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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덴 동산과 파라다이스
(김 성 교수 /협성대학교, 성서고고학)
하나님이 만드신 최초의 지상낙원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 예루살렘으로 추정 그리스어로 성서 번역 때 파라다이스로 쓰여
에덴 동산 구약성서의 창세기에 나오는 ‘에덴 동산’의 히브리어 표기는 ‘간 베에덴’으로서 ‘에덴에 있는 정원’이라는 뜻이다. 이 경우 에덴을 특정한 지명으로 볼 수 있는데 이러한 해석은 그 다음에 나오는 ‘동쪽의(미케뎀)’이라는 단어를 통해 유추가 가능하다. 그런데 히브리어 표기 ‘간 베에덴 미케뎀’은 각각 ‘동방의 에덴에 있는 정원’과 ‘에덴의 동쪽에 있는 정원’ 둘 다 해석이 가능하다. 만일 히브리어 에덴이 아카드어 에디누(edinu)에서 유래되었다면 그 뜻은 들판이나 평원이기 때문에 에덴 동산은 실제로는 ‘들판에 위치한 정원’이라고 해석될 수 있다. 아카드어 에디누는 수메르어 에덴(eden)에서 유래되었는데 ‘풍요로움’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우가릿어와 고 아람어에서도 에덴이 ‘풍요롭고 기쁨이 충만한 상태’를 의미하고 있다. 과연 창세기의 저자는 어떤 의도로 에덴이라는 명칭을 사용했을까?
파라다이스 파라다이스는 원래 고 페르시아어로 ‘정원’을 의미하는 ‘파이리-다에자(pairi-daeza)’로부터 유래되었다. 히브리어 파르데스는 바로 이 단어의 영향을 받은 것이고 느헤미야는 페르시아의 왕 아르타크세륵세스에게 파괴된 예루살렘 성벽과 성전 복구에 필요한 목재를 왕의 ‘파르데스’로부터 채취할 수 있는 벌목 허가권을 달라고 부탁하였다(느헤미야 2:8). 이 경우 파르데스는 단순한 정원이라기보다는 고급 목재를 얻을 수 있는 백향목 숲을 말하며 지리적 여건 상 예루살렘에 가까운 레바논 산지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비슷한 시기에 기록된 다른 구약성서의 구절에서는 파르데스가 단순한 정원이나 과수원으로 등장한다(아가서 4:13, 전도서 2:5). 또한 유대교 문헌 중에서 서기 200년경 편집된 미쉬나와 서기 600년경 편집된 바빌로니아 탈무드에서도 파르데스는 각각 히브리어와 아람어로 정원을 의미하고 있다. 그렇다면 구약성서와 후기 유대교 문헌에서의 파르데스, 즉 파라다이스는 이상향이라기보다는 구체적으로 과수원이나 정원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렇다면 언제부터 파라다이스가 낙원을 지칭하게 되었을까?
낙원으로서의 파라다이스는 히브리어 구약성서가 그리스어로 번역되는 과정에서 탄생했다고 볼 수 있다. 서기전 200년경 구약성서가 그리스어로 번역될 때 창세기에 등장하는 에덴 동산이 바로 파라데이소스(Παραδεισο?)로 대체되었고 비로소 파라다이스가 단순한 정원이 아니라 하나님이 만드신 최초의 지상낙원의 의미로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이 때부터 주로 그리스어 구약성서인 칠십인역을 자주 읽었던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낙원은 더 이상 에덴 동산이라기보다는 파라다이스라는 용어로 정착되었다. 따라서 그리스어 구약성서를 자주 인용했던 신약성서에서 파라다이스는 초월적 의미의 낙원으로 통용되었고(누가복음 23:43, 고린도후서 12:4), 나아가 요한계시록(2:7)에서는 파라다이스가 종말에 건설되며 한 가운데 생명나무가 있는 낙원으로 묘사되는데 이는 곧 첫 번째 인간이 추방되었던 태초의 에덴 동산이 종말에 회복되는 것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딜문(바레인) 한편 메소포타미아의 전통적인 낙원 사상은 수메르 신화 <엔키와 세계질서>, <엔키와 닌후르삭>에 등장하는 딜문(Dilmun)에서 찾아볼 수 있다. 딜문은 순순하고, 깨끗하며, 빛나는 땅이다. 딜문에서는 맹수나 혐오스러운 동물들이 설치지 않는 곳이며, 더 이상 질병이나, 노화, 죽음이 없는 기쁨의 땅이다. 오늘날 페르시아 만의 섬나라 바레인으로 알려진 딜문은 고대 세계에 있어서 중계무역의 중심지로서 모든 상품이 넘쳐흐르는 장소로서 낙원으로 묘사된 것으로 보인다.
“딜문에서는 까마귀가 울지 않는다. 매도 울지 않는다. 사자는 잡아먹지 않는다. 늑대는 어린양을 잡아채지 않는다. 새끼 염소를 죽이는 들개도 없다. 곡식을 먹어치우는 곰도 없다. 눈 아픈 사람이 눈 아픈 사람이라고 말하지 않고, 머리 아픈 사람도 머리 아픈 사람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늙은 여자는 늙은 여자라고 말하지 않고, 늙은 남자도 늙은 남자라고 말하지 않는다. 가수는 슬픈 노래를 부르지 않는다”
이러한 수메르 판 에덴 동산인 딜문에 관한 묘사는 구약성서 이사야서(11:6-9)에 등장하는 종말에 건설되는 새로운 세상에 대한 묘사와 연관이 있는데 이 구절에도 맹수들의 포학성이 없고 질병이 없는 장소로 언급되어 있다.
“그 때에 이리가 어린양과 함께 거하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찐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니라. 나의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
에덴 동산은 어디에 있었는가? 우리가 에덴 동산의 지리적 위치를 알 수 있는 근거는 그 곳에서부터 네 강이 흘러나온다는 구절이다(창세기 2:10-14). 이 중 힛데겔과 유브라데는 각각 오늘날 터키에서 발원하여 시리아를 거쳐 이라크로 흘러 들어가는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을 말한다. 이 둘을 놓고 본다면 에덴 동산은 두 강의 수원지인 터키 동쪽의 아르메니아 고원지대에 있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문제는 첫 번째 비손 강과 기혼 강이 어디인지 알 수 없다는 점이다. 기혼 강이 흐르는 구스 땅은 구약성서에서는 오늘날 이집트의 남부인 수단 지역을 말하는데 그렇다면 기혼 강은 나일 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첫 번째 비손 강이 금이 많이 나는 하윌라 땅을 적신다고 했는데 고대 성서의 세계에 있어서 황금이 가장 많은 곳은 다름 아닌 이집트였기 때문에 이 강도 나일강과 비교될 수 있다.
아직도 몇 몇 아마추어 고고학자들이 에덴 동산을 중동 지방의 지도상에서 찾기 위하여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지만 결정적인 증거는 나오지 않고 있다. 네 강 중에서 적어도 세 강은 성서 시대의 대표적인 두 문명이었던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를 가능케 했던 강으로 볼 수 있다. 우리가 기혼 강이 어디인지 알 수 없으나 기혼 샘은 바로 예루살렘의 기드론 골짜기에서 지금도 흘러나오는 샘이고 바로 예루살렘 도시가 존재할 수 있었던 결정적인 이유가 되는 물의 근원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에덴 동산은 당시 최고로 발달했던 두 문명권, 즉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 그리고 야훼의 성전이 있었던 예루살렘을 모두 포함하는 지리적 상징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김성교수의 문화와 역사
- 에덴 동산과 파라다이스
에덴 동산 과연 어디에 있었을까?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 예루살렘으로 추정 노화·질병·죽음 없는 풍요와 기쁨의 땅, 낙원
▶ 에덴 동산 구약성서의 창세기에 나오는 ‘에덴 동산’의 히브리어 표기는 ‘간 베에덴’으로서 ‘에덴에 있는 정원’이라는 뜻이다. 이 경우 에덴을 특정한 지명으로 볼 수 있는데 이러한 해석은 그 다음에 나오는 ‘동쪽의(미케뎀)’이라는 단어를 통해 유추가 가능하다. 그런데 히브리어 표기 ‘간 베에덴 미케뎀’은 각각 ‘동방의 에덴에 있는 정원’과 ‘에덴의 동쪽에 있는 정원’ 둘 다 해석이 가능하다.
만일 히브리어 에덴이 아카드어 에디누(edinu)에서 유래되었다면 그 뜻은 들판이나 평원이기 때문에 에덴 동산은 실제로는 ‘들판에 위치한 정원’이라고 해석될 수 있다.
아카드어 에디누는 수메르어 에덴(eden)에서 유래되었는데 ‘풍요로움’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우가릿어와 고 아람어에서도 에덴이 ‘풍요롭고 기쁨이 충만한 상태’를 의미하고 있다. 과연 창세기의 저자는 어떤 의도로 에덴이라는 명칭을 사용했을까?
▶ 파라다이스 파라다이스는 원래 고 페르시아어로 ‘정원’을 의미하는 ‘파이리-다에자(pairi-daeza)’로부터 유래되었다. 히브리어 파르데스는 바로 이 단어의 영향을 받은 것이고 느헤미야는 페르시아의 왕 아르타크세륵세스에게 파괴된 예루살렘 성벽과 성전 복구에 필요한 목재를 왕의 ‘파르데스’로부터 채취할 수 있는 벌목 허가권을 달라고 부탁하였다(느 2:8).
이 경우 파르데스는 단순한 정원이라기보다는 고급 목재를 얻을 수 있는 백향목 숲을 말하며 지리적 여건 상 예루살렘에 가까운 레바논 산지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비슷한 시기에 기록된 다른 구약성서의 구절에서는 파르데스가 단순한 정원이나 과수원으로 등장한다(아 4:13, 전 2:5). 또한 유대교 문헌 중에서 서기 200년경 편집된 미쉬나와 서기 600년경 편집된 바빌로니아 탈무드에서도 파르데스는 각각 히브리어와 아람어로 정원을 의미하고 있다.
그렇다면 구약성서와 후기 유대교 문헌에서의 파르데스, 즉 파라다이스는 이상향이라기보다는 구체적으로 과수원이나 정원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렇다면 언제부터 파라다이스가 낙원을 지칭하게 되었을까?
낙원으로서의 파라다이스는 히브리어 구약성서가 그리스어로 번역되는 과정에서 탄생했다고 볼 수 있다. 서기전 200년경 구약성서가 그리스어로 번역될 때 창세기에 등장하는 에덴 동산이 바로 파라데이소스로 대체되었고 비로소 파라다이스가 단순한 정원이 아니라 하나님이 만드신 최초의 지상낙원의 의미로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이 때부터 주로 그리스어 구약성서인 칠십인역을 자주 읽었던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낙원은 더 이상 에덴 동산이라기보다는 파라다이스라는 용어로 정착되었다. 따라서 그리스어 구약성서를 자주 인용했던 신약성서에서 파라다이스는 초월적 의미의 낙원으로 통용되었고(눅 23:43, 고후 12:4), 나아가 요한계시록(2:7)에서는 파라다이스가 종말에 건설되며 한 가운데 생명나무가 있는 낙원으로 묘사되는데 이는 곧 첫 번째 인간이 추방되었던 태초의 에덴 동산이 종말에 회복되는 것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 딜문(바레인) 한편 메소포타미아의 전통적인 낙원 사상은 수메르 신화 <엔키와 세계질서>, <엔키와 닌후르삭>에 등장하는 딜문(Dilmun)에서 찾아볼 수 있다. 딜문은 순순하고, 깨끗하며, 빛나는 땅이다. 딜문에서는 맹수나 혐오스러운 동물들이 설치지 않는 곳이며, 더 이상 질병이나, 노화, 죽음이 없는 기쁨의 땅이다. 오늘날 페르시아 만의 섬나라 바레인으로 알려진 딜문은 고대 세계에 있어서 중계무역의 중심지로서 모든 상품이 넘쳐흐르는 장소로서 낙원으로 묘사된 것으로 보인다.
“딜문에서는 까마귀가 울지 않는다. 매도 울지 않는다. 사자는 잡아먹지 않는다. 늑대는 어린양을 잡아채지 않는다. 새끼 염소를 죽이는 들개도 없다. 곡식을 먹어치우는 곰도 없다. 눈 아픈 사람이 눈 아픈 사람이라고 말하지 않고, 머리 아픈 사람도 머리 아픈 사람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늙은 여자는 늙은 여자라고 말하지 않고, 늙은 남자도 늙은 남자라고 말하지 않는다. 가수는 슬픈 노래를 부르지 않는다”
이러한 수메르 판 에덴 동산인 딜문에 관한 묘사는 구약성서 이사야(11:6∼9)에 등장하는 종말에 건설되는 새로운 세상에 대한 묘사와 연관이 있는데 이 구절에도 맹수들의 포학성이 없고 질병이 없는 장소로 언급되어 있다.
“그 때에 이리가 어린양과 함께 거하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찐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니라. 나의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
▶ 에덴 동산은 어디에 있었는가? 우리가 에덴 동산의 지리적 위치를 알 수 있는 근거는 그 곳에서부터 네 강이 흘러나온다는 구절이다(창 2:10∼14). 이 중 힛데겔과 유브라데는 각각 오늘날 터키에서 발원하여 시리아를 거쳐 이라크로 흘러 들어가는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을 말한다. 이 둘을 놓고 본다면 에덴 동산은 두 강의 수원지인 터키 동쪽의 아르메니아 고원지대에 있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문제는 첫 번째 비손 강과 기혼 강이 어디인지 알 수 없다는 점이다.
기혼 강이 흐르는 구스 땅은 구약성서에서는 오늘날 이집트의 남부인 수단 지역을 말하는데 그렇다면 기혼 강은 나일 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첫 번째 비손 강이 금이 많이 나는 하윌라 땅을 적신다고 했는데 고대 성서의 세계에 있어서 황금이 가장 많은 곳은 다름 아닌 이집트였기 때문에 이 강도 나일강과 비교될 수 있다. 아직도 몇 몇 아마추어 고고학자들이 에덴 동산을 중동 지방의 지도상에서 찾기 위하여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지만 결정적인 증거는 나오지 않고 있다.
네 강 중에서 적어도 세 강은 성서 시대의 대표적인 두 문명이었던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를 가능케 했던 강으로 볼 수 있다. 우리가 기혼 강이 어디인지 알 수 없으나 기혼 샘은 바로 예루살렘의 기드론 골짜기에서 지금도 흘러나오는 샘이고 바로 예루살렘 도시가 존재할 수 있었던 결정적인 이유가 되는 물의 근원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에덴 동산은 당시 최고로 발달했던 두 문명권, 즉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 그리고 야웨의 성전이 있었던 예루살렘을 모두 포함하는 지리적 상징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김성 교수의 성서문화와 역사
- 노아 홍수의 흔적을 찾아서
메소포타미아 문학에서 노아의 홍수 확인 스미스, 니느웨서 384개 토판문서 발견 성서고고학의 초석이 된 기념비적 사건
@대홍수 이야기의 발견 1872년 가을철 어느 날 30대 초반의 한 대영박물관 직원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박물관 수장고에서 먼지로 뒤덮인 수많은 토판문서들을 하나씩 들추어내며 그 내용을 해독하는데 열중하고 있었다. 글 쓰기의 재질이 되는 나무나 돌이 비교적 귀했던 메소포타미아에서는 일찍부터 진흙 판에 갈대 펜을 이용하여 글씨를 새겼다. 이러한 토판문서들은 이집트의 파피루스 종이와는 달리 불에 타면 오히려 더 단단해져 보관상태가 좋은 편이지만 깨어진 조각으로 자주 발견되기 때문에 그 내용을 해독하는데는 여러 가지 어려움이 뒤따른다. 조지 스미스라 불리는 이 학자도 먼지를 털면서 절반쯤 깨어져 나간 한 토판 조각을 읽고 있었다. 중간쯤 읽었을 때 순간 그는 자신의 눈을 의심치 않을 수 없었다.
“6일 낮과 7일 밤 동안 폭풍우가 몰아치고 대홍수가 밀어 닥쳤다. 7일 째가 되었을 때 비바람이 그쳤다. 방주는 니시르 산에 도착하였다. 첫째 날, 니시르 산은 방주를 붙들어 놓았다. 둘째 날, 셋째 날, 넷째 날… 일곱째 날이 되었을 때, 나는 비둘기를 날려보냈다. 비둘기는 앉을 곳을 찾지 못하고 돌아왔다. 나는 제비를 날려보냈다. 참새도 앉을 곳을 찾지 못하고 돌아왔다. 나는 까마귀를 날려보냈다. 물이 빠지는 상황에서 까마귀는 먹이를 찾아 지면을 쪼면서 결국 돌아오지 않았다”
유럽의 기독교인들이 어릴 때부터 주일학교 선생님으로부터 자주 들어서 익숙해진 창세기의 노아 홍수 이야기가 떠오르는 대목이었다. 스미스가 발견한 토판은 길이 14㎝, 폭 13.5㎝의 크기로서 1840년대 이라크의 니느웨에서 발견된 것이었다. 홍수 이야기는 나중에 알려진 바 실제로는 모두 12개의 토판으로 이루어진 장문의 서사시 중 한 부분으로 밝혀졌다. 주인공의 이름을 따서 ‘길가메쉬 서사시’로 명명된 이 작품은 메소포타미아 문학의 백미로서 이미 3500년 전부터 고대 근동 여러 지방에서 자주 읽혀지고 쓰여졌던 대중문학이었다. 과연 어떤 내용의 이야기이길래 그토록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을까?
@길가메쉬의 모험 메소포타미아 남부 지방의 대도시 우룩에 길가메쉬라 불리는 한 왕이 있었다. 2/3는 신이고 1/3은 인간으로 만들어진 길가메쉬가 폭정으로 백성을 괴롭혔다. 백성의 하소연을 들은 아루루 여신은 진흙을 빚어 반인반수의 괴물 엔키두를 창조하여 길가메쉬를 제압토록 하였다. 하지만 난폭한 엔키두를 본 사람들은 공포에 휩싸였고 감히 그에게 접근하는 자가 없었다. 엔키두의 소문을 들은 길가메쉬는 한 사냥꾼에게 그를 사로잡을 것을 명령하였다.
도시 한 복판에서 길가메쉬와 엔키두의 대결이 펼쳐졌다. 해가 저물도록 승부가 나지 않자 결국 둘은 화해하고 의형제를 맺었다. 길가메쉬와 엔키두는 머나 먼 백향나무 숲으로 함께 모험을 떠났다. 둘은 수 십 미터 높이의 거대한 백향목을 도끼로 쓰러뜨리고자 하였다. 하지만 엔키두가 숲의 수호신 훔바바를 죽인 대가로 신들의 저주를 받아 그만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대홍수와 영생의 비밀 하루아침에 친구를 잃고 슬픔에 잠긴 길가메쉬는 곧 죽음의 공포에 사로잡혔다. 어떻게 하면 인간이 죽음을 극복할 수 있는가? 수소문 끝에 그는 바다 건너 섬 나라에서 영생을 누리고 있다는 우트나피슈팀을 찾아갔다. 길가메쉬는 그로부터 다음과 같은 대홍수와 영생의 비밀을 전해 들었다. 인간들의 소란스러움 때문에 밤잠을 설친 신들이 홍수를 통해 인류를 말살시키기로 작정하였다. 하지만 이들 중 한 신이 우트나피슈팀에게 배를 만들어 대홍수를 피하라고 알려주었다. 6일 동안 비가 온 후 7일째 그쳤다.
니시르 산에 배가 도착한 지 7일째 되는 날 우트나피슈팀은 차례대로 비둘기와 제비를 날려보냈으나 앉을 곳을 찾지 못하고 돌아 왔다. 까마귀를 날려보내자 더 이상 돌아오지 않았다. 홍수가 물러가고 육지가 드러난 것이다. 이야기를 끝낸 우트나피슈팀은 길가메쉬에게 바다 밑바닥에서 자라는 가시 달린 불로초를 소개해 주었다. 길가메쉬는 다리에 바위를 매달고 잠수하여 불로초를 획득하는데 성공하였다. 길가메쉬는 고향으로 돌아 오던 중 날씨가 너무 더워 연못에서 옷을 벗고 목욕을 하고 있었는데 물 속에서부터 뱀 한 마리가 나타나 불로초를 물고 사라져 버렸다. 길가메쉬가 뱀을 쫓아갔지만 남은 것은 뱀의 허물 뿐이었다. 고대 메소포타미아 사람들에게 있어서 유일하게 영생을 누리는 존재는 뱀이라는 것이다. 왜냐면 그들은 뱀이 죽을 무렵이 되면 허물을 벗고 다시 태어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니느웨 발굴 1872년 12월 3일 스미스는 런던에서 개최된 성서고고학회에서 ‘갈대아 판 대홍수’라는 제목으로 자신의 연구 결과를 발표하였다. 갈대아는 구약성서에서 바빌로니아 사람들을 일컫는 말로서 이미 유럽 기독교인들에게는 매우 익숙한 용어였다. 창세기에서 아브라함의 고향이 ‘갈대아 우르’, 즉, ‘갈대아 민족의 우르’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19세기 최고의 고고학적 발견에 언론이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문제는 메소포타미아 홍수 이야기가 등장하는 토판문서가 절반쯤 깨어져 나갔는데 하필이면 이야기의 첫 부분과 마지막 부분이 떨어져 나간 것이다. 스미스는 당장이라도 현장으로 달려가서 나머지 반쪽을 찾아내고 싶었다. 그런데 만만치 않은 비용이 문제였다.
당시 영국 최대의 일간지였던 ‘데일리 텔레그라프’는 대영박물관에게 나머지를 찾아오는 비용으로 1천 기니아의 거금을 제공하였다. 스미스는 1873년 5월 니느웨에서 발굴을 시작한지 일 주일 만에 대홍수 이야기의 첫 부분 17줄이 기록된 토판문서 조각을 발견하게 되었다. 건초더미에서 잃어버린 바늘 찾기보다 더 어렵다는 스미스의 발견은 사실 앗시리아의 왕 앗슈르바니팔의 도서관 자리를 집중적으로 발굴했던 덕분이었다. 스미스는 즉시 발굴 후원자인 데일리 텔레그라프 신문사에 이 소식을 전보로 알렸고 기적 같은 발견 소식은 1873년 5월 21일자 신문의 제 1면을 장식했다. 스미스는 한 달 동안의 발굴 결과 모두 384개의 토판문서들을 수집하여 영광스런 귀국 길에 올랐다. 창세기의 노아 홍수를 메소포타미아의 문학적 전통에서 확인한 스미스의 발견은 성서고고학의 초석을 놓는 기념비적 사건으로 기억될 것이다.
길가메쉬 서사시의 11번째 토판(대영박물관 소장, 서기전 7세기)
길이 14cm, 폭 13.5cm의 크기의 토판은 원래의 것에서 이미 절반 정도가 깨어져 나간 상태였다.
원래는 앞면에 세 단, 뒷면의 세 단 등 여섯 단에 모두 328줄로 구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사진의 토판은 뒷면으로서 오른 쪽의 제 4단과 왼쪽의 제 5단이 일부 보존되어 있다.
조지 스미스(George Smith: 1840-1876)
1840년 영국 런던 출신의 스미스는 지폐 도안공으로 일하던 중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쐐기문자 해독에 관심을 갖고 연구하였다. 대영박물관에 취직하여 소장된 수많은 토판문서들을 해독하다가 1872년 노아 대홍수에 필적할 만한 메소포타미아의 홍수 이야기를 발견하였다.
김 성 교수의 성서문화와 역사
노아의 방주는 어디에?
창세기에 기록된 틀림없는 사실 탐험가들 노력 불구 흔적 못찾아
노아 방주를 찾아서 1955년 7월 초 프랑스 출신의 탐험가 페르낭 나바라(F. Navarra)는 11살 난 아들과 함께 아라랏 산을 오르고 있었다. 그는 벌써 1952년부터 세 차례나 아라랏 등정을 시도했는데 그의 최종 목표는 해발 5137미터의 정상이 아니라 4000미터 높이에 위치한 얼음으로 뒤덮인 골짜기로서 19세기 초부터 많은 탐험가들이 노아 방주의 잔해를 발견했다는 곳이었다.
힘들고 어려운 탐험 길에 굳이 어린 아들을 동행시킨 것은 터키 국경수비대의 스파이 의심을 따돌리기 위해 가족 여행으로 위장하기 위한 것이었다. 아들이 위에서 지켜보는 가운데 나바라는 7월 6일 이른 아침 빙하 사이의 깊은 틈새로 줄사다리를 내리고 조심스럽게 내려갔다. 얼어붙은 지하 호수에는 시커먼 물체들이 여럿 놓여있었다. 나바라는 마침내 준비해 간 도끼로 조심스럽게 나무 기둥의 일부를 잘라내는데 성공하였다.
나바라 부자는 1.5미터 길이의 묵직한 나무를 등에 지고 산을 내려왔다. 문제는 근처에 주둔하고 있는 터키 국경수비대의 검문이었다. 이슬람 국가인 터키로서는 주로 기독교인들이 아라랏 산에서 노아 방주의 흔적을 찾는 일 자체를 부정적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그들은 나무를 세 토막으로 잘라 각자의 배낭 속에 숨겼고 산아래 마을에서 기다리던 가족과 재회한 후 무사히 프랑스로 귀향하였다. 아라랏 산에서 가져온 이 나무토막은 오늘날 프랑스 보르도의 한 개인 박물관에 진열되어 있다. 과연 오늘날 터키의 아라랏 산이 창세기의 노아의 방주가 도착한 아라랏 산일까?
아라랏은 곧 우라르투 왕국 지명인 동시에 민족 이름이기도 한 아라랏의 경우 구약성서에는 히브리어로 ‘하레이 아라랏’, 즉 ‘아라랏 산지’로 기록되었기 때문에 특정한 산 이라기 보다는 넓은 의미로 고원지대를 일컫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창세기의 아라랏은 원래 ‘우라르투’의 히브리어 식 표기인데 우라르투는 오늘날 터키 동부 지역에 위치한 고원지대이자 서기전 9세기 이후 번창했던 고대 왕국이었다.
노아 홍수 이야기는 전통적인 메소포타미아의 홍수 신화에 많은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메소포타미아의 지리적 관점에서 대홍수가 그치고 물이 빠질 때 가장 높은 고원지대에 방주가 안착한다면 바로 아라랏 산지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앗시리아 왕 세나케립의 암살사건을 다루고 있는 열왕기 하(19:37)와 이사야 서(37:37-38)에 의하면 세나케립이 니느웨의 한 신전에서 제사를 드릴 때 그의 아들들에 의해 살해되었고 암살자들은 쿠데타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아라랏 땅으로 망명한 것으로 나타난다. 실제로 당시 아라랏, 즉 우라르투 왕국은 앗시리아와 적대관계에 있었다. 한편 예레미아서(51:27-28)에서는 서기전 590년경 아라랏, 미니, 아슈케나즈(스키타이), 메데 등의 왕국들이 동맹을 맺고 바빌로니아에 대항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구약성서의 아라랏은 특정한 산을 의미한다기보다는 고원지대에 위치한 지역 이름으로서 역사적인 우라르투 왕국을 염두에 둔 것임을 알 수 있다.
아라랏 산은 어디인가? 노아 방주의 도착지 아라랏이 넓은 의미의 우라르투 왕국임에도 불구하고 역사적으로는 아라비아와 터키에 위치한 특정한 산이라는 해석이 있었다. 신약시대의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는 아르메니아 지역의 코르디아 산에 노아 방주의 흔적이 있다고 언급한 바 있다. 코르디아스는 고르디아스로 불리고 아랍어로는 주디라고도 불렸는데 이슬람 경전에서는 주디 산이 아라비아 북부에 위치해 있다고 전해지며 터키에서는 시리아로 넘어가는 국경도시 지즈레(Cizre) 동쪽 25 킬로미터 지점에 위치해 있다고 알려져 있다.
터키의 주디 산은 해발 2114미터 높이이며 전통적으로 이 지역의 네스토리아 기독교인들에 의해 ‘노아의 산’으로 신성시되었다. 따라서 해마다 9월 14일 이 지역의 유대교인, 기독교인, 이슬람교인들은 모두 산 정상에 모여서 노아가 아라랏 산에 도착한 후 드린 첫 제사를 기념하는 의식을 가졌으며 전통은 서기 13세기까지 지속되었다고 한다. 한편 주디 산과 는 별도로 서기 4세기 아르메니아에 기독교가 들어온 후 이 지역에서 구체적인 아라랏 산을 찾으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서기 5세기 아르메니아 왕국이 아락세스 지역에서 독립한 후 이 왕국의 최고봉 아르 산이 최종적으로 해발 5137미터 높이의 아라랏 산으로 확정되었다. 주위와는 구분되는 우뚝 솟아있는 아라랏 산은 봉우리가 일년 내내 흰눈에 덮여 있고 정상은 대부분 구름에 가려져 있어서 신비감을 자아내게 하는 산이다.
누훈 게미시 1948년 여름 아라랏 남쪽에 위치한 도우베야짓 마을의 뒷산 언덕에 대규모의 산사태가 발생한 직후 근처를 지나던 마을 사람들은 전에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지형지물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것은 길이 150미터 폭 40미터 규모의 꼭 배같이 생긴 특이한 지형지물이었다. 하지만 마을 사람들은 산사태에 의해 땅 속에 묻혔던 바위 테두리가 드러난 것이고 그 곳은 인적이 드문 곳이어서 아무도 이를 신기하게 생각하거나 관심을 갖지 않았다.
하지만 1959년 터키 정부가 지도를 제작하기 위하여 촬영한 아라랏 산 근처의 항공사진들을 판독하는 과정에서 바로 이 구조물을 확인하면서 다시금 관심의 대상이 되기 시작하였다. 뿐만 아니라 당시 이 지역은 터키와 소련의 국경지대여서 미국과 소련의 인공 위성이 여러 차례 촬영을 시도하였고 정찰기들의 항공 사진에서도 거대한 배 모양의 물체가 선명하게 드러나면서 국제적 군사첩보로 간주되었다. 미국의 보수적 기독교인 탐험가들은 이듬해인 1960년 레네 누버건(R. Noorbergen)을 주축으로 탐사대를 구성하고 이 구조물을 촬영하였고 그 사진이 1960년 9월 5일자 라이프 매거진에 실리면서 전 세계에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다.
오늘날 터키 관광청은 이 지역을 터키어로 ‘누훈 게미시’, 즉 ‘노아의 방주’로 명명하고 길을 닦고 방문객 센터로 건립하여 누구든지 도우베야짓 마을에서 차를 타고 방문할 수 있는 관광 명소로 만들어 놓았다.
영원히 지속되는 미스테리 프랑스의 페르낭 나바라가 가져 온 세 개의 나무토막은 분석 결과 참나무로 확인되었으며 나무나 뼈, 섬유 등 유기물의 연대를 위한 탄소연대분석을 적용한 결과 서기 8세기의 것으로 밝혀졌다. 또한 누훈 게미시의 배 모양 구조물도 고대의 목재 선박의 화석이 아니라 단순한 지형지물로 밝혀졌다. 지금까지 수많은 탐험가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아라랏 산과 노아 방주는 아직까지도 그 실체를 드러내지 않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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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라랏 산
창세기의 아라랏 산으로 알려진 터키의 동부 고원지대에 위치한 해발 5137m의 아르 산은 주위와는 구분되는 우뚝 솟아있는 봉우리가 일년 내내 흰 눈에 덮혀있고 정상은 일년 중 대부분 구름에 가려져 있어서 신비감을 자아내게 하는 산이다. |
노아 방주의 일부(?) 1955녀녀 프랑스의 페르낭 나바라가 터키의 아라랏 산 중턱 4000미터 지점 얼음 골짜기에서 수집한 나무 기둥으로서 연대측정 결과 서기 8세기의 것으로 밝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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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훈 게미시
터키 아라랏 산 동남부 20킬로미터에 위치한 배 모양의 특이한 지형지물로서 1950년대 이후 항공촬영에서 노아의 방주 모습이라고 알려진 곳이다 |
아브라함의 고향은 어디인가?
(협성대 김 성 교수)
터키에 속한 우르파라 불리는 곳으로 알려져 아브라함의 생가 터? 이슬람교 사원으로 보전
이스라엘 민족은 오늘날에도 그들의 최고 조상이 아브라함이라고 고백한다. 그는 갈대아 우르 출신이다. 갈대아 우르는 갈대아 민족, 즉 바빌로니아 민족의 도시 우르라는 뜻인데, 그렇다면 아브라함은 바빌로니아 사람이고 이스라엘 민족은 바빌로니아 사람의 후예인가? 서기전 586년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고 유다의 상류층이 대부분 바빌론으로 유배되었는데 아무리 아브라함이 바빌로니아의 도시 우르 출신이라 하더라도 그의 후손인 이스라엘 민족이 바빌로니아 민족과 동일시 될 수는 없을 것이다.
우르는 하란 근처에 위치해야 전통적인 아브라함의 고향은 하란 북쪽에 위치한 오늘날 터키에 속한 우르파라 불리는 곳으로 알려졌다. 아브라함의 고향이 메소포타미아의 우르가 아니고 터키의 우르라는 사실은 다음과 같은 구절을 통해서 잘 알 수 있다.
첫째, 아브라함의 부친 데라는 가족을 이끌고 가나안으로 가기 위하여 우르를 출발하여 하란에 도착하였고, 아브라함은 하란을 출발하여 가나안에 도착하였다(창 11:31-12:6). 그렇다면 여정 상 우르는 하란과 가나안의 연장선 상에 위치하여야 하며 당연히 가나안이 남쪽에 있으므로 우르는 하란 북쪽에 자리잡은 도시가 되어야 한다.
둘째, 아브라함은 자기 아들 이삭의 배필을 구하기 위해 늙은 종을 고향으로 보냈다(창 24:1-10). 이 종은 아람 나하라임에 위치한 아브라함의 할아버지 ‘나홀’의 성에 가서 리브가를 데려왔다. 아람 나하라임은 한글성서에서는 메소포타미아로 번역되었는데 이는 서기전 3세기에 번역된 그리스어 구약성서에 따른 것이다(창 24:10). 왜냐면 당시 메소포타미아라는 지역은 오늘날의 이라크라기 보다는 하란을 중심으로하는 시리아와 터키 지역을 일컫는 지명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지명의 오류 때문에 성서지리학자들은 아브라함의 고향을 전통적인 메소포타미아, 즉 오늘날의 이라크 지역에서 찾고자 노력하였다. 하지만 아람 나하라임은 ‘두 강의 아람’이라는 뜻으로서 발릭크 강이 유프라테스 강으로 흘러들어가는 하란 지역을 일컫는 말이다.
셋째, 창세기의 다른 구절에서는 리브가의 고향을 밧단 아람이라고 밝히고 있다(창 25:20). 야곱은 밧단 아람에서 두 아내와 두 여종을 통해서 모두 열 두 아들을 낳았고 이들이 이스라엘 열 두 지파의 조상이 되었다. 많은 학자들은 아카드어로 ‘파다누’가 ‘길’을 의미하기 때문에 밧단(파단) 아람은 같은 의미를 지닌 하란을 지칭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렇다면 밧단 아람은 다름 아닌 아람 나하라임과 같은 지역으로 볼 수 있다. 넷째,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조상을 ‘유리하는 아람 사람’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신 26:5). 아람 민족의 지리적 고향이 바로 시리아이기 때문에 전통적인 하란 지역과도 일치한다. 사실 창세기에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너의 본토 친적 아비 집을 떠나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고 명령했을 때 그 현장이 바로 하란이었다.
터키의 우르파 아브라함의 고향 우르는 기독교 전승을 통해서 볼 때 이라크 남부 지역보다는 시리아와 터키의 국경 지대인 하란 근처로 알려졌다. 또한 실제로 1930년대 이후 시리아의 우가릿, 알랄락크, 에블라 등에서 출토된 토판 문서의 해독을 통해서 우르라는 도시가 여러 개 있으며 모두가 하란 근처에 위치한 것으로 드러났다. 그렇다면 우르는 과연 어디인가?
유대교와 기독교의 영향을 받아 형성된 이슬람교에서 아브라함은 아랍어로 ‘이브라힘’으로 불리며 특별히 하나님의 자비로운 친구라는 극존칭으로 존경받고 있다. 따라서 이슬람 국가인 터키의 한 도시가 바로 아브라함의 고향으로 여겨지며 그와 관련된 여러 전승과 장소들이 잘 보존되어 있다. 먼저 우르파에는 아브라함이 태어나서 자랐다는 그의 생가 터가 이슬람교 사원으로 보전되어 있다. 내부에는 샘도 흐르고 지금도 터키인들이 방문하여 기도를 드리는 곳이다. 또한 그 사원 앞마당은 우르파에서 가장 유명한 중앙 공원인데 이 곳에는 잘 가꾸어진 연못이 있고 연못에는 수만 마리의 잉어 떼가 자라고 있다.
이슬람 전승에 의하면 아브라함이 가나안으로 가는 도중 이 곳 사람들에게 붙들려 종교재판 끝에 화형에 처해지는 운명을 맞았다고 한다. 사람들이 아브라함을 나무에 묶고 장작더미를 쌓아 불을 붙이는 순간 갑자기 하늘에서 소나기가 퍼부어서 불이 꺼졌고 그 곳에 거대한 연못이 형성되었으며 장작들이 물에 떠다니다가 잉어로 변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곳 사람들은 지금도 이 거룩한 잉어를 먹지 않으며 법적으로 보호를 받는 천연기념물로 보존되고 있다. 비록 이 도시에 관한 체계적인 발굴은 진행되지 않았지만 그 지리적 위치 상 고대근동의 문헌에 자주 등장하는 우르슈, 즉 우르로 볼 수 있으며, 이미 서기전 2000년경부터 사람들이 거주한 것으로 추정된다. 서기전 300년경부터 우르파는 에데사로 불렸으며 비잔틴 시대에는 이 지역의 중심적인 기독교 도시로 발전했기 때문에 창세기의 아브라함에 관한 여러 전승들이 잘 보존된 것으로 추정된다.
새로운 아브라함의 발견 1929년 3월 17일자 뉴욕 타임스 신문의 머릿기사는 모든 기독교인들의 시선을 집중시키기에 충분했다. ‘우르의 발굴, 새로운 아브라함의 발견’. 그 밑으로는 다음과 같은 소제목들이 이어졌다.
‘아브라함은 유목민이 아니라 도시의 창시자’, ‘하갈의 추방은 합법적’, ‘구약성서의 관습들을 고고학적 발굴을 통해서 확인함’. 때마침 몰아닥친 경제공황의 우울한 나날 속에서 실의에 잠겨있던 미국민들에게 이러한 파격적인 뉴스는 성서적 복음주의에 마지막 희망을 갖게 했다. 여기서 말하는 ‘새로운 아브라함’이라는 제목의 의도는 그가 창세기에서는 가나안 땅에 들어온 후 텐트를 치고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는 유목민으로 묘사돼 있지만, 원래 그의 고향인 우르에서는 엄연히 대도시의 귀족 중 하나였다는 것이다.
나아가 아브라함은 빈손으로 온 것이 아니라 당대 최고도로 발달된 도시문명의 법과 도덕, 천지창조와 홍수에 관한 전승을 지니고 가나안 땅에 들어와 후손인 이스라엘 민족에게 전해줬다는 것이다. 이 때부터 아브라함의 고향이 이라크 남부 지방에 위치한 한 고대 도시로 알려지게 되었다.
사진설명 우르파의 ‘아브라함의 못’ 우르파의 할릴 라흐만 사원의 마당에는 회랑으로 둘러싸인 연못이 있고 법적으로 보호받는 잉어들이 살고 있다.
김성 교수의 성서문화와 역사
- 베들레헴의 별
예수님의 진짜 생일은 언제일까? 별의 밝기, 별자리 근거로 탄생일 추정하기도 성서를 과학적 데이터로 풀어내는 것은 잘못
1984년 12월 영국의 천체물리학자 세이무어(P. Seymour)는 예수가 서기전 7년 9월 15일에 태어났다고 주장하였다. 지금까지 수많은 학자들이 복음서의 구절과 헤롯 대왕의 통치 연대를 토대로 예수가 대략 어느 해에 태어났다고 추정해왔지만 이처럼 날짜까지 구체적으로 제시한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특별히 천체 전문가가 베들레헴의 별을 근거로 계산한 날짜이기 때문에 그 해 성탄절을 앞두고 ‘더 타임즈’를 비롯한 수많은 언론이 이 소식을 대대적으로 보도하였다. 과연 세이무어는 어떤 근거로 예수의 탄생일을 정확하게 제시할 수 있었을까?
마태복음서(2:1-12)에 의하면 헤롯 대왕 시대에 예수가 베들레헴에서 탄생한 이 후에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그의 별’을 보고 경배하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찾아왔다고 한다. 그들이 어떤 별에 주목하여 왕의 탄생을 예견했는지는 모르지만 동방의 박사들은 예루살렘으로 와서 당연히 미래의 왕, 즉 왕자가 태어난 줄 알고 헤롯 왕궁을 방문하였다. 하지만 그런 사실이 없는 가운데 헤롯은 혹시 장차 쿠데타를 일으킬 인물이 태어났을지도 모른다는 의심과 함께 신하들을 불러모아 ‘메시아’가 어디서 태어나는지를 물었다. 헤롯의 신하들은 구약성서의 미가서 5장 2절을 인용하면서 베들레헴에서 이스라엘의 통치자가 나온다는 사실을 일러주었다. 헤롯은 동방 박사들을 베들레헴으로 안내했고 혹시 그를 만나면 자신도 경배할 의향이 있으므로 정확한 장소를 알려달라고 부탁했다. 하지만 천사의 계시를 통해 예수를 죽이려는 헤롯의 음모를 눈치 챈 박사들은 약속을 어기고 몰래 고향으로 돌아갔다.
예수 탄생이래 베들레헴의 별에 관한 다양한 해석들이 쏟아져 나왔다. 베들레헴의 별은 14세기 초 이탈리아의 화가 지오또(Giotto di Bondone)에 의해 긴 꼬리를 지닌 혜성의 모습으로 묘사되었다. 이탈리아의 옛 도시 파두아(Padua)에 위치한 스크로베니 교회당 내부는 지오또의 대표적인 작품인 그리스도의 생애에 관한 여러 벽화들이 장식되어 있다. 이 중에서 ‘동방 박사들의 경배’라는 제목이 붙은 벽화에는 요셉과 마리아 머리 위로 꼬리가 달린 한 혜성이 베들레헴의 밤하늘을 스쳐 지나가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아마도 지오또는 자신이 1312년에 직접 목격했던 헬리 혜성을 토대로 이 그림을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 만일 베들레헴의 별이 지오또의 상상대로 헬리 혜성이었다면 이 현상은 서기전 12년에 발생한 것으로 조사되었다.
행성의 만남과 영웅의 탄생 밤하늘의 가장 밝은 별은 시리우스이지만 목성이나 화성이 이보다 더 밝게 보인다. 만약 행성 두 개가 한 자리에 겹쳐 보인다면 그야말로 특이하게 밝은 별로 여겨질 것이다. 고대 바빌로니아 점성술에서 목성은 왕이나 영웅들과 밀접한 관련이 있고 토성은 ‘유대인의 수호자’로 알려진 행성이다. 따라서 목성과 토성이 마주친다면 이는 곧 유대인 중에서 위대한 인물이 탄생한다는 것이며 이러한 현상은 20년에 한 번씩 발생한다.
그런데 만일 목성과 토성이 일 년 중 세 번씩이나 마주친다면 유대인 영웅 탄생이 더욱 확실시되는데 이러한 현상은 139년에 한 번씩 발생한다. 나아가 목성과 토성의 연중 세 차례 만남이 지리적으로 유다를 상징하는 물고기 자리에서 이루어진다면 틀림없이 그 지역에서 위대한 인물이 태어난다는 징조인데 이는 900년에 한 번 꼴로 찾아오는 매우 희귀한 경우이다. 이미 독일 출신의 천문학자 요하네스 케플러는 1603년에 자신이 직접 목격했던 목성과 토성의 겹침 현상을 중시했고 이를 토대로 계산한 결과 서기전 7년에 목성과 토성이 일 년에 세 번씩이나 마주 친 사실을 알게되었다. 따라서 그는 바로 이 현상이 베들레헴의 별이었고 예수도 서기전 7년에 탄생했다고 주장한 바 있다. 이를 토대로 영국의 천문학자 세이무어는 서기전 7년 9월 15일 태양이 서쪽 지평선의 처녀 자리로 떨어진 후, 동쪽 지평선에서는 목성과 토성이 물고기 자리에서 만났으며 이 시점이 곧 예수의 탄생일이라고 주장했던 것이다.
예수의 탄생 연도 신약성서와 당시 역사자료를 근거로 예수의 탄생 연도는 다음과 같이 계산될 수 있다. 첫째, 예수는 헤롯이 죽기 전에 태어났다(마 2:1). 헤롯은 서기전 4년에 죽었기 때문에 예수는 서기전 4년 이전에 태어나야만 한다. 둘째, 예수는 빌라도가 예루살렘의 총독으로 근무하던 임기(서기 26-36)중에 33세의 나이로 십자가에 처형당했으므로 예수의 탄생 연도는 서기전 7년에서 서기전 3년 사이로 볼 수 있다. 셋째, 시리아의 총독 퀴리니우스(Quirinius)의 인구조사(눅 2:1-7)는 서기 6년에 실시되었다. 이 중에서 세 번째 연대는 첫 번째와 두 번째와 배치되므로 배제한다면 예수는 서기전 7년에서 서기전 4년 사이에 태어났을 가능성이 있다. 따라서 서기전 7년의 목성과 토성의 만남 현상이 더욱 주목을 끌게 된 것이다.
물고기 자리 연관성
지오또(Giotto)의 ''동방박사들의 경배''(14세기)
14세기 초 이탈리아의 화가 지오또는 파두아에 위치한 스크로베니 교회당 내부에 동방박사들의 경배를 주제로 벽화를 그렸는데, 베들레헴의 밤하늘에 긴 꼬리를 가진 혜성의 모습이 특이하다. 지오또는 자신이 1312년에 직접 목격했던 헬리 혜성을 토대로 베들레헴의 별을 묘사하였다.(그림설명)
서기전 7년에 목성과 토성이 세 번씩이나 만난 위치는 모두 물고기 자리 근처에서였다. 고대 바빌로니아의 천문학에서 물고기 자리는 서쪽을 의미하며 유대인들의 천문학에서 물고기 자리는 예루살렘과 깊은 관련이 있다. 물고기는 그리스 어로 ‘익튀스(ΙΧΘΥΣ)’라 불리는데 이 단어는 신기하게도 각각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 구세주’의 첫 글자들로 구성되었다.
이러한 인위적인 단어 조합 외에도 기독교와 물고기의 연관성은 이미 오래 전부터 천문학적 해석을 통해 그 연관성을 찾아 볼 수 있다. 고대인들이 밤하늘의 별들을 관측할 때 태양이 지나가는 황도를 기준으로 삼았고 한 해의 시작으로 여겨지는 춘분에 태양이 뜨는 곳에 위치한 별자리가 특별한 주목을 받게 되었다. 춘분의 태양은 예수 탄생 시대부터 양 자리에서 물고기 자리로 이동하였다.
이는 지구의 자전축이 마치 회전력이 둔화되면서 중심이 서서히 원형으로 흔들리는 팽이처럼 약 2만 6천 년의 주기로 이동하는 세차운동 때문에 발생하는 현상이다. 따라서 아브라함 시대로 여겨지는 서기전 2000년 경에는 태양이 춘분에 황소 자리에서 양 자리로 이동하였고, 예수 탄생 시점에는 물고기 자리, 그리고 서기 2000년에는 그 다음 별자리인 물병 자리 쪽으로 옮겨간다는 것이다. 즉, 우리가 알고 있는 서양의 12 궁도의 순서를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는 셈이다. 따라서 예수 탄생 이후 약 2천년 동안 춘분의 태양이 물고기 자리를 통과하기 때문에 물고기가 기독교를 상징하는 배경이 된 것이다.
단지 두 행성의 만남을 근거로 서기전 7년 9월 15일을 예수의 정확한 탄생일로 추정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왜냐면 900년마다 유다 지역에서 메시아적인 인물이 태어나야 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신앙 고백적인 성서의 특정한 구절을 정확한 과학적 데이터로 풀어내고자 하는 시도 자체가 오해의 소지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중세 이후로 종교에 의한 과학의 지배에 위기감을 느꼈던 영국의 아이작 뉴튼은 다음과 같은 말로 두 영역의 기능적 차이를 분명히 하고자 하였다.
김성 교수의 성서문화와 역사
- 이집트의 파라오 야곱
이스라엘의 강력한 지도자 히브리 족장 창세기 족장 역사적 조명하는 고고학 자료있어 이집트 벽화에서 가나안 출신 유목민 모습 발견 메소포타미아에서 이집트로 태어날 때부터 쌍둥이 형의 발꿈치를 잡고 나온 야곱은 창세기에서 어머니 리브가의 도움과 속임수를 이용해 형의 장자권을 차지한 인물로 묘사되어 있다. 야곱은 두 명의 부인과 두 명의 여종으로부터 모두 12명의 아들을 얻었다. 야곱은 열한번 째 아들 요셉 덕분에 이집트에서 가장 비옥한 땅 ‘람세스의 땅’에 정착할 수 있었다(창 47:11). 이 사건을 계기로 천지창조, 에덴동산, 대홍수, 바벨탑, 아브라함 등으로 연상되는 창세기의 메소포타미아적 배경은 이집트적 배경으로 교체되기 시작하였다.
이스라엘의 고향 이집트(?) 이집트는 예로부터 이스라엘 민족의 피난처로 제공되었다. 아브라함이나 야곱의 가족은 가나안 땅에 비가 제대로 내리지 않아 기근이 들었을 때 일년 내내 물이 풍성한 이집트로 내려가서 도움을 요청했고 신약시대 예수의 가족도 헤롯의 박해를 피해서 이집트로 내려가기도 했다. 하지만 역시 노예로 팔려갔다가 총리대신의 지위에까지 오른 요셉이야말로 성서의 이집트적 배경을 가장 잘 나타낸 인물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중세 이후 이집트를 여행했던 유럽인들은 거대한 피라미드를 ‘요셉의 곡식창고’라고 불렀으며 지금도 이집트인들은 나일강으로부터 흘러나와 저지대인 파윰 오아시스의 호수로 흘러 들어가는 하천을 아랍어로 ‘바흐르 유셉’, 즉 ‘요셉 하천’이라 부르고 있다.
출애굽기에서 이스라엘 민족은 이집트에서 노예로 고생한 것으로 나타난다. 그런데 이집트 역사 전승에서는 정반대로 이스라엘이 이집트를 무력으로 점령하여 통치했다는 언급이 나타난다. 이러한 사실은 신약시대의 유대인 역사가인 요세푸스의 한 작품에서 처음으로 등장한다. 당시 이집트의 항구도시인 알렉산드리아의 유대인 공동체는 매우 번성하였다. 그런데 이를 시기한 아피온(Apion)이라 불리는 한 이집트인은 ‘유대인 반박문’을 통하여 출애굽 당시 유대인들이 나환자들이었기 때문에 이집트로부터 쫓겨났으며 예루살렘 성전의 지성소에는 금으로 만든 당나귀를 모셔다 놓고 숭배했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치욕적인 비난에 대항하여 요세푸스는 ‘아피온 반박문’을 발표했는데 그는 이 글에서 서기전 3세기 이집트의 역사가 마네토를 인용하면서 유대인들이 한 때 이집트를 통치했음을 분명하게 밝혔다. 마네토에 의하면 ‘힉소스’라 불리는 한 민족이 북쪽에서부터 쳐들어와서 도시들을 불사르고 신전을 파괴했으며 이집트 민족을 학살했다고 한다. 그들은 처음에는 멤피스를 점령하여 수도로 삼았다가 아바리스라는 도시를 건설하였고 나중에 이집트로부터 쫓겨날때는 그들의 재산을 모두 가지고 나갔으며 유다 지방에 강력한 요새인 예루살렘을 건설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힉소스는 다름 아닌 이스라엘 민족의 한 부류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베니 하산의 아브라함(?) 1824년 영국의 고고학자 윌킨슨(G.Wilkinson)은 이집트 중부 지방의 한 유적지인 베니 하산에 들러 절벽의 중턱에 만들어진 바위굴 무덤들을 조사하였다. 모두 39개나 되는 이 무덤들 중에서 크눔호텝이라 불리는 한 귀족의 무덤 내부에는 이집트인들과 뚜렷하게 구분되는 독특한 턱수염과 화려한 무늬로 짜여진 통치마를 걸친 한 무리의 사람들이 벽화로 그려져 있었다. 이들의 우두머리는 산양 한 마리를 붙들고 있었으며 그의 이름은 힉소스 ‘아비샤’로 기록되어 있었다. 또한 그림의 위쪽에는 ‘37명의 힉소스들이 눈 화장품을 팔기위해 이집트에 왔음’을 알리고 있었다. 윌킨슨은 바로 이들을 통하여 아브라함을 비롯한 창세기에 등장하는 히브리 족장들의 실제 모습을 알 수 있게 되었다고 주장하였다. 이 무덤은 서기전 1900년경 건설된 것이어서 어느 정도 연대상으로도 가능한 추론이었다. 비록 이름은 다르게 나타났지만 이집트의 한 무덤벽화에서 히브리 족장들을 연상시키는 가나안 출신의 유목민들의 모습이 생생하게 발견되는 순간이었다.
이집트의 파라오 야곱 히브리 족장들중의 하나인 야곱은 스캐럽이라 불리는 이집트의 도장에서 그 이름이 처음으로 발견됐다. 고대 이집트인들의 최고신은 태양신 라(Ra)였다. 이른 아침에 짐승의 똥을 공처럼 둥글게 뭉쳐서 굴리고 가는 말똥구리를 그들은 태양신의 운반자로 여겨서 풍뎅이 형상을 부적으로 만들었으며 도장으로 새겨서 반지에 끼고 다녔다. 1930년대 예루살렘에서 수집되어 베를린의 이집트 박물관에 소장된 한 스캐럽에는 ‘야쿱-헤르’라는 이름이 파라오를 의미하는 타원형 테두리로 싸여 있었다. 1969년 이스라엘의 항구도시인 하이파 근처 쉬크모나의 한 무덤에서 발견된 스캐럽에도 분명하게 상형문자로 ‘야쿱-헤르’가 표기되어 있었으며 베를린의 것과 거의 같은 모습을 보여준다. 함께 출토된 토기들을 통하여 이 무덤의 주인공 야곱은 서기전 1750년경의 인물로 밝혀졌다. 또한 대영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다른 스캐럽에는 이집트 제 15왕조의 파라오임을 증명하는 표시와 함께 야곱의 이름이 나타난다. 그는 힉소스 왕조의 제 2대 왕으로서 서기전 1600년경 통치했었다.
서기전 1900년경 화려한 채색 옷을 입은 아비샤를 비롯한 서른 일곱 명의 힉소스들, 서기전 1750년경 이스라엘 항구도시에서 발견된 한 도시의 왕 야곱, 그리고 이집트의 최고 통치자로서 군림했던 서기전 1600년경의 파라오 야곱 등은 모두가 창세기 족장들을 역사적으로 조명해주는 귀중한 고고학적 자료들이다. 비록 창세기에는 요셉이 총리대신으로 등장하지만 이집트 역사에서 힉소스라 불렸던 히브리 족장들은 파라오로서 약 100여 년 동안 이집트를 식민지로 통치했기 때문에 이제 그들은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강력한 지도자들로 재평가 될 필요가 있다.
‘사진 설명’
1. 크눔호텝 3세 무덤의 힉소스 벽화
서기전 1900년경 제 12왕조 이 지방의 영주였던 크눔호텝의 무덤벽화에는 37명의 힉소스, 즉 ‘외국의 통치자들’이 눈화장품을 팔러 이집트를 방문했음으로 보여준다.
이들은 가나안 지방 출신으로서 창세기의 요셉을 연상시키는 화려한 채색옷, 독특한 수염 등으로 이집트인들과는 쉽게 구별된다.
2. 야곱(야쿱-헤르)의 스캐럽 도장
왼쪽: 창세기의 야곱과 같은 이름의 ‘야쿱-헤르’가 새겨진 스캐럽 도장이 1969년 이스라엘에서 발견되었고 서기전 1750년경의 것으로 밝혀졌다. (이스라엘 하이파 박물관 소장)
오른쪽: 이와 똑 같은 스캐럽 도장이 1930년대 예루살렘에서 발견되었는데 여기에는 이집트의 파라오를 표시하는 타원형의 테두리가 둘러져 있다. (베를린 이집트 박물관 소장)
<협성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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