는 첫 장에서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라”(1:7)고 “여호와 경외”로 시작하여 마지막 장에서, “고운 것도 거짓되고 아름다운 것도 헛되나 오직 여호와를 경외하는 여자는 칭찬을 받을 것이라”(31:30)고 “여호와 경외”로 마치는 것이 잠언서의 구조(構造)입니다. 잠언서에는 “여호와 경외”가 19번이나 등장합니다. 우리는 “여호와 경외”를 예사(例事)일로 생각합니다만 그러면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아무나 여호와 경외가 가능한 것입니까? 다시 묻습니다. 그리스도의 중보 없이도 “여호와 경외”가 가능하냐고 묻고 있습니다. 이를 생각하지 않는 것은 성경을 구속사라는 선으로 보지 않고 교훈이라는 점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그리스도와 복음을 잃어버리게 된 것이 현대교회의 실정인 것입니다.
불가능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허물과 죄로 죽은 자요, 본질상 진노의 자녀”(엡 2:1, 3)인 자들이 어떻게 자력으로 여호와를 경외할 수가 있단 말입니까? 이사야 59:2절에서는,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갈라놓았고 너희 죄가 그의 얼굴을 가리어서 너희에게서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라”(사 59:2)고 말씀하는데 여호와 경외가 어떻게 가능합니까?
그러므로 “여호와 경외”가 19번이나 강조되어 있는 잠언에서 우선적으로 규명해야 할 점은 “여호와 경외”가 어떻게 해서 가능해지는가 하는 점입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딤전 2:5)로 대답합니다. 그리고 주님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고 대답하십니다. 그러므로 구약의 성도들은 아브라함에게 세워주신 메시아언약 안에서만 “여호와 경외”가 가능하고, 신약의 성도들은 언약의 성취자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이 가능해진다는 점에 확고해야만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잠언서의 중심단어는 87번이나 등장하는 “여호와”입니다. 다음에 상고하게 될 “전도서”의 호칭은 “하나님”입니다. “여호와”라는 호칭은 “하나님”이라는 칭호와는 구별이 된다는 점을 알고 계십니까? 어떻게 구별이 되는가? 출애굽 당시 “나는 여호와라”하시면서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전능의 하나님으로 나타났으나 나의 이름을 여호와로는 그들에게 알리지 아니하였다”(출 6:2-3)고 구별되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여호와”라는 이름은 출애굽, 즉 구속(救贖)과 결부하여 계시하신 칭호입니다. 그러므로 불신자들은 “하나님”이라고 부를 수는 있어도 “여호와”라 부를 수 있는 자는 “구속하여 내 백성을 삼고”하신 하나님의 백성들뿐입니다. 그러므로 잠언서에서도 “대저 그들의 구속자는 강하시니”(23:11)한 “구속자”와, “인자(仁慈)와 진리(眞理)로 인하여 죄악이 속하게 된다”(16:6)는 속죄교리를 대하게 된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잠언서는 65회나 등장하는 “지혜”를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해석이 갈리게 됩니다. 그러므로 “지혜”가 잠언을 바르게 해석하는 열쇠라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잠언서에서 말씀하는 “지혜”가 누구에 대한 상징인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 “여호와께서 그 조화의 시작 곧 태초에 일하시기 전에 나(지혜)를 가지셨으며 만세 전부터, 태초부터, 땅이 생기기 전부터 내(지혜)가 세움을 받았나니”(8:22-23)라고 태초부터 계신 “지혜”라 말씀합니다.
㉡ “내(지혜)가 그 곁에 있어서 창조자가 되어 날마다 그의 기뻐하신 바가 되었으며 항상 그 앞에서 즐거워하였다”(8:30)고 창조주(創造主)되시는 지혜라고 말씀합니다.
㉢ 또한 “내(지혜)가 나의 영을 너희에게 부어주며 내 말을 너희에게 보이리라”(1:23)고 말씀하는 지혜입니다. 그러면 만세전부터 상고(上古)부터 계셨으며, 창조자시오, “나의 영을 너희에게 부어주신다”는 “지혜”가 누구를 가리키는가는 분명해지는 것입니다.
태초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셨던 “말씀”이 육신을 입고 오심과 같이(요 1:1), 태초부터 하나님과 함께 하셨던 “지혜”가 육신을 입고 오신 예수 그리스도이신 것입니다. 이점을 선지서에서는,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그의 위에 여호와의 영 곧 지혜(智慧)와 총명의 영(靈)이요 모략과 재능의 영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이 강림하시리니”(사 11:1-2)라고 예언하고 있는데 그대로 성취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약성경에서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고전 1:24)고 증언합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智慧)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다”(고전 1:30)고 말씀합니다.
잠언서를 분류한다는 것은 무리일 수가 있습니다만 자세히 관찰해보면 바울 서신처럼 크게 두 부분으로 되어 있다는 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1-9장은 원리적인 말씀이고, 10-31장은 원리를 삶에 적용을 시키는 상론(詳論)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1-9장에 나타난 원론(原論)에 확고해야만 10-31장에서 말씀하는 상론(詳論)에 충실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① 먼저 원리적(原理的)인 1-9장의 구도를 파악해보도록 하겠습니다. 1장-9장 안에는 “지혜”가 31번, “음녀 또는 이방 계집”이 12번 등장을 합니다. 그리고 “내 아들아”하는 “아들”이 19번이나 나옵니다. 그러면 어떤 구도(構圖)가 되는가? “사랑하는 아들”을 중심으로 “지혜와, 음녀”가 각기 자기 소유(所有)를 삼고자 대결(對決)을 하는 구도라는 점을 깨닫게 됩니다.
욥기도 이와 같은 구도(構圖)로 되어 있는데 욥을 중심으로 하나님과 사탄이 대결하는 구도입니다. 그리고 이런 구도는 에덴에서 아담 하와를 중심으로 하나님은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라”(창 2:17)하시고, 사탄은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창 3:4)는 구도요, 다니엘서에서도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가 불가마 앞에서 굴복하고 우상에게 절을 할 것이냐? 하나님께 대한 믿음의 정절을 지킬 것이냐 하는 양자택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도 “나” 자신을 중심으로 하나님의 이름에 영광을 돌릴 것이냐? 모독을 받으시게 할 것인가 하는 이 구도가 계속되고 있다는 점을 유념해야만 합니다.
그러므로 잠언의 무대는 온실이 아니라 유혹과 폭력이 난무하는 목회현장(現場)인 “길거리, 광장, 네거리, 성읍”(1:20, 8:2, 9:14)인 것입니다.
㉠ 먼저 “지혜”의 초청을 들어 보십시오. “지혜(知慧)가 길거리에서 부르며 광장에서 소리를 높이며 시끄러운 길목에서 소리를 지르며 성문 어귀와 성중에서 그 소리를 발하여 이르되 너희 어리석은 자들은 어리석음을 좋아하며 거만한 자들은 거만을 기뻐하며 미련한 자들은 지식을 미워하니 어느 때까지 하겠느냐”하면서, “나의 책망을 듣고 돌이키라 보라 내가 나의 영을 너희에게 부어 주며 내 말을 너희에게 보이리라”(1:20-23)고 초청(招請)을 합니다.
8장에서도, “지혜(知慧)가 부르지 아니하느냐 명철이 소리를 높이지 아니하느냐 그가 길가의 높은 곳과 네거리에 서며 성문 곁과 문어귀와 여러 출입하는 문에서 불러 이르되 사람들아 내가 너희를 부르며 내가 인자들에게 소리를 높이노라 어리석은 자들아 너희는 명철할지니라 미련한 자들아 너희는 마음이 밝을지니라 너희는 들을지어다 내가 가장 선한 것을 말하리라”(8:1-6)고 초청을 합니다.
9장에 나타난 초청은 더욱 분명합니다. “지혜(知慧)가 그의 집을 짓고 일곱 기둥을 다듬고 짐승을 잡으며 포도주를 혼합하여 상을 갖추고 자기의 여종을 보내어 성중 높은 곳에서 불러 이르기를”합니다. 그리고 초청하기를 “어리석은 자는 이리로 돌이키라 또 지혜 없는 자에게 이르기를 너는 와서 내 식물을 먹으며 내 혼합한 포도주를 마시고 어리석음을 버리고 생명을 얻으라 명철의 길을 행하라”(9:1-6)고 초청을 합니다. 이는 주님의 천국잔치 비유와 꼭 같지 않습니까?
㉡ 그런가하면 음녀(淫女)도, “미련한 여인이 떠들며 어리석어서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자기 집 문에 앉으며 성읍 높은 곳에 있는 자리에 앉아서 자기 길을 바로 가는 행인들을 불러 이르되 어리석은 자는 이리로 돌이키라 또 지혜 없는 자에게 이르기를 도둑질한 물이 달고 몰래 먹는 떡이 맛이 있다”(9:13-17)고 유혹하고 있습니다.
잠언은 7장에서 음녀의 유혹에 걸려든 어리석은 소년 하나를 보여주기까지 합니다. “내가 내 집 들창으로, 살창으로 내다보다가 어리석은 자 중에, 젊은이 가운데에 한 지혜 없는 자를 보았노라”합니다. “그가 거리를 지나 음녀의 골목 모퉁이로 가까이 하여 그의 집 쪽으로 가는데 저물 때, 황혼 때, 깊은 밤 흑암 중에라”고, 점점 어둠 속으로 빠져 들어갑니다.
그때에 기생의 옷을 입은 간교한 여인이 그를 맞아, “여러 가지 고운 말로 유혹하며 입술의 호리는 말로 꾀므로 젊은이가 곧 그를 따랐으니 소가 도수장으로 가는 것 같고 미련한 자가 벌을 받으려고 쇠사슬에 매이러 가는 것과 같도다 필경은 화살이 그 간을 뚫게 되리라 새가 빨리 그물로 들어가되 그의 생명을 잃어버릴 줄을 알지 못함과 같으니라”합니다. 그리고 “대저 그가 많은 사람을 상하여 엎드러지게 하였나니 그에게 죽은 자가 허다하니라 그의 집은 스올의 길이라 사망의 방으로 내려가느니라”(7:6-27)합니다. 얼마나 끔찍한 장면입니까?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음녀”의 유혹에 빠지지 않게 되는가? “지혜를 얻으며 명철을 얻으라 내 입의 말을 잊지 말며 어기지 말라 지혜를 버리지 말라 그가 너를 보호하리라 그를 사랑하라 그가 너를 지키리라 지혜가 제일이니 지혜를 얻으라 네가 얻은 모든 것을 가지고 명철을 얻을지니라”(4:5-7)고, “지혜”를 반복적으로 강조하고 있습니다.
시편에서는 “말씀”을, “금 곧 많은 순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도다 또 주의 종이 이것으로 경고를 받고 이것을 지킴으로 상이 크니이다”(시 19:10-11)고 진술하고 있는데 잠언에서는 “지혜”를, “은을 구하는 것 같이 그것을 구하며 감추어진 보배를 찾는 것 같이 그것을 찾으면 여호와 경외하기를 깨달으며 하나님을 알게 되리니”(2:4)합니다. 이로 보건대 “지혜=말씀”과 같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② 다음으로 상론(詳論)부분인데 이는 해설해야만 알 수 있는 그런 내용들이 아닙니다. 또한 몰라서 실천을 못하는 것들도 아닙니다. “이는 우리가 유치원 때 다 배웠다”는 그런 내용들입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실천하지를 못하는 것인가? 원인은 왜 이런 삶을 살아야하는가 하는 당위성(當爲性), 즉 원리에 확고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기독교 윤리는 세상 윤리와 달라서,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고후 5:14)한, 사랑의 줄에 이끌려 사는 삶, 곧 복음이 이끄는 삶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잠언서에도 시편처럼 “의인(義人)과, 악인”(惡人)의 대조가 참으로 많이 등장합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말씀하는데 이 많은 의인들은 어디서 나온 자들입니까?
이점에서 성경이 말씀하는 “의인과 악인”이란 하나님과의 “관계성”(關係性)에서 일컫는 뜻이라는 점을 인식해야만 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셨다는 것은 하나님과 바른 관계, 교제의 대상으로 지으셨다는 의미입니다. 그랬던 관계가 죄로 말미암아 단절(斷絶)이 되고 불화한 관계가 되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의인”이라 함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된 사람을 가리키고, 악인이란 회복되지 못한 단절된 상태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단순히 단절만 된 것이 아니라 “이 세상 신”인 사탄이 왕 노릇하는 악의 진영에 속하여 하나님을 대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잠언서의 대부분의 말씀들은, “의인과 악인, 생명 길과 사망의 길” 등 두 부류, 두 진영의 대조로 되어 있습니다. 시편 1:6절에서는 “무릇 의인들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들의 길은 망하리로다”고 말씀하는데 잠언에도 “길”이 무려 68번 이상 등장합니다. “내 아들아 그들과 함께 길에 다니지 말라 네 발을 금하여 그 길을 밟지 말라”(1:15)고 경계합니다. 반면 “이 무리는 정직한
길을 떠나 어두운 길로 행한다”(2:13)고 탄식합니다. 그러니까 모든 사람은 예외 없이 “두 진영” 중 어느 하나에 속해 있고, “두 길”중 어느 한 길을 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잠언서에는 사망으로 끌려가는 자들을 생명의 길로 옮기려는 “목회서신”적인 말씀이 많이 등장합니다.
㉠ “의인의 입은 생명의 샘이라도 악인의 입은 독을 머금었느니라”(10:11)합니다. 영적 싸움은 입을 가지고 싸우는 진리와 비진리를 증언하는 싸움이기 때문입니다.
㉡ “네 양 떼의 형편을 부지런히 살피며 네 소 떼에게 마음을 두라”(27:23)하십니다.
㉢ “충성된 사자는 그를 보낸 이에게 마치 추수하는 날에 얼음냉수 같아서 능히 그 주인의 마음을 시원하게 하느니라”(25:13)합니다. 목회자란 보냄을 받은 사신들입니다. 충성된 사신들이 되어서 “좋은 기별”을 전해드림으로 주님의 마음을 시원케 해드려야 할 것입니다.
㉣ “너는 사망으로 끌려가는 자를 건져 주며 살륙을 당하게 된 자를 구원하지 아니하려고 하지 말라 네가 말하기를 나는 그것을 알지 못하였노라 할지라도 마음을 저울질 하시는 이가 어찌 통찰하지 못하시겠으며 네 영혼을 지키시는 이가 어찌 알지 못하시겠느냐 그가 각 사람의 행위대로 보응하시리라”(24:11-12)합니다. 이는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로다”(고전 9:16)한 말씀을 연상하게 합니다.
㉤ 반면 “미련한 자 편에 기별하는 것은 자기의 발을 베어 버림과 해를 받음과 같으니라”(26:6)합니다. 왜냐하면 전도자란 주님을 태운 당나귀와 같아서 주님의 “발”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 “내가 게으른 자의 밭과 지혜 없는 자의 포도원을 지나며 본즉 가시덤불이 그 전부에 퍼졌으며 그 지면이 거친 풀로 덮였고 돌담이 무너져 있기로 내가 보고 생각이 깊었고 내가 보고 훈계를 받았노라”(24:30-32)합니다. 우리의 포도원이 이와 같지 않기를 바랍니다. 주님은 달란트 비유에서 이와 같은 종을 “게으르고 악한 종아”하십니다.
그러므로 잠언서는 의외라 싶게, “누가 현숙한 여인을 찾아 얻겠느냐 그의 값은 진주보다 더 하니라”(31:10-31)고 “현숙한 신부”로 끝을 맺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창 2:18)하고 첫 사람 아담에게 배필을 지어주심과 같이 마지막 아담(고전 15:45)이신 그리스도에게 형제를 돕는 배필로 지어주셨다는 점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현숙한 배필인가? 31:15절을 보겠습니다. “밤이 새기 전에 일어나서 자기 집안 사람들에게 음식을 나누어 주며 여종들에게 일을 정하여 맡기며”, 즉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주는 자입니다.
21절에서는 “자기 집 사람들은 다 홍색 옷을 입었으므로 눈이 와도 그는 자기 집 사람들을 위하여 염려하지 아니하며”합니다. 눈이 오는 역사적인 겨울이 옵니다. 그러나 다 “홍색 옷”을 입었기 때문에 염려할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홍색 옷은 왕자들이 입는 옷으로 우리에게는 의의 옷으로 적용이 됩니다. 이처럼 예비하는 자가 현숙한 신부인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열심을 내노니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고후 11:2)합니다. 이상 살펴본 대로 모든 성도들이 “지혜, 훈계, 명철의 말씀”(1:2)을 깨달아야 합니다만 우선적으로 목회자들이 지혜를 얻고 현숙한 배필이 되어야 할 말씀입니다. 이것이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라”한 잠언입니다.
9일은 대통령 선거일입니다. 민주주의의 성패는 국민들의 의식수준, 즉 분별력에 달려 있습니다. 그래서 불완전한 민주주의보다 해독이 큰 정치체제는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부디 지혜와 명철로 그리스도인 다운 분별력을 행사하시기를 바랍니다.
구속의 은혜를 저버리고 어긋난 딴 길로 가다가도
예수의 사랑만 생각하면 곧 다시 예수께 돌아오리
주께서 나를 사랑하니 즐겁고도 즐겁도다
주께서 나를 사랑하니 나는 참 기쁘다 (202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