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철(李在哲) 목사는 1949년 부산에서 출생하여 한국외국어대학교 불어과를 나왔고, 장로회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 신학을 공부했다.
출판사 (주)홍성사를 설립 경영하였고, '주님의 교회'를 개척하여 10년 간 목회한 뒤 목회 초기 약속대로 담임목사직을 스스로 사임했다.
그 후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총회 파송 선교사로서 스위스에 있는 제네바 한인교회를 3년 간 섬겼으며, 돌아와 개인복음 전도자로 집필에 전념하는 한편, 서울의 한 작은 교회 중.고등부 교사로 섬겼고, 서울극장 '사랑의 초대' 집회에서 설교하였다.
'한국 기독교선교 100주년 기념사업회'의 요청에 따라 2005년 7월부터 양화진에서 '100주년 기념교회' 담임목사로 사역중이다.
한국기독교선교100주년기념교회 http://100church.org
한국기독교선교100주년기념사업협의회 http://www.100thcouncil.com
(주)홍성사 http://www.hsbooks.com
주님의 교회 http://pcltv.org
제네바 한인교회 http://geneva-koreanchurch.org
산울교회 http://www.sanul.or.kr
서울극장 '사랑의 초대' http://www.seoulcinema.com
인터뷰, 이재철 목사에게 듣는다
‘나의 하나님’아닌 ‘우리 하나님’돼야

이재철 목사는 한국의 크리스천 및 신학생들이 가장 만나고 싶은 목회자 가운데 한 명이다.
서울 '주님의 교회'를 개척, 부흥시킨 뒤 약속대로 10년 만에 교회를 사임하고 홀연히 스위스로 떠나 제네바 한인교회를 담임하다 귀국, 현재 산울교회 중고등부 교사로 섬기며 집필 활동에 전념하고 있다.
이 목사는 언론과 인터뷰를 하지 않는 목회자로 유명하다. 국민일보와도 이번이 공식적으로는 최초의 인터뷰다.
이 목사는 크리스천들이‘황제의 논리’를 벗어나 거룩한 진리의 법칙에 따라 살 때 세상을 변화시키는 힘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 목사가 말하는 목회와 예배, 크리스천의 삶에 대해서 들어봤다.<편집자>
-요즘 어떻게 지내십니까.
△산울교회라는 작은 교회에서 중고등부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집필과 강연은 지속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오는 27일부터는 매월 한 차례 서울극장에서 청년들을 위한 ‘극장 예배’를 인도하게 됩니다.
-극장에서 드리는 예배라니 매우 신선하군요. 예배에 대한 이야기가 많은데 참다운 예배란 무엇입니까.
△예배는 나를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구약시대 사람들이 자기를 대신해서 하나님께 제물을 드린 것처럼 온전하게 나를 하나님께 의탁하는 시간이 바로 예배입니다. 자기의탁이라는 말을 구체적으로 표현하면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예배를 통해서 내가 죽는 것입니다. 예배시간에 부어지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내가 죽어야 합니다. 자기 부인을 통해 하나님과 만나고 그분과의 영적 접촉에서 새로운 힘을 얻어 한 주간의 인생 고비를 넘는 것이 바로 예배입니다. 사실 요즘의 예배를 보면 하나님께 나를 드린다는 부분이 너무나 소홀합니다. 드린다고 할 때 예배를 받으시는 주체는 하나님입니다. 그러나 요즘 예배는 참여하는 사람들을 위한 예배가 대부분입니다. 본질에서 벗어나 있지요.
-그러면 참다운 예배 회복을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먼저 교회의 본질을 정확하게 해야 합니다. 교회는 시스템이나 외형적 구조물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그 사람들은 세상과 구별된 사람들입니다. 구별을 다르게 표현하면 거룩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세상과 구별된 거룩성을 상실하면 크리스천들이라고 불릴 수 없습니다. 따라서 거룩한 성도들이 드리는 참다운 예배는 거룩성과 무관할 수 없습니다.
교회의 힘과 예배의 힘은 외형적인데 있는 게 아니라 거룩함에 있습니다. 세상과 구별된 힘이 세상을 변형시키는 동력이 되는데 세상과 구별되지 않는 예배를 드리기 때문에 세상을 변화시키는 힘이 없는 것입니다. 교회가 세상과 구별될 때 굳이 개혁을 말하지 않아도 결과적으로 개혁은 수반됩니다. 역설적으로 교회 지도자들이 개혁을 강조하는 것 자체가 지금의 교회가 힘을 잃었다는 증거입니다. 교회가 본연의 힘을 지니고 있으면 개혁이라는 말 자체가 필요없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에 대해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베드로가 그같은 놀라운 고백을 한 장소인 가이사랴 빌립보는 로마 황제의 신전이 있었던 장소였습니다. 예수님은 황제의 논리가 판을 친 그 도시에서 베드로에게 ‘로마 황제가 신이냐,아니면 너희 눈에 보이는 내가 참신이냐’를 물었던 것입니다. 베드로는 황제의 논리가 만연한 도시에서 당시로서는 거지와 같았던 예수님을 가리키며 ‘당신이 참신이요’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세상을 압도하는 황제의 논리를 따르지 않고 거룩한 진리의 법칙을 따라 살겠다고 고백한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 고백 위에 나의 교회를 세우겠다고 하셨습니다. 교회사를 볼 때 교회가 세상을 변화시킬 때는 항상 교회가 황제의 논리를 초월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 교회는 황제의 논리에 몰입되어 버렸습니다. 어느 시대이든 교회가 예수님의 진리 법칙만 따르면 굳이 개혁을 말하지 않아도 교회 자체에 의해서 역사는 밝아집니다. 그래서 참다운 교회는 세상의 소망이요 희망인 것입니다.
-그럼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성경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가 있습니다. 어느 시대나 대다수는 황제의 논리를 좇아갑니다. 항상 깨어있는 소수만 황제의 논리를 초월합니다. 오늘날의 세태 자체를 보면 절망하기 쉽습니다. ‘왜 너는 교회답지 못하냐’고 비판하기보다는 내가 주님의 교회로 스스로를 바로 세우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가장 시급한 명제입니다. 그런 사람들에 의해서 교회는 항상 새로워집니다.
자기 자신과 싸우는 사람에 의해서 세상은 바뀝니다. 우리가 싸울 상대는 밖이 아니라 나 자신입니다. 우리 각자가 좁은 문으로 들어가서 참다운 교회로 나 자신을 세우는 것만이 유일한 해결책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숙제입니다.
-그렇게 될 경우 결과적으로 세상의 불의나 부조리를 묵인하게 되는 것이 아닙니까.
△세상의 부조리를 묵인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부조리에 물들지 않는 것입니다.내 삶의 영역에서 모든 악한 것과 스스로가 맞서는 것입니다. 정치인은 정치인으로서,상인은 상인대로,교사는 교사대로 적어도 자신의 영역에서는 불의를 행치 않는 것입니다. 나 스스로가 참된 교회로 바로 서는 데에는 소극적인 것이 아니라 가장 적극적인 용기가 필요합니다. 세상이 거꾸로 가더라도 나 혼자는 바로 간다는 강한 결심이 필요한 것입니다. 사람들과 더불어 같이 가는 것도 용기 있지만 내 삶의 터전에서 스스로 진리의 사람으로 서는 것은 더욱 진정한 용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이 그같은 용기를 가지고 자신의 삶을 지킨다면 대한민국은 놀랍게 변화될 것입니다.
-만일 기독교사회책임 등과 같은 단체에서 목사님을 영입하려 한다면 어떻게 하실 것입니까.
△사람마다 하나님께 받은 소명이 있습니다. 기독교운동을 하시는 분들은 그 소명을 받은 분들입니다. 제 소명은 그저 이 시대에 내게 주어진 삶속에서 썩는 한 알의 밀알이 되는 것입니다. 그분들의 일이 의미롭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내게 주어진 소명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같은 일에서 저는 무자격자입니다.
-목사님은 인생의 많은 과정을 거치시고 목사가 되셨습니다. 목회자가 됐다는 것은 어떤 것을 의미합니까. 또한 목회란 과연 무엇입니까.
△목회자가 됐다는 것과 목회를 한다는 것은 같은 말입니다. 목회는 교우들과 더불어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회자는 어쩔 수 없이 교인들의 본으로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고 ‘우리 다같이 이렇게 살아보지 않겠습니까’라면서 선봉장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목회자입니다. 목회자의 진정성은 강단이 아니라 삶에서 드러나게 됩니다. 본인은 선봉장이 될 생각이 없어도 교인들과 함께 살아가다보면 하나님에 의해서 선봉에 서게 되는 사람이 바로 목회자입니다.
-그러면 목회의 범위는 어느 정도까지입니까.
△많은 사람이 제게 ‘언제 목회를 다시 하십니까’라고 묻습니다. 그러나 저는 지금 ‘교회 없는 목회’를 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목회라고 하면 교회와만 연관을 짓는데 저는 신학교 때 50대에는 나라 밖 사람들을 위해서 제 삶을 나누겠다고 서원했습니다. 그 서원대로 해외 한인 크리스천들과 말씀을 나누고 있습니다. 책을 쓰는 것도 목회지요. 저는 한번도 목회를 그만둔 적이 없습니다. 교회를 담임하는 여부를 떠나 죽을 때 까지도 목사로서 목회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신자 즉,크리스천이 됐다고 하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신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신분이 바뀐 사람입니다. 한줌의 재로 끝날 허망한 인간이 영원한 존재로 신분이 바뀐 것입니다. 그런데 모든 신분의 변화에는 그에 걸맞은 수준이 요구됩니다. 신분에 걸맞은 수준을 유지하기 위해서 노력해야 합니다. 바뀐 신분을 즐거워만 하고 그 신분에 걸맞은 수준이 되기 위해 노력하지 않는다면 언젠가는 파탄에 처하게 됩니다.
사실 오늘날 한국 교회는 바뀐 신분에 대한 기쁨만을 추구하는 것 같습니다. 수준을 추구하지 않습니다. 21세기 한국 교회는 하나님 자녀다운 수준을 추구해야 합니다. 신분은 저절로 주어지지만 수준은 사도 바울이 날마다 자신을 쳐서 복종시키는 것과 같이 부단히 노력해야 합니다. 신분에 안주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만 생각합니다. 하나님을 나의 전유물로만 생각합니다. 그러나 크리스천들이 탁월한 수준을 추구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하나님’이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 될 때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며 세상 잘못을 내 탓으로 생각하게 됩니다.
-인생을 살면서 가장 의미 있었던 순간에 대해서 이야기해주시죠.
△목회자로 살 정도의 수준이나 능력을 갖추지 못했음에도 주님이 나를 도구로 쓰신다는 사실에 감격합니다. 날마다 의미 있게 지냅니다.
-사랑이 무엇입니까.
△나를 주는 것입니다. 상대가 요구하기 이전에 무엇이든 주는 것입니다.
-새해를 맞아 한국의 크리스천들에게 부탁하고 싶은 말씀은 무엇입니까.
△진짜 크리스천이 되어야 합니다. 크리스천은 예수의 말씀을 아는 사람들이 아니라 그 말씀대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믿는다는 것은 아는 것을 넘어서 사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진짜 크리스천으로 새해를 맞이해야 합니다. 우리 중심이 확고하게 주님을 향해서 방향 설정이 되지 않으면 새해는 늘 묵은 해의 연장선밖에 되지 않습니다.
새 것은 옆이나 밑에서부터 오지 않고 오직 위로부터만 옵니다. 주님과의 관계 속에서 이 땅의 모든 크리스천이 새해를 맞이하기 바랍니다. 언젠가는 우리 모두 세상을 떠나 하나님 앞에 서야 하는데 그때 후회가 없어야 합니다.
(2005. 1. 2. 국민일보 / 대담: 이태형 기자)
담임목사도 성전도 간판도 없는…서울 충정로 산울교회
소설가 조성기 전도사 설교...이재철 목사 교사로 중.고등부 지도
18일 오전 11시 서울 서대문구 충정로의 한 건물 20층을 올라가니 강당 출입구에 붙여진 A4 용지에 ‘산울교회’라고 씌어 있다. 그 안에서 60여명의 신자들이 예배를 올리고 있다. 이 교회는 간판도 없이 한 대학재단 소유의 건물 강당을 일요일마다 빌려 쓰고 있다.
교회는 1998년 소설가 조성기씨를 비롯한 동역자들이 교회의 대형화 성전화 추세에 의문을 갖고 소그룹 단위의 인격적 만남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생활 속에서 실천하자는 취지에서 만들었다.
산울교회는 담임목사 없이 평신도 중심으로 운영된다. 굳이 교회 운영을 책임지는 사람을 들자면 한 달에 세 번 설교하고 인터넷 홈페이지(www.sanul.or.kr)를 관리하는 조성기씨. 직함도 목사가 아니라 전도사다.
조씨는 주제에 맞춰 성경을 인용하는 방식 대신 마가복음을 한 대목씩 강의하는 식으로 설교한다. 이날 설교는 마가복음 7장 31∼37절의 ‘에바다’. 이 말은 예수 활동 당시 이스라엘에서 통용된 아람어로 ‘열려라’란 뜻. 예수가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며 병자를 고쳤다는 대목을 인용하며 조씨는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베풀기가 아니라 그 고통받는 사람이 되라는 뜻이라고 설교했다. 그는 지금까지 이 같은 방식으로 누가복음 사도행전 로마서 등의 설교를 마쳤다.
조씨는 “성경의 한 대목만 보는 것으로는 전체 맥락을 놓치기 쉽다”고 말했다.
한 달에 한 번은 평신도가 설교한다. 성경 속에서 은혜를 받은 말씀을 다른 신자들과 함께 나누는 설교를 한다.
헌금도 ‘감사와 나눔의 연보(捐補)’라고 해서 내고 싶은 만큼만 내도록 한다. 건물, 담임목사가 없으니 교회 관리비도 거의 필요 없다. 헌금은 선교와 개척교회 지원, 장학금, 봉사활동 지원, 불우이웃돕기에 대부분 사용된다. 조씨는 “교회개혁 같은 거창한 목표를 세우지 않고 하나님 말씀의 실천을 화두로 삼는 교회”라고 말했다.
산울교회는 또 흩어지는 교회를 내세운다. 이곳 시스템을 갖고 교회개척에 나선 평신도가 5명이다. 최근에는 대구가톨릭대 전강수 교수(집사)가 쥬빌리교회라는 평신도교회를 개척하기도 했다.
1시간의 예배가 끝나면 장년 청년 중고등 초등부로 나눠 분반활동을 한다. 특히 중고등부 활동을 지도하는 사람은 ‘주님의 교회’ 담임을 지냈던 이재철 목사다. 그는 98년 주님의 교회 담임에서 물러난 뒤 스위스 제네바의 작은 한인교회 목회를 하러 떠났다가 2001년 귀국해 이 교회에 출석하고 있다.
두 자녀와 함께 산울교회를 다니는 양기영씨는 “교회의 방침도 좋고 아이들이 이 목사님을 좋아해 인천에서 이곳까지 온다”고 말했다.
예배가 끝날 무렵, 신자들이 함께 로마서 15장 13절을 외우며 축도를 대신했다.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케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없는 것이 많은 교회, 그래서 더 꽉 차 보이는 교회였다.
(2004. 4. 22. 동아일보 / 서정보 기자)
‘극장예배’ 기획 3인방 “영화 만큼 즐거워”
이재철 목사 설교, 고은아 권사, 곽정환 장로
극장에서 예배를 본다?
영화인 출신 고은아 씨(본명 이경희·합동영화㈜ 서울극장 대표)는 ‘극장 예배’에 대한 기대 때문에 그 어느 때보다 부푼 마음으로 올 크리스마스를 맞았다. 고 씨의 남편 곽정환 씨(합동영화㈜ 서울극장 회장)와 동생 이재철 목사 역시 기쁨으로 충만해 있다.
22일 서울 종로구 종로3가 서울극장에서 세 사람을 만났다. 고 씨는 “가족들이 뜻을 모아 매월 마지막 주 목요일 오후 9시 우리 극장에서 예배를 갖기로 했다”면서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음악도 듣고 하나님 말씀에 감명을 받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첫 예배는 다음달 27일 오후 9시 서울극장의 11개 상영관 중 가장 큰 제2관(902석)에서 열린다. 실력 있는 연주자들로 구성된 뉴트리팝스오케스트라가 30분 동안 영화음악 팝송 찬송가 등을 공연한 뒤 이 목사가 1시간가량 설교할 예정이다. 누구든지 무료로 극장에 들어가 예배에 참석할 수 있다. 서울극장은 ‘극장 예배’가 있는 날은 평균 40∼50%의 좌석 점유율을 기록하는 제2관의 오후 8시 이후 영화 상영 2회를 하지 않기로 했다.
과거 이력이 독특한 세 사람이 손해를 감수하면서까지 ‘극장 예배’에 의기투합한 일은 요즘 교계에서 화제가 되고 있다. 고 씨는 1960년대 영화계를 주름잡던 인기배우였고 곽 씨는 영화 제작과 극장업계 대부 중의 한 사람이다. 서울 강남에서 교회 건물도 없이 10년 만에 신자를 3000명으로 늘린 뒤 홀연히 떠났던 이 목사는 명설교로 이미 교계에 널리 알려져 있다.
고 씨는 “이 양반(곽 회장)이 어느 날 교회를 다녀온 뒤 전도하는 데 극장을 사용하자는 얘기를 해서 깜짝 놀랐다”면서 “하지만 나도 10년 전 라디오 선교방송을 그만두면서 10년 후 새로운 일을 하겠다고 다짐했던 터라 흔쾌히 동의했다”고 말했다.
곽 씨는 “25년간 극장 사업을 하면서 극장을 전도에 사용할 수 없을까 고민하던 중 ‘극장 예배’ 아이디어를 생각해냈다”며 “하지만 교회를 섬기고 있는 목사가 설교를 맡게 되면 부작용이 생길 것 같아 걱정하던 중 ‘이 목사님’이 떠올라 도움을 청했다”고 말했다. 서울 종로구 평창동 예능교회 장로를 지낸 곽 씨는 신자들은 목사를 잘 모셔야 한다면서 처남을 연방 ‘이 목사님’이라고 불렀다.
이 목사는 ‘주님의 교회’ 담임목사 시절 서울 정신여고에 강당을 지어주고 주일에만 이를 빌려 예배를 보다가 1997년 스위스 제네바로 떠났으며 3년 만에 귀국해 화제가 됐다. 그는 귀국 후에도 평신도로 교회에 다니면서 주일학교 중고교생을 지도하고 글을 통한 선교에 전념해 왔다.
이 목사는 “누님과 자형께서는 매주 ‘극장 예배’를 하는 게 어떻겠느냐고 했지만 제 능력에 부친다고 생각해서 한달에 한번만 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그는 또 “사람들은 값비싼 물건을 사면 사용설명서를 열심히 읽어 보면서도 하나님이 제시한 ‘인생 사용설명서’나 다름없는 성경은 제대로 알려고 하지 않는다”며 “극장을 자주 찾는 젊은이들에게 살아가는 데 지혜가 될 만한 얘기를 들려주고 싶다”고 말했다.
고 씨부부는 “다른 사람들이 할 수 없는 방식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게 돼 기쁘다”면서 “예배 참석자들이 늘어나면 예배과정을 촬영해 다른 극장으로 ‘영상 예배’를 확대해 나갈 계획”이라고 말했다.
(2004. 12. 24. 동아일보 / 김차수 기자)
목회자들의 설교 분석
곽선희,옥한흠,조용기,이동원,이재철 목사
설교는 모든 목회자의 특권이자 고민이다. 교인들이 교회를 선택할 때 가장 고려하는 사항 가운데 하나가 목회자의 설교다. 누구나 탁월한 설교자가 되기를 소망하지만 ‘바르고 탁월한’ 설교를 하기란 쉽지 않다. 효과적인 설교를 위해서 목회자들은 이 시대에 탁월하다고 평가되는 설교자들의 설교법을 연구할 필요가 있다. 그들을 카피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만의 노하우를 배워 적용하는 것도 필요하다. 월간 ‘교회와 성장’이 최근호에서 곽선희 조용기 옥한흠 이동원 이재철 목사의 설교를 분석했다. ‘최고의 설교가’라는 소리를 듣는 이들의 설교 포인트를 소개한다. <편집자>
△곽선희 목사(소망교회 원로)-분석자:이승진 교수(천안대 설교학 교수)
곽 목사의 말씀은 성도로 하여금 설교 현장에 임재하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하는 설교의 기본적인 목적에 충실하다. 곽 목사는 자신의 설교에서 종말을 향해 역사와 인생을 구속적 경륜을 따라서 섭리하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이미지와 아울러 그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고 자신에게 주어진 영적인 책임을 성실하게 감당하는 순례자의 이미지를 분명하게 확보하고 있다.
이런 두 이미지가 일련의 거대한 구속적 드라마로 짜여져서 설교를 통해 하나님과의 만남에 대한 성도들의 영적 욕구에 적절히 응답하고 있다. 이 점이 설교에서의 하나님의 임재를 지향하는 모든 설교자들이 참고해야 할 부분이다. 그는 하나님을 딱딱한 조직신학적인 맥락에서 제시하지 않고 대신 하나님의 이미지를 그분의 경륜과 섭리에 따라 살아갈 수밖에 없는 성도의 모습과 관련 지으면서 성도의 윤리적 책임 또는 적용적인 맥락에서 제시한다는 것이 특징이다.
곽 목사가 설교에서 강조하는 성도의 긍정적인 모습은 이 땅에서 하나님의 구속적인 경륜을 깨닫고 더 나아가서 종말을 바라보면서 한시적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삶과 책임을 성실히 감당하는 순례자다. 종말을 향해 역사와 인생 하나하나를 자신의 구속적인 경륜에 따라서 간섭하시는 하나님과 그 하나님 앞에서 의연하게 현재의 고난에 대처하며 주어진 삶을 믿음의 눈으로 성실히 감당하는 순례자의 모습은 곽 목사의 설교에서 자주 접하는 한 편의 거대한 구원 드라마다. 실제로 곽 목사는 자신의 설교 4편 가운데 최소한 한 편에서는 섭리와 경륜의 하나님과 아울러 그에 따른 성도의 믿음의 결단을 지속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옥한흠 목사(사랑의교회 원로)-분석자:정인교 박사(서울신대 설교학 교수)
옥 목사의 설교에서는 튀지 않으면서도 모자람이 없는 모범생을 대하는 느낌을 갖는다. 미스터 코리아의 근육질은 아니지만 신체 어느 부위 한 군데도 모자람이 없는,그래서 지성과 영성,신학과 신앙에서 잘 균형잡힌 스탠더드형 몸매를 보는 느낌을 옥 목사의 설교에서 받는다. 더도 덜도 아닌 설교의 모범 답안이라고 할 수 있다.
옥 목사에게 설교란 제자훈련이라는 큰 틀에서 이뤄지는 일종의 ‘전체 교육’과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복음주의적 신학을 견지하면서 ‘열린 사고’를 가지고 있다는 점은 옥 목사의 커다란 장점이다. 그는 복음주의적 신학,하나님 중심적 신앙이라는 테두리에 분명히 머무르면서도 고정적이고 기계적인 사고와 해석을 거부한다. 즉 하나님 중심적 사고를 든든한 울타리로 정한 뒤 그 안에서 새로운 시각의 해석을 시도한다.
옥 목사의 설교가 가진 또 다른 장점은 철저히 성경 중심적이면서도 한 가지 주제에 집중한다는 점이다. 그는 본문 단어를 그 문맥에 맞춰 연구하고 핵심적인 개념을 집중적으로 주석함으로써 본문에 대한 불확실성을 철저히 제거한다. 또한 그의 설교는 매우 사실적이다. 회중을 형이상학의 세계에 머무르게 하지 않는다. 설교를 듣고 나서 구체적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명확하게 손에 쥐어준다. 큰 틀에서 볼 때 그는 경건주의의 전통에 따라 신앙의 실천과 경험을 강조한다.
설교에는 옥 목사의 관심이 철저히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이 승리하는 삶에 있다는 사실이 투영된다. 신앙은 허구가 아니라 구체적인 삶이고 그리스도인이 세상을 변화시켜야 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실천될 수밖에 없는 것임을 의미한다. 또한 누구도 흉내내기 어려운 설교자의 기품 또한 옥 목사의 설교를 뚜렷하게 만드는 요소다.
△조용기 목사(여의도순복음교회)-분석자:김기홍 목사(아름다운교회)
조 목사의 설교는 성령의 도움을 구하는 설교다. 그의 설교 원고는 복음적이고 성경적이다. 그러나 인상 좋고 경험 많은 다른 목회자가 그의 원고대로 설교한다면 수많은 사람이 모이기 어려울 수 있다. 바로 조 목사의 설교는 분명히 원고나 전달 이외의 그 무엇이 있다. 그것은 바로 설교에 역사하는 성령의 능력이다. 성령과의 교제를 위해 수없이 기도하고 늘 성령을 의지하려 노력했기 때문에 조 목사의 설교는 사역 초기부터 청중에게 영적 권위를 느끼게 했다. 그가 설교 준비를 하면서,단 위에 올라 가면서 성령의 충만함을 갈구하기 때문에 성도들도 설교에서 능력을 느끼며 은혜를 훨씬 더 받는다.
조 목사는 모든 유능한 설교자들처럼 노력하면서 그 이상의 것을 구한다. 성령의 임재를 느끼고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아 성령의 도움으로 설교한다. 모든 준비를 다한 뒤 성령께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아예 처음부터 모든 일을 성령을 의지해서 성령과 함께 한다.
성령과 함께 하기 때문에 설교에 능력이 있고 그러다보니 조 목사만의 이미지가 만들어진다. 목회의 능력과 함께 쌓아올려진 이미지 설교는 다른 목회자들이 도저히 따라갈 수 없다.
조 목사의 이미지를 흉내내는 사람은 절대로 조 목사의 이미지를 넘어서지 못한다. 설교자는 자신의 이미지를 스스로 만들어 나가야 한다. 설교와 관련해 조 목사를 통해 배울 수 있는 점은 성령을 의지하고 죽도록 준비하고 연습해야 한다는 점이다. 조 목사는 성령을 의지하며 성령의 인도를 받아 성령의 뜻을 분별한다. 성령의 도우심을 절실하게 구한다. 설교뿐 아니라 목회 전반이 그렇다. 어찌보면 조 목사는 당연한 일을 하고 있다. 그러나 얼마나 많은 설교자가 당연한 일을 하지 않고 인위적인 차원에서 모든 것을 마치려고 해왔는가.
△이동원 목사(지구촌교회)-분석자:김형준 목사(동안교회)
첫째,이동원 목사의 설교 핵심과 구조는 복음이다. 설교의 모든 포인트가 그리스도로 모아진다. 둘째,이 목사의 설교는 현실과 본문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를 통해 완성되기 때문에 둘 사이의 긴장 속에서 청중은 성경에서 자신을 발견하고 현실에서 하나님의 뜻을 비교적 수월하게 발견한다. 셋째,이 목사의 설교의 특징 및 장점은 뛰어난 전달력에 있다. 그의 용어 선택은 정확하고 탁월하다. 정확한 용어 구사력과 톤과 리듬이 조화를 이루어 청중이 단절되는 느낌을 받거나 싫증을 내지 않는다. 넷째,이 목사의 설교는 신학적으로 튼튼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쉬운 표현과 언어임에도 불구하고 깊은 신학이 내재되어 있다. 그의 설교에는 주경신학 조직신학 선교신학이 잘 어우러져 있다. 선교신학을 전공한 학자로서 이 목사는 ‘상황화’라는 선교신학의 주관심사를 놓치지 않고 메시지에 잘 적용한다.
다섯째,이 목사의 설교는 훈련과 사역을 통해 보완되고 성숙된다. 그는 ‘설교는 삶의 터닝 포인트를 제공할 수 있지만 진정한 의미에서 삶의 변화는 일으킬 수 없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그래서 이 목사의 설교는 교육훈련과 각종 사역,목장 사역으로 나눠지는 구조를 통해 완성되고 마무리된다. 여섯째,이 목사의 설교 특징은 체계적이고 계획적인 준비에 있다. 그의 설교 방법은 주제별 강해 설교로 하나의 큰 주제 안에 3개월 분량에 해당하는 소주제를 정하고 주제별로 전반적인 개요와 방향,구성과 본문을 생각하며 설교 준비를 한다. 이 목사는 설교준비를 10단계로 나눠서 진행한다. 본문을 읽을 때 그는 설교자의 입장 뿐 아니라 설교를 들어야 할 청중의 입장에서 읽는다. 또한 본문을 현대적으로 재구성해 현대인이 흥미를 가질 만한 아이디어는 무엇인지를 구상한다. 이 목사 설교의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성령님께 의지하는 자세다.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와 성령의 임재를 매일 요청하는 겸손함은 이 목사 설교의 가장 큰 비결이다.
△이재철 목사(전 주님의교회 담임)-분석자:오현철 박사(그리스도신대)
이 목사의 설교는 사람들로 하여금 본질로 돌아오게 하는 구심력을 가진다. 이 목사의 설교에서 보이는 본문 해석의 타당성과 논리적인 힘은 철저한 성경중심적인 설교관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의 설교는 철저한 강해설교로 말씀을 순서대로 본다. 이 목사의 설교는 제목도 없고 대지도 없이 그냥 한 절 한 절 읽어나가며 단순한 해석으로 끝나는 요즘의 잘못된 강해설교 유형과는 엄격히 구분된다. 본문 해석은 물론 적용과 전달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말씀을 순서대로 묵상한다는 것은 설교자의 취향을 뛰어넘는 것이다. 그는 설교 준비를 통해 자신의 생각과 시야를 극복할 뿐 아니라 설교를 통해 회중의 사고와 시선을 주님의 사고,주님의 시선으로 회복하려는 설교자다.
이 목사는 또한 본문이 가지는 가능성들에 충실한 설교를 하며 일관된 교회론에 입각한 메시지를 전한다. 본문을 적용할 때 이 목사는 ‘이재철표’라고 할 수 있는 탁월한 서론과 풍부한 예화를 사용한다. 대부분의 예화가 직접 경험한 것을 사용한다는 점은 인터넷을 통해 쉽게 예화를 차용하는 목회자들에게 도전을 준다. 이 목사의 설교에서 청중은 시대에 대한 그의 감수성을 엿볼 수 있다. 그것은 그가 설교 환경으로서의 역사 문화적 상황에 대해 얼마나 민감하게,긍정적으로 반응하고 있는가를 전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이 목사는 설교자를 연출자로 보며 예배 때의 모든 의식 자체가 설교라고 믿는다. 이 목사는 설교는 결국 ‘표현력’과 ‘문장력’에 의해 좌우된다고 생각한다. 설교 결론 후 이어지는 기도에서도 그냥 즉석에서 드리는 기도나 단순한 설교 요약,막연한 기원이 아니라 본문의 정수가 느껴진다. 마치 또 한 편의 설교를 창조하는 듯하다. 그는 설교 원고를 완벽하게 외울 뿐 아니라 완전히 소화해서 강단에 선다. 이 목사는 지난 시절 자신에 맞는 ‘이재철표’ 설교 전달법을 계발해왔다.
(2004. 7. 8. 국민일보 / 이태형 기자)
신앙의 강화냐, 신앙의 심화냐!
(전) 주님의 교회 이재철 목사 설교비평
정용섭 목사(대구성서아카데미 원장)
전설을 쓰다!
‘88 서울 올림픽’이 열리던 해에 어린이를 포함해서 50 여명으로 시작된 ‘주님의교회’는 아이엠에프가 본격화한 1998년 6월, 교회창립 10주년 기념예배를 드릴 때는 2천6백여 명에 이르는, 비교적 큰 교회가 되어 있었다. 이미 한국교회의 성장이 둔화되거나 실제로는 마이너스 성장으로 돌아섰다고 일컬어지는 그 시기에 50배의 성장을 기록했다는 건 예삿일이 아니다.
그렇지만 짧은 기간에 급성장한 교회는 그 외에도 몇몇 손에 꼽을 수 있으니까 그런 급성장만으로 우리가 주님의교회에 관심을 기울이는 건 아니다. 주님의교회가 보여준 행태는 흡사 희귀식물처럼 우리가 일반적으로 보아온 교회와는 그 품격을 전혀 달리했다. 그 중에 몇 가지만 추려본다면 다음과 같다. 본인들에게 물적인 토대가 충분한데도 불구하고 주님의교회는 자신들 소유의 교회당을 세우지 않았다. 잘 알려진 대로 주님의 교회는 미션스쿨인 정신여고를 위해서 대강당을 지어주고 그것을 빌려 쓰는 방식으로 예배처소 문제를 해결했다. 한국의 모든 교회가 명분으로는 모이는 공동체로서의 ‘에클레시아’라는 교회의 본질을 내걸고 있지만 실제로는 교회 소유의 부동산에 관심을 쏟는 이 현실 앞에서 주님의교회가 선택한 방식은 우리를 놀라게 하기에 충분하다. 주님의교회는 교회 재정의 반 이상을 교회 밖으로 돌린다. 무엇을 ‘소유’하기보다는 주님의 교회로 ‘존재’하는 일에 철저하니까 당연히 재정까지 정상적으로 운용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한국교회의 개혁이 논의되는 자리마다 교회재정 문제가 현안으로 등장하는데, 실제로 재정의 50% 이상을 순수하게 교회 밖으로 돌리는 교회는 그렇게 흔하지 않다.
주님의교회 현상에서 가장 눈여겨보아야 할 대목은 담임목사와 장로의 시무 임기제가 아닐까 생각한다. 담임 목사는 10년으로 못 박고, 장로들은 13년만 시무할 수 있다. 이런 발상이 단지 말로만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실천되었다는 사실에서 필자는 한국교회가 살아날 수 있는 희망의 빛을 보았다. 은퇴 후에도 영향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심지어는 목사직의 세습을 위해서 온갖 편법과 변칙, 또는 추태가 드물지 않게 벌어지는 한국교회 안에 이렇게 자신들의 종교적 기득권을 과감하게 던질 수 있는 교회가 현존한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위로이며 자랑이다. 필자가 보기에 우리의 상식을 파격적으로 허물어내면서 한국교회의 개혁을 선도해나가는 주님의교회는 앞으로 한국교회 역사학자들에 의해서 매우 높게 평가될 것이다.
그런데 주님의교회가 거의 무모하리만치 철저하게 개혁의 길을 가면서도 동시에 쾌속 성장을 이루었다는 사실은 신기하기도하고, 또한 신비롭기까지 하다. 일반적으로 개혁적인 교회는 성장하지 않거나, 성장하는 교회는 개혁적이지 않다는 우리의 고정관념을 주님의교회가 깬 셈이다. 이래저래 한국교회가 사회로부터 곱지 않은 시선을 받고 있을 뿐만 아니라 교회의 영적인 에너지가 내리막길을 걷고 있는 이 와중에 자신을 철저하게 비우면서도 동시에 역동적인 공동체를 꾸려낸 주님의교회가 등장했다는 건 하나님이 여전히 한국교회를 사랑하신다는 징표가 아닐까 생각한다. 필자는 주님의교회가 보여주고 있는 그 행태와 결과들을 일종의 ‘전설’이라 부르고 싶다. 옛이야기로만 남아있어야 할 전설을 오늘 우리는 주님의교회를 통해서 ‘현실’로 경험하고 있는 셈이다.
1984년 8월2일, 새벽 2시
이 전설의 한 가운데에 이재철 목사님(이하 ‘이 목사’)이 있다. 본인은 굳이 인정하지 않으려 하겠지만 주님의교회가 10년 동안 보여준 전설적 이야기 중심에 이 목사가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은 아무도 부인하지 못한다. 도대체 그는 누구인가? 불혹의 40대를 온전히 주님의교회에 쏟아 붓고, 본인의 신앙적 비전을 야무지게 구현할 수 있을 정도로 교회를 성장시킨 그 순간에, 더구나 이제부터 중진 목사로서 한국교회의 개혁을 위해 본격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그 나이에 처음 약속한 대로 10년 만에 자리를 훌훌 털고 스위스 제네바로 떠났던 이 목사는 어떤 사람인가? 필자가 지금 인물평을 쓰려는 게 아니기 때문에 세세한 이야깃거리는 접어두고 그의 설교와 연관된 대목만 짚어보겠다.
바울을 바울 되게 한 결정적인 사건이 부활의 주님을 빛으로 만난 다메섹 도상에서의 회심이었듯이 이 목사를 이 목사 되게 한 결정적인 사건은 1984년 8월2일 새벽 2시에 일어난 회심이었다. 그 사건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사업을 하던 이 목사는(물론 목사가 되기 이전) 늘 그랬던 것처럼 그날도 밤늦도록 술을 마시고 새벽 2시나 돼서야 집으로 돌아왔다. 모르긴 해도 그 당시의 그는 풍류를 아는 멋쟁이였을 것이다. 평소에는 벨을 눌러서 아내를 깨웠지만 그날만은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자신의 열쇠로 아파트 문을 열고 들어갔다. 자리에 엎드려 성경을 읽으면서 남편을 기다리던 그의 아내는 잠들어 있었고, 그녀의 얼굴 밑에는 공책이 놓여 있었다. 잠든 아내를 그대로 두고, 그 공책을 펼쳐든 이 목사의 눈은 아래의 글에 가 닿았다.
"나는 오늘도 버스를 타고 수유리 너머로 갔다. 시골길을 하염없이 걸으면서 오늘도 어김없이 죽음을 생각했다. 약을 먹고 죽을까 아니면 손목을 그어서 죽을까. 그러나 그것은 내가 취할 길이 아님을 나는 다시 한번 더 확인하고 되돌아왔다. 나를 살리기 위해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주님께서 주님의 뜻을 위해 내게 주신 남편이므로 나는 사랑해야만 한다. 나는 할 수 없지만 주님께서 사랑하라 명령하시므로 나는 사랑해야만 한다. 주님! 도와주세요. 나의 약함을 주님께서 잘 아시잖아요."(<요한과 더불어> 제2권25쪽. 이후로 권수와 쪽수를 숫자로만 표기함).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아내의 깊은 속내를 알게 된 이 목사는 심장이 멎는 듯했고, 귀에서 큰 북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고 한다. 온몸의 전율과 함께 이 목사는 아내가 불쌍해서 펑펑 울었다. 그리고 어머니가 불쌍해서 울었다.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이 불쌍해서 울었다. “왜 내가 이런 삶을 살고 있을까? 어쩌다가 이 지경이 되었을까?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저의 영혼은 악취가 진동하는, 갈가리 찢어진 더러운 걸레조각처럼 여겨졌습니다.”(2:26). 그날 밤 이 목사는 예수님이 뒤에서 자기를 감싸주는 느낌과 함께 마음 깊은 곳에서 세미한 음성을 들었다고 한다. “나의 사랑하는 재철아, 나는 너를 한번도 버린 적이 없단다. 네가 나를 버리던 그 순간에도 나는 줄곧 너와 함께 있었단다. 나는 너를 사랑하기 때문이다.”(2:27).
이날 밤 회심의 순간에 이 목사가 아내, 어머니, 자기에 대해서 주체할 수 없는 연민을 느꼈다는 사실은 그의 무의식과 정서, 그리고 신앙의 기질을 지배하고 있는 키워드가 무엇인지 설명하는 단서다. 그의 정신세계에 이 셋은 하나로 결합되어 있다. 특히 이 목사에게 아내와 어머니는 자기 자신에 대한 무력감과 하나님의 사랑을 동시에 경험할 수 있는 통로였다. 이 목사는 쉰 두 번의 맞선 끝에 그의 아내 되는 사람을 만났다. 그의 나이 서른다섯이었다. 결혼한 후에도 여전히 지난날의 방탕한 삶을 끊어내지 못한 채 오히려 잘난 남편이라고 자만하고 있던 그 순간에 아내가 죽음을 생각하고 있었다는 사실 앞에서 그는 완전히 무너졌다. 어머니는 이 목사가 세살 때 이 목사의 형을 잃었고, 열네 살 때 그녀의 남편을 잃고, 6남매의 막내이며 외동인 이 목사에게 모든 희망을 걸고 사셨다. 어거스틴이 어머니의 기도로 회심했듯이 이 목사의 회심에도 역시 어머니의 기도는 결정적이었을 것이다. 이 두 여자, 아내와 어머니를 통해서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뼈저리게 경험했으며, 그런 구체적인 일상의 경험에 근거해서 ‘이재철’만의 고유한 목회와 설교 스타일을 주조할 수 있었다.
부정과 긍정의 변증법을 통한 일상의 복음화
그것은 곧 부정과 긍정의 변증법이다. 그는 끊임없이 자기에게 절망하고 자기를 부정한다. 그러나 자기 자신에 대한 절망은 절망으로 끝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큰 긍정으로 지양되었다. 한편으로 부정되고 다른 한편으로 지양을 통해서 긍정된다. 이 목사에게 작용하는 이런 변증법적 신앙의 내면에는 위에서 언급한 아내와 어머니의 사랑이 있었다. 이 문제를 조금 더 구체적으로 검토해보자.
필자는 이번에 이 목사의 설교집 <요한과 더불어> 10권을 모두 정독했다. 그 이외에 장로회 신학대학교 사경회를 마치고 신학생들에게 기립박수를 받았다고 하는 설교 테이프 5개를 듣고, 홍성사 믿음의 글 시리즈 191 <참으로 신실하게>와 199 <내게 있는 것>을 읽었다. 필자가 상당히 정성을 기울여 듣고 읽은 그의 설교와 글쓰기에서 필자는 이 목사가 부단히 자기를 부정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유복한 집안의 외아들로 자란 이 목사가 집안의 기대와는 달리 고등학생 때부터 비록 일년 동안의 한시적인 기간이었지만 깡패들과 어울렸고(6:59), 대학 졸업 후 사업을 핑계로 백구두를 신고 벤츠를 몰면서 사치스러운 삶을 영위했다는 부끄러움 때문인지, 그리고 더 근본적으로는 위에서 지적한 대로 아내와 어머니를 실망시켰다는 자책 때문인지 그의 설교는 철저한 자기부정에 토대하고 있다.
"저는 자타가 인정하는 거룩한 성도였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빛으로 저를 조명해 보았을 때, 바로 저 자신이 추잡한 창녀였습니다. 허망한 욕망을 위해 나의 영혼과 인생을 송두리째 팔아먹는 창녀 중의 창녀였습니다. 세상의 창녀는 생존을 위해 창녀가 되지만, 저는 단지 더 먹고 더 지니고 더 즐기기 위해 창녀가 된 자였습니다. 세상의 창녀는 자신이 창녀임을 아는 지혜라도 있지만, 저는 창녀면서도 창녀임을 자각치 못하는 창녀보다 못한 창녀였습니다."(3:267).
그의 설교에는 이렇게 자기를 부정하는 참회어록이 끊임없이 등장한다. 그런 자기 부정이 단지 청중을 설득하기 위한 설교학적 수사의 차원에 머무는 게 아니라 자기의 삶을 구체적으로 부정하는 단계로까지 발전한다. 이 목사 부부는 자기들 개인의 소유를 포기했다(1:180, 3:16, 5:195), 교회 수련회에서 뜻하지 않은 사고에 대한 책임을 물어 사직서를 제출했다가 여의치 않자 스스로 3개월간의 근신을 내렸다(1:241). 자신의 아이가 잘못을 저질렀을 때 아이로 하여금 자신의 종아리를 치게 했다(4:253). 이 목사 부부는 자기들의 몸도 부정한다. 죽은 다음에 매장하지 않고 화장하겠다고 한다. 주님의교회를 10년 만에 떠날 때 교회에서 5년 동안 유학할 수 있는 비용을 대겠다고 했지만 그것을 극구 사양했다.(10:68). 이런 자기 부정은 그의 모든 삶과 설교와 목회행위 밑자락에 깔려있기 때문에 여기서 더 이상 거론하지 않고 한 가지만 더 짚겠다. 주님의교회 후임자를 선택할 때 극구 거절하시는 임영수 목사님을 모시기 위해서 스위스를 몇 번이나 방문했다고 한다. 필자의 생각에 그가 임영수 목사님을 후임으로 모셨다는 건 주님의교회라는 현상 앞에서 자기 자신을 부정한다는 상징적 사건이다.
이렇듯 자기를 향한 부정은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자기 긍정으로 승화한다. 이미 1984년의 특별한 회심 사건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뜨겁게 경험한 이 목사는 즉시 술과 담배를 끊었으며, 모든 사람을 향한 사랑의 열정이 솟구치기 시작했다. 세족식에서 가난한 아이의 발을 씻기던 때를 이렇게 회상한다.
"그러나 그 때마다 그 가난한 아이들은 한결같이 흐느껴 울었습니다. 발을 씻기는 제 손등 위로 아이들의 뜨거운 눈물이 뚝뚝 떨어졌습니다. 저도 울었습니다. 제 눈물로 아이들의 발을 씻긴 것입니다. 발을 다 씻긴 다음에는 아이들을 제 가슴으로 꼭 끌어안고 함께 울면서 기도드렸습니다. 아이들의 뜨거운 눈물, 뜨거운 숨결, 그 뜨거운 가슴을 어찌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이제 세월이 흘러 그 아이들의 이름도 얼굴도 다 잊어버렸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한 가지만은 잊지 못할 것입니다. 그날 그 아이들의 발아래에서 만난 주님을, 그 곳에서 주님께서 보여주신 그 감동의 역사를 말입니다."(6:114).
부정을 통한 긍정의 열매라 할 수 있는 사랑의 열정은 그의 설교에서 사소한 듯 보이는 일상에 대한 깊은 파토스로 작용한다. 다른 사람 같으면 그냥 흘렸을 법한 작은 일상도 그의 눈에는 거룩한 빛으로 반사된다. 그래서 그가 들려주는 감동적인 이야깃거리에는 신앙의 위인들만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에 관한 것도 꽤나 많다. 가난한 아버지의 구두를 사드리기 위해 중학생 남매가 걸어서 통학했다는 이야기 같은 데서 발견할 수 있듯이 이 목사는 모든 사람들의 일상에 깃들어 있는 감동을 찾아내는 데 탁월한 능력이 있다. 만지는 것마다 황금으로 변했다는 마이더스의 손처럼 이 목사의 마음과 입을 통해서 전달되는 일상은 사람들의 마음을 심층에서 울리는 감동적 휴먼 드라마로 변한다는 말이다. 이런 능력은 일상 안에서 살아가는 청중에게 복음을 구체적으로 전해야 할 대중 설교자로서 매우 소중한 자산이다. 사람은 자기가 마음속으로 생각하는 것을 확인하고 실현하면서 살아간다는 말이 맞는다면 이 목사의 마음속에는 감동적이고 따뜻한 일상이 항상 보석처럼 빛나고 있을 것이다.
실존주의적 인식론
그렇지만 일상에 대한 감동적인 경험이 있다고 해서 모든 설교가 청중들의 마음을 관통할 수 있는 건 아니다. 그런 이야기를 담을 수 있는 인격과 삶이 그 바탕에 놓여 있어야 하는 것은 물론이지만,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그 이야기를 해석해낼 수 있는 인식론적 틀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맛있는 사과를 깎아서 예쁜 접시 위에 올리는 것과 뚝배기에 담는 것이 전혀 다르듯이 감동적인 드라마라고 하더라도 설교자의 어떤 인식론적 그릇에 담기는가에 따라서 그 울림의 깊이는 천차만별이다. 필자가 보기에 이 목사의 인식론적 토대는 실존주의이다.
이 목사는 한국 외국어 대학교에서 불어를 전공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그는 당연히 카뮈나 사르트르 같은 프랑스 실존주의 철학자들의 글을 적지 않게 읽었을 것이다. 인간 삶의 부조리, 무의미, 그 절망, 혼돈을 실존적으로 심각하게 경험해보지 않은 사람은 삶의 내면과 이면을 이해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 실존의 바닥을 딛고 일어선 일상의 감동을 포착할 수 없다.
인생이 대단한 것 같지만 고작 70-80년이면 끝나 버립니다. 그것도 날아가는 것같이 빨리 끝나버립니다.(1:104).
거듭난 삶을 추구하지 않는 자의 인생 궤적은, 설령 밤잠을 설치고 매일 수고의 땀을 흘리며 애써 그어 가고 있다 할지라도 실은 공동묘지를 향한 죽음의 궤적에 지나지 않습니다.(1:299).
아무리 잘 먹어도 그 인생은 결국 죽음이라는 종착역에 다다를 수밖에 없고, 잘 먹고 잘 입은 사람의 죽음일수록 모든 것의 굴절을 의미하는 죽음은 상대적으로 더 허무할 수밖에 없습니다.(5:228).
위에서 몇 구절만 인용했지만 이런 실존주의적 경향은 그의 설교에 거의 구조적이며 내재적이다. 물론 복음을 선포하는 설교자라고 한다면 당연히 인간의 죽음과 고독과 소외 같은 실존적 현상을 언급하겠지만 다른 설교자들의 경우에는 그런 부분들이 단지 하나의 정보 수준에서 작용하는데 반해 이 목사의 경우에는 자신의 삶 안에 실제적으로 체화했다는 점에서 확연히 구별된다. 성서와 신앙과 인간의 삶을 실존적으로 경험한 사람이 그것을 복음 안에서 전하기 위해서 혼신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면, 이런 설교에 은혜 받지 않을 청중이 있겠는가?
열린 세계이해
회심 사건을 통한 일상의 감동과 실존주의적 세계관을 통한 삶의 깊이가 이 목사의 설교를 추동해나가는 두 기둥이지만 그의 설교에는 주목해야 할 또 하나의 특징이 있다. 그것은 곧 비교적 탄탄한 인문학적 토대이다. 이 목사는 일반적인 대중 설교자들에게서 볼 수 있듯이 청중들에게 감정적으로 접근한다거나 교묘하게 교리적으로 혼선을 야기한다거나 군중심리를 이용해서 선동하는 일을 결코 의도하지 않는다. 그는 세계를 보편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인문학적 토대를 통해서 복음을 자폐적이거나 독단적인 방향이 아니라 세계를 향해서 열린 방향으로 끌고 나간다.
이미 아버지의 서재에서 이룬 풍부한 독서가 한몫하기도 했겠지만 홍성사를 운영하면서 책읽기의 내공을 깊이 쌓은 게 그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게 아닐까 생각한다. 그의 설교에는 많은 소설가와 시인들이 등장한다. 그 중에는 시인인 구상, 소설가인 이청준처럼 실제로 친분을 쌓은 분들도 제법 많다. 그의 설교에는 그런 문학적 소양만이 아니라 선불교로부터 시작해서 동서양 고전, 영화, 바둑에 이르기 까지 인간 삶의 모든 분야가 다양한 소재로 등장한다. 이런 소재를 통해서 그는 일상을 복음의 차원으로 끊임없이 ‘업그레이드’ 시키고 있으며, 이런 그의 작업이 청중들에게 설득력 있게 받아들여진다.
또한 한국의 일반적인 설교 명망가들과 달리 그의 세계 인식은 역사적인 부분에서도 비교적 선명하다. 박정희 전대통령을 비롯해서 군부 독재자들을 비판할 줄 알며(2:347, 4:137, 4:357), 인디언들이 북미에서 당했던 운명에 대해서도 분명한 인식이 있으며(5:241), 사회정의에 대해서도 바른 자세를 유지한다. 그는 문익환, 박형규 목사님과 함석헌 선생님 같은 분들의 글들을 많이 읽었다고 한다. 이 세상을 열린 자세로 보는 게 중요했기 때문이다.
그분들의 생각이나 사상이 제 삶의 방식이나 신앙의 틀 혹은 사고의 양식 속에서 여과될 것은 여과되고 농축될 것은 농축되어, 좀더 성숙하고 좀더 열린 크리스천으로 살아가기 위함입니다.(3:235).
삶과 역사에 대한 이 목사의 열린 태도는 한국교회에 거의 금기시되고 있는 타종교에까지 이른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지만 이 목사가 담임하던 당시에 주님의교회는 매년 정기적으로 4월에 ‘신앙대강좌’를 개최했다. 이 강좌에 초청된 인사들 중에는 우리의 예상을 벗어나는 이들이 제법 많다. 비기독교인인 이어령 선생, 가톨릭의 오경응 신부와 김승혜 수녀, 종교학자인 길희성 교수, 더 나아가 불교에서 윤호진 승려 같은 이들이 주님의교회를 방문했다. 이런 강연이 가능한 교회는 한국에서 주님의교회 외에는 없다. 특히 개혁적인 자세를 보이긴 하겠지만 여전히 강남 지역 특성상 비교적 보수적인 신자들로 구성되었을 것으로 보이는 주님의교회에서 이런 파격이 가능하다는 것은 그만큼 이 목사의 세계이해와 역사이해가 열려 있다는 사실의 반증일 것이다.
필자는 이 목사의 설교를 전반적으로 건강하다고 생각할 뿐만 아니라 그가 이미 이룬 목회와 후진들에게 끼친 영적인 영향력을 따라가기에도 벅차다는 게 솔직한 심정이다. 그의 개혁 마인드와 그 실천을 높이 사고, 특히 감정이 아니라 이성으로 접근하는(테이프 4) 태도에서도 그의 설교에 신뢰가 간다. 그러나 그의 설교가 가장 바람직한 복음적 설교의 한 전형이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동시에 개인적으로, 순전히 개인적으로 그의 설교에서 무언가 아쉬움이 남는다는 사실도 숨길 수 없다. 이런 나의 아쉬움이 이 목사의 설교가 지향하고 있는 큰 줄기를 흔들지는 못하겠지만, 또한 그럴 의도도 그렇게 크지 않지만, “설교란 무엇인가?”라는 화두에서 간과할 수 없는 대목이 아닐까 생각한다.
교회력의 실종
우선 이 목사의 설교가 교회력과 거의 무관하게 진행되고 있었다는 사실이 그의 설교에서 갖게 된 아쉬움의 단초이다. 주님의교회에서 6년여에 걸쳐서 설교한 <요한과 더불어>에서 교회력과 연관된 설교를 한편도 발견하지 못했다는 건 뜻밖이었다. 물론 ‘성찬주일’이라는 표제가 주기적으로 달려있는 걸 보면 다른 개신교회에 비해서 리터지에 관한 관심이 높은 것 같은데, 설교만 놓고 본다면 교회력과 거의 무관하게 진행되었다. 대림절, 사순절, 고난주일, 부활절, 추수감사절을 맞아 한두 마디 그 절기를 언급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단지 그 날을 암시하는 것에 불과할 뿐, 설교의 전반적인 내용은 교회력과 아무 상관없는 길을 갔다. 이 목사는 성서 텍스트와 그것이 선포되는 컨텍스트와의 관계에서 조금 이상한 입장을 취하고 있다.
이처럼 4년 반 동안 성경의 각각 다른 부분을 순서대로 배워 오면서 우리는 두 가지 분명한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첫째, 성경을 순서대로 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말씀들이 교회적으로나 개인적으로 혹은 사회적으로 우리의 처지나 상황에 언제나 딱 맞아 떨어지는 말씀이었다는 것입니다. 어떤 시기나 처지를 맞아 그 상황에 맞는 말씀을 구태여 찾지 아니해도 순서대로 본 말씀이 기가 막힐 정도로 그 순간을 위해 예비된 말씀일 수 있었다는 사실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역사하심을 확연히 알게 되었습니다.(2:132).
하나님의 말씀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우리의 삶에 적용된다는 이 목사의 진술은 성서를 폭넓게 해석할 수 있는 저력이 그에게 확보되었다는 증거이면서도 동시에 보기에 따라서는 아전인수일 가능성도 높다. 왜냐하면 필자의 생각에 따르면 성서 텍스트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다기보다 오히려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바로 설교자들이 흔히 빠지기 쉬운 성서해석의 근본적인 한계와 오류가 있다. 필자는 이 자리에서 성서해석에서 ‘삶의 자리’(Sitz im Leben)가 왜, 그리고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한 신학적인 논의를 전개하고 싶지 않다. 텍스트의 지평과 독자(컨텍스트)의 지평이 융해됨으로써 새로운 지평이 열리려면 각각의 지평이 구체적이고 실체적으로 살아나고 들어나야 한다는 가다머의 철학적 해석학(Wahrheit und Methode)을 거론하고 싶지도 않다. 단지 성서가 가리키는 계시의 지평을 정확하게 이해하려는 노력은 소홀히 하면서 단지 청중들의 종교적 욕구나 필요를 공급하기 위해서, 혹은 그들에게 종교적이고 도덕적인 영향을 끼치기 위해서 모든 성서 텍스트를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접근하는 행태를 문제 삼을 뿐이다. 성서를 역사 계시론적 깊이가 아니라 단지 도구적 차원에서 접근하는 이런 설교는 조금 노골적으로 표현한다면 설교자 개인의 주관주의적 경험에 근거한 ‘설교편이주의’와 다른 게 아니다. 물론 한편의 설교를 준비하기 위해서 금요일 밤부터 토요일 밤까지 전력투구하는 이 목사의 설교를 편이주의의 한 모델이라고 단정하거나 비난할 수는 없겠지만, 그럴만한 개연성까지 부정할 수 없다.
연속 강해설교의 문제점
이 목사의 설교에서 교회력이 무시되는 이 현상은 그의 주일공동예배 설교가 연속 강해설교 형식을 취한다는 사실과 결탁해있다. 그는 주님의교회에서 말씀을 전한 10년 동안 주일공동예배에 한정해서 본다면 대략적으로 마태복음을 4년, 요한복음을 6년 설교했다. 필자가 볼 때 주일공공예배에서 교회력에 의한 ‘성무일과’는 철저하게 무시되고 한권의 성서만을 설교의 본문으로 삼았다는 것은 심각한 문제이다. 물론 이 목사나 그 당시에 이 목사로부터 설교를 들었던 주님의교회 신자들은 이에 대해서 아무런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 그 이유는 두 가지다.
첫 번째 이유는 이 목사와 주님의교회 신자들이 교회력의 실체를 충분하게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대림절로부터 시작해서 52주 동안 각각의 교회력에 맞도록 성무일과가 정해지는 교회력은 하나님의 계시를 인식하고 체험하는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개인의 영성보다는 교회의 역사적 영성이 훨씬 근본적이고 상위라는 사실에 대한 신학적 확증이다. 이런 점에서 언제부터인가 한국교회 강단에서 유행하다시피 하는 주일공동예배의 ‘연속 강해설교’는 매우 무모한 시도이다. 이런 형식의 연속 강해설교에 의하면 스타 목사는 출현할지 모르지만 성서 텍스트가 스스로 말씀하는 계시의 역사적 신비는 침묵하고 말 것이다.
두 번째 이유는 이 목사의 요한복음 설교가 요한복음만이 아니라 66권 성서 전체와, 교회력을 포함한 기독교 역사 전체를 총망라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물론 그에게는 그럴만한 신앙적, 신학적, 영적인 힘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이 목사의 이러한 장점은 즉시 그의 약점으로 작용한다. 어느 본문을 택하더라도 흡사 손오공의 도술처럼 청중들에게 필요한 영적인 양식을 자유자재로 풀어낼 수 있는 그의 능력으로 인해서 결국 텍스트가 침묵하고 있다는 역설이 바로 그것이다. 이런 필자의 지적이 옳은지, 아니면 공연한 트집 잡기인지 앞으로 조금 더 나가보자.
침묵하는 텍스트
앞에서 말한 대로 이 목사는 스물한 장에 불과한 요한복음을 6년 넘게 설교했는데, 2004년에 그것을 자그마치 10권의 설교집으로 묶어 출판했다. 이런 일은 2천년 기독교 역사에 전무후무한 기념비적인 사건이 아닐까 모르겠다. 이런 업적을 이루었다는 것은 곧 성서본문에 대한 그의 영적 통찰력과 그 적용 능력이 탁월하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의 설교는 결국 텍스트에 의존하지 않았거나 집중하지 않았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텍스트의 깊이로 들어가지 않고, 옆으로 확대 재생산하는 방식을 취했기 때문에 요한복음 설교가 거의 끝없이 늘어나게 된 것이다. 만약 이 목사가 마음만 먹었다면 10년 이상을 요한복음만으로 설교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런 작업은 일종의 설교 요령에 속하기 때문에 필자에게도 가능하다. 어떻게 이런 일들이 가능한가?
<요한과 더불어> 6권의 21번째 설교 “버려두지 아니하고”(요 14:15-21)는 이렇게 구성되어 있다. 어거스틴을 중심으로 한 시간의 의미, 소설가 박경리, 삼손, 쥐(동화, 우화?), 본문 18절 해석, 수술환자 이야기. 좀 송구스러운 말씀이지만 필자의 생각에 이런 식의 설교는 아무리 감동적이었다고 하더라도 주일공동예배의 설교로서는 자격 미달이라고 본다. 좀 직설적으로 표현한다면 그것은 교양강좌, 혹은 신앙강좌다. 6권 25번째의 설교 “나보다 크심이라”(요 14:28-31)는 다음과 같은 순서로 작성되었다. 아들들의 바둑 이야기, 야구방망이, 금붕어, 본문설명, 믿음과 행복에 대한 일반적 교훈, 일본 작가 엔도 슈사꾸의 수필집 <마음의 야상곡>. 텍스트에 대한 해명은 단지 구색을 맞추는 정도에 머물고 사람들의 온갖 감동적인 이야기가 범람하고 있는 설교를 우리는 ‘하나님이 말씀하시는’(Deus dixit) 설교라고 말할 수 없다. 이처럼 설교행위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지 않는다는 비극적 현상은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이지 매우 일반적인 것으로서, 이미 오래 전에 루돌프 보렌이 이렇게 지적한 바 있다.
"이 책을 쓰고 있는 동안에 놀라운 사실을 하나 발견했다. 그것은 즉 성서가 설교되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중략> 성서에 관해서 설교되어지지 않는다는 것은 곧 그 책을 덮어버리는 것과 마찬가지다. 성서가 침묵을 지키는 것이다. 침묵을 깨려면 성서 자체가 말을 하고 그 말씀이 들려져야 한다." (루돌프 보렌, 설교학 원론, 4).
필자가 이 목사의 수많은 설교 중에서 극단적인 설교 두 편만 인용했지만, 비록 일부분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결국 이 목사 본인의 설교이기 때문에 책임을 피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사실은 그의 설교 중에 이런 유의 설교가 적지 않았으며, 넓게 보면 거의 모든 설교가 이런 방식이었다는 건 놀랍기도 하고 실망스러웠다.
설령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 목사의 그런 설교를 들은 청중들이 은혜 받고, 더 나아가서 그들의 삶이 실제로 변화되면 괜찮은 거 아니냐 하고 말하지는 마시라. 설교학 교수들이나 설교 세미나의 강사로 나서는 설교 명망가들이 흔히 강조하는 그런 부분은 참으로 무의미하고, 어떤 점에서는 설교자의 영성을 파괴시키는 요설(饒舌)이며, 동시에 청중들의 영혼을 어지럽히는 요설(妖說)이다. 설교자는 청중들에게 은혜를 끼쳐야 하겠다는 조급증에서 하루 빨리 자유로워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은혜는 설교자가 주관적으로 다룰 수 있거나 객관화할 수 있는 게 아니라 말씀 자체의 일이며, 성령 자체의 일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청중이 받는 은혜와 감동이라는 게 경우에 따라서 순식간에 선동과 세뇌로 바뀔 수 있다는 사실을 한국교회 안에서 자주 목격하고 있는 않는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해야 할 사람이 자신의 영적인 눈높이에 묶이거나 안주한 채 청중들을 설득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것보다 더 큰 어리석음은 없다. 설교자는 약간 느리거나 진부하게 보이더라도 성서의 심층적 지평으로 들어가는 일에 집중해야만 한다.
일상의 과부하
그런데 아내와 어머니를 통한 삶과 신앙의 경험이 강렬했던 탓인지 이 목사는 기독교 신앙을 그런 감동적인 일상에서 확인하려고 옆에서 보기에 안쓰러울 만큼 애를 쓰고 있었으며, 경우에 따라서 무리수를 둘 때도 많다. 예컨대 변비에 걸린 행려병자들의 항문을 입으로 빨아 해결했다는 가가와 도요히꼬의 이야기나(테이프 5), 주님의교회 부목사인 신철범 목사가 뇌성마비 아들을 키우는 간증에서(7:85 이하) 청중들은 크게 감동받는 것 같지만, 영적인 차원에서는 전혀 다른 결과로 나타날 수도 있다. 부활절을 비롯해서 몇몇 주일에는 설교하기 전에, 혹은 설교 중간에 상당히 긴 간증 시간이 주어지기도 했다. 이런 간증이 얼마나 은혜롭고 본받을 만한가에 대해서 아무런 토를 달고 싶지 않지만, 신자들은 ‘병원 24시’나 ‘인간극장’, 또는 ‘리더스 다이제스트’에 나오는 이야기를 듣기 위해서 교회에 나오는 것은 아니다. 이처럼 그의 설교가 ‘일상’의 과부하에 걸렸다고 한다면 필자의 편견일까? 무엇이나 과하면 문제가 생기기 마련이다.
이 목사는 삼풍백화점 사고에서 어머니를 잃은 14살짜리 무남독녀를 위로하러 갔다가 오히려 큰 은혜를 받고 돌아온 이야기를 했다. 그 소녀가 이렇게 말했다고 전한다.
"저희 어머니께서 붕괴된 건물더미에 깔려 돌아가셨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처음에는 너무너무 가슴이 아프고 슬펐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중에 하나님께서 말할 수 없는 평강을 제게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영원하신 생명으로 제 어머니를 품고 계심을 깨닫게 해 주셨습니다."(5:499).
졸지에 어머니를 잃은 14살 소녀라고 한다면 최소한 몇 달간은 울고불고 지내는 게 자연스러운 행동이다. 그런데 사고를 당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인생을 달관한 듯한 말을 한다는 건 오히려 문제가 있는 게 아닐까 모르겠다. “듣기만 해도 우리의 마음을 정화해주는 아름다운 시”라고 그가 인용한 초등학교 5학년 소녀의 시를 여기 소개하겠다.
"내 마음에는 빛이 있어/ 무엇보다 밝은 빛/ 해보다 밝고 달보다 밝아/ 별처럼 반짝이는 빛/ 어른들은 몰라/ 내 마음의 밝고 반짝이는/ 이 아름다운 빛을/ 그건/ 욕심 없는 깨끗함이야"(8:93).
아마 고(故) 이오덕 선생님이 이 동시를 읽었다면 어른 흉내를 낸 죽은 글이라고 따끔하게 나무라셨을 것 같다. 매우 작위적으로 보이는 이런 예화들을 통해서 그의 설교는 흡사 솜씨 좋은 프로 권투선수가 상대선수를 코너로 몰아넣듯이 청중들을 압박한다. 이런 설교가 반복되면 청중들은 일종의 청교도적인 콤플렉스에 빠지거나 아니면 적당한 위선에 만족하는 신앙적 처세술을 배울 뿐이다.
그런데 필자의 이런 거친 비판과 달리 이 목사는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의 목회와 설교 행위의 기초로 삼고 있다는 사실을 명시적으로 밝힌 바 있다. 그는 교회 개혁을 주장하더라도 그 개혁이 목표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중심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며(테이프 5), 목회 철학 자체가 “하나님의 말씀에 따른 목회로서, 그 구체적인 목표 중의 하나가 바로 교인들로 하여금 오직 하나님께 시선을 집중케 하여 하나님의 시각으로 이 세상을 바라보게 함으로 인간적 획일성에서 탈피하여 신앙적 시야와 경지가 넓어지도록 돕는 것”이라고 주장한다.(7:411). 이런 주장의 진정성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싶긴 하지만 성서 해석과 설교는 이런 개인의 신앙과 인격의 진정성만으로 해결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지적해야겠다. 이 문제는 곧 신앙의 본질에 대한 신학적 인식과 관계된다.
신앙의 강화, 혹은 심화
필자는 이 목사의 설교에서 주로 신앙의 ‘강화’만 보았지 신앙의 ‘심화’는 별로 발견하지 못했다. 우리가 자칫 동일한 것으로 착각하기 쉬운 신앙의 강화와 심화는 전혀 다른 차원이며, 다른 성질이다. 강화는 이미 주어진, 이미 알고 있다고 전제된 신앙의 내용을 여러 방식으로 세련되게 하거나 개혁적으로 만들거나 확실하게 하는 작업이라고 한다면, 심화는 우리가 영적으로 성령에게 철저하게 의존함으로써 생명의 신비로운 세계로 빠져들어 가는 사건이다. 강화는 겉으로는 감동적이지만 내적으로는 정체된 반면에, 심화는 신비주의자들에게서 볼 수 있는 것처럼 겉으로는 아무 변화가 없는 듯하지만 내적으로는 혁명적인 변화가 일어난다. 교육적인 차원이라면 신앙의 강화가 우리에게 어느 정도 필요하긴 하지만, 케리그마를 다루어야 할 주일공동예배의 설교는 전적으로 심화로 방향을 잡아야만 한다. 신앙과 삶의 일치를 예언자처럼 부르짖는 이 목사의 설교야말로 신앙의 심화에 토대를 둔 설교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다면 그런 분들은 기독교 신앙이 도덕성을 회복하고 개혁의 기치를 높이 드는 데 있는 게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구원행위를 향한 놀람과 기쁨과 송영(doxology)에 있다는 사실을 좀더 심각하게 생각할 필요가 있다.
이런 점에서 필자는 한국교회에 도덕성이 없다거나 개혁적이지 않다거나 교회 성장이 둔화되었다는 것보다는 신앙의 심화과정이 없다는 사실을 훨씬 본질적이고 심각한 위기로 생각한다. 도덕성과 개혁과 교회성장은 우리의 게으름과 한계에 불과하지만 신앙의 심화과정이 없다는 말은 성령이 활동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이 자리에서 설교와 영성, 그리고 성령의 문제를 본격적으로 논의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다만 신앙의 심화 과정이라 할 기독교 영성은 어떤 신앙적 고지를 점령하거나 고상한 인격적 상태에 머무는 게 아니라 바람처럼 자유롭게 활동하시는, 따라서 신비롭게 생명의 세계를 열어 가시는 성령의 활동에 예민하게 반응할 수 있는 우리의 영적인 인식과 연관된다는 점만을 지적해두고자 한다. 따라서 기독교 영성은 기본적으로 하나님과 그의 나라와 그의 통치와 그의 미래를 심층적으로 인식하고 자기 삶에 체화하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기독교 영성은 기본적으로 ‘신학적 통찰’ 없이는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영성은 곧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바른 인식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열정적인 기도와 말씀읽기, 봉사 같은 실천을 통해서 영성을 확보하는 것이지 신학적 이론으로 되는 게 아니라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지만, 이런 주장은 부분적으로만 옳다. 그 이유는 두 가지인데, 하나는 우리가 경험적으로 알고 있는 영성은 경우에 따라서 단순히 인간의 심리적 작용일 가능성이 많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바른 신학이라고 한다면 당연히 생명의 영이신 성령의 활동과 직결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바른 영성과 바른 신학은 결코 분리될 수 없다. ‘신학적 영성’이야말로 신앙을 심화하는 가장 바른 길이다.
따라서 이 목사의 설교가 단지 기존의 신앙을 (매우 바람직한 방향으로) 강화하고, (이 시대에 반드시 요구되는 방향으로) 개혁할 뿐이지 신비한 생명의 세계를 향한 심화의 단계에 이르지 못했다는 근거는 그에게 신학적 영성이 부족하다는 데에 있다. 이 문제를 좀더 구체적으로 다루려면 또 하나의 다른 글쓰기가 필요하기도 하고, 비록 이 목사에게 이런 한계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가 이룬 목회와 설교의 업적은 크게 훼손되지 않는다고 보기 때문에 이런 정도로 접어두고, 다만 신학적 영성에 의한 신앙의 심화에 토대를 둔 설교의 특성을 한 마디 짚는 것으로 만족하려고 한다.
설교의 여운
그것은 곧 설교의 여운(餘韻)이다. 필자의 생각에 신앙의 심화를 지향하는 설교는 ‘여운’이 있으며, 당연히 그래야만 한다. 하나님의 존재 신비와 ‘세계의 비밀로서의 하나님’(에버하르트 융엘)을 의식하고 있는 설교자라고 한다면 자기의 잠정적이고 제한적인 신앙 경험과 열정을 청중들에게 강요하기보다는 성령의 임재를 기다리는 데 온 마음을 쏟지 않을 수 없다. 그런 이들은 자신의 역할을 가능한대로 줄이는 대신 성령과 성서 텍스트가 활동할 수 있는 자리를 넓히게 된다. 그 자리가 설교의 여운이며, 바로 그곳, 바로 그 순간에 청중과 말씀이 설교자의 예상을 뛰어넘는 방식으로 만난다. 그 사이에 설교자는 끼어들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구원은 설교자의 몫이 아니라 설교자의 신앙경험보다 훨씬 위대한, 즉 2천년 기독교 역사와 함께 하신 성령의 몫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아직 경험되지 못한 진리가 언젠가는 경험될 수 있는 진리임을 고백할 수 있어야 하고, 또 그런 진리도 찬양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게 될 때에 우리는 성서의 진리를 선포하게 되고, 교회의 진리가 우리의 신앙경험보다 위대하다는 사실을 선포하게 되는 것이다.”(헬무트 틸리케, 현대교회의 고민과 설교, 80쪽).
일상을 복음의 차원으로 끌어올리고, 복음을 일상의 차원에서 구체화하기 위해 신앙의 강화와 개혁에 온몸을 던졌던 이 목사가 단지 개혁전도자, 또는 대중설교자로 머물지 말고, 어쩌면 그 일만으로도 그의 사명은 이미 충분한 건지 모르겠지만, 앞으로 인간의 경험과 언어와 열정까지 모두 폐기되는 궁극적 신비의 세계를 향해 시나브로 발걸음을 내디딜 것으로 기대한다. 제네바에서 돌아온 다음 교회를 맡지 않고 작은 교회의 중고등부 교사로 섬기며, 집필활동에 전념하고 있는 이 목사와 그의 가족 모두에게 하나님의 은총이 함께 하시기를 진심으로 기도한다. 혹시 필자가 잘못 짚은 부분이 있다면 똘레랑스를 베풀어 주시고, 아울러 따끔한 질책이 있기를 기다린다.*
출처: 「기독교사상」2005년 4월호 그리고 정연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