꽝탄 언덕의 비명을 찿아서...청룡/짜빈동전투 을 왜곡하는 글임!/전투수당연합(국민행복당+관청피해자모임/무료법률상담소 동해20호
작성자박동석작성시간19.03.02조회수2,010 목록 댓글 13꽝탄 언덕의 비명을 찿아서..... 짜빈동전투 을 왜곡하는 글임!
홍보부장은 이런 글 알고나 있나..? 이런 얼토당토않는 글을 읽고서, 대처하진 않고 우리가 만행을 제 정신 있는사람인지...?,
고경태의 1968년 못다 한 이야기
꽝탄 언덕의 비명을 찾아서...② 짜빈동 신화의 이면
옛 짜빈동 기지에서 만난 베트남의 비석들이 말하는 또 다른 진실
비석 세 개가 있다.
그 비석들은 베트남 꽝응아이성 선띤현 띤토사 2㎞ 반경에 모여 있다.
제2화는 그 비석의 메시지를 따라가보았다.
고대사의 자취가 서렸다는 중국 만주나, 임시정부가 세워졌던 상하이에서만 외국 유적이 발굴되는 것은 아니다.
나는 베트남 중부 지역 곳곳에 세워진 수십 개의 비석이야말로 대한민국 현대사를 거울처럼 비쳐주는 외국 유적이자, 우리가 자부만 했던 과거를 뒤집어 보여주는 훌륭한 역사 선생님이라고 생각한다.
그 유적의 사실관계를 추적하고 검증하다보면 이야기는 더 풍부해진다.
짜빈동의 세 비석을 처음 발굴해 소개한다....
무적 해병의 신화는 이렇게 쓰여 있다.
“(3소대) 이수현 소위는 원위치에서 지휘가 곤란하자 일단 예비진지로 물러나고 제1분대의 조정남 일병은 분투 중 적의 수류탄에 전신 파편상을 입고 위급한 상황에 처하였는데 이때 3명의 적이 교통호를 따라 접근하자 그는 죽음을 결심하고 그 자리에서 수류탄을 터뜨려 자신의 소총을 적이 사용하지 못하게 파괴하고 그들과 함께 폭사하였다. 한편 중상으로 행동이 곤란한 처지에 놓인 동 분대 이학현 상병은 교통호 양쪽에서 가까이 다가오는 적들을 보자 ‘적에게 죽느니보다는 차라리 내가 먼저 적을 죽이고 나도 죽겠다’라고 외치면서 수류탄을 터뜨려 그들을 죽인 다음 자신도 그 자리에서 산화하였다.”
“(1소대) 신원배 소위는 향도 임향근 하사에게 말하기를 ‘나는 이미 죽음을 각오하였다. 따라서 내 몸이 가루가 되더라도 한 조각의 심장이 뛰고 있는 한 어떻게든지 기어가서 기필코 적진지를 파괴할 테니 선임하사가 돌아오면 다행이지만 만일에 나와 같이 죽는다면 향도하사가 소대를 지휘토록 하라’고 비장한 결의를 보인 다음 대원들에게 ‘나는 지금 전방의 적진지를 파괴하기 위하여 떠날 테니 모든 병사들은 최후의 순간까지 싸워서 반드시 이겨야 한다’라고 강조하고 특공조를 엄호사격할 것을 지시하고는 4명의 선두에서 비호처럼 돌진하였다.”
<파월한국군전사> 제2권의 해당 전투 묘사는, 흡사 전쟁영화의 한 장면 같다. 기록에 따르면 장교와 병사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싸웠다. 1개 중대 규모가 조금 넘는 병력은 혼연일체가 되어 그 열 배 넘는 적 1개 연대의 기습을 물리쳐내고 완승을 거두었다. 12척 배로 133척을 거느린 왜 수군을 격퇴한 정유재란 때의 명량해전을 연상시킨다. 1967년 2월15일, 짜빈동에서의 일이다.
<파월한국군전사>는 “종래의 5대 작전에 본 전투가 새로이 추가됨으로써, 6대 작전의 하나로서 해병전투사에 길이 빛나게 되었다”고 말한다.
5대 작전이란 한국전쟁기의 통영지구작전, 인천상륙작전 등을 일컫는다.
추가된 짜빈동은 그중 가장 소규모 부대로, 가장 짧은 시간에, 가장 드라마틱한 승리를 연출한 작전이었다.
해병대는 짜빈동 전투를 베트남전의 전설로 선전해왔다.
2018년 12월30일, 그 짜빈동을 갔다. 눈으로 직접 보고 싶었다.
전투가 벌어진 지 52년이 흘렀다. 짜빈동은 도전을 받은 적이 없는 신화다.
국회도서관에서 키워드를 넣고 검색해봤더니 찬양 논문 일색이었다.
전쟁이나 파병에 대한 근본적 사유와 함께, 다른 질문을 던지는 문헌은 찾아볼 수 없었다.
짜빈동엔 대승리의 신화와 교훈밖에 없을까?
승.전.비
베트남에 짜빈동(Trà Bình Đóng)이라는 공식 지명은 없다. 꽝응아이성(도) 선띤현(군)에 속해 있다는 기본 정보만으로 탐색을 시작했다. <파월한국군전사> 전투부도와 현재 지도를 연결해 파악해준 주변 전문가의 도움으로 그곳이 띤토사(읍)에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현지 인민위원회 관계자의 안내도 받기로 했다. 주민들은 짜빈동이 오래전에 존재한 띤토사의 마을 지명일 것이라 추정했다. 한국군이 왜 짜빈동이라 했는지는 알 길이 없었다.
짜빈동은 1967년 해병제2여단(청룡부대) 3대대 11중대가 책임지던 전술기지다. 꽝응아이에서 북서쪽으로 12㎞, 여단 본부가 있던 쭈라이에서 남쪽으로 23㎞ 떨어진 지역이다. 청룡부대가 1968년 호이안으로 기지를 옮기기 이전 시절이다. 짜빈동은 표고 30m의 작은 동산으로, 둘레 800m, 남북 직경 300m, 동서 직경 200m의 달걀처럼 생긴 지형이었다. 11중대 말고도, 제1중대 1개 소대와 4.2인치 박격포 1개 소대, 80mm 박격포 1개반 등이 배속돼 총 294명이 기지를 지켰다.
오후 1시께 약속 장소에 나온 띤토사 인민위원회 관계자가 오토바이를 타고 앞장섰다. 인민위원회 앞에서 출발한 승용차는 곧 숲이 우거진 야산 지대로 들어섰고 10분도 안 돼 목적지에 도착했다. 양쪽에 키 큰 나무들이 도열한 15도 경사 시멘트길을 오르니 맨 끝에 비석 하나가 있었다. 2008년 이후 띤토사 인민위원회가 옛 짜빈동 기지 남쪽에 세웠다는 전투 기념물이었다. 뭐라고 써 있을지 궁금했다.
비석에 나온 주소는 선띤현 띤토사 트엉토촌 돈 마을. 이름은 ‘꽝탄 언덕 승전비’였다. 꽝탄 언덕(Đồi Tranh Quang Thạnh), 그리고 승전비(Di Tích Chiến Thắng). 둘 다 생소한 낱말이었다. 꽝탄은 이곳에서 2㎞ 떨어진, 습격이 시작된 지명이라고 했다. 그들은 낮은 곳에서 언덕을 올라 쳐들어왔다. 베트남은 이곳을 ‘꽝탄 언덕’이라 일렀던 것이다. 다음은 승전비. 해병의 승리 신화를 가슴 벅차게 품어온 이들이라면 ‘역사 왜곡’이라며 기함을 할지도 모르겠다.
뒤이어 도착한 띤토사 인민위원장 응우옌반이(52)가 비석 앞에서 설명을 해주었다. “전투만 놓고 보면 한국군이 이긴 게 맞지요. 하지만 이곳은 동서를 잇는 전술적으로 중요한 지역이었고, 기습 목적은 한국군 철수였어요. 실제로 한 달 뒤 물러났고요. 전술적으로 졌지만 전략적으로 이긴 셈입니다.”
짜빈동 신화를 향해 던져볼 만한 첫 번째 질문이다. 과연 승리한 것인가?
전투에 참여한 병사들은 모두 각종 훈·포장을 받고 일계급 특진했다. 대통령 박정희는 하루 뒤 ‘찬사와 치하’의 축전을 띄웠다. 병사들은 도회지로 나가 쇼공연을 관람할 기회도 얻었다. 하지만 적의 습격을 저지한 기지에서 오래 머문 것 같지는 않다. <파월한국군전사>를 뒤져보면 11중대가 이곳에 주둔하며 부근에서 작전을 한 기록은 더 이상 없다.
1968년 ‘뗏 공세’를 떠올려본다. 미군을 비롯한 연합군은 남베트남 전역에서 설 휴전 약속을 어기고 대대적 기습공격을 감행한 북베트남군과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 게릴라들을 패퇴시켰다. 하지만 ‘뗏 공세’에서 미군이 이겼다고 여기는 이들은 없다. 전투에서는 이겼지만 이후 세계 여론과 전황은 불리하게 돌아갔다. 짜빈동 습격은 ‘초미니 뗏 공세’였을까?
이제 승전비의 비문을 읽어볼 차례다. “(앞 생략) 적군은 두 겹 참호(깊이 1.3m, 폭은 5m) 방어망을 구축했다. (중략) 1967년 2월15일 제5군구 2사단 1연대, 그리고 선띤현 부대와 띤토사 주민들이 서로 협력하여 꽝탄 언덕을 습격했다. 전투가 악렬하고 긴장되게 연속 3시간 동안 벌어졌다. 우리는 청룡여단에 속한 남조선군대의 한 소단을 소멸시켰는데 420명을 죽음에 이르게 했다. (중략) 남조선군에 의해 살해당했던 꽝응아이성 선띤현, 빈선현, 그 외 많은 지역 동포에 대한 복수를 했다. 꽝탄 언덕의 승리는 제5군구 무장 역량과 꽝응아이성 주민의 적군에 대한 깊은 증오감과 결전의 정신을 생생히 증명해준다.”
‘적 420명을 죽음에 이르게 했다’는 부분에서 눈길이 멈췄다. 한국 국방부 공식 기록에 한국군 전사자 수는 15명이다(북베트남군과 유격대원 전사자는 243명). 응우옌반이는 엷은 웃음을 띠며 고개를 저었다. 잘 모른다고 했다. 생존자를 만나게 해달라고 했다. 유일하게 한 분이 계신데, 얼마 전 입원했다는 답이 돌아왔다. 전투에 참가한 이들 중 상당수가 타향 출신의 북베트남 정규군이었다.
그는 지방 유격대장으로 싸웠던 분의 제사가 마침 오늘이라고 했다. 그곳에 가보기로 했다.
너의 전설
51주기를 맞는 고인의 이름은 두 개였다고 한다. 응우옌꽝과 응우옌락. 1930년생. 띤토사 유격대장으로서 짜빈동, 아니 꽝탄 언덕 습격 작전 때 지방 유격대원들을 총지휘했으며, 길을 잘 모르는 주력군(북베트남 정규군)을 안내하는 역할을 했다. 전투에서 살아남았지만, 같은 해 다른 곳에서 한국군에 체포돼 잠깐 감옥에 갇혔다가 풀려난 뒤 또 다른 전투에서 전사했다. 제단 위 고인의 얼굴 사진은 양복에 빨간 넥타이를 맨 몸통 그림과 합성돼 이색적이지만 조악한 느낌을 주었다.
베트남 제삿날은 축제다. 여유가 있는 이들은 이웃들을 초청해 술과 고기 등을 대접한다. 오후 3시 넘어 제사 장소에 도착했던 터라 북적거리던 손님들이 빠지는 중이었다. 3개 테이블에 10여 명이 남아서 맥주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중에 띤토사 전 인민위원장 레탄하(64)도 끼어 있었다
.
“짜빈동 전투가 한국군 해병의 전설로 알려져 있다”고 운을 뗐다. 전 인민위원장 레탄하가 받았다. “베트남에선 아주 작은 전투였을 뿐이에요. 꽝응아이성 선띤현에서야 기리겠지만 베트남전 전체에선 큰 의미가 없어요.” 한국에서는 중대급 해병부대가 연대 규모의 적을 격파한 걸 자랑스러워한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이때 누군가가 불콰해진 얼굴로 술잔을 들고 일어나 소리쳤다. “우리가 미국을 이겼는데 작은 전투 하나 이겼다고 무슨 개소리냐!”
진지한 대화를 나누기 힘든 분위기였다.
취기가 오른 이들이 자리를 뜨지 않고 큰소리로 열을 올렸다. “한국군은 미군의 괴뢰군일 뿐이었어. 같은 아시아인으로서 싸울 필요가 애초에 없었지.” 베트남에서 이미 지겹게 들었던 이야기였다. 누군가 건배를 외쳤다. “우릴 침략한 건 일본 제국주의와 미국 제국주의야. 우린 친구야. 단결해야 해. 그런 마음으로 원샷!”
한 시간도 안 돼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도반(56)을 만나러 가야 했다. 띤토사 학살 사건의 생존자다. 앞에서 본 꽝탄 언덕 승전비엔 이런 대목이 있었다. “남조선군에게 살해당한 지역 동포에 대한 복수를 했다.” 도반
가족은 한국군에게 살해당했다. 그와 잡은 약속 시간이 다가왔다.
짜빈동 신화를 향해 던져볼 만한 두 번째 질문이다. 부근 마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생존자 도반
19년 전인 2000년, 짜빈동 전투에서 중상을 입고 후송됐던 참전 군인을 인터뷰한 적이 있다.
경남 마산에 사는 김영만씨였다.
11중대에 배속됐던 4.2인치 박격포 소대 출신이다. 그는 인터뷰에서 전투 이틀 전 11중대원들이 수색정찰 중 잡아온 30대 베트남 남자를, 선임 병사들과 함께 아무런 절차도 거치지 않은 채 직접 총살해 묻었고, 이후 죄의식에 시달려왔다고 고백했다.
이런 식의 마구잡이 처형이 2~3일에 한 번씩 있었다는 증언도 했다.
개별적 처형을 넘어 짜빈동 기지 주둔 해병들의, 집단 학살에 관한 생존자 증언이 나오긴 이번이 처음이다.
사건 당시 3살이던 도반은 오른쪽 다리에 총상을 입었지만, 어머니 응우옌티뚜이(당시 46살)의 품에 안긴 덕분에 생존했다.
어머니를 포함해 함께 있던 누나(도티브우, 23살)와 형(도반라인, 8살) 모두 죽었다.
사건 당일 산으로 피신했던 아버지 도띠(1915~95)는 화를 면했다.
아버지 도띠에게 들은 내용이다. 짜빈동 전투 4개월 전인 1966년 10월17일 아침 8시께, 띤토사 토떠이촌에서의 일이다. “짜빈동 기지에 있던 한국군이 전날 행군하다가 지뢰를 밟아 몇 명 죽었다죠. 그날 아침 주민들을 모았대요. 한국군이 지뢰에 관해 심문하면서 일부 주민을 때렸고 대검을 꺼내 한 여자의 몸을 찔렀나봐요. 다른 이들이 놀라 소리를 지르며 달아나자 일제히 사격을 했대요. 저는 살아나 죽은 엄마 배 위에 올라가 젖을 빨았다고 합니다.” 이날 그곳에서 20명이 희생됐다(다른 장소에서도 16명이 죽어 당일 희생자는 총 36명). 다음날 18일엔 2㎞ 떨어진 띤토사 반호아촌의 한곳에 모인 21명이 목숨을 잃었다. 당시 짜빈동 기지엔 1967년 2월15일의 전투를 치른 11중대가 아닌 9중대가 있었다.
1966년 10월17일과 18일, 하루 차이로 일어난 두 사건은 각각 ‘버짜이 논 학살’과 ‘ 할머니 집마당 학살’이라 한다. 두 곳의 위령비는 50주기를 1년 앞둔 2015년에야 사건 현장에 세워졌다. 꽝응아이성은 1993년부터 이곳을 역사문화유적으로 인정했지만 예산 책정이 안 돼 위령비 건립을 계속 미뤄왔다고 한다. 버짜이 논 위령비는 이름 그대로 논 한가운데 있었다. 가운데 폭 1m 진입로를 흙을 쌓아 만들어놓았다. 내가 간 날은 비가 흩날렸는데, 신발이 푹푹 빠졌다. 비가 더 오면 완전히 잠길 듯했다. 진입로 포장은 주민들 숙원이라고 했다. 이 비석에는 도반
가족을 포함해 함께 희생된 20명의 이름을 적어놓았다. 그중 14명이 여자였고, 8명이 10살 이하였다.
할머니 집마당 위령비도 귀신이 나올 만큼 으슥한 숲에 숨어 있었다. 위령비 비문을 읽어보았다. “선띤현 띤토 학살. 장소: 반호아촌 동쪼이
할머니 집마당. 1966년 10월17일 꽝탄 언덕에서 남조선 용병들이 띤빈사, 띤히옙사, 띤박사까지 대규모 수색정찰을 했다. 그들은 마을을 불 지르고 파괴하며 죄 없는 민간인들을 잡아서 띤토사 반호아촌 동쪼이
할머니 집마당으로 몰아넣었다. 그들은 민간인들의 손을 묶고 총을 쏘아서 21명을 죽였다.” 희생자들은 이 마을 사람이 아니었다. 비문에 명단이 없는 이유다.
버짜이 논 희생자 유가족들은 2017년 음력 기일에 한국에서 처음 온 10여 개의 조화를 보며 위령비 앞에서 많이 울었다고 한다. 외면당해온 슬픔을 인정받은 느낌이었을지도 모른다. 도반은 말했다. “밀라이는 504명이 희생된 큰 학살이고, 여기는 기껏 20명 죽은 작은 학살이니, 그동안 관심이 없지 않았겠어요?”
도반은 요즘도 악몽을 꾼다. 지겹게 본 폭격과 미군-유격대의 전투 장면은 트라우마가 됐다. 하늘에서 포탄이 쏟아지다가 군인들이 사람을 모아놓고 쏴 죽이는 장면이 꿈속에서 되풀이된다. 화제를 바꿨다. 학살의 원수를 갚을 목적도 있었던 꽝탄 언덕 습격에 대해 아느냐고 물었다. 그러나 뜻밖의 대답에 허를 찔렸다. “구글을 찾아보세요. 저도 구글에서 읽었어요.” 진지한 이야기 도중에 폭소가 터지고 말았다.
오 일병, 김 수병
베트남 취재를 마치고 한국에 돌아온 뒤, 19년 전 만났던 짜빈동 전투 참전자 김영만씨에게 전화를 걸었다.
당시 55살이던 그의 나이는 현재 74살이다.
그날에 관해 물었다. 1967년 2월14일 밤에서 15일 새벽으로 이어지던 중요한 순간들에 관해 다시 듣고 싶었다. <파월한국군전사>에 따르면, 14일 밤엔 안개가 자욱하고 보슬비가 내렸다.
밤 11시께 적의 1차 공격 시도가 있었지만 아군은 4.2인치와 81mm 박격포 공격으로 간단히 제압했다.
기지 철조망 15m 정도가 찢어진 수준이었다.
적은 한 명의 주검을 남긴 채 후퇴했다.
김영만씨는 “날이 밝으면 적 시체를 확인하러 가자며, 승전의 기쁨으로 소대원들끼리 교통호에서 술을 마셨다”고 회고했다.
<파월한국군전사>에는 나오지 않는 이야기다.
“병사들 사기 진작을 위해 미군 헬리콥터로 술, 담배, 식빵을 엄청나게 보급해주던 때였어요. 술은 최고급 양주 조니워커였죠.
그날 밤에도 새벽까지 조니워커를 마셨고, 4시께 적의 2차 공격으로 다들 술이 깼죠.”
그는 부상당하기 전 교통호에서 양주잔을 기울이며 후임병과 나눈 이야기를 기억한다고 했다. “평생 잊힐 수 없는 말을 남겼지요. 서울서 대학 다니다 온 오아무개 일병이었어요. 나한테 그랬거든요. ‘김 수병님, 우리 비겁하게 싸우다가 용감하게 귀국합시다.’ 목숨 보전해서 고향에 꼭 가자는 말을 함축한 거지. 근데 몇 시간도 안 돼, 저세상 사람이 됐어.”
김영만씨는 새벽 5시께 적의 위치를 육안으로 관측해 거리를 재기 위해 교통호 밖에서 서성이다가 포탄 파편에 얼굴을 맞았다. 한 바가지 피가 울컥 솟아오르는 순간, 쓰러지면서도 이런 생각이 먼저 머리를 스쳤노라고 과거 인터뷰에서 밝힌 바 있다. ‘장가도 못 가고 죽는구나.’ 요즘도 가끔 언론사에서 짜빈동에 관한 인터뷰 요청이 들어온다고 했다. “웬만하면 응하지 않아요. 자꾸만 눈물이 나서요. 세월이 흐르면 기억이 멀어질 줄 알았는데 자꾸 더 생생히 살아나면서 말을 잇기 힘들어져요. 그러고 나면 몸이 아파요.”
짜빈동 신화를 향해 던져볼 만한 세 번째 질문이다. 누구를 위한 영웅 신화인가.?
짜빈동의 주인공은 <파월한국군전사>에 거룩하고 용감하게 그려진 해병들만이 아니다. 학살 뒤 주검 더미에서 거짓말처럼 살아나 죽은 엄마 젖을 빨던 3살 아기, 젊은 베트남 남자라는 이유만으로 체포되자마자 한국군 기지에서 총살된 포로 아닌 포로, 외세와의 투쟁이라는 거대한 명분 아래 한국군이 점거한 꽝탄 언덕을 기어오르다 비참하게 죽은 북베트남 정규군과 지방 유격대원, ‘비겁하게 싸우다 용감하게 귀국하고 싶었으나’ 허망하게 폭사한 오 일병, 피를 쏟으며 쓰러지면서도 장가도 못 가고 죽는다는 걱정을 했던 김영만 수병, 그리고 조국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저 죽고 싶지 않아 두려움을 이기며 참호에서 육박전까지 불사한 끝에 생존에 성공한 수많은 해병 병사들.
절대적인 남성성의 세계, 전쟁 미화의 세계, 무적 해병의 짜빈동 신화는 꽝탄 언덕을 수놓았을 수많은 비명(悲鳴)들과 함께 다시 기록돼야 한다.
싸움 실력을 자랑하기 앞서 싸움의 의미부터 묻는 보편적 이성의 눈으로...
띤토(베트남 꽝응아이)=글·사진 고경태 <1968년 2월12일> 저자 humank21@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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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重傳/이희빈 작성시간 19.03.03 공직자비리수사처 설치에 관한 국민청원은 종료되었는데
청원동의 302,856 명 참여하셨으니 이제는 하루 속히 남북통일하시기 바랍니다.
北, SLBM 핵심기술 콜드런치 성공한듯..
"예상보다 속도 빨라 우리 군 내부서도 놀란 분위기..대응 전력은 뒤쳐져있어 뉴스
2016.04.25. 12:21
http://media.daum.net/politics/dipdefen/newsview?newsid=20160425122126501이미지 확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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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전호승(카페 감사) 작성시간 19.03.03 필승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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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댓글 작성자박동석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19.03.03 전호승(카페 감사)님,重傳/이희빈님!우리월참전우들은,베트남전쟁터에 대한민국/국회의결로 강제파병당하여..숱한참극의 희생양이 되었고,모의재판정에서 패소당하여,이중고를 겪고있는
슬픈 1달러의 삐에로들 이여요..??
게시글1)=꽝탄 언덕의 비명을 찿아서는...청룡/짜빈동전투를 왜곡하는 글입니다!
게시글2)를 참조해보셔요~劍鬪士 / Gladiator
Ave Imperator, Morituri te salutant.
"곧 죽을 자들이 황제께 인사올립니다."[1]
고대 로마에서 유행했던 검투대결에 출전하는 선수. 현대로 치면 프로레슬러나 격투기 선수로 비유할 수 있다. 유희왕의 검투수와 아르마토스 레기오 카드도 이것이 모티브.
我們被大韓民國/議會派往越南戰場, -
작성자김세중 작성시간 19.03.04 월남 참전용사들님에게 감사드립니다.
필승 기원합니다. -
작성자한번뿐인삶 작성시간 19.05.08 건강 유의 하시면서 싸우십시요. 필승!
월남 전쟁사 연구원 배상
그리고 현 마산회장님께서, 그때의 산 증인(짜빈동의 영웅)입니다.
당시 두발의 총탄에도, 잘 견디고 계십니다,
그리고 전쟁의 휴유증으로 두 발목관절염으로, 월 화요일중에 수술이 예정되어 준비 중입니다.
마산의 참전자 분께서는, 대한 해병의 명예에 불을지르고 도망간 김영만을 수소문해 찾아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반드시 전범자인 그를, 처단해야 합니다.
당시 그들이 설치한 각종 부비츄렙 밟아 다리 잘리고, 눈부상 당한 주민들을 상대로 취재해서
독자들의 동정심을 자극시켜 한ㅇ레 2ㅇ 주간지에 올려 놓고 정기 구독 신청하고,또 한편으로 한ㅇㅇ재단 홈피에 올려
취재협조 후원계좌를 만들어 후원금을 거두워들이는 수법을 쓰고 있습니다.
검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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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고대 로마에서 유행했던 검투대결에 출전하는 선수. 현대로 치면 프로레슬러나 격투기 선수로 비유할 수 있다. 유희왕의 검투수와 아르마토스 레기오 카드도 이것이 모티브.
경기장에서 칼이나 그물, 삼지창 등 무기를 들고 싸우는 일종의 격투가로 야생 동물(주로 사자), 다른 검투사, 범죄자 등과 싸웠다. 흔히 원형경기장(=콜로세움)에서 싸우는 모습이 유명하다. 한쪽이 죽을 때까지 싸우는 데스매치로 유명하지만, 모든 경기가 패자의 사망으로 끝나는 것은 아니었다.
신변의 자유가 적었다는 점에서 검투사보단 검노라는 번역이 더 맞는다는 주장이 있지만, 아래 서술을 보면 알 수 있듯 노예 아닌 검투사들이 분명히 존재했기 때문에 어폐가 있다. 특히나 본격적으로 인기를 얻게 되고 살생을 피하는 하나의 스포츠로 발전한 로마 후반기에는, 유명 검투사들은 최상급 연예인 부럽지 않을 정도의 대접을 받았다. 또한 검투 게임은 스폰서[2]와 프로모션이 존재했고, 심판까지 존재해 단순 노예들의 막싸움과는 차원이 달랐다.
2. 유래[편집]
검투사가 되는 자격 조건은 따로 없었다. 초창기에는 전쟁포로나 노예를 검투사로 훈련시켜 죽고 죽이게 했지만, 나중에는 일반 시민들도 검투사로 자원하여 프로모터와 계약을 맺고 직업으로 삼거나 심지어 귀족 자제들도 검투사를 업으로 삼는 등 흐름이 많이 바뀐다. 극단적으로는 황제인 코모두스가 경기장에서 직접 싸운 사례도 있다. 실력 좋은 검투사는 요즘의 연예인 내지 스포츠 스타들과 비슷한 취급을 받았다고 한다.[4]
스파르타쿠스 반란 등이 일어나기도 한 것을 보면 노예 출신인 제정 이전의 검투사들의 삶은 자유민 출신의 후대의 검투사에 비한다면 비참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참고로 이 반란을 일으킨 검투사들은 진압하러 온 로마군을 격파하고, 잡아온 로마 군단병 포로들에게 자신들이 당했던 검투 경기를 시켜서 복수했다고 한다. 이건 복수뿐만 아니라 전사자들에 대한 추모식이기도 했는데, 원로원은 이 부분에서도 분노했다. 이런 추모 경기 등등은 높으신 분들만 주최할 수 있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제정 후대의 검투사들의 생활과 취급도 제정 전에 비하면 크게 나아진 것은 아니었다. 검투사가 연예인 취급을 받은 것은 맞지만, 현대와는 달리 로마는 배우를 비롯한 연예인이 최하층 천민 취급을 받았던 사회였고 검투사의 신분도 다르지 않았다. 이들은 지원할 때 위 인용구와 같은 서약서에 서명해야 했는데, 이는 스스로를 타인의 종으로 낮추고 로마 시민권이 있다고 해도 시민권이 제공하는 권리를 포기한다는 선언과도 같았다.[6] 검투사가 가질 수 있는 권리의 일반적인 상한선은 스스로 싸울지 여부를 선택할 수 있는 자유였고, 이런 자유를 획득한 최고참 검투사(auctorati)조차도 자신의 목숨을 걸고 남에게 공연을 하여 돈을 버는 연예인이라는 인식 때문에 신분상으로는 자유민일지언정 그 이상의 법적인 보호를 받지는 못했다.[7]
서기 325년 콘스탄티누스 시대에 검투 경기를 금지하는 법이 만들어지고, 이후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되면서 검투 경기는 지나치게 잔인하고 부도덕적이라는 이유로 점점 줄어들었다. 하지만 열성 관중의 맥은 쉽게 끊이지 않았으므로, 서기 4세기와 5세기의 황제들은 거듭해서 금지령을 발포했고 결국 6세기에야 전 제국에서 완전히 맥이 끊긴다. 애당초 검투 경기에 돈이 지나치게 많이 들었기에 재정이 악화된 고대 로마 말기에는 더 이상 검투 경기를 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검투사들의 검투 경기는 기사들의 토너먼트 경기로 대체되었다.
3. 검투사의 특징[편집]
검투사로 양성할 전쟁 포로들이 넘쳐났던 공화정 초기의 검투 경기에서는 무자비하게 패자를 죽이는 경향이 높았다. 어차피 검투사 양성소에 공급되는 노예는 차고 넘쳐날 정도였기 때문이다. 제정 때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칙령으로 '패자를 무조건 죽이는 검투 경기를 금한다' 라고 명했지만 그다지 큰 효과를 보지 못했다. 공화정 초기에 높았던 검투사의 사망률은 검투 경기가 절정에 달한 제정 중기까지 서서히 감소해갔으며, 제정 말기에 다시 치솟았다. 점점 관중들과 황제가 사망자 없는 시시한 경기에 질렸기 때문이다.
검투사들의 사망률이 높았다는 것은 통계가 증명한다. 대략 한 번의 검투 경기를 치를 때마다 최소 20명의 검투사가 죽어나갔다. 투입되는 검투사의 숫자가 평균적으로 많아봐야 백 명 남짓이라는 것을 생각해보면 전원 사망(50명)까진 미치지 못해도 상당히 높은 숫자다. 게다가 신참 검투사는 보통 1년 내로 사망하기 마련이고, 운이 좋아 1년을 넘기더라도 3년 안으로 대부분 사망했다. 앞서 언급한 검투사 20명의 비문을 해석해보면 8명이 아예 처음 싸워본 신참 검투사였고, 베테랑은 거의 없었다.
그 이유는 검투 경기의 특징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로마인들은 실력이 좋은 베테랑 검투사가 신참을 상대로 일방적인 경기를 펼치는 것을 싫어했다. 언제나 아슬아슬하고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종이 한 장 차이 승부를 좋아했다. 그래서 검투사는 무조건 비슷한 실력대의 검투사와 싸우는 것이 원칙이었다. [8] 베테랑 검투사끼리의 전투는 서로 몸값이 높고 양성하는 기간이 길기 때문에 일단 승패가 결정되면 쉽게 죽이는 일이 없었다. 그리고 베테랑 검투사들은 경험으로 서로를 죽이지 않고 제압하는 법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거기다 같은 양성소의 동료끼리 싸울 경우, 한솥밥을 먹은 정을 생각하면 더더욱 죽이는 것만큼은 피하려고 했다.
그런데 적을 죽이지 않고 제압한다는 것은 죽이는 것보다 훨씬 어렵다. 경험이 얼마 없는 신참에게 그런 노련함을 기대하긴 어려웠다. 그래서 보통 신참 검투사들의 경기는 한쪽의 사망으로 끝나곤 했다. 물론 베테랑들에게도 상대방을 죽이는 것이 승리하기 가장 쉬운 방법이기에 경기 도중 상대가 사망하는 일이 제법 발생하곤 했다.
검투 경기의 패자를 처분하는 것은 보통 관중이 결정권을 쥐고 있었다. 관중이 보기에 경기 내용이 지루했다면 패자는 거의 무조건 죽었다. 반대로 지더라도 경기가 흥미진진했다면 관중은 검투사를 살리려고 했다. 이런 경우 검투사는 졌지만 살아서 콜로세움을 나갈 수 있었다. 하지만 무조건 관중이 패자의 목숨을 결정하는 것은 아니었다. 최종 결정권은 황제가 쥐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경우 관중들이 살리고 싶어하는 검투사를 마음에 안 든다는 이유로 죽여버렸다. 또 관중의 의견이 반반으로 갈리는 경우 보통 주최자나 심판이 패자의 목숨을 결정했다.
검투사들에게 있어 어떤 황제를 만나느냐는 굉장히 중요한 문제였다. 베테랑 검투사라 해도 황제의 심기를 건드리면 목이 날아가는 일이 일상다반사였기 때문이다. 가령 칼리굴라 황제의 경우, 검투 경기에서 승리한 검투사들을 다른 양성소에 팔아버렸다. 이게 왜 문제냐면, 승리한 검투사들은 시설이 좋고 비교적 대우를 받는 황제 직속 양성소에서 열악한 사설 양성소로 팔려나갔기 때문이다.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경우, 특이하게도 죽는 순간의 사람이 어떤 표정을 짓는지 궁금하다는 이유로 패배한 검투사의 목을 치도록 명령했다. 콤모두스 황제는 같은 양성소의 검투사들이 서로 죽이기를 머뭇거리며 소극적으로 싸우자 격노해 모든 검투사를 한꺼번에 투입시켜 죽을 때까지 싸울 것을 명령했다. 하지만 관중의 의견에 반하는 명령은 대중에게 좋지 않게 보였기 때문에 평판에 악영향을 끼치고는 했다.
모든 황제가 다 검투사들에게 잔인했던 것은 아니었다. 이례적인 케이스도 있었는데, 티투스 황제의 경우 프리스쿠스와 베루스라는 두 명의 검투사가 치열하게 싸운 끝에 서로 동시에 항복하자, 종려나무 관과 목검을 하사해 두 명의 검투사를 자유의 몸으로 만들어주었다. 쌍방 승자 판정을 내린 것이다.
로마 제국이 서서히 몰락해가던 4세기 즈음에는 검투사로 공급할 노예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사망자는 거의 나오지 않았다. 검투 경기에서 이기는 조건이 상대방의 몸에 상처를 내는 것으로 완화되었기 때문이다.
4. 검투사의 실력[편집]
검투사들의 실력과 충성심이 뛰어났기 때문에 황제들은 은퇴한 검투사를 근위대에 뽑거나 내전에 검투사 부대를 투입하는 일이 종종 있었다.
검투사들의 전투는 무조건 실전이었다. 서로 봐주거나 짜고 치는 경기는 있을 수가 없었다. 왜냐면 검투 경기는 조 추첨이 기본이었기 때문이다. 관중들이나 검투사들이나 자신이 정확히 누구와 싸우게 될지는 경기 날짜가 오기 전까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대충은 짐작할 수 있었는데, 가령 자신이 레티아리일 경우 주로 세쿠토르나 무르밀로와 싸우는 것이 정석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검투사들은 평소 양성소에서 훈련하면서도 훗날 자신과 싸우게 될 검투사 그룹의 기술이나 실력을 눈여겨보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런데 여러 검투사 양성소가 참여할 정도로 큰 경기의 경우 서로 다른 양성소의 상대끼리 싸우기 때문에 검투사들을 곤란하게 했다. 같은 병종이라 해도 상대방의 스타일에 따라 싸우는 방식은 천차만별이었다. 서로 다른 양성소의 상대방과 싸울 경우 실전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상대방이 어떤 유형의 전술을 구사하는지 알 수 없었다. 따라서 큰 경기에 투입되는 검투사들은 서서히 탐색전을 하며 경기의 흐름을 읽으려고 노력했다.
5. 병종 구분[편집]
5.1. 동물과 싸우는 사람[편집]
이들은 대개 수입해온 흔치 않은 동물들과 싸웠다. 제국 각지에서 잡아오기도 했고, 심지어는 북극곰, 카스피호랑이, 인도코뿔소같은 희귀한 맹수들도 잡아 왔다. 모두 위험한 맹수들이기에 이들은 활과 창, 횃불, 갑주 등으로 단단히 무장하고 스코틀랜드산 사냥개들을 대동한 채 맹수들과 대결했다. 대개 베스티아리가 유리하지만 동물이 이길 확률도 약간 있었다. 이 때문인지 관중들은 짐승을 죽이는 장면 못지않게 베스티아리가 죽는 장면을 보고 싶어했다고 한다.
맹수를 따돌리기 위한 통로나 엄폐물 등의 장치를 설치하기도 했는데, 극적인 장면을 연출하기 위한 의도도 있었다. 보다 정면으로 맹수에게 대항할수록 더 많은 환호를 받았으며 때로는 오늘날의 투우처럼 짐승의 공격을 아슬아슬하게 흘리거나, 사자나 호랑이와 대적하면서 죽마 위에 서서 싸우는 등 일부러 위험한 상황을 연출하는 선수도 있었다. 심지어 곰이나 사자를 맨손으로 대적한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9]
상금과 명예를 위해 싸우는 베스티아리는 용기의 증명이라고 하여 젊고 용맹한 사내에게 권장하기도 했으며, 네로나 콤모두스는 직접 베스티아리로 나서서 맹수들을 물리치기도 했다. 이런 상금 경기를 하는 베스티아리를 위한 훈련 교실도 존재했다.
5.2. 사람과 싸우는 검투사[편집]
위의 베스티아리가 오전에 싸우면, 오전 경기로 생긴 시체를 치우고 모래를 새로 뿌린 뒤 사람끼리 싸우는 경기가 벌어졌다.
이들은 무장과 전투방법에 따라 몇 가지로 나뉘었다. 이들은 서로 다른 무장과 전투법으로 다른 부류의 검투사들과 싸웠는데 이는 오늘날의 이종격투기와 비슷하다. 원래 검투사 경기는 죽은 로마 병사들의 원혼을 기린다는 희생제의 개념에서 전쟁 포로들을 잡아와서 시작한 것이고, 또한 전쟁에 참가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전쟁터의 모습을 재현해보인다는 목적이 있었다.
나중에는 검투사 타입들은 승패의 흥미로움을 더해주기 위해 다양하게 늘어가는데, 병종 간에 일방적인 승패가 가려지지 않도록 밸런스 패치가 가해졌다. 더 유리한 병종에게는 방어구를 줄이는 식으로 페널티를 주고, 불리한 병종에게는 방어구나 무장을 더 늘리고 숫자를 늘리는 식. 보통 얼굴과 팔다리는 철저히 보호했는데, 치명상으로 인해 경기가 일방적으로 흘러가 지루해지는 걸 막기 위해서였다. 반대로 흉부-복부의 방어는 포기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는 결정타를 먹일 여지를 남기기 위해서였다. 불리한 병종이라면 흉부-복부의 방어까지 철저했지만 유리한 병종이라면 갑옷 따위 없다.
무장과 방어구가 다양하니만큼 관중마다 좋아하는 취향이 달랐다. 예로 티투스는 트라키아인을 좋아했고, 클라우디우스는 레티아리를 싫어했다고 한다.
스탠다드한 검투사들은 다음과 같다.
그물을 잃으면 죽을 수밖에 없긴 했지만 워낙 승률이 높은 강한 병종이다. 일단 그물에 상대를 잡히게 만들기만 한다면 상대는 움직일 수가 없고, 레티아리의 또 다른 무기는 원거리 공격이 가능한 삼지창이므로 상대 검투사의 무기의 사정권을 벗어난 상태에서도 자기는 상대를 잡았다 가정할 경우 안전거리에서 안 다치고 상대를 편히 찌르는 게 가능하다. 그러니 왼팔을 덮는 팔의 갑옷(마니카)나 목과 아랫쪽 얼굴을 덮는 고정식 어깨 방패(갈레루스), 허리띠 외에는 방어구가 없이[11] 알몸으로 싸웠다. 주무기인 그물마저도 유리에 금박을 입혀서 매우 무겁게 만들었으며, 가장 중요하게 여겨지던 머리 방어구인 투구조차 없었다. 그래도 상당히 승률이 높고 강한 병종이었다. 레티아리와 싸우는 세큐토레스. (퍼블릭 도메인)
다음은 특수한 상황에만 나오는 검투사들이다.
은퇴를 거부하고 다시 싸움에 뛰어드는 루디아리우스는 현대인의 기준으로 마이크 타이슨과 맞먹는 슈퍼스타 취급을 받았다. 플라마(Flamma)라는 한 세큐토레스는 목검을 무려 네번이나 하사받았는데, 은퇴를 네번 전부 거부한 뒤 마지막 경기인 34번째 경기에서 목숨을 잃었다. 최종 전적은 34전 21승 9무 4패였다고 한다.[12]
죄인에 대한 처형으로 무기를 든 죄인과 맨손의 죄인이 대결하는 경기도 있었다. 대개 무기를 가진 자가 승리하지만 그대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승자가 무기를 반납하고 이번에는 자신이 맨손이 되어 새로운 도전자와 싸워야 했다.
5.3. 여성 검투사[편집]
여성 검투사에 대한 문헌적 기록은 별로 남아 있는 것이 없다. 이는 문헌 기록을 남기는 로마 식자층이 남자들의 미덕(전투 기술과 체력)을 겨루는 검투 경기에 여자들이 참여하는 것을 남성의 미덕에 대한 모욕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풍자시인 유베날리스의 다음 시를 보면 당시 식자층 남성들이 여자들의 검투 경기를 어떻게 생각했는지 잘 알 수 있다.
이외에도 철학자 세네카, 역사가 카시우스 디오 등을 비롯해 많은 로마 시대 지식인들이 여자들의 검투 경기를 비난하는 기록들을 남긴 것을 찾아볼 수 있고, 후대의 셉티미우스 세베루스황제는 이를 금지시키기도 했다.
여성 검투사들의 존재 여부와 생활 양식에 대한 정보들은 문헌 기록이 없어 오랫동안 알려지지 않았지만, 고고학적 발굴 성과를 통해 추측해볼 수 있게 되었다. 특히 템즈 강 유역의 할라카르나소스(고대에는 비슷한 이름의 도시가 많았다)에서 발견된 두 여성 검투사의 시체와 함께 매장된 장비, 그리고 두 사람을 묘사한 부조 및 기록은 생활상을 추측하는 데 결정적인 증거가 되었다. 두 여성 검투사는 아마존과 아킬리아라는 이름(예명으로 추정된다)을 사용하였으며, '상위 랭크'의 검투사였다는 기록에서 당시 여성 검투사에게도 등급이 있었음을 짐작케 해 준다. 또 이 부조는 이들의 '신화적인 경기'를 기념해서 만들어졌다고 되어 있다고 한다. 이 승부의 경우 무승부로 끝났고, 둘 다 살아서 경기가 끝나 자유의 몸이 되었다고 한다.
또한 '콜레기아 이우베눔', '루두스 마그누스' 등의 당시 검투사 양성소에서 여성들의 훈련 공간이 발견되는 등, 분명히 여성 검투사들을 전문으로 양성하는 곳이 있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하지만 동시에 그 구역의 비중 차이를 볼 때 흔하지는 않고 대단히 드물게만 열렸을 것으로 보이며, 당시 로마 제국이 굉장히 넓었으니만큼 지역별로 또 격차가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함부르크에서 발견된 여성 검투사상은 아예 상의 탈의상태로 나오는데, 이런 자료는 또 여성 검투사들이 성적 대상으로서 취급받았을 거라는 근거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당시 젖가슴을 드러낸 모습은 여자 노예들에게도 흔했기에 하급 여자 검투사를 묘사한 것이라는 설도 있다. 역시 아직까지는 자료가 너무 부족하다 보니 당시 여자 검투사들의 위상이나 경기 방식을 완전히 추측하기는 힘들다.
아무튼 여성 검투사에 대한 자료가 많지 않은 것과는 별개로 이 직종이 실존하기 때문인지, 로마 시대를 다루는 소설인 《폼페이 최후의 날》 에선 여성 검투사 출신의 조역이 등장하기도 한다.[16]
6. 기타 이야기거리[편집]
7. 대중 문화 속의 검투사[편집]
7.1. 영화[편집]
영화 성의의 시퀄, 칼리굴라 시대, 기독교 신자인 코린트의 데미트리우스(전작 성의의 남주인공에게 기독교를 전도한 노예)는 예수가 남긴 의복을 지키려다가 근위대와 싸우고, 그 벌로 검투사가 된다. 살인을 해서는 안 되는 교리 때문에 검투시합에서 이기고도 상대를 죽이려 하지 않자 칼리굴라가 처형하라는 명령을 내리지만, 이 자에게 매력을 느낀 메살리나가 아깝게 그냥 죽이지 말고 호랑이 4마리와 싸우게 하자는 제안을 내놓아 살아날 기회를 얻는다. 그리고...
7.2. 드라마[편집]
7.3. 만화[편집]
7.4. 소설[편집]
7.5. 게임[편집]
8. 관련 문서[편집]
감각이 열라 발달하고 싸움실력이 열라 출중하지 않는 한사실 싸우다 죽으라는 것이나 다름없는 검투사군이 녹시였다. 인간은 시각에 크게 의존하는만큼 시각이 차단당하면 행동이 많이 봉쇄되는데 그런 상황에서 무기를 쥐워줘봤자 상대가 눈을 드고 있으면 압도적으로 불리해진다. 그래서 시력을 포기하지 않으려고 맨손 싸움을 택한다 해도 상대가 무기를 가지고 있으면 상대의 무기를 빼앗거나 맨손으로 상대를 완전제압할 정도의 초인이 아닌 한 승률이 팍팍 떨어지는건 당연지사. (일단 상대 검투사가 든 것이 아무리 짧은 단도 정도의 무기라 가정해도, 무기가 상대의 손에 들어가있는 한 상대의 사정거리 + 사용수단의 폭이 넓어진다)[14] 한쪽에만 갑옷류를 걸치고 반대쪽은 벗는다.[15] 복수형은 gladiatrices[16] 이 여자는 해당 소설의 레귤러 + 서브 히로인인 나디아의 여주인으로, 검투사 출신의 남편과 함께 술집을 운영하고 있는 여성이다. 그녀는 현역 검투사 시절에 황제 앞에서도 경기를 했던 전적이 있으며 이를 자랑으로 삼는다. 작중에서도 그녀의 전투력(...)이 왠만한 남자들보다 더 쌔다고 묘사하고, (소설 묘사상 검투사들이 거의 목숨걸고 싸우는 것처럼 묘사되니 이 전직 검투사였던 아줌마도 목숨을 건 혈투를 많이 거쳐봤고, 그런 상황들을 거쳐 살아남을 수 있을 정도로 몸이 단련되었을것이다.) 현재는 검투사 일을 하지 않으며 그 대신 남편과 함께 술집을 경영하는 걸로 봐선 그녀 역시 노예 출신 → 자유민 전철을 밟은 검투사거나 자유민이어도 돈 문제로 검투사를 하다가 그만둔 사람인듯. 여담으로 성격이 매우 억세고 잔혹해서, 자기 노예인 나디아에게 학대 수준의 폭행을 해댔다. 덕분에 당대 소설 등장인물 치곤 여성 검투사라는 이례적인 기믹을 지녔긴 하나 소설 포지션상 그냥 조역 + 악역이다. (그녀에 대해서도 여성 검투사로서의 면모가 많이 묘사가 안 되는걸 보면, 여성 검투사 직종에 대한 자료가 지금보다도 부족한 시기에 만들어진 소설상의 등장인물이었기에 그런 걸수도)[17] 이런 식의 처형법은 영화 쿼바디스에서 잘 묘사되었다.[18] 로마가 크리스트교를 탄압하면서 초기 신자들을 사자에게 물어죽이게 한 장소[19] 거상은 라틴어로 콜로수스다.[20] 케임브리지 대학 코퍼스 크리스티 칼리지의 교수. 로마 제국사(고대 말기) 전공.[21] 아마도 오록스였을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